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8년 4월 29일 부활 제5주일

Margaret K 2018. 4. 28. 18:31

2018 4 29일 부활 제5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요한. 15,1-8)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고,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설교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자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참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이시라며, 당신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참포도나무로 자신을 비유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단순하고 명료한 비유를 통하여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가지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 버리고, 결국 잘려 나가 불에 태워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뿌리에서 얻은 영양분으로 열매를 맺으며 나무에 더 단단히 붙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먼저 그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상의 순간마다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의 태도와 판단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예수님처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서는 주십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일어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울과 바르나바가 유다인들의 박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히 설교하며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님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기억하고 이야기한 것들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실천을 이끌어 냅니다.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사랑은 느낌이나 관심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향해 행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행동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 앞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의 은사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나의 작은 실천이 포도나무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의 결실이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용기 내지 못했던 아쉬움

-조명연신부-


예전에 자전거 여행을 위해 제주도에 가게 되었는데, 본당 신자분께서 호텔 숙박권을 주셔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방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편안한 침대와 함께 배치된 가구들도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호텔의 정원도 호텔의 명성에 맞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객실에서 필요한 물건이 있어 비치된 미니바를 봤다가 너무나 비싼 가격에 깜짝 놀랐습니다. 좋은 호텔인 만큼 다 비싸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객실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음 일정을 위해 짐을 싸들고 방을 나오는데 객실 청소를 하시는 자매님께서 제 방을 본 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손님, 방에 있는 과일을 하나도 안 드셨네요. 정말로 맛있는데….” 저는 솔직히 말했지요. “너무 비쌀까 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자매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님, 방의 과일은 모두 공짜입니다. 가격표가 적혀 있지 않잖아요.”

만약 누군가에게 물어봤더라면 신선하고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레짐작의 판단으로 과일은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더 적극적이면 그만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여자 친구와 오랫동안 사귀다가 헤어지게 된 사회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또다시 이별의 아픔을 얻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뒤 아무도 사귀지 않고 오랫동안 혼자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오랜 독신 생활을 마치고 결혼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독신으로 살 것 같았는데, 이제 이별의 아픔은 끝난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래 남는 것은 차마 용기 내지 못했던 아쉬움이지, 실패한 사랑은 아니더라고. 그래서 내 여자다 싶어서 용기 있게 다가섰지.”

사랑 역시 용기가 없으면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런 용기보다는 저절로 내게 다가오는 사랑만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즉,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이 나무에 붙어 있는 나무라고 하십니다.(요한 15,5 참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 곁에 머무르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요한 15,4 참조)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당신 곁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의지를 세워서 주님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의지가 용기이고,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면서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과연 행복할까요?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 곁을 스스로 떠나지 말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용기와 굳은 의지, 그리고 사랑과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참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당신의 서간에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하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이제는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시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 안에서 나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 지키는 그리스도인 삶은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김창선-


부활의 기쁨과 평화의 축제가 이어져 부활 제5주일을 맞은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포도원으로 초대하여 포도나무의 비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있는 우리가 주님을 믿고 형제애를 나누면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물러 평화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오늘의 복음말씀(요한 15,1-8)을 묵상하면서 지난날 한 포도원을 방문했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까운 팔로알토(Palo Alto)에 살던 시절 미국의 이름난 포도산지 나파벨리(Napa Valley)를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넓은 대지에 그림 같은 와이너리(winery)에 들러 좋은 와인을 시음해보는 기회였습니다. 그때 포도원 주인으로부터 와인의 품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자면 포도 수확이 좋아야 하는데 충분한 일광, 신선한 기후, 튼튼한 가지가 필수랍니다. 기상조건은 자연현상이기에 포도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수확하려면 가지치기를 잘 해야 한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 하고 거듭거듭 당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0,4-5) 그렇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뿌리로부터 뽑아 올린 수액을 공급받아 탐스런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맺게 됩니다.

‘주님 안에 머무름’은 무슨 의미일까요? 오늘의 제1독서(사도 9,26-31) 말씀이 그것은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굳센 믿음임을 귀띔해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도 바오로(사울)가 다마스쿠스 인근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빛과 소리를 체험하면서 회심(사도 9,3)을 합니다. 유다인의 박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도들과 함께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를 합니다. 바오로가 자신의 출생지인 타르수스로 내려가 교통도 험난했던 시대에 지중해 지역에로 세 차례나 위대한 전도여행을 하면서 지역교회와 소통한 서간들이 신약성경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2독서(요한 1서 3,18-24)에서 주님의 애제자인 요한 사도는 ‘주님 안에 머무름’은 애덕의 실천으로 새깁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과 혀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요한 1서 3,18)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심은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신심생활을 ‘야곱의 사다리’에 비유했습니다. 사다리의 두 기둥은 기도와 성사이고, 가로로 놓인 나무는 사랑의 계단입니다. 기도와 성사로 계단을 오르며 성덕을 쌓고, 다시 내려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녀들의 손길과 발길에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자신의 힘과 재물과 명예만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그리스도의 몸’이신 성체로 자녀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는 행복합니다. 분주한 일상을 벗어나 피정을 가거나 성체조배를 하면서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러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은총입니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다고 해서 모두 열매를 맺는 건 아닙니다. 열매 맺지 못한 가지가 값진 생명의 수액을 짜먹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그런 가지는 다 쳐내시고, 열매 맺는 튼실한 가지만 깨끗이 손질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요한 15,2)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주님 안에 머무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을 따르면 많은 열매를 맺고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요한 15,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겠습니까?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마르8,34; 루카 9,23)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사랑의 모델이십니다. 부활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희망의 문을 여신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버리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분이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생명나무’인 십자가를 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손길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주님과 친교 속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청하면 이루어집니다.(요한 15,7) 그리스도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고,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룰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있기에 그리스도교회는 연대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형제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제단과 수도회는 형제적 공동체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형제애를 나누는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기도와 성사로 신심을 기르고 생명의 빵을 나누며 친교를 이루어 사랑과 봉헌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수석사제와 원로들에게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이야기(마태 21,33 이하)를 하셨습니다. 포도밭을 일구는 소작인들이 자기중심의 시비를 할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이를 두고 이사야 예언서(이사 5,1 이하)는 “주인이 좋은 땅 산등성이에 땅을 일구고 포도나무를 심어 좋은 포도가 주렁주렁 맺기를 바랐는데 소작인들 사이에 시비가 일어 좋은 포도는커녕 들 포도를 맺고 말았다”고 전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하신 예수님께서 자녀들에게 당신 안에 머물러 진실한 우정으로 형제애를 나누기를 당부하십니다. 주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친교의 공동체를 이룰 때 평화의 열매를 맺고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아멘.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김강정 신부-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고 물으면 다들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그건 낮은 차원의 답변입니다.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그분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구원을 원하는 겁니다. 주님께 뭔가를 받기 위해 성당에 다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닌 최고최상의 것을 먼저 드리기 위해 성당에 다니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신앙을 사는 이유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 속에 머무는 삶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서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듯, 우리도 주님께 붙들려있어야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아니면 열매는 고사하고 저 하나의 목숨도 보전하지 못합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 삽니다. 다른 잎에 눈독을 들이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우리도 생명의 영양분을 주님한테만 공급받아야 합니다. 영양분을 다른 데서 취하면 반드시 탈이 납니다. 열매가 가지에 달린다고 해서 그 열매를 가지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열매는 나무가 만드는 겁니다. 우리한테는 사랑할 능력은 있어도, 사랑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받아서 주는 사랑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아서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겁니다. 이 사랑의 수액을 공급받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생명의 전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저더러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 언제냐고 물을 때면, 미사성제를 봉헌하는 순간과 성체 대전에 머무는 시간이라고 답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은 없습니다. 머묾이 좋다는 건 머물러 본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주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 이 아름다운 일치와 결합은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겁니다.“너희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여라.”이 맛을 들인 사람은 절대 이 맛을 잊을 수 없고 끊을 수 없습니다. 한시라도 주님을 떠나 살 수 없으며, 늘 성체 대전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중독이 이 중독입니다. 우리가 이 힘으로 하루를 살고, 이 힘으로 세상 앞에 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힘없이, 허약한 내 힘만으로 서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이 말씀이 오늘 하루도 우리 삶을 지탱시키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호내재
-이상호신부-

작년 사제 피정 때, 신부님들 앞에서 미사 강론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들 앞이라 몹시 떨렸기에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때 제가 ‘상호내재’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 모셔서 상호내재하듯이, 그렇게 교구 사제들도 서로를 내어주고 받아들여 상호내재하는 우정으로 살면 좋겠다. 그렇게 기도하자.’라는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이런 취지의 말씀을 드리는 마음이야 진심이었지만 실상 사제로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형제 같은 동료 신부님들과도 더 잘 지내지 못하고 오히려 소원해지는 제 모습이 부끄러워 반성하게 됩니다.

교구 미디어국으로부터 ‘부활 5주일 교구보 강론 당번’ 통지를 받고 그날 복음을 찾아보니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이 보입니다. 동시에 작년의 사제 피정과 ‘상호내재’라는 단어가 번쩍 떠오릅니다. 사랑과 우정으로 사귀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을 내어주고 상대방의 인격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서로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이루는 내적 교류와 일치는 누구나 갈망하는 로망입니다. 주변의 사람들과 마음을 잘 맞추고 타인을 잘 수용하는 사람일수록 행복하고 스스로 만족합니다. 상대방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나도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인간 행복의 근원적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류하면 어떤 양태로든 상호교환과 상호내재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경험으로 교류하면 벗으로 상호내재 되겠지만 나쁜 경험으로 교류하면 원수로 상호내재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재화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상적이고 순진한 소리일까요? 그래도 기도해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재해서 우리 인격이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더 닮는다면 그만큼 더 성숙한 모습으로 기쁘게 살게 되고, 그만큼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험상, 인간적 계산으로 좋은 일을 잘 한다 하더라도, 제 속의 위선과 가식에 걸려 주님 보시기 좋은 결실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저의 위선과 가식이 그리스도라는 거름망에 걸러져 나올 때는 저 자신도 편하고 주님 보시기에도 좋은 결실이 나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실제로 신앙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분께서 나를 움직여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서공석신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너희는 가지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불렀습니다.이사야서는 하느님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5,2)고 말하고,예레미아서는 하느님이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다.”(2,21)고 말합니다.시편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지켜 주소서.”(80,15)라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 포도나무라는 말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단어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하고, 하느님은 그 나무를 손질하는 농부이시며, 신앙인들은 포도나무 가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참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심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수액(樹液)을 받고, 하느님의 손길이 다듬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우리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 계획과 실현을 잘한 사람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우리가 속하는 집단(集團)을 위해, 우리는 계획하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나들이를 할 때는 목적지까지 갈 계획을 세우고, 합당한 교통수단을 택합니다. 우리가 물건을 구매(購買)할 때도, 미리 계획하여 구입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실현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계획하지 않고, 접근해서 얻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술 작품(作品)을 감상할 때, 우리는 미리 계획하고, 계획의 결과를 감상하지 않습니다. 그 작품의 세계 안에 우리는 그냥 빠져들고 심취(心醉)합니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받은 감동으로 우리 자신이 달라져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문학작품을 읽거나, 음악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계획 없이 접근합니다. 감상과 감동은 우리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대상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파장(波長)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우리 자신이 만든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열어주는 세계에 빠져들고 감동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도 같은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계획을 포기하고, 복음이 열어주는 세계로 빠져듭니다. 복음서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를 위해 유익하게 활용하겠다는 계획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고 예상한 교훈만 복음서에서 얻을 것입니다. 이때, 복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계획하면서 기대했던, 우리 자신을 위해 유익한 교훈만 얻어내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서가 열어주는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만나지 못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수액(樹液)을 받아 나무의 생명을 살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그분의 생명을 받아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소인(小人)의 근성(根性)을 탈피하여, 예수님이 보여주신 큰 생명을 받아 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생명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며,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며, 측은히 여긴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 주셨다.”(10,38)는 말로 그분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겨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 시대에 마귀 들렸다고 사람들이 외면하던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으며, 죄인으로 지탄받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는 좋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성공을 위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마음에 들어, 그들의 가호(加護)를 받아 종교지도자로 출세할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유대교의 율법과 관행을 열심히 따라서,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칭찬 받는 길을 찾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소중한 것은 오로지 자비하신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확신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미움을 받게 하였지만, 그분은 그것을 한()으로 가슴에 품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랑과 자비는 한이라는 응어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 생명의 진실에 감동하고 심취하셨습니다. 그 점에서 그분은 여느 인간과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계획 없이, 하느님 생명의 진실에 몰두하셨습니다. 신앙인의 기도(祈禱)는 자기 자신을 열어서 하느님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진실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 있게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 제1하느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당신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님에게서 그 큰마음을 배워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기 자신의 일에 골몰한 마음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태어나 세상에 살다가 그것을 대자연에 돌려주고, 어디론가 가는 생명들입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세상이고, 내어 주어야 하는 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과, 그 마음의 실천만 하느님 안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알리는 바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 계획의 결과로 우리가 획득하는 명예와 재물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잘린 가지의 운명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 생명의 열매를 우리 안에 맺게 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신하느님의 마음을 영입하여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아버지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비록 보잘것없는 실천이라도, 그분 자비의 몸짓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각자를 다듬어서,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머물기 위해 감사한 것을 찾아야

-전삼용신부-


개리 리지웨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이코 패스 연쇄살인범입니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숫자는 밝혀진 사람만 48명입니다.

20년이 지나서야 과학기술의 발달로 DNA검사가 이루어져 범인이 잡혔습니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판결에 화가 난 그의 피해자 가족들이 재판 석에서 일어나 하나같이 사형시켜

지옥에 보내야 한다느니 똑 같은 고통을 당해봐야 한다 등의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기억하지도 못할뿐더러 죄책감도 없어보였고

그냥 모든 것에 무관심해 보였습니다.

물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말입니다.


그러던 중 한 피해자의 아버지가 나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리지웨이씨,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증오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당신은 제가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을 힘들게 하긴 했지만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그 믿음은 바로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냉혈한 살인마, 개리 리지웨이는 자신이 죽인 얼굴도 기억 못하는

피해자 아버지의 진정어린 용서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아마도 그가 성인이 된 이후 흘린 최초의 눈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한 흑인 교회에서 총성이 울렸고

성경공부를 하던 신자 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인 21세의 딜런 로프에게 유가족들은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고 우리 가족도 너를 용서한다. "

네가 우리의 용서를 참회의 기회로 삼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두 팔을 벌려 너를 성경모임에 받아들였지만 너는 내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였다.

내 몸에 있는 살 오라기 하나하나가 모두 아프고 나는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기도하겠다.”


이런 용서의 말들에 딜런 로프도 잠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리고 관선변호사를 통해 사죄하는 마음을 유가족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가지는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뜻을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수난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그분 안에 머물러야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싫으면 말라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분 안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간당간당하게 간신히 붙어있는 것을 의미할까요?

붙어 있을 수 있는 힘은 감사입니다.

단순한 진리지만 어느 곳에, 혹은 누구와 함께 머물려면 나쁜 것보다는 좋은 면을 찾아내고

그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옛날 재래식 화장실에 오래 머무르면 그 냄새가 옷과 몸에 배여

사람들이 내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런 화장실에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대에서 두 시간 이상씩 머물러야 했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선임자들의 서열을 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을 보이는 데서 외우면 안 되기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가서

발밑으로 기어 다니는 구더기들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몇 시간씩 외우고 와야 했던 것입니다.


오래 머물러 온 몸에 그 냄새가 배는 것보다 저녁 때 선임에게 혼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화장실이 내가 머물러야 할 가장 행복한 곳이 되었습니다.

냄새는 이내 구수하게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오래 머물고 싶으면 이렇듯 내 자신이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해야 하는 어려움보다는

그것을 통해 오는 더 큰 이익을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더 쉽게 눈에 들어오고

좋은 것들은 금방 익숙해져서 잊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저는 로마가 지독히도 싫었습니다.

아니, 공부가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학위를 따 가야하니 로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냥 싫어하면 안 되었습니다.


여행하는 것은 좋겠지만 외국인으로 외국인에 대한 반감 1위인 나라의 수도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가장 큰 나라가 된 이유는

처음에 가톨릭국가이기 때문에 난민들을 많이 받아주었는데 이들이 취직을 할 수 없자

빈민촌을 형성하고 도시로 들어와 범죄들을 자주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실업난이 심한데 중국인들이 몰려들어와 그들의 일자리마저 빼앗기는 실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을 했을 때는 석연찮은 심판의 판정 때문에

이탈리아가 한국에 패하게 되자 반한 감정도 극도로 오른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시골 성당으로 두 달 동안 파견을 갔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 마음이

따듯함을 느꼈습니다.

어른들은 물론이요 축구에 미친 아이들이나 젊은이들까지 로마에서 보던 사람들과는

매우 달라보였습니다.

로마에서는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시골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매우 따듯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랬더니 이탈리아의 인상이 조금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왔더니 로마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이탈리아 시골에 사는 사람들도 많은 수가 로마에 한 번도 안 와 보았고,

신학생으로서 로마에 있는 교황청 소속 신학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는데도 저는 그런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안 좋은 것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매년 한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중국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다 또 그 중의 일부만이

간신히 한국에 들어옵니다.

그럼에도 이들 중 많은 수가 한국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사고를 저질러 감옥에서 공짜 법을 먹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의 그 감격은 사라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머물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탈북녀 이소율, 한국에 와서 제일 좋은 점 TOP 5’란 것이 올라와있습니다.

처음엔 물론 ‘자유’란 것이 가장 큰 좋은 점이었겠지만

점차 그 자유에 익숙해지다 보니 새로운 좋은 점들을 찾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5. 티비 채널이 많다: 24시간 보고 싶은 것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4. 안정적인 전기 공급: 24시간 동안 끊이지 않고 공급되는 전기는 북한에 있을 때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3. 보일러(손쉬운 난방): 나무를 주우러 다니고 그래도 안 되면 추위를 참고

눈을 붙여야만 했던 시절에 비하면 감사할 뿐이다.

2. 가스레인지: 이렇게 쉽게 불을 피워 음식을 할 수 있다니.

1. 전기밥솥(풍부한 음식): 굶은 적도 많고, 또 밥 한 번 짓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왜 사람은 머물러서 좋은 것들은 쉽게 잊고 머무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만

크게 생각하게 될까요?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불만족이라는 본성을 지닌 자아 때문입니다.

그 자아는 마치 저절로 자라나는 잡초처럼 가만히 놓아두면 우리 온 자신을 불만족으로 휘감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불만족으로 주님께 머물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불만족을 뽑으면 밑에 무엇이 남을까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가 덮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불만족을 뽑아야합니다.


남녀가 헤어지는 것도 이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어린왕자’는 처음에 자신의 별에 자라난 장미꽃 한 송이 때문에 사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 꽃의 투정과 그 꽃을 위해 해 주어야만 하는 의무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꽃이 있는 별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머물고 싶으면 감사한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 감사한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미사입니다.

미사는 감사, 특별히 영성체가 감사란 이름을 지닙니다.

감사해야 그분의 뜻도 따라줄 수 있고, 그분의 뜻을 따라주어야 그분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야 말라버리거나 지옥 불에 던져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미사 때 감사를 찾고 나왔는지 아니면 계속 불만족인 것만 생각하며 나왔는지 되돌아봅시다.

미사 끝나고 나올 때 성체 성혈, 이것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그것을 주신 주님께

그것만으로 감사하여 나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미사 때 찾으러 가는 보물, 기도 때 찾아야만 하는 유일한 보물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가 있어야만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고 머물러야 많은 열매를 맺고

그래야 구원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머물기 위해 잡초를 뽑듯 우리 안에 불만족이 올라오지 않게 만드는 작업을

멈추지 말아야합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장점은 질서이며, 개신교회의 장점은 자유이다.” 가톨릭교회는 잘 짜여진 교계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전 세계 교회의 구심점이 됩니다. 교구장은 각 나라 교구의 구심점이 됩니다. 사제는 본당 공동체의 구심점이 됩니다. 이 구심점의 원천은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성체성사입니다. 교황님은 주교님들을 임명하고, 파견할 수 있습니다. 주교님들은 사제들을 임명하고 파견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본당의 봉사자들을 임명하고 파견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커다란 조직은 없습니다. 이렇게 오랜 전통을 지닌 조직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장점을 질서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조직은 힘이 있지만 각 지역 교회의 현안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각 지역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전통과 역사를 감안하기 어렵습니다. 가톨릭교회에 있었던 박해와 순교는 때로 이런 문화적인 차이에서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개신교회는 이런 가톨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각 지역교회의 독립과 자유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말씀 중심이며, 역동성이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자유로움은 있지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조직과 제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성과와 능력이 우선되기도 합니다. 대형교회는 모든 면에서 풍요롭지만 작은 교회들은 운영이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보면 질서와 자유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골격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골격이 없다면 움직일 수 없고, 몸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우리의 몸은 신경과 혈관을 통해서 자유롭게 소통하고 있습니다. 신경은 빛의 속도로 정보를 공유합니다. 혈관은 몸의 지체에 영양분을 주고, 노폐물은 배출하는 일을 합니다. 골격만 있다면 우리의 몸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경과 혈관만 있다면 우리의 몸은 움직일 수 없으며 다른 동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서울대교구는 1992년에 ‘2000년대 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26년이 지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진단하였고, 소공동체를 통한 복음화를 모색하였습니다. 교회는 제도로서 존재하며, 교회는 봉사자들이 함께 하며, 교회는 단체들이 모여 있으며, 교회는 소공동체들이 함께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화의 4가지 요소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말씀, 실천, 지역, 교회와의 연대가 복음화의 4가지 요소였습니다. 제가 바라볼 때, 2000년대 복음화 운동의 핵심은 가톨릭교회의 장점인 질서와 개신교회의 장점인 자유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작년에는 25년을 지내면서 2000년대 복음화 운동에 대한 평가와 성찰이 있었습니다. 소공동체를 통한 교회의 모습이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야만 성장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삶의 장소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없으면 잘려나간 가지처럼 말라버리고,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녀 여러분, 우리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살기 편한 집은 있지만 따뜻한 정이 흐르는 가정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편리한 시설과 아름다운 성당 건물은 있지만 기도와 사랑이 넘치는 성당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 하느님과의 친교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과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질서와 자유의 조화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는 사도들이 성령의 이끄심으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공동체의 삶

-기도, 사랑, 영광-

-이수철신부-


참 아름다운 계절, 부활시기 봄입니다. 계속되는 ‘알렐루야!’ 주님 부활 축제 시기입니다. 주님 부활을 경축하든 봄꽃들이 지니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아름다움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색깔로 한다면 신록의 기쁨일 것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우리는 부활시기 아침마다 위 초대송 후렴의 하느님 찬미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 계시기에 살 맛나는 인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맛, 무슨 재미, 무슨 기쁨으로 이 광야 인생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큰 모임에서 나의 찬미도 주께로서 오도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처럼 큰 모임 미사전례에서 주님으로 인해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장 아름다운 분 예수님을 만나러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4월19일 창립 125주년을 맞은 베네딕도회 총연합 회원들을 만나 “바쁘고 산만한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평화와 침묵의 오아시스를 제공해 달라.”고 당부하셨다 합니다. 교황님 말씀대로 주님은 오늘 부활 제5주일 참 생명을 주는 수도원 오아시스 미사전례에 여러분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또 오늘 4월29일은 한국교회가 정한 이민의 날이기도 합니다.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은 2017년 12월 기준 약218만명이라 합니다. 인구대비 4.2% 수준이지만 앞으로 다문화사회의 확장속도는 무척 빨라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세계이민의 날(1월14일) 기념미사강론에서 “이방인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이 공포감이 이방인에 대한 환대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민과 난민들과 어떻게 좋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지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 아름다운 공동체의 삶'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계속 참 좋은 공동체로 성장하는 살아있는 공동체가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하늘나라 유토피아 공동체의 실현은 바로 하느님의 유일한 꿈이자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여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부활시키시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몸, 한 마음 공동체를 살라는 과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바로 이런 참포도나무 예수님 공동체를 가꾸시는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예외없이 예수님 포도나무에 붙어 살아있는 가지들입니다. 아름다운 신록의 나무들만 봐도 이런 공동체의 이치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땅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에 붙어있기에 가지 마다 신록의 아름다운 나뭇잎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신록의 영혼으로, 신록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음은 예수님 나무에 붙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임을 깨닫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신록의 아름다운 영혼으로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참 좋은 공동체 삶을 살기 위한 세가지 처방을 주십니다. 이대로 실천하면 우리는 참 아름답고 좋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습니다.


첫째, 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입니다.

기도는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개인은 물로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너무나 자명한 말씀입니다. 주님께 붙어 연결되면 살고 끊어지면 죽습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 끊임없는 기도요 회개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의 관계도 깊어집니다. 똑같은 공동체 안에 머물러도 주님과 관계의 깊이는 다 다릅니다. 개인의 문제를 공동체가 다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공동체 안에 머물러도 주님과의 일치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해 각자 평소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는 기도는 필수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 안에 머무르기에 주님과 무관한 삶, 헛된 노고의 삶입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 정주할 때 안정과 평화요 활력넘치는 삶입니다. 그러나 막연히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이 아닙니다. 이렇게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여 함께 기도하고 나눌 때 비로소 주님 안에 머무르는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하여 공동체 형성에 어떤 형태로든, 비록 둘 셋이라도 ‘함께,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기도와 말씀공부의 구체적 수행을 습관화함이 절대적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님 안에 머무르는 끊임없는 공동체 수련의 실습장소는 바로 이 거룩한 성전입니다. 


둘째, 늘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랑의 관상은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관상의 진가는 사랑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없이 용기를 내어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시작이 반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크신, 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다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언제나 그분 안에 머무르고 주님께서도 그분에 머무시니 제1독서의 바르나바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위기에 처한 사울에 대한 바르나바 사도의 사랑의 배려가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격려의 아들’이란 이름 뜻대로의 바르나바입니다. 말과 혀로의 사랑이 아니라 온몸과 온마음을 투신한 바르나바의 사랑의 배려, 사랑의 실천이 바오로를 살렸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공동체를 건설합니다. 바르나바처럼 주님과 깊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아야 이런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셋째, 늘 아버지께 영광드리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 인생의 궁극 목표입니다. 무엇을 하든 판단의 잣대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삶이, 참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은 그대로 우리의 기쁨이요 구원입니다. 우리의 영적 굶주림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하느님의 영광을 끊임없이 찬미하는 삶입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 바로 수도원 정문 입구 큰 바위판에 새겨진우리 분도회의 모토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말미 말씀도 우리 공동체의 최종 목표는 아버지의 영광임을 깨닫게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노심초사, 예수님께도 최종 관심사는 아버지의 영광이었음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이 내안에 머무르는 상호내주의 일치 상태라면 그대로 우리의 청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니 우리의 청은 다 이뤄질 수 뿐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필생과제는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상호내주의 일치에서 우리는 주님의 자랑스런 제자가 되고 풍성한 삶의 열매들을 산출함으로 아버지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신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은총이자 숙제라는 사실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상호내주의 일치 없이는 헛되고 허무한, 영원히 반쪽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나를 압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나도 모릅니다. 평생을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삶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할까요. 예수님을 알고 하느님을 알아 참나를 살라고 유일무이한 선물로 주어진 인생입니다. 평생 마음에 담고 삼아야 할 예수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런 예수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는 영원히 반쪽일 수 뿐이 없습니다. 한번 뿐인 인생, 반쪽으로 살다가 반쪽으로 죽는다면 너무 억울하고 허망합니다. 예수님과 일치할 때 비로소 온전한 참 인간의 실현입니다. 


지난 4월27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반도에 베풀어 주신 선물이 놀랍습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반쪽인 북한과 반쪽인 남한이 하나되는 통일을 이뤄주셨기 때문입니다. 두 정상이 다정하게 함께 찍은 사진에 대한 소감이 재미있어 인용합니다.


“김정은이가 문재인 옆에 있으니 너무 착해 보인다.”

“김정은이가 문재인의 보디가드같다.”


최고 존엄인 북지도자에 대한 호감과 선의, 애정이 담긴 유우머입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반쪽과 반쪽이 만나 언젠가 한쪽의 통일이 실현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니 이미 정전停戰을 상징하는 1953년생 소나무의 기념식수에서 이미 반쪽과 반쪽의 남북한이 만나 한쪽이 되는 기적도 발생했습니다. 그 묘사를 읽어 드립니다.


‘소나무앞에는 한라산 흙과 백두산 흙, 한강물과 대동감 물이 놓여 있었다. 두 정상은 흰 장갑을 끼고 각자 삽을 잡았다. 문대통령은 백두산 흙을, 김위원장은 한라산 흙을 삽에 퍼서 나무에 세차례 뿌렸다. 문대통령은 평양 대동강 물을, 김위원장은 서울 한강물을 나무에 뿌렸다. “합토합수合土合水”를 통해 남북의 통일을 기원한 것이다.’


얼마나 기발한 눈물나도록 감동적인 장면인지요. 1953년 정전停戰후 만67년, 이제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2018년 종전終戰을 상징하는 통일의 소나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롯한 전국민들이 기도하고 염원한 결과 평화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 한민족에게 평화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흡사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례 장면같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과의 일치로 온전한 한쪽이 되게 하시고 당신을 닮아 신록의 생명, 신록의 사랑, 신록의 기쁨, 신록의 영혼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 <1독서>에서는 예수님 부활을 체험한 바오로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2독서>에서는 그 부활의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그리고 <복음>에서는 부활한 영혼이 어떻게 예수님과 결합되고 일치되어 있는 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회심이 그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단호하고, 결정적인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의 회심은 죽음을 담보로 한 회심이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앙이 하나의 장신구가 아니라, 신앙이 아니면, 삶이 의미도 없다.’라는 실존적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 도덕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이토록 사도 바오로에게 목숨을 불사하게 한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이 진리에 대해서 오늘 <2독서>에서 말해줍니다. 말로써가 아니라 행실과 진리로써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는 사도 요한의 말은 단지 언행일치의 윤리 도덕차원의 차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윤리도덕차원의 사랑이 아니라, 진리로써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라는 단어는 <요한계 문헌>에서 신적 속성을 지칭합니다. 곧 우리의 사랑의 행위가 윤리적 틀을 뛰어넘어 하느님다운 신적 속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적 속성인 진리로써 사랑한다.”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바로 그 근거를 오늘 <복음>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 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스런 단어인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적으로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 물을 떠나면 죽음이듯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머물다는 말은 우선적으로는 뗄레야 뗄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붙어있음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붙어있되, 열매를 맺는 이라야 머물러 있는 이 입니다.

따라서, 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그분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요,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된다.”(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상호 내주 혹은 공유는 상호 안에 단순히 머물러 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 ‘상호교제, ‘상호 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예물기도>에서는 거룩한 교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밝히듯,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우리에게 영광의 관을 씌어주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공동본성(Connaturality)에서 오는 앎에 경탄하여 탄성을 질렀습니다. ,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적 진리로써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스런 참 사랑, 하늘스런 참 생명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토마스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열매를 맺으실 수 있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라야,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붙어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신 그분의 수액을 받아 마시며, 말씀 안에 머물고, 사귀고, 교제하면서, 당신께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주님!

오늘도

십자나무에 붙어

사랑을 수혈 받게 하소서.

 

제 삶에

사랑의 피가

흐르게 하고

그 사랑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처럼

십자나무에 붙어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은

골고타 언덕에 심어진

참 포도나무.

당신만이

저의 혈관

저의 숨통입니다. 아멘.


포도나무 비유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의 내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대한 내용이다. 복음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잘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평범한 내용 같지만 그것은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1독서: 사도 9,26-31: 교회는 주를 두려워하며 그 수효가 차츰 늘어났다

사도 바오로는 회개한지 3년이 된 후(갈라 1,18-24 참조). 예루살렘 공동체에 함께 하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당했다. 박해자였기 때문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26). 그러나 바르나바가 바오로를 소개하고 주 예수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하여 해결이 되었다(28). 저자인 루가는 초기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성령의 격려"로 성장된다. 교회는 같은 목적을 위해서 다양성 안에서 단일성을 추구하는 조화있는 성장의 개념이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보다도, 주님께 대한 성실성, 즉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화하시는 성령의 힘, 즉 성령의 격려로써 가능하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역시 이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에 공식적으로 가입하려고 한 것은(1고린 9,1), 성령의 특은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를 거슬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모든 카리스마를 다 해도 그 그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바오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2독서: 1요한 3,18-24: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이에 대한 삶의 모습은 '말로써가 아니고 행동과 진실에 의한 상호신뢰와 참된 사랑으로' 하게 되면(18), 하느님께서는 '성령과 믿음으로 가득 차서'(사도 11,24)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인식하고 분별할 능력이 있는 바르나바와 같은 사람을 항상 보내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가지도 자기 탓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간에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 피를 통해 새로운 계약을 세우시며(마태 26,27-29) "나는 참 포도나무"(1)라고 선포하신다. 이제 주님의 포도밭은 이미 그리스도이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포도밭의 상징을 통해 표현된 사랑과 충실성의 완전한 충만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홀로 '참 포도나무'가 되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지들'인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살도록 그들을 당신의 생명에 살도록 그들을 당신에게 결합시키신다(4-6). 포도가지들의 "공동체적" 운명은 우리 모두가 풍요한 결실을 맺기 위해 원 그루터기의 무진장한 생명력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주님의 말씀의 "머물러라."라는 말이다. 이는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에 같은 생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듯이 똑같은 생명에 감싸여 있음을 느끼는 데서 생겨나는 일치, 수렴, 용해, 우정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머물러라."는 말은 일방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호적인 의미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체에 대해 말씀하셨듯이 같은 생명을 함께 실현시킴을 의미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이제 그 가지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을 만큼 "열려져" 있어야 하고, 둘째로 "열려진" 것 뿐 아니라 "결실"을 맺어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 즉 믿음과 사랑의 결실을 맺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경우에 말과 머리로만 그리스도께 일치하고 있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이는 우선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비극은 우리의 불충함에서 기인됨을 알아야 한다. "포도밭"이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말라버린 가지는 잘라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6). 그리고 또 말씀하신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

 

여기서 주님의 "포도밭"에 대한 "심판"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를 쳐준다. 첫 번째 경우는 단죄하는 의미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멀어져 멸망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비록 시련과 고통은 따르지만 사랑의 심판이다. 그것을 통하여 더욱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어떻게 일치를 이루고 그 생명에 함께 하고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 오늘 이 독서와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 속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초기 교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보아진 것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그래서 기쁜 하루가 되도록 주님께 기도하자.


너는 나의 봄이다!

 -양승국신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예수님의 훈화 말씀을 경청하면서, 참 많은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복음 15장 5절)

 

자주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있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붙어있는가? 하는 반성을 합니다. 혹시라도 떨어져나갈까 안간힘을 다해 원줄기에 붙어있지만,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꼭 붙어있기는 하지만 일생에 도움도 안되는 가지로 여겨지지 않을까 두려움이 큽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구성원들을 만납니다. 소속은 분명 우리 소속이 맞는데, 우리 편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 소속이라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만,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신이나 영성과는 전혀 별개의 삶을 살아갑니다. 무슨 불평불만이 그리 많은지, 입만 열면 자신이 속한 단체나 리더들을 향한 험담을 폭포수처럼 쏟아냅니다.

 

이런 분들은‘증거의 삶’이 아니라 ‘반대증거’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표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 표양’이 됩니다. ‘복음적 증거의 삶’이 아니라 ‘반복음적 증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메스컴을 장식하는 사이비 교주들이 그렇습니다. 목소리 높여 성경을 가르친다고 외쳐대지만, 정작 성경을 욕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를 훼손하고 축소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 예수! 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모욕하고 박해하고 있습니다. 

 

저희같은 사제나 수도자들도 조심해야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반대증거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의 악표양으로 인해,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제왕적 리더십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에게 반복음적 증거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을 때 마다 늘 드는 느낌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다들 한 나라, 한 민족, 한 핏줄 속에, 한 마음으로 평화롭고 화기애애하게 살아가는 데, 왜 하필 우리나라, 우리민족만 남북으로 갈라져 이토록 ‘쌩고생’을 하고 있는가? ‘하느님도 참 무심하시지?’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두 정상이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큰 형님과 동생처럼, 스승과 제자처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고, 속 마음을 털어놓고, 미래를 함께 걱정하는 새로운 세상이 온 것입니다. 남북한 8천만 동포가 다들 기뻐하고, 온 세상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가나 꼭 초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고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해도 부족할텐데, ‘어처구니 없다!’며 ‘위장평화 쇼’라며,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신상태가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이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합니다.

 

하나 되어야 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참으로 어이없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무에 달려있지만 별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고, 열매도 맺지 않은 가지와도 같은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언제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혹시라도 나는 별 도움이 안되는 의미없는 가지는 아닌지? 풍성한 열매를 맺지는 못할망정, 세상과 이웃의 걸림돌이 되고 악표양이 되는 존재는 아닌지?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 5)

-한상우신부-

머물러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머물러야
목마르지 않습니다.

머무름은 생명을
얻는 사랑의
참된 방식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머무름에서
출발하여
머무름으로 마치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를 빚어 
만드신 분안에
머무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 
머무르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떠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자랄 수 없고
익어갈 수 없습니다.

머물러야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머무름은 속도에서
벗어나 함께 나누는
사랑입니다.

사랑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결국
머무름의
선물입니다.

먼저 머무름으로
돌아가는 은총가득한
주님의 날 되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5월 3일 부활 제5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