2018년 4월 26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요한 13,16-20)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receives the one I send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당신과 당신을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 주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뻐하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삶으로 보여 줄 때, 이들에 대한 신뢰로부터 믿음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마다, 그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은, 믿음이 확실한 증거가 아닌 권위 있는 증언과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식과 다릅니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내려는 바벨의 탑을 쌓아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교만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실제로 인류는 과학 기술의 진보와 인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신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왔지만, 인류가 여전히 겪고 있는 폭력과 전쟁, 불의와 모순은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전도 여행 중에 들른 안티오키아에서, 회당에 모인 이들에게 구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하느님 구원의 대서사시를 감동적으로 들려줍니다. 예수님의 출현과 그분의 구원 업적이, 이스라엘 백성이 겪어 온 구원에 대한 갈망을 채워 주는 궁극적인 완성임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미 믿음을 통해 성장한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성장하고, 교회를 통해서 표현되며, 교회와 더불어 실천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판에는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이 잡초들을 없앨 수 있느냐?”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자들은 “삽으로 땅을 갈아엎는다, 불로 태워버린다, 뿌리째 뽑아 버린다.” 등의 답을 말했습니다. 스승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의 마음에 있는 잡초는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느냐?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일 년 뒤 이 자리에 다시 모이자.”
일 년 동안 제자들은 무성하게 자란 자기 마음속 잡초 때문에 고민했지만 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뒤 그 들판을 찾아온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들판은 잡초가 아닌 곡식이 가득한 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들판 한편에는 이런 팻말 하나가 꽂혀 있었지요.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자라는 잡초 또한 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을 실천할 때 뽑아낼 수 있다.”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시오. 참으로 많은 잡초가 있지 않습니까? 이기심, 자만심, 욕심, 허영심 등등 삶을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마음의 잡초가 계속해서 무성히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요? 평화, 기쁨, 사랑, 믿음, 희망 등의 곡식을 심어야만이 마음의 잡초를 없앨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쓸데없는 잡초를 마음 안에 그대로 두면서 힘들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좋은 곡식을 심어서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바로 주님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이를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사를 할 때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합니다.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아마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도 헌집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필요한 물건들을 과감하게 버립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삿짐을 정리하듯이 때로는 잡초라고 여기지는 내 마음의 짐도 정리해야 합니다. 대신 주님을 맞이하면서 주님 뜻에 맞는 것들로 새롭게 채워나갈 때 우리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조유미의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잘 되다’라는 표현에는 성공하다, 이루다, 얻다 등의 가치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실패하더라도 실패에 의연해질 수 있는 마음을 배우면 ‘잘 된’ 것이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어도 그 안에서 얻은 무언가가 있다면 ‘잘 된’ 것이다. 이처럼 ‘잘 된다’는 건 목표하던 것을 달성했는지의 유무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자랐는지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겉으로 보이는 가치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조재형신부-
교회의 신앙생활에 대한 통계가 발표 되었습니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켜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의 수가 줄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주일미사를 참례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성당엘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 영세자의 수가 줄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갖겠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점차 고령화 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의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의 성소도 감소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의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직자들의 쇄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사나운 이리 떼로부터 지켜야 하며,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을 위해서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미사 전에 고백성사를 정성껏 드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아픈 이들을 자주 찾아 봐야 합니다. 장례가 나면 빈소에 찾아가서 고인의 유족들을 위로하고 연도를 함께 바치면 좋겠습니다. 성경공부도 함께 하고, 교리를 가르치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 사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들일 수 있는 교리교육과 재복음화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맛 집을 찾아다니곤 합니다. 가격이 비싸도, 줄을 서서 기다려도 우리는 맛 집을 찾아갑니다. 재료가 신선하고,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기쁨을 안다면, 신앙생활의 맛을 체험한다면 우리는 외국에 나가서도 성당을 찾을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본당과 교구에서는 이런 재교육의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복음화 학교’는 이런 신자 재교육을 성심껏 하고 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5단계의 과정을 통해서 교육과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화 학교를 통해서 신자들은 기도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복음화 학교의 문을 열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복음화 학교가 더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허물이 있는 사람도 있고, 다시 잘못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언쟁을 벌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은총의 빛으로 교회를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할 때 우리의 부족함도 우리의 허물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허물을 씻어내는 가장 큰 방법은 바로 겸손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을 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 내가 만나는 분들을 주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정성껏 우리들의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섬김과 환대
-섬김의 주님, 환대의 주님-
-이수철신부-
참 좋은 말마디 섬김과 환대입니다. 말마디만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섬김의 주님, 환대의 주님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일수록 주님을 닮아 섬김과 환대에 힘써야 함을 봅니다. 어느 분야든 대가의 깨달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조용필의 인터뷰 기사중 한 대목에 공감했습니다.
-“인생이란 뭘까요?”
“제 생각엔 산 같아요. 살아오면서 큰 일을 하나 넘기면 평탄한 길이 있어서 쉬울 줄 알았는데 또 산을 기어올라야 하더라고요. 넓은 평야가 오겠지 했는데 크건 작건 또 산이 있고요. 인생은 계속 산을 넘는 거 같아요.”-
진솔한 고백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삶’이란 표현을 씁니다.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첩첩산중의 인생입니다. 살아있는 한 날마다 넘어야 할 산이요, 각자 이런 인생은 흡사 ‘살아있는 산맥’처럼 보일 것입니다. 예전 고 김대중 대통령을 인터뷰했던 분의 소감도 생각납니다.
“산인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 뵈니 살아있는 산맥이더라고요.”
그렇습니다. 하나하나의 인생이 살아있는 산맥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 삶을 통해 아름다운 살아있는 산맥의 삶을 만들며 살 수 있을까요? 섬김과 환대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섬김과 환대의 영성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런 영성도 없습니다. 또 하나 가왕 조용필의 인터뷰 대목입니다.
-“조용필에게 음악은 무엇인가요?”
“음악은 제 일상입니다. 제가 언제 음악을 떠난 적이 있나요. 죽으면 모를까, 살아 숨쉬는 동안 ‘은퇴’란 없습니다. 음악은 끝이 없어요. 예술은 새로운 것을 계속 배우는 거잖아요. ‘이 나이가 되어서 뭘 배워,’이런 것 없습니다. 배우면서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드는 거죠.”-
저에게 하느님이 무엇인가 묻는 다면, “제 일상이죠. 하느님 공부는 끝이 없어요. 배우면서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고, 평생 배워야 하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平生學人이요, 은퇴가 없어 죽어야 은퇴인 ‘영원한 현역現役’의 평생전사平生戰士의 삶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평생 무엇을 배웁니까? 바로 주님의 섬김과 환대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분도 성인도 규칙서에서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했습니다.
주님을 닮은 지름길도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뿐입니다.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주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주님이신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모범을 보여 줬으니 너희도 나를 닮아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닮는 지름길도 항구하고 충실한 섬김의 수행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가 행복하다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분도규칙에서도 참 많이 나오는 말마디가 섬김입니다.
섬김의 중심에 주님이 계십니다. 형제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입니다. 섬김의 환대입니다. 섬김의 사랑, 환대의 사랑입니다. 섬김으로 표현되는 환대입니다. 우리를 섬김으로 환대하시는 주님이시며 주님 또한 우리 모두가 그러하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 들이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형제를 환대함은 예수님을 환대하는 것이자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형제를 섬김으로 환대함은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하나의 뿌리는 예수님이자 하느님이심을, 참으로 하나하나가 주님이 보내주신 섬김으로 환대 받아야 할 귀한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의 환대 활동은 참 다양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안티오키아에 있는 유다인 회당에서 바오로 사도의 첫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이집트로 부터의 탈출로부터 시작하여 세례자 요한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구세사를 요약한 설교입니다. 이 또한 회당에 모인 유다인 동포들을 설교를 통해 섬김으로 환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서도 주님의 섬김과 환대가 잘 드러납니다. 우리를 섬김으로 환대해주시는 성체성사의 주님이십니다. 얼마전 주일미사 참여율이 19%라는 보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100명 학생에 19명 출석이라니 섬김과 환대의 주님 마음도 참 참 허전하고 썰렁할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주님의 섬김과 환대의 사랑을 배워야 할 곳이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섬김의 사람, 환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아멘.

주님의 방식을 선택하라
-반영억신부-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분이 계셔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희망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살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의 때이며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비틀거리는 걸음도 다시 힘을 내는 용기이며, 복음에 타오를 열정을 다시 가지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선교의 열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성공이 보장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겨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복음화할 수 없습니다. 복음화는 몸으로 부딪쳐야 하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구체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용기가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재촉합니다. 저 너머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몫이 끝났다고 느낄 때까지 가십시오. 복음화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단어는 우리의 삶과 표양과 말로 복음화를 실행해야 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핵심어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Alzati, alzati)” △“가까이 다가가라(accostati)”, “가까이함”(vicinanza) △“상황에서 시작해라(parti dalla situazione)”는 구체성(concreta)입니다. 이들은 아주 단순한 방식이지만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길을 걸어 가셨고, 항상 사람들 가까이 계셨고, 항상 구체적인 상황, 구체성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복음화는 이 세가지 태도로만 할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이 세가지 태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어날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상황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재촉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모든 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를 알고 실천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섬김의 도는 실행함에 있습니다. 실행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는 도입니다. 그러니 실행하는 자가 복됩니다. 곧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김을 실행하는 것이 복 있으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섬김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실, 섬김은 실행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실행되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고 하셨습니다.
이토록,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섬기심을 실행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섬김과 존경을 받고 싶고, 크고 높은 자 되고 싶어 합니다.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먼저 섬기는 이가 섬김을 받고, 먼저 존경하는 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낮출수록 사실은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을 섬기면서 주인을 섬기게 되고, 파견 받은 이를 섬기면서 파견하신 분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나와 함께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조욱현신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16절)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은 겸손하게, 온건하게, 조용히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는 주님의 말씀대로 더 낮은 사람일수록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로 주님과 같이 될 수 있다. 주님은 아버지의 선과 사랑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분은 주님이시면서도 우리 모든 죄인들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부를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주시어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우리는 ‘아들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7절) 이것은 우리가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사랑과 열정에 어울리는 것은 덕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의 지식이 실천으로 드러나게 될 때, 항상 생각지 못한 큰 결과를 얻게 된다. 실천이 없으면 지식도 심각한 불구가 된다.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라고 쓰여 있다. 믿음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고백을 모두 포함하지만, 실천으로 나오는 빛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뽑은 이들을 아시고 발꿈치를 치켜든 자들을 아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다 아시면서 유다는 왜 뽑으셨을까?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창조하셨고, 사울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 유다를 뽑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분명히 제자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는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아담도 하와도 사울도 유다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택한 결과이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19절)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신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생각을 몰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따라온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주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2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이는 바로 파견된 자 ‘사도’들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맞아들이는 이는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맞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파견된 이에게는 보내신 분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파견된 그리스도를 맞아들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그분을 보내신 분 아버지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사도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사도들을 가르치신 분을 발견할 것이며, 우리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찾는다면, 아들 안에서 그분을 낳으신 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놀랄 대 사건, 세족례(洗足禮)
-양승국신부-
성 목요일 저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신 후 행하신 세족례는 인류역사 안에 전무후무했던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영위하셨던 시대 당시는 철저하게도 신분제도가 지켜지던 시대였습니다. 왕족, 귀족, 서민, 천민에 대한 분류가 확실했습니다. 신분이 다르면 서로 넘나들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섞는 것도 불가능했었고, 상종조차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각 신분에 따라 수행해야할 직무들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세족(洗足)’ 다시 말해서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철저하게도 노예들의 일이었습니다. 만일 왕족이나 귀족이 ‘세족’을 했다가는 봉변을 당할 큰 스캔들이 세족례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왕 가운데서도 왕,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스승 중의 스승이셨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에 의해 행해진 세족례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될 큰 사건이었습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놀랄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목숨처럼 중시 여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너무나 이해 못할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하필 수난 하루 전날, 성 목요일 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까요? 사실 세족례 전부터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겸손의 교육, 자기 낮춤의 훈련을 강도높에 시키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직 깨달음에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틈만 나면 ‘누가 높은가?’를 잘 따졌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오 복음 18장 1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오 복음 18장 4절)
제자들을 향한 겸손 교육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걸어가던 어느 순간, 제자 공동체에서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발생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와 그의 어머니까지 합세한 가운데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대로 변에서 누가 높은가 따지다가, 대판 싸운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두 제자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께 이렇게 인사청탁을 넣었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강력한 훈육을 실시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20장 26~27절)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겸손 교육, 낮아짐의 교육을 실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성 목요일, 이제 내일이면 당신께서 적대자들의 손에 넘어가시게 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교육방식을 선택하십니다. 말로는 해도 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온 몸으로, 행동으로, 겸손 교육을 실시하십니다.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 앞에 허리를 굽히십니다.
제자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뽀독뽀독 씻어주시고, 마른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주신 다음, 더 자세를 낮춰 그 발들에 입을 맞춰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놀라고,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깜짝 놀랄 하느님의 지극한 겸손이 바로 세족례를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도 누가 높은가 따지는 우리들입니다. 아직도 인간의 탈을 쓰고서 도저히 하지 말아야 할 갑질 횡포를 일삼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세족례를 보다 자주 묵상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사 안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세족례가 보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겠습니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이를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 20)
-한상우신부-
흩어진 우리를
모아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를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의 방식은
언제나 맞아들임의
방식입니다.
맞아들임이야말로
참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맞아들이십니다.
서로를
맞아들임으로
서로가 치유됩니다.
자신을 내려놓아야
온전히 누군가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사랑입니다.
맞아들임으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은 다시
사랑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맞아들임으로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아지시는
삶으로 우리를
끌어안습니다.
끌어안음과
맞아들임으로
새롭게 우리를
만들어가십니다.
맞아들임은
창조와 구원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
서로를 맞아들이는
생명의 순간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맞아들임의
기쁜 날 되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4월 2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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