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You have faith in God; have faith also in me.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시며,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선택은 본능에 따르는 경우도 있고, 취향이나 가치관을 따르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선택에 대한 후회는 우리 마음을 언제나 산란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선택에 따른 확신이 서지 않을 때마다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기적을 보면 확신이 서다가도,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거나 율법 전통과 다른 내용을 가르치실 때마다, 정말 이분이 메시아가 맞을까 하는 고민도 생겼을 것입니다.
토마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분명하고, 그 길이 보편적인 진리이자 내게 생명을 주는 길이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은 세상의 논리로 쉽게 따르기 힘든 길처럼 보입니다. 메시아라면 어떤 세속의 권력을 넘어서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데도 불의하게 사형 선고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며, 무덤에 묻히셨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불신은 인간적인 고뇌에서 생깁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은 이 불신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결단에서 나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동참하고서 부활의 기쁨을 누린다면, 그것이 가장 훌륭한 삶의 권위이자 확신이 아닐까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어떤 오해와 편견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켜 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주님께 청해 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평화의 장인(匠人)
-양승국신부-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강경한 대치와 반목의 10년 세월이 가고, 거짓말처럼 해빙과 화해의 봄이 찾아온 것, 정말이지 꿈만 같습니다.
갑자기 마주한 기적같은 상황 앞에 너무 좋아 가끔씩,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자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저버리지 않으셨음에 깊이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이런 좋은 분위기가 이 땅 위에서 항구히 지속되고 진전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반도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오랜 분단의 세월로 인해 남북한 백성들이 겪어온 큰 고통에 가슴 아파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영적 아버지요 착한 목자이십니다.
격려의 메시지 끝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특별한 문장 하나를 쓰셨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Artigiani della pace.’ 한국 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평화의 장인(匠人)’ 혹은 ‘평화의 달인(達人).’ 교황님께서 분쟁 지역인 중동지역이나 난민들의 많이 발생하는 지중해 연안국가들을 방문하셨을 때에도 자주 사용하셨던 말씀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시기, 국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교황님의 당부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남북 두 정상과 남북한 국민들은 평화의 장인(匠人)이 되어주십시오!”
남북간의 화해, 평화 통일 같은 일은 대통령이나 정부 당국자들의 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국민들 모두도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의 장인,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해나가야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만큼 깊은 관심을 갖고, 온 몸과 마음으로 동참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열심한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남북간의 대치과 긴장을 통한 분단의 고착화를 자신들의 배경이자 자산으로 삼고 살아온 일부 정치인들과 기자들에게 한반도 ‘해빙 무드’는 견디기 힘든 사건이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궤변과 억지에 일일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수녀님들의 연례피정을 동반하면서 깜짝 놀란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수녀님들께서는 오래 전부터 수녀회 차원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비핵화, 그리고 남북간의 화해와 긴장 완화, 경제 협력을 위해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만명 이상 되는 이땅의 수녀님들께서 한 마음, 한 목적으로 지향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바치신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또 성모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경사스런 자리를 마련하기까지 수고하신 새 정부와 관계자들께 진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준비하셨으니, 내일 회담도 잘 성사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남북간의 긴장과 적대 관계가 말끔히 해소되길 수녀님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번 회담을 통해 오랜 갈등과 불안의 원인이었던 비핵화 문제도 잘 해결되길 기원합니다. 이번 만남을 통해 단절되었던 남북간의 교류가 활기차게 재개되길 바랍니다. 멎었던 개성 공단이 재가동되고, 금강산 길도 다시 한번 재개통되면 좋겠습니다. 금강산길만 아니라 묘향산, 백두산 가는 길까지 활짝 열려,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평화 통일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첫걸음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주님께서도 덕담을 한 마디 던지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 민족에게 바라시는 바는 바로 평화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거짓과 계략이 아니라 마음 속에 오래 묻어둔 진솔한 대화를 통해 진리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반목과 전쟁을 통한 죽음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통해 우리 모두 생명, 더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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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에 이렇게 약속 장소에서 몇 시간씩을 기다리고 있다면 바보 같은 행동을 왜 하느냐면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5분만 늦어도 SNS나 문자 메시지를 날리고, 전화를 거는 등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더군다나 각종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인해서 언제 도착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기에 더욱 더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신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문득 예전 생각이 났습니다. 정확하게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가는 것이 아니라, 30분 먼저 나가 책을 읽으면서 그 신부를 기다렸습니다. 책을 읽다가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신부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의 낭만을 간직하고 싶었거든요.
10분 정도 약속에 늦은 신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긴 늦으면 곧바로 연락하는 요즘,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방금 전에 왔다고 생각했나봅니다. 불편하게 생각할까봐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럼, 지금 방금 왔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금 같은 시간을 상대방을 위해서 쓴다면 어떨까요? 이것이 사랑이고, 또 그런 마음을 간직하니 기쁨입니다.
기다림은 사랑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잘 기다리지 못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내가 했던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응답에 대한 기다림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빠른 결과만을 바라는 우리의 모습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향한 사랑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삶 안에 사랑이 가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더 이상 불평불만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때, 분명히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결과에 대해 쉽게 평가를 내리려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강하게 따지려는 행동이 모두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을 일으킨다. 우울하면 우울한 생각이 더 많아지고 불안한 감정만 머릿속에 꽉 차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단정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내 기준만을 내세울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다른 생각이 필요한 요즘인 것 같습니다.

-조재형신부-
시간이 되면 본당 성소후원회 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창5동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성소후원회 모임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를 끝을 맺습니다. 사제와 수도자, 성소자들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103위 성인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였습니다. 103위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에게 103위 성인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창5동 성당은 미사 참례에 오시는 분들이 이름표를 착용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영성체를 하면서 이름을 불러 주면서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가브리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성체를 영해 주는 것입니다. 신자 분들은 주님께서 지금 나의 몸으로 오신다는 것을 더 진하게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도 신자 분들의 이름을 매번 부르게 되니 이름을 더 쉽게 기억하게 된다고 합니다. 다른 본당에서도 이름표를 착용하고 미사를 봉헌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눈높이 수학’이라는 학습지가 있습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은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과목입니다. 저도 수학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눈높이 수학은 학생의 수준을 파악하고, 학생의 입장에서 어려운 수학을 가르친다는 뜻일 것입니다. 도형의 넓이를 계산하고, 방정식을 풀고, 함수까지는 이해 할 것 같았는데 통계, 미분, 적분과 같은 분야는 잘 이해 못하였습니다. 만일 제가 눈높이에 맞는 강의를 들었다면 좀 더 쉽게 이해했을 것 같습니다.
본당사목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본당에 부임하면 적어도 6개월은 지켜보라고 합니다. 본당 신자들의 분위기를 보고, 지역의 현안도 파악하면 새로운 사목의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부임하면서 바로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려고 하면 신자들도 어려워하고, 그런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입니다. 밥은 ‘뜸’이 들어야 제 맛이 나듯이 사목도 신자들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야 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방법도 어쩌면 ‘눈높이 선교’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의 역사를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들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니, 쉽게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그리스의 철학과 역사를 풀어서 참된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또한 ‘눈높이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로 오셨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그곳에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진리이며, 그 진리의 끝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회담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기도로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이번 만남이 씨앗이 되어서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꽃이 활짝 필수 있도록 기도 하면 좋겠습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예수님뿐!-
-이수철신부-
흔히 우리 인생 여정을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라 일컫곤 합니다. 평탄대로가 아닌 어제 강론의 경우에서처럼 첩첩산중의 행로같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집으로의 목표가 뚜렷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과연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고 있는지요?
오늘 요한복음은 14장에서 시작하여 17장에서 끝나는 긴 고별담화의 시작입니다. 유다의 배신 예고와 예수님의 이별 예고, 베드로의 부인 예고로 인해 산란해진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안심시키는 서두 말씀이 우리에게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나름대로 힘겹게 걱정과 불안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이란 명사는 전혀 없고 ‘믿는다’란 동사만 사용되는데 예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하는 기본적인 인간자세를 말합니다.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응답, 굳건한 신뢰, 내적 평화와 마음의 안정을 뜻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이런 믿음이 답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믿음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당신 자신뿐임을 천명하십니다. 우리는 토마 사도 덕분에 참 귀한 예수님 복음 말씀을 듣습니다. 다음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자 요약입니다. 요한복음 신학을 요약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예수님만이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진리를 떠날 때 거짓된 삶이요 생명을 떠날 때 죽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이란 길을 몰라, 길을 잃어 거짓과 죽음의 세계에서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예수님뿐입니다.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구원입니다.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을 체험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화,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관계가 우리 삶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떠날 때 길을 잃고 거짓과 죽음의 세상속에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은총임과 동시에 결단의 선택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주변에서 이런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자주 접하곤 합니다. 참 신비로운 것이 모두가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별 변화없이 나름대로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흡사 사람들의 길은 정해져 있다는 느낌도 받곤 합니다. 30대 초반 만났던 불우한 몇몇 분들이 있는 데 지금도 결혼하진 못했지만 힘든 중에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탈선하지 않고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한 평생 살다가 세상을 떠난 주변의 무수한 이들을 봐도 결국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떠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삶의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연민과 사랑의 대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참으로 어떤 처지에 있던 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결속이 우리 삶의 전부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예수님은 당신을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살 길을 보여주십니다.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기쁜 소식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시어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부활시키시어 우리에게 참 좋은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버지께 이르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화, 우리의 모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과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아멘.

흔들리지마십시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견하신 지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마저 배신하는 끔직한 세상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일시적인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길이신 그분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을 추구하기에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힘들면 힘이 들수록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참으로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사실이었습니다. 이토록 마음이 산란해져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요한 14,1)
이는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고, 생명의 집이 있어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4)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부름에 따라 약속의 땅에 다다르기 위하여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멀고 험한 길이다. 뒤에, 이 길의 표상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하려고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습니다. 곧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길’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곧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사실, 이는 엄청난 발언이었습니다. 그것은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진리”(áληθεια)는 ‘감추어진 보화를 들러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사람들에게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진리”이십니다. 곧 드러난 보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진리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는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요한 1,17)
이처럼, 당신이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그것은 하느님의 신적 생명이 예수님께 넘쳐흐르고 예수님께서는 이 신적생명을 믿는 이들에게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빵이신 말씀을 먹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니 마치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처럼,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토마스처럼 어리석음에 빠져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앎을 알게 합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 앎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앎은 진리를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믿고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참된 앎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요한 14,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조욱현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돌아가신다는 것 때문에 인간적으로 놀라고 혼란스러워 하자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확신시키시며 그들을 위로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면 당신을 믿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아들과 아들을 낳으신 아버지께 대한 믿음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고 어떤 악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아들에 대한 믿음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하나로 만들며, 그분의 하느님이심을 아버지의 하느님이심과 하나로 만든다. 즉 그분도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이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여기서 아버지의 집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이것은 또한 아드님께서 아버지께 바칠 하느님의 나라이기도 하다. 바로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라는 말을 들은 그 나라이다. 하느님의 이 집, 하느님의 이 성전, 하느님의 이 나라와 하늘나라는 지금 지어지고 세워지고 준비되고 있다. 거기에 거처가 마련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할 거처를 준비하신다고 하신다. 그분이 가시는 것은 하늘나라의 거처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그 자리가 마련된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자리가 우리 차지가 되도록 믿음이 소망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고대하는 것이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다. 사랑을 살며 감사하는 삶으로 마련하는 자리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이렇게 살아서 그 자리가 마련되면 그분이 우리를 데려가 그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분이 계신 곳은 바로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왜? 바로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받아주실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므로 우리가 있게 될 거처는 바로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6) 여기서 생명은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그 거처를 마련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았다면, 우리는 ‘그 길’, 곧 ‘그분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크나큰 축복을 얻는 길은 바로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토마스는 그 길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5절)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는 말씀에 정신없이 한 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ㄱ)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을, ‘진리’는 거룩한 교회를,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 ‘길’은 완전함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복된 목적지, 곧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ㄴ)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아들을 통하는 길이다.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라고 하면, 아들이신 하느님만이 진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진리로 가득하신 분이시며 아들은 진리이시니, 참되신 분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태초의 상태로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생명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러므로 세 가지가 있다. 온갖 덕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신앙교리를 믿음으로써,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올 삶을 소망함으로써 이다. 우리의 인도자요 수단이 되는 분이 바로 아들이시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생명에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따라 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염철호신부-
닭이 울기 전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할 것을 예고하신 뒤(요한 13,36-38), 예수님은 고별담화를 전하십니다. 사실, 야곱도 죽기 전 열두 자녀에게 고별담화를 나누었고(...창세 49장), 모세도 죽기 전 온 이스라엘에 고별담화를 남겼습니다.(신명 33장) 여호수아도, 다윗도 많은 이가 고별담화를 했는데,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고별담화가 대개 축복과 약속을 담고 있듯,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떠나지만 다시 돌아와 제자들을 당신이 머무는 곳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으며, 예수님 친히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어 당신과 함께 머물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요한 14,2-4) 그러니 제자들은 마음이 산란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들 가운데 토마스가 질문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5절) 이렇게 묻는 이유는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는 이미 요한복음서 7장 33-35절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그들과 잠시 동안만 함께 있다가 당신을 보내신 분께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그분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그리스인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에게 가서 그리스인들을 가르치려 하는가?’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또한 8장 21-22절에서 예수님이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라고 하시자,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자살하려는 것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13장 36절에서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자,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목숨을 내어놓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점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 곧 생명에 이르는 참된 길임을 거듭 말씀해 주십니다. 당신이 걷는 길 자체가 바로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이며, 그 길을 걸을 때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 말씀 따라 걷기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자.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한상우신부-
다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고
또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믿음의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들
마음의 시간이
믿음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수 없이 깨어지는
우리 믿음의
여정입니다.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완성됩니다.
가장 진실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길을
열어주시는
예수님께
내세울 것 없는
제 믿음을 봉헌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빛 안에서
믿음의 향기로
살아가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힘들수록
예수님 안에
해답이 있음을 알기에
믿음으로 견디어냅니다.
다시 믿음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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