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8년 4월 30일 부활 제5주 월요일

Margaret K 2018. 4. 29. 18:41

2018년 4월 30일 부활 제5주 월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1-12)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If you know me, then you will also know m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을 보고,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내려왔다며 두 사도에게 제물을 바치려 하자, 사도들은 자신들도 군중과 똑같은 사람이라며 이를 말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고립되어 있지 않고 타자를 향해 행동하고, 자신이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관심에 공감하며, 하나의 목적에 도달하려는 열정을 일으킬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와 능력이 모두 예수님에게서 왔음을 확신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켰을 때, 신화적 세계에 갇혀 있던 그리스 사람들은 신이 사람 모습으로 내려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두 사도를 신으로 모시려는 우매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헛된 우상에 빠진 이들을 질책하며 자신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방인들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상대방의 생각에 관심이 없고 자기만족의 대상으로만 삼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소유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상대와 나누는 사랑의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려고 더 멀리 보고, 더 진지하게 들으며, 더 소중하게 상대를 만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짧은 시간이라도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또는 강의 준비를 할 때에 갑자기 막막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고, 글이 잘 써지지 않고, 강의 진행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떠올려지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참을 고심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에서 SNS 메시지가 왔다는 표시등이 뜹니다. 머리가 복잡했는데 잘 되었다는 생각에 확인을 하고나서 가입되어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어떤 글이 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E-Mail 함도 열어보지요. 잠깐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참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서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하려고 하면 어떨까요?

처음의 막막함이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뿐이 아니라 더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확인을 하지 않습니다. E-Mail 함에는 확인하지 않은 메일이 가득입니다. 제 글에 어떤 댓글이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니 겨우 시간 낭비를 줄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일일이 메일을 확인하고, 제 글에 대한 모니터링을 계속한다면 어떨까요? 정말로 해야 할 것들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보니 이밖에도 유혹을 가져오는 세상의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들이 내게 커다란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데, 정작 할 일은 뒤로 제쳐두고 순간의 쉬운 만족만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의 일보다도 세상의 일이 먼저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뜻과는 점점 먼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고 싶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에 대한 관심만 가득한 상태에서 겨우 주일미사 한 번 참석하는 것만으로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겠다고 말하는 것은 커다란 욕심이고 착각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이런 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계명을 받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주님이 세상의 것보다 먼저인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큰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단 번에 가능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불가능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보호자이며 협조자이신 성령을 우리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사실 제자들 역시 성령을 받아들인 뒤에 비로소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가 있었지요. 이 성령은 용기와 지혜를 가져다주어서 올바른 판단과 함께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주님께 온전하게 의탁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들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주님을 맞이하는 힘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의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 주면 달걀 프라이가 된다.



시간

로마 제국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즉, ‘남을 부러워하다 보낸 세월’과 ‘바로 이 순간’입니다. 그리고 남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다가 흘려보낸 세월을 중지시키고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각자는 똑같은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간을 살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남들을 부러워하는 시간을 살고 있지요. 그렇다면 어떤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까? 당연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시간은 남들을 부러워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남들을 부러워하는 시간은 그냥 편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시간을 가져야 행복할까요? 비록 노력의 시간 안에서 어렵고 힘듦의 시간을 겪기도 하지만 분명히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부러워하기만 하는 시간은 아무런 노력 없이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노력,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분명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비밀은 선물이다

-전삼용신부-


세간에 화제가 됐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2010년 아내 엘린 노르데그렌과 이혼할 당시

우즈의 외도에 의한 이혼으로 이혼합의금으로 5억 달러(5200억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준 이유는 외도와 불륜에 대한 책임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외도에 대해 침묵해준다는 대가라고 합니다.

노르데그렌은 이 돈을 받는 대가로 우즈와 관계된 외도에 대해 어떤 인터뷰는 물론

책도 쓸 수 없고, TV 출연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죤 드리아든은 “하인에게 비밀을 얘기하는 사람은 그 하인을 자기의 상전으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비밀을 잡아 그것으로 상대의 재물을 뜯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비밀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아무에게나 말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도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당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진리의 성령님을 통해서인데

그것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곧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관계를 가져가면서 그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로의 비밀을 나누게 됩니다.

그만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다는 증거이고 믿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가장 소중한 비밀을 말해버리는 사람은 조심해야합니다.

애정결핍이거나 그 비밀을 이용해 애정을 얻으려는 속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 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상대의 비밀을 지켜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됩니다. 그만큼 깊은 관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누구에게나 드러내 보이시지 않고 당신 계명을 지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당신 비밀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믿고 말한 것은 다른 이에게 발설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다시는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둘의 관계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아 그 비밀을 지켜줄 수 없는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이비나 이단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신흥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한 번 이상은 기성종교를 거친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기성종교에서 그릇이 합당하지도 않은데 많은 진리들을 가르쳐주어서 그것을 이용해

이단을 만들게 만든 책임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왠지 믿음이 가서 자신의 속내를 다 털어놓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앞에서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선물은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믿을만한지 그렇지 않은지 지켜보시다가

믿을만한 사람에게만 당신 소중한 비밀을 선물하십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성소주일이었습니다. 일주일 전의 예보는 비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성소국장이 열심히 기도하면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기도 때문은 아니겠지만 3일전 예보를 확인하니 오전에는 흐리고 오후 3시부터 비가 올 거라고 하였습니다. 당일 날의 예보를 확인하니 오전에는 흐리고 오후부터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소주일 아침에 명동에서 혜화동까지 걸어가는데 종로 5가 쯤에서 비가 조금 내렸습니다. 순간 저는 주머니에 있던 묵주를 꺼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성소주일은 아주 시원한 날씨 속에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걱정보다는 기도가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 미사를 주례해 주신 주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1960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쓰셨던 일기장을 보여 주셨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기를 쓰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58년 동안 일기장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는 사람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매일 복음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작은 일이지만 저도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성소주일에 두바이에서 잠시 휴가를 왔다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두바이에서 일을 합니다. 신부님의 묵상 글이 제게는 영적인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형제님의 말씀이 제게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집을 이루는 벽돌 한 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 장의 벽돌이 모여서 아름다운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교구청 마당에는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은 모두 많은 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잎 하나는 작지만 그 잎들이 모이니 교구청은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나뭇잎이 자기가 나무라고 생각한다면, 나무가 자기가 숲이라고 생각한다면 조화를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자신들이 교회의 벽돌 한 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자신들은 교회라는 숲에 있는 작은 잎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언제 어디서나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

-사랑愛, 봄見, 앎知-

-이수철신부-



잘 듣는 귀도 중요하지만 잘 보는 눈은 더 중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또는 넘어 볼 수 있는 눈도 있습니다. 눈의 모습, 색깔, 크기도 다 다릅니다. 눈빛 또한 다 달라서 깊고 그윽한 눈빛도 있고 따뜻하고 부드러는 눈빛도 있고 천박한 또는 차가운 눈빛, 어둡고 무거운 눈빛 등 참 다양합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비단 육안肉眼만 아니라 심안心眼, 영안靈眼도 말하곤 합니다. 볼 ‘견見’자가 들어간 한자가 봄의 중요성을 입증합니다. 의견意見, 견해見解, 견성見性, 편견偏見, 선입견先入見,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단어도 있고, 관상觀想도, 깨달을 ‘각覺’자도 볼 ‘견見자’가 들어 있습니다. ‘맹목盲目’이란 단어도 ‘안목眼目’이란 단어도 눈‘안眼’ 눈’목目’자로 이뤄졌습니다. 모두가 잘 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는데 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뿐 아니라 눈빛도 그 사람의 내면이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굴도 눈빛도 잘 돌보고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세월따라, 마음따라 변하는 얼굴이요 눈빛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카의 핀란드 흰 올빼미 도자기 전시회에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말)이란 말뜻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올빼미에서 마지막 눈동자를 잘 집어 넣는 것이 절대적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올빼미의 눈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올빼미의 모든 특징이 압축적으로 그대로 드러난 기다림, 외로움, 그리움으로 깨어있는 눈빛이었습니다. 만약 올빼미에 눈이 없다면, 또 눈이 이런 정서를 담고 있지 않다면 올빼미는 전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눈이 없다면 창문 없는 온통 벽만의 답답한 방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 얼굴에 눈이 없고 온통 얼굴뿐이라면 창문없는 벽처럼 답답하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하여 눈을 마음의 창, 마음의 거울이라 일컫곤 합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참행복 선언중 여섯째 항목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여 마음의 눈이, 심안心眼이 그처럼 중요합니다. 마음따라 보는 육안입니다. 하여 편견, 선입견이란 말도 있습니다. 눈이 욕심으로 가려져 있으면 있는 그대로, 또 넘어 바라볼 수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의 눈은 관상의 눈, 지혜의 눈입니다. 관상가, 신비가의 눈이 이러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변의 모두는 하느님 향한 성사聖事의 문이 될 수 있겠지만, 이런 눈이 없으며 주변 환경이 그저 무의미하고 답답한 벽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국은 눈에 대한 묵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예수님의 두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며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의 눈이 마음의 눈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말씀을 지킬 때 열리는 마음의 눈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탐욕이 많다면 아무리 육안이 좋아도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뜬 맹인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되니, 사랑-봄-앎이 하나로 직결됩니다. 사랑할 때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뵙습니다. 바로 이런 눈을 지니신 예수님이요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리스트라에 태생 앉은뱅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바오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있음을 꿰뚫어 보는 관상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지체없이 “두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큰 소리로 말하자 즉각적인 치유의 기적입니다. 무지에 눈 먼 군중들은 기적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바르나바를 제우스로, 바오로를 헤르메스로 믿고, 또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제물을 바치려 합니다. 


육안은 멀쩡해도 영안이 눈먼 이들입니다. 반면 영의 눈이 활짝 열린 바오로 사도의 감동적인 설교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선물로 가득한 세상이요, 어디서나 충만한 하느님 현존 체험입니다. 이렇게 살아있음 자체가 생생한 하느님 체험이 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하늘에서 비와 열매를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하느님께 눈이 가려진 눈뜬 무지의 맹인들에게 삶은 허무하고 무의미하며 한없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답은 하느님뿐인데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마음의 눈만 열리면 하느님의 선물들로 가득찬 세상에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삶일 것입니다. 무지의 치유에 자발적 하느님 사랑의 찬미와 감사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늘 당신을 닮아,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의 삶을 살게 하시며 날로 당신과의 우정도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옵니다.”(시편115,1). 아멘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흔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은 이를 답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이가 아니라, 설령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넘어 그를(그의 인격을) 받아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 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인 그 말을 지키는 이, 곧 실행하는 이가 진정 그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버리고 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곧 그를 믿고 신뢰하고 마음으로 결속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는 말씀은 뒤에 나오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말씀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곧 내적 일치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전제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주님!

빛이 되어 오소서.

저를 사르는 빛으로 오소서.


함께 살며,

불살라 태우소서.


저를 태워

세상을 밝히소서.


제가 빛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보호자이신 성령 안의 삶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4,21-26: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당신이 누구신지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아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들이 올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단지 바라만 보았던 진리를 눈으로 보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것이다. 오직 의인들만 수려한 모습의 임금”(이사 33,17)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유다가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22) 하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한쪽은 당신을 사랑하고 다른 한쪽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자녀들과 세상을 구별하는 것은 한마음이 된 이들을 한 집에 살게 하는 사랑이다. 이 집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사시며,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사랑을 주신다. 이 사랑은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이 실행될 때는 자기의 뜻을 죽이고 그분의 계명을 따를 때이다. 자기의 뜻을 따를 때는 그분의 뜻을 거스르게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과 지혜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며, 그들 안에 나와 아버지가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라고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 안에서 모든 악습과 욕정을 태워 버리시고 그들을 당신의 깨끗하고 합당한 성전이 되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의 마음 속에 오시어 그 안에 사신다. 이 말씀은 그분이 당신 친구라고 부르신 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시며,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이다.”(24)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하신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드님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외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도 거부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말이 당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그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그것들은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제는 위에서 오는 빛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이 그분의 권위를 따르게 되었다. ,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 이 말씀은 아들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가르치신다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는 말은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지혜 자체로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의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과 함께 온전히 깨닫게 되며 아들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우리의 삶을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는 삶이 되도록 은총을 청하며 기도하자.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양승국신부-

 

제자단을 떠나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도 자녀들을 두고 먼길 떠나야 하는 부모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안타깝고, 안쓰럽고, 걱정되고, 눈에 밟히고...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대신해서 제자들을 동반하고 안내하고 가르쳐주실 또 다른 스승을 당신 대리자로 즉시 보내주셨는데, 바로 성령이십니다. 

 

승천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 앞에서 사라지셨지만 초대교회 사도들은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매순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관계로 그들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당당했습니다. 의기양양, 위풍당당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 지니고 있었던 인간적 미성숙도 떨쳐버렸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니 약한 믿음은 굳센 믿음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금상첨화격으로 인간적 야심이자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났으며 지극한 겸손의 덕까지 겸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확연히 변화된 사도단이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가 심한 박해를 받는 중에도 여러 지방을 두루다니며 거침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 리스트라라는 지방으로 피해갔을 때, 거기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털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스스로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설교 도중 그의 존재가 바오로 사도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말씀에 몰입해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새 삶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사도행전 14장 10절)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의 그 한 마디 말에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모습은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유다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소 몇 마리를 잡아서 왔으며, 커다란 화환을 들고 왔습니다. 이게 뭐냐고 묻는 사도들에게 유다인들은 말했습니다. “저희가 볼 때, 두 분은 신(神)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는 어불설성, 신성모독이라는 표시로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치유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두 사도의 깊은 신앙과 놀라운 겸손의 덕이 돋보입니다.

 

틈만 나면, 치유, 종말, 기적, 신비스런 현상들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스스로를 우상화시키면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사이비 지도자들이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교만한 그들에게 결핍된 점은 겸손의 덕입니다.

 

가끔 아주 작은 우리의 일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찬사와 박수갈채 앞에 우리가 어떤 자세,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염철호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진정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버지께 사랑받을 것이며, 그런 사람만이 당신을 진정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묻습니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유다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다시 한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 말씀, 곧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데, 당신이 하신 말씀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외아들 예수님은 말씀을 지키는 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머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이 점을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에 관해 약속하십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시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 말씀을 잘 실천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올바로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제자가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 말씀 따라 걷기
*진리의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한상우신부-

어김없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가장 좋은 기억은
주님 말씀이기에
예수님 말씀에 
머물게합니다.

머무르는 기쁨이
바로 말씀의 시간이며
말씀을 붙잡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 말씀으로
불안한 삶의 중심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삶의 중심이
예수님의 사랑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십니다.

사랑의 일치된
관계를 맺게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말씀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을
채워주시는 분또한
성령님이십니다.

말씀이 계신 곳에
성령님또한 계십니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가
말씀의 자리이길
기도드립니다.

내딛는 걸음마다
말씀으로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성령께서는
알고 있는 것을
지키고 실천하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해주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이 
참된 사랑이며
참된 용서임을
기억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4년 5월 19일 부활 제5주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