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8년 5월 3일 목요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Margaret K 2018. 5. 2. 18:31

2018 5 3 목요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작은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는 야고보는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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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요한 14,6-14)

 

"Have I been with you for so long a time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Phili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가 전한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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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많이 변했습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마다 어느 정도는 변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변화되려고 결심한 것 자체만도 큰 변화가 아닙니까? 신앙인은 변화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많은 것을 버리고 잃은 대신 새로운 것을 많이 얻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말고 진정한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나의 시각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내 가족을, 이웃을, 그리고 산과 들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무엇보다도 이 세상 모든 사물이 귀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마저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고귀함을 늘 생각하고 이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가족을 비롯한 내 주변 사람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힘을 길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나 자신부터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숨결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되려면 어떤 결심이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초등학교 시절, 저희 학년은 성탄 예술제 때에 연극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12월 한 달 내내 연극 연습으로 바쁘게 지냈지요. 그때 제가 맡았던 배역은 대사가 하나도 없는 목동 3이었습니다. 솔직히 성당에 열심히 다녔던 저로써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역은 못하더라도 요셉이나 동방박사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었거든요.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저의 재능을 알아보셨는지 대사 하나 없는 배역을 주셨습니다.

드디어 12월 24일 저녁 성탄 예술제의 막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저희 학년의 연극 차례가 왔지요. 연습한대로 모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셉 역할을 하는 친구가 대사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동방박사를 맞이하면서 말을 해야 하는데 어쩔 줄 모르면서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지요. 바로 그 순간, 아기 예수님 역할을 맞고 있는 친구가 벌떡 일어나서 요셉의 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응애~ 응애~”라고 아기 울음소리만 내야하는 아이가 갑자기 요셉의 대사를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고,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은 고래를 푹 숙이고 어떻게 할지를 몰라 합니다. 연극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즉,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고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인공 한 명 만으로는 연극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습니다. 많은 조연들이 있어야 하고, 그 배우들을 도와주는 보이지 않는 스텝들이 있어야만 훌륭한 연극이 나올 수가 있지요. 이렇게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의 역할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을 통해야지만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고,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주인공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고 하면서 마치 종에게 말하듯이 주인공이신 주님께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인공이십니다. 이 주인공이신 주님께 굳은 믿음을 둘 때, 우리의 삶은 가장 훌륭한 삶의 모습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알 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드니 디드로).



성모성월을 맞이하면서...

어렸을 때 저의 장난감 비슷한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묵주입니다. 어머니께서 워낙 묵주기도를 많이 하셔서 집 곳곳에 묵주가 놓여 있었는데, 이 묵주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다다다다’ 소리를 내면서 헬리콥터 운전하는 놀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모습을 보신 어머니께서는 깜짝 놀라면서 혼을 내셨지만, 저는 이렇게 하나의 놀이로 묵주를 알게 되었고 또 가깝게 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 역시 묵주는 제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이것도 조기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신학생 때 걸어 다니며 묵주기도를 하다 보니 지금도 산책하면서 또는 운전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봉헌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죄송한 마음입니다. 진득하게 성당에 앉아서 온 정성을 쏟아 부어 바쳐도 모자랄 판에 산책을 하면서 또는 운전하는 시간에 봉헌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습관이 정말로 무섭다고, 성당에 앉아서 조용히 묵주기도를 바치면 자주 하품도 나고 또 분심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더욱 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곤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모님의 특별한 전구가 효과 만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어려움이 쉽게 해결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기도를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성모성월입니다. 성모님께 중재를 청하는 시간, 그래서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는 5월 되시길 바랍니다.  

먹었으면 화장실 가는 것은 당연하다

-전삼용신부-


멕시코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54)는 멕시코의 한촌 코요아칸에서 태어났습니다.


젖 먹던 어린 시절, 동생 크리스티나를 돌보느라 유모에게 맡겨져 자라난 프리다는

6살이 되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려 9개월 동안 방에만 갇힌 채로 생활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병과 외로움은 그녀의 자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평생 오른쪽 다리를 혐오해, 말라비틀어진 이 다리를 감추기 위해 긴 치마를 즐겨 입었으며,

‘외로움’은 그의 삶의 정향에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1925년(18세) 9월 17일, 프리다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대형사고를 맞게 됩니다.

버스기사의 실수로 발생한 순간적인 이 사고로 손잡이들이 달린 쇠파이프로

그녀의 몸은 한복판을 관통당합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골절, 세 군데의 골반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대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습니다.


이사고로 프리다는 오랜 동안 석고로 만든 전신 깁스 틀 속에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프리다는 이처럼 고통이 전신을 덮고 있을 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몰핀으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을 프리다는 그림 작업으로 이겨냈습니다.


이시절의 고통과 행복을,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했다’고 훗날 술회합니다.


프리다는 21세 되던 해에 운명적 사랑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만납니다.

천재 벽화화가이자 열렬한 사회주의자며 호색한인 디에고의 세 번째 부인이 됩니다.


평생에 걸쳐 여러 번의 헤어짐과 재결합을 계속 한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자리매김을 간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 임신을 하였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모두 임신중절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디에고는 프리다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이전의 그 어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고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잘라내고, 그를 떠나기로 작심하여 별거에 들어갑니다.


프리다는 1950년과 51년 사이에 오른쪽 발이 썩기 시작하여 무릎 아래까지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영국에서 골수 이식수술을 받다가 세균감염으로 1950년 3월부터 11월까지 무

려 여섯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시절 옛 남편 디에고는 프리다의 곁에 머물면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건 다 해주려고 했습니다.


폐렴에도 공산주의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비를 맞고 1954년 7월 13일 사망했는데,

마침 그녀가 전 날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세상을 떠나기 전 날은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일로부터 25주년 기념일을 17일 앞둔 날이었습니다.

프리다는 17일 뒤에 다가올 결혼 25주년 기념 반지를 디에고에게 미리 건넸습니다.


왜 반지를 미리 주는가를 디에고가 묻자

‘머지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 라고 말했습니다.


프리다에게 있어 그림은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딛고 일어나

자기 자신으로 남는 유일한 길이자 존재의 긴박한 이유였습니다.


그녀는 자신 안에 쌓이는 풀 수 없는 질문과 절망, 외로움과 배신 등을

끊임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모든 것들을 소화시켜냈고

쏟아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영혼의 음식입니다.

음식은 소화가 되어서 대소변으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만약 소화가 안 되고 변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온 몸에 독이 퍼져 부어오르고

결국엔 사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용서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습니다.

상처 받은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나에게 닥쳐온 이해할 수 없는 불행으로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자신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소화되지 않고 배변되지 않아 내 안에서 독이 되어

온 몸으로 퍼져 나를 죽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습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아버지께서 아드님 안에 사시고

아드님이 아버지께 순종하여 사시기에 결국 아드님을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는

삼위일체 신비를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질문하는 것이 어리석고 무엄하게 보일까봐 부끄러워

마음속에만 꼭꼭 숨겨놓고 있었다면 역시 그것도 내 안에서 소화되지 않고 빠져나가지 못하는

하나의 장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쌓이는 부끄러움들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내보낼 수 있을 때

속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먹었으면 반드시 화장실에 가야합니다.

변을 보는 것이 창피하다면 그 때부터 몸에 독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음식 쓰레기를 밖으로 배출하십시오.


반드시 내 영혼 안에 쌓이는 오물을 버리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변을 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끄러운 질문이라도 참기 힘들면 해 버리고

부끄러운 상처도 다른 사람들도 다 가진 것처럼 털어놓으십시오.


프리다의 경우처럼 어떤 때는 내가 쏟아낸 부끄러운 것들이

경이로운 예술작품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필립보의 질문처럼 중요한 대답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언제부터인지 걷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에는 하루에 걷는 걸음의 수가 자동으로 기록되는 웹이 있습니다. 하루에 평균 이만 걸음은 걷고 있습니다. 거리는 대략 14킬로 정도 됩니다. 고등학교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체중의 변화가 없는 것도, 아직까지는 큰 이상이 없는 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매일 규칙적으로 걷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명동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걸을 수 있는 곳이 참 많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걸을 수 있고, 경복궁까지 걸어 갈 수 있고, 남산을 한 바퀴 돌 수 있고, 혜화동 신학교도 걸어 갈 수 있고, 장충동 분도 피정의 집도 걸어 갈 수 있습니다.

 

걷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영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하기도 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걸으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기도 합니다. 또 걸으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 생긴 가게를 보기도 하고, 지하도에 전시된 그림도 보기도 하고, 하늘의 구름도 보기도 하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걸었고 약속의 땅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걷다가 주님을 만나서 성경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가던 베드로 사도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바쁜 생활이지만 시간을 내서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나이를 먹으면 노화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곳이 가장 먼저 노화가 될 가요? 눈이 가장 먼저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감을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컴퓨터 모니터를 보기 때문에 눈이 더욱 피로해 진다고 합니다. 안보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본다는 뜻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각막을 기증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 중에 눈을 많이 감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음은 치아가 노화된다고 합니다. 물론 많이 씹기 때문입니다. 음식만 씹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험담을 하고, 뒤에서 욕을 하면서 우리들의 입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험담과, 시기와 질투의 말들은 나의 이를 늙게 만드는 것이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귀라고 합니다. 귀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싱싱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의식이 없어도 귀는 열려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숨이 넘어갔어도 병자성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자가 된 젊은이가 자신이 부자가 된 비결을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지갑을 열어 돈을 쓸 때, 늘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돈을 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돈 들도 기분이 좋아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돈을 쓸 때, 아까워하면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무금을 낼 때도, 헌금을 할 때도, 누군가를 도울 때도 아까워하면서 돈을 쓰면 돈들도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돈을 쓸 때도 감사하면서 기쁘게 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돈들도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돌아 올 테니까요.

 

현실을 바라보며,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실을 준비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현실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성공에로 이끌어 준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하느님 오른 편에 계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도들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십자가의 영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싶습니까?"

-파스카의 삶, 하나뿐!-

-이수철신부-


-“암사슴이 시냇물을/그리워하듯

 하느님/제 영혼이 당신을/이토록 그리워하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42,2-3).


시편 성무일도시 자주 대하는 시편 구절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사람 누구나 이런 영원한 분,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습니다. 하여 토마스 머튼은 사람은 마음 깊이에서는 모두가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이라 말했습니다.


실제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싶은 갈망입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싶어하는 무수한 고백의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바로 우리 모두의 성소입니다. 바로 이런 갈망이 오늘 복음의 필립보를 통해 고백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필립보의 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마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같습니다. ‘필립보’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넣어보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는데도 예수님을, 아버지를 모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를 말하는데 예수님은 바로 아버지와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에서 예수님이 누구이며 하느님이 누구인지 잘 드러납니다. 토마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는 날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뵌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 하지 않고 꼭 아버지라 부릅니다. 과연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하느님을 친근감있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는지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이 아버지와 일치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뵙는 것이 아버지를 뵙는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예수님과 일치의 친교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유일무이한 최고의 구원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관계의 깊이와 함께 가는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수 있겠습니까? 바로 오늘 독서가 답을 줍니다. 바로 파스카의 복음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을 뵈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해 복음과 구원, 그리고 파스카 삶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말씀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복음 내용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구원의 복음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한결같이 믿고 사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파스카의 삶이 바로 영원한 삶의 구원입니다. 하여 깊어가는 바로 파스카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뵙게 되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뵙게 됩니다. 


파스카의 삶이 깊어가면서 점차 또렷해 지는 아드님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만일 복음의 필립보 사도가 진정 파스카의 삶을 살았다면 이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 달라니 예수님도 참 어처구니 없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싶습니까? 답은 파스카의 삶, 하나뿐입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여 주님과 함께 끊임없이 죽고 부활하는 파스카의 삶에 충실하고 항구하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삶이 깊어갈수록 점차 또렷해는 예수님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예수님의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을 뵈옴으로 영육의 위로와 치유가 뒤따르고, 영육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비로소 해결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신비체험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신비가로 변모시켜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반영억신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 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 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읽을 수 있는 관계형성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비록 어둔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이목이 집중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 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하며 불만을 토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겼으나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13). 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그러나 이 말씀을 듣자, 필립보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곧 예수님을 아는 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아는 것이 되고, 아버지를 뵌 것이 되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립보는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요한14,8) 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청은 또한 우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진정, 우리도 그분 뵙기를 열망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이 말씀은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줍니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필립보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만약 우리도 필립보처럼,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말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는 필립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아버지를 알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려주지 않거나 보여주시지 않으셔서 못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는 이미 알려주고 보여주셨는데도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을 때, 요한이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호라오”)입니다.

이는 보고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깨달아 알아보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믿음으로보는 것이 깨달아 아는 것이요, ‘본다는 것안다는 것믿는다는 것의 통합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뵙는 데는 믿음으로 깨달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 보고 깨달아 알게 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보는 것을 믿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는 것, 그것을 믿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라야 참된 앎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 이라 말합니다.

이를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을 보는 이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믿음이 그분을 뵙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과 깨달아 아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해줍니다. 결국, 믿으면,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뵙고도 아직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저에게서 결코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해주십시오.

저에게서 결코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사랑을 믿게 히 주십시오.

저에게서 결코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믿게 해주십시오.

오늘 그 믿음으로 아버지를 뵙게 하소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시오니,

우리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뵙고 아버지를 뵙게 하소서. 아멘.


 주님!

당신은 저와 함께 계셨지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환히 아시지만

저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성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다(요한 1,43-44).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하고 청한 분이다. 성 야고보도 역시 열 두 사도 중의 한 분이며 알패오의 아들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1고린 15,7),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신 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부활4주간 토요일의 복음이 다시 읽혀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고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하고 있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 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키 작은 꽃도 아름답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두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야고보란 이름이 그만큼 흔한 이름이었던가 봅니다. 한분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이고, 다른 한분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입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는 열 두 제자들 가운데, 넘버원 베드로 사도, 넘버투 요한 사도에 이어, 넘버쓰리 사도였습니다.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간부급 제자, 핵심제자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올라가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입니다. 넘버쓰리 야고보 사도(대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소 야고보’, 혹은 ‘작은 야고보’라고도 불립니다. 

 

넘버쓰리 야고보 사도는 그나마 성경 안에서 그분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의 형’,‘주님의 형제’란 호칭이 그에게 붙여졌습니다. 핵심제자단의 일원으로 예수님 지근거리에서 활동했던 자취들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알패오의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 복음은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소개할 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임을 밝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나마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딱 한 번 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야고보에 이어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 역시 둘 중 대소(大小) 야고보 중 누구를 칭하는지 명료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해 성경이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으며, 베일에 가려져 있는 소야고보 사도,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묵상을 해봅니다. 인류 역사 안에 이름이 굵은 글씨로 새겨진다는 것, 자신의 행적과 업적이 만방에 알려진다는 것,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는 없겠지요. 모든 사람이 다들 무대 전면에 나서서 마이크를 쥘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멋진 한 바탕 무대를 꾸미기 위해서 누군가는 뒤에서 묵묵히 땀흘리며 희생해야 합니다. 행사 며칠 전부터 무대를 설치하기 위해 밤늦도록 망치질을 하는 사람, 행사에 필요한 제반 설비들을 끙끙대며 나르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격상 아마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다른 사도들이 누가 높은가 길에서 따지고 다툴 때, 다른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더 드러나기 위해 기를 쓸 때, 무대 뒤에서 그저 아무 말없이, 주님의 일을 하던 사람, 과묵한 사람, 진중한 사람이 소야고보 사도였을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나서서, 용감하게 스승 예수님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회개시키는 일들 앞에 마치 내 일처럼 기뻐했던 사람, 동료들이 복음선포를 잘 해낼 수 있도록 뒤에서 말없이 기도하고 지지하고 헌신하던 사람, 그가 소야고보 사도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있는데, 다들 키큰 해바라기처럼 큰 꽃들만 있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다들 화려한 장미꽃으로만 존재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때로 수수한 싸리꽃도 필요하고, 때로 키작은 난장이 패랭이꽃, 잘 보이지도 않는 ‘개미눈물꽃^^’도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이런 사람을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거침없으면서도 재미있는 강론으로 신자들의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명 강론가 신부님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루 온 종일 강도 높은 노동으로 퉁퉁 부은 신자들의 발을 오래도록 정성껏 씻겨줄 키작고 겸손한 신부님들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세상 그 어디도 하소연 할 곳 없는 상처투성이뿐인 신자들의 마음을 고백소 안에서 따뜻이 어루만져줄 자상하신 신부님들도 꼭 필요합니다.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충실한 침묵의 사도가 우리에게 더 많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박수갈채보다는 주님께서 주실 상급과 칭찬만을 생각하는 익명의 사도, 익명의 의인, 익명의 천사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
-류지인신부-


뛰어놀던 두 아이가 정글짐으로 기어오르더니 아빠를 찾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높은 곳에 올라서서는 겁이 났던지 그만 내려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팔을 벌리며 다가선 아빠 품에 한 아이가 폴짝 뛰어내려 안깁니다. 


재미가 있었는지 땅에 내린 아이는 금세 또 올라가 아빠에게 안기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아이는 울기만 할 뿐 뛰어내릴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괜찮다며 잡아준다고 달래보아도 손에 꼭 쥔 철봉을 놓지 못합니다.


 한 아이에게는 ‘우리 아빠’였지만 다른 아이에게는 ‘내 친구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아빠라는 포근함이 다른 아이에게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이의 품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필립보의 청원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는 같은 분이심을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직접 대면해본 일이 없기에 뜬구름처럼 

하느님 모습을 그리고 있을 제자들에게 

성부 하느님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분으로 제시해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체험해온 모든 것이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친근하게 스승님을 부르듯 아버지 하느님을 찾도록 제자들을 직접 연결해주고 계시는 분,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과 잘 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하고 부르면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는 진짜 ‘우리 아빠’가 되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 6)

-한상우신부-

길은 길을
갈망하고
진리는 진리로
이어지고
생명은 생명으로
다시 뜨거워집니다.

비천한 한 사람이
길과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을 드디어
만나게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진리는
바로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진리가 진리인 것은
하느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에게서
소중한 우리자신을
하느님안에서
찾게됩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없이 하시는
생명이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희망으로 말씀을
받아 삼킵니다.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묻고 배우는 구원의
시간되십시오.

구원이란
성 필립보처럼
성 야고보처럼
이 모든 것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길을
진리를
생명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5월 3일 화요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