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8년 5월 2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18. 5. 1. 19:38

2018 5 2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아타나시오 성인은 295년 무렵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가 된 아타나시오 주교는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성인은 특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요한 15,1-8 )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할례 문제로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참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이시라며,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수를 받아야만 영적인 생명을 누리며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삶의 목적과 방법이 다 다릅니다. 우리는 가장 순수하고 참된 삶을 위해 신앙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세례를 통해 모든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잘 가꾼 나무라 하여도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이내 시들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도 늘 예수님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만 하지요. 우리의 영혼이 더욱 정화되고 완성되려면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언제나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 안에 뿌려진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싹 틔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의 하나는 성경을 읽으며 어느 장면이나 문장, 단어를 선택하여 곰곰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어떤 영감이나 내용이 떠오를 때까지 내가 택한 내용을 반복하여 묵상하면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종종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너 커서 뭐가 될래?”

그런데 사람들이 당황스러울만한 답을 하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답은 ‘실업자’였습니다. 아이가 실업자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뜻이 무엇인지 아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이잖아요.”라고 답변하더군요.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이 행복하다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냥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사실 무엇이 되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명확해야 합니다. 만약 장래 희망이 ‘신부님’이라면, 막연하게 신부님 되겠다고 한 것이 중요하지 않고 왜 신부님이 되려는 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막연하게 편하고 쉬운 것만을 선택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어른들이 그런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아이들 역시 그런 모습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제 형님이 아는 분의 아이 돌잔치에 갔다고 합니다. 돌잔치 중에 돌잡이 순서 때였습니다. 사회자는 아이 아빠에게 돌잡이 물건 중에서 어떤 것을 아이가 잡기 원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아이 엄마 역시 망설이지 않고 ‘돈’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는 무엇을 잡았을까요? 망설이지 않고 ‘돈’을 잡았답니다. 엄마 아빠의 바람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나 봅니다. 그런데 돈이 행복한 미래를 결정해주지는 않습니다.

내 삶의 미래에 대한 의미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걸림돌에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참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의미 없는 삶이 아닌, 많은 열매를 맺는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지 않고 세상과 연결된 것만을 쫓을 때에는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어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기쁨 안에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내 삶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TV 앞에 앉아서 혹은 핸드폰을 만지는 것 이외에는 많은 일에 도전하지 않는다(트리쉬 웨그스태프).



가치

제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있습니다. 자그마치 25년이 되었습니다. 어떤 옷일까요? 아마 눈치를 채신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단’입니다. 신학교 4학년 때 착의식을 하면서 입게 된 수단을 지금까지도 계속 입고 있습니다. 25년 동안 입고 있었으니 아주 낡았습니다. 전에 불을 쬐고 있다가 수단에 불이 붙어서 기운 자국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낡은 수단을 입고 있을 때 제가 부끄러워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제 사제 생활의 역사가 이 수단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오랜 시간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 신학생 때나 지금이나 몸의 변화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사실 등이 이 수단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새 옷, 비싼 옷이 더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제 자신이 만드는 가치였습니다. 그 가치가 더욱 더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도록 합니다.

투자의 한계를 정하라

 -전삼용신부-


어떤 소년이 학교에 지각을 했습니다.

평소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소년에게 지각 사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소년은 학교에 오는 도중 어떤 아저씨가 동전을 떨어뜨려서

그걸 같이 찾느라고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물론 동전을 같이 찾아드리는 일도 좋지만,

학교에 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고

지각하지 않게 왔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또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자기가 그 동전을 밟고 서 있었기 때문에

올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소년은 동전을 떨어뜨린 아저씨가 학교 시작할 시간이 지나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것에 투자를 할 때는 그 투자에 대한 이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 투자한 값을 뽑으려다가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에 에너지를 투자하되 어느 한계가 지나면 투자한 것을

손해 보더라도 빨리 접을 줄도 알아야합니다.

 

경영학에서는 어떤 것을 투자할 때 가령 3개월 이상 투자했는데도 그 성과가 나지 않는다면

투자한 것이 아깝다고 계속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어느 일정 시간을 정해놓고 최대한 열심히 노력한 다음 그래도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그 일을 접어야 더 큰 손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당신에게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과감히 쳐내신다고 하십니다.


어찌 보면 냉정한 것 같지만 사실 열매도 맺지 못하는데 그것을 위해

무작정 에너지만 낭비하는 것이 더 좋지 못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나무에 붙어있지만 아무런 변화나 열매도 맺지 못하는 가지는

그 안에 성령의 액이 흘러들어갈 공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의도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성령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도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에너지는 바로 성령님, 즉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어찌 낭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하실 때 빵 부스러기도 다 모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열 번 찍었는데도 안 넘어가면 어떻게 할까요?


일반적으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는데 특이하게 열 번을 찍었는데도 안 넘어간다면

그 나무는 이십 번을 찍어도 안 넘어 갈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차리라 다른 것으로 옮겨 찍는 편이 낳습니다.

이렇게 한계를 정해야합니다. 열 번이면 열 번.


아마 예수님께서도 가리옷 유다에게 한계를 정하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의 순간.

그 때까지도 회개하지 못하면 이제 포기해 버리겠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하여라.”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그를 놓아줍니다.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스스로 정해놓으신 때가 찬 것입니다.

 

만약 어떤 신자가 잘못을 하면 가서 타일러 주라고 하십니다.

타일러도 말을 안 들으면 한 명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마저 안 듣는다면

그를 세리나 이방인 취급을 하라고도 하십니다.

 

즉 교회의 말도 안 들으면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포기했는데 그 사람을 살려보겠다고 혼자 달려드는 것은

오히려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포도밭에 삼 년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재배인에게 그것을 베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주인에게 그 투자의 기간은 3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재배인은 자신이 거름도 주고 더 잘 보살필 테니 1년만 더 달라고 합니다.

  

즉 그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길어야 내년엔 잘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이 아니라 열매가 아직 열리지 않은 무화과나무도

저주하여 말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열매’를 갈구하십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한 청년이 여자 친구가 안 만나준다고

여자 친구의 어머니가 운영하고 있는 식당으로 차를 돌진해 박아버렸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노력 했는데도 안 되면 더 이상 아닌 것도 알아차릴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과감히 잘라낼 줄도 알아야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결국 이와 비슷한 화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력은 철저히 하되 어느 한계는 정해놓고 해야 합니다.

사라질 것은 사라져야 하고

새로 생겨날 것은 새로 생겨나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신학교의 진리관 입구에는 “Omnibus Omnia"(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는 라틴어가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꼭 간직해야 할 마음의 자세임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정성을 모아 후배들을 위해서 기증한 것입니다. 저는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 그 글을 보았습니다. 사제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렇게 먹은 마음을 삶으로 실천한다면 힘은 들겠지만 많은 열매가 맺어질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과 건물에 에머슨 홀을 지으면서 건물 정면에 새겨 넣을 글을 공모하였다고 합니다. 교수들이 낸 의견은 사람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했던 프로타고라스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의 글이며, 인문학의 꽃인 철학과 건물에 어울리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건물에 새겨진 글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라는 시편 8 5절의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과학, 철학, 신학이 발전을 해서 그 깊이를 더해 갈수록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높은 산의 정상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캄캄한 밤에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인간은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신학의 시작이고, 그것이 종교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종교는 개별 종교가 가지는 교리라는 에 가두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희로애락과 상선벌악이라는 윤리적인 에 가두기에는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우주에 펼쳐진 신의 숭고함과 사랑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을 유대인들의 율법과 계명이라는 틀 속에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제비꽃에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고, 순금에 도금하는 것과 같고, 무지개에 색을 하나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만남의 문화를 위하여 우리는 줄 뿐만 아니라 받을 준비도 해야 합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모임을 갖고 주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들의 율법과 계명이라는 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로써 복음은 율법과 계명이라는 껍질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내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소통과 공감의 도구인 스마트 폰입니다. 저도 늘 스마트 폰을 곁에 두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몇 번의 손동작으로 답을 찾기도 합니다. 약속과 일정은 스마트 폰에 저장을 해 놓았습니다. 티켓을 예매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책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원하는 음식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물론 통화는 기본입니다. 그러니 스마트 폰이 없는 하루를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스마트 폰도 전원이 꺼져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원이 켜져 있어도 인터넷과 연결이 안 되면 병따개 없는 콜라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 곁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식탁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해서 말씀의 양식을 받을 수 있고, 성체를 모실 수 있습니다. 말씀의 양식을 잘 받기 위해서는 미리 오늘의 성서 말씀을 읽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것입니다. 내가 몸을 가꾸는 만큼 나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세수하고, 화장을 합니다. 그런 시간만큼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몸은 깨끗한데 영혼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피정이나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성경공부, 피정, 특강에 자주 참여하는 분들은 주님 곁에 머물 수 있으며 알찬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한 방울 씩 떨어지는 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곁에 머물면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본질적인가?”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사랑의 일치-

-이수철신부-


무엇이 본질적인가?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분별의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분별의 지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랑할 때 보이고 보일 때 압니다. 그러니 사랑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본질적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주님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해 줍니다.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일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실 남는 것도, 주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주님과 사랑의 관계뿐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인지요?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우선순위를 식별하는 눈도 지닙니다. 사랑있을 때 본말전도本末顚倒,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우愚를 범하지 않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넓고 깊은 내외적 시야를 지닐 수 있습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편견에 눈먼이들의 주장을 보십시오. 참으로 무지에 눈먼 모습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흡사한 이념이나 잘못된 신심에 눈먼 맹신이나 광신의 모습을 종종 목격하지 않습니까? 사건의 발단은 다음에서 시작됩니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유다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에 안티오키아 교회에 혼란이 빚어진 것입니다. 편견에 눈먼 모습입니다. 하느님 영역의 구원을 너무나 협소하게 만듭니다. 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와 이들간에 분쟁과 논쟁이 일어납니다. 


바로 여기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최된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바리사이파에 속했다가 믿게 된 사람들 역시 집요하게 같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고,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인 것입니다.-


권위있는 사도회의의 지혜로운 판결을 기대할 수 뿐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정말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되지 않지만 편견에 눈먼 이들에게는 이처럼 생각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본말전도, 어리석은 편견에 눈 먼이들입니다.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수적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새삼 분별의 어려움을 겪을 때 교회의 어른이나 교회 공동체에 분별의 지혜를 청함이 겸손한 믿음이자 지혜임을 다음 오늘 성무일도 찬미가에서 깨닫습니다.


“지극히 인자하신 누리의 목자/언제나 하늘에서 우리 주님은

 교회의 하는말에 힘을주시니/누리는 끊임없이 빛을 받도다”


본질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이 본질적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답입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끊임없이 공동전례기도 수행에 충실하고 항구함도 결국은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사도행전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의 관계일 때 무지에서 벗어나 올바른 분별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사랑의 빛, 말씀의 빛입니다.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4-5).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할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로 구원입니다. 많은 영적 열매들이 바로 구원의 빛나는 표지들입니다. 바로 성령의 열매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5,22-23).


이것이 우리 영성생활이 궁극으로 지향하는 바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상호내주의 사랑의 눈을 지닐 때 올바른 분별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가 답입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가 목표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거듭 이런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맫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주님과 이런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 상태라면 청하는 것 모두가 주님의 뜻과 일치할 터이니 응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풍성한 영적 열매들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아버지께도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는 과연 교회의 사람이자 믿음의 용사입니다. 78세 고령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산전수전 다 겪으며 5회에 걸친 유배 중에도 아리우스 이단에 끝가지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했으며, 신약성경 27권의 목록을 만들고 안토니오의 생애를 저술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오입니다.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의 4대교부라 일컫는 주교님입니다. 새삼 주님과 깊은 상호내주의 일치의 사랑이 그 삶의 원동력임을, 또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 관계가 답입니다. 이것이 우선이요 영성생활에서 본질적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상호내주의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아멘.


원하는 바를 다 이루어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달라고 떼를 씁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 효과적인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논리를 펼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의 일치의 마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하기 때문에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이가 늘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신앙의 삶을 통해 더 큰 생명력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참 포도나무의 비유붙어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동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특히 머물다라는 단어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정주를 서원하고 살아가는 우리 베네딕도 회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적으로 붙어있음을 뜻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그 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음이듯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머물다라는 말은 생사를 담보로 맺어지는 유대의 끈을 말합니다. 곧 뗄래야 뗄 수 없는 생명으로 유착된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그분 말씀의 권능이 우리 안에서 열매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에 속해 있을 뿐 결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는 없듯,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처럼,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자신을 내어주는 상호 친교상호교제입니다. 나아가 상호 교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삼위 하느님의 내주와 공유인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한 영이 됩니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오로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우리 안에 당신이 머무르신다는 이 놀라운 사랑의 신비 앞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신비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이 머무시는 현존의 자리요, 그분이 사랑의 열매를 이루시는 활동의 공간이요, 장소인 것입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우리 안에 정주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감사와 감격인가!

오늘 우리는 붙어있되, 참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가?

머물되 상호친교와 교제를 나누고 있는가?

열매를 맺되, 나의열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참으로, 지금 여기 공동체 안에 머물러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행복입니다. 이미 차고 넘치는 자비요 은총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단지 공동체에 정주하는 회원으로 지탱하는 것을 넘어, 사랑의 실현인 열매를 맺어야할 일입니다. 아멘.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조욱현신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것 그리고 당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결합된 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린 이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분께 결합된 이들은 가지이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우리는 삶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경작하시어 우리 마음에서 사악한 씨앗을 없애고,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가지들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가지들은 모두 잘려 나가고 만다.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포도나무도 세상 곳곳으로 심겨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그래서 버려지고 말았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라고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모사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 가지는 잘릴 것이고, 농부는 잘린 가지들을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깨끗이 손질하시어라는 말씀을 박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박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 가지가 어머니인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되어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지는 자신의 생명의 수단이 되는 것을 나무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지가 잘려 나가도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움트며, 잘려나간 가지는 뿌리와 떨어지기 때문에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 가지들이 포도나무와 본질이 같고, 거기에서 생겨나듯, 주님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지닌 우리도 그분의 충만함을 받으며 그것을 부활과 구원의 뿌리로 지닌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육체인 포도나무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행을 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에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아버지는 경작을 하시는 분이며 동시에 심판관이시다. 그분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보시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처럼 그들을 잘라 불에 던져 버리시고,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신께서 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더욱 많은 열매를 맺도록 보살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7절 참조)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나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영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고 하신 것이다. 그런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우리 주님 덕분에 우리는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쓰여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 1)

-한상우신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언지를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시간입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서로를 돌보는  
진정한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삶의 주인은
참된 사랑을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이와같이
생명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농부의
마음을 만납니다.

아버지의 
깊은 기도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참포도나무를
직접 우리가운데
심어셨습니다.

열매는 참된
사랑의 실천입니다.

참포나무처럼
참된 실천과 함께
살고자 하십니다.

실천하시는
참포도나무와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우리는
늘 하나입니다.

생명은 하느님과 함께
열매는 사랑과 함께

생명은 생명의
첫주인이신 하느님을
드디어 만나는 참된
머무름입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안다는 것이며

빛나는 열매처럼
하느님을 드러내는
겸손의 여정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우리의
참된 길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4월 27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