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4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요한 15,12-17)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도들과 원로들은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사랑은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대하시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관심 깊게 대하셨지요, 그러니 그들이 처한 모든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관심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합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관심을 가지듯이 너희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
관심이란 돌보는 행위입니다. 관심은 감동을 가져오지요. 상대방에게 서로에게 생명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복음 말씀은 “너희도 서로에게 감동을 주기 바란다.”라는 뜻도 됩니다.
이처럼 사랑은 감동을 낳습니다. 감동은 진정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감동을 주어야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감동을 주는 사랑을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기만 합니다. 주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할 때가 많지요. 따라서 우리는 오늘 상대방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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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는 개를 보고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엽다면서 손을 내밀면서 친해지려고 노력까지 합니다. 어렸을 때의 두려움이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요? 아마도 개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몇 년 째 개를 키우다보니 저를 힘들게 했던 개에 대한 두려움도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두려움보다 좋아하는 감정으로 변화시켰고 그래서 개들과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극한의 상황에서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자녀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을 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인데도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구하는 영웅적인 사랑도 봅니다. 그밖에도 우리는 자주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랑을 듣고 또 실제로 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사랑을 우리들에게 직접 보여주시지요. 완전한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주님 역시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상의 죽음을 기꺼이 선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사랑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간직하고 또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이 세상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두려움 속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명령하시고 또 직접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 밖에 없습니다. 이 사랑을 가득한 세상이 될 때, 세상은 결코 어렵고 힘든 곳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넘치는 곳, 함께 사랑하기에 행복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95세 이상의 어르신들에게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떤 대답을 했을까요? 많은 대답들을 정리하면 다음의 세 가지였다고 합니다.
첫째, 생각을 더 많이 할 것이다. 즐거운 순간, 해돋이, 노을, 행복한 순간을 더 많이 즐길 것이다.
둘째, 위험 부담을 더 많이 감수하고 모험심을 더 발휘할 것이다. 도전을 피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셋째,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살아갈 유산을 남길 것이다.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성령과 우리
-전삼용신부-
1990년대 후반에 TV 드라마를 각색한
‘세인트’(The Saint)라는 영화가 크게 히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미남 배우가 등장해 산업스파이이자 정보 도둑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특전대원,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기자, 신비로운 시인,
여자처럼 나긋나긋한 사무원 등 여러 인물로 바뀌는 ‘변장의 귀재’로 나왔습니다.
그는 산업스파이를 위해 끊임없이 변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성인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그의 변장술은 너무나 정교하고 완벽해 그를 쫓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친한 사람들까지도 꼼짝없이 속고 말았습니다.
어떤 장면에선가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람의 옆 자리에 앉아
그 추적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까지 던집니다.
그래도 추적자는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개신교에서는 물론 마르틴 루터가 개혁의 선봉장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음으로써 그 깨달음에 견딜 수 없어 바티칸과 맞서
참 그리스도교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루터가 제시한 95개 반박문에 대답할 할 수 없었던
무지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한 사람이 전 가톨릭교회와 맞서 승리한 사람처럼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이들은 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실수는 단 한 사람의 생각이
온 교회의 생각을 앞설 수 있다고 믿는 오류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주에서는 어떤 사제들이 미사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은 교회의 생각이 어리석고 몇 명의 성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성령의 교회를 넘어설 수 없음은
성경 자체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초대 교회 때 이미 교회 내부에 분열을 조장하는 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24절)
교회 내에서 조심해야 하는 적은 ‘순종’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즉, “지시를 받지도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전한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성령과 우리’의 결합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명령하시어 교회가 움직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시는 성령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스를 파견합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이들을 따라야 안전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교황대사로서 파견되어 오신 분이 계십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파견되지 않은 이들은 분열을 시키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성인처럼 보일지라도 교회의 지시가 없이 행동하는 이들을 추종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생각이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듯이 교회의 결정도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과 우리(교회)’는 공식적으로 가르치고 공식적으로 파견합니다.
가르침에 오류가 없는 것처럼 그 파견에도 오류가 없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라고 반복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교회)’에게 불순종할 때 ‘성령’께 불순종하고 있음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글입니다.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어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이 되는 집을 헐게 되었습니다. 인부들은 지붕을 벗기려다가 꼬리 쪽에 못이 박힌 채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집주인을 불러 그 못을 언제 박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집을 짓던 3년 전에 박은 것이 분명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도마뱀이 3년 동안이나 꼬리에 못이 박힌 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도마뱀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마뱀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못에 박힌 친구를 위해 먹이를 가져다주기를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학생들 면담이 있었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1학년 학생들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았던 학생들이 함께 모여서 생활하기 때문에 힘든 점들이 더러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의 허물과 잘못이 자꾸만 눈에 보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비판을 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말을 합니다.
동료 학생들의 허물이 자꾸만 보인다는 학생들에게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있어도 농부는 가라지를 뽑아 내지 않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그제야 농부는 밀밭의 가라지를 뽑아 버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지적하고 비판하기 전에 나의 영적인 능력을 더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동료 학생들의 비판과 지적이 두렵다는 학생들에게는 ‘하늘의 새와 들의 꽃을 먹이고 입히시는 하느님’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들의 꽃들도 아름답게 입혀 주시고, 하늘의 새들도 먹이시는 분이시니 아무런 걱정과 두려움 없이 기쁘게 지내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많은 능력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도마뱀입니다. 그러나 친구를 위한 마음은 우리 보다 훨씬 더 진한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예전에 예수님의 사랑이란 주제로 구역장, 반장 교육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셨고, 배반했던 제자들에게도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하는지 물었던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수난과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3년 동안 먹을 것을 날라다 준 도마뱀에게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것은 도둑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랑을 하라고 하셨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주셨으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병을 치유해 주셨고, 죽었던 소녀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도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느냐?” 이것은 자식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세상은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토마사도에게도 불신앙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야 믿습니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될 것입니다.’ 토마사도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렵지만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였던 바오로 사도에게도 깊은 믿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열정이 없었다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열정이 없었다면 가난했던 어부들과 함께 하느님나라 운동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열정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길에서 3번씩이나 넘어지는 고통을 감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열정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신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명동에서 노점상을 하는 분들도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나라를 전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열정과 정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공동체를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까?”
-예수님과의 우정-
-이수철신부-
오늘 강론 제목은 제가 생각해도 참 마음에 듭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까?-예수님과의 우정-”이 강론 제목입니다. ‘예수님의 친구’, ‘예수님과의 우정’ 말마디만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자신의 품위도 격상된 느낌입니다. 예수님 친구의 체면을 생각해서도 함부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친구답게 품위를 유지하며 살 것입니다. 하여 예수님 친구로부터 다음같은 고백을 듣는 다면 우리는 더할 나위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나 그대의 자랑이듯이, 그대 나의 자랑이어라.”
친구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합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의 친구라면 말할 수 없이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정말 친구인 예수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하며 신뢰와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습니다. 주님이자 형제이며 친구인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믿는 모두에게 차별없이 활짝 열려 있는 예수님과의 친구관계입니다.
보통 친구가 아닌 영원한 길벗, 영원한 길동무인 영원한 친구입니다. 세상 친구들 다 떠나도, 죽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말그대로 영원한 친구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영원한 친구 예수님과의 우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우정관계는 수도원의 로고 그림인 ‘하늘과 불암산’의 관계를 닮았습니다. 자주 나눈 제 자작시입니다.
-“하늘 있어/산이 좋고
산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 영원한 친구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산과 같습니다. 흔히 우리 삶을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순례여정이라 정의합니다. 과연 순례여정과 더불어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가는 지요. 삶의 유일한 의미도 주님과 우정관계 하나뿐입니다.
피정지도때 마다 경각심을 줄 때 자주 예로 드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일일일생, 내 인생 여정을 하루로 압축할 때 오전 또는 오후 몇시 지점에 와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일년사계로 내 인생을 압축할 때 어느 계절에 와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웃지만 잠시 지나면 자못 심각해지는 분위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 답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또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바로 상호 사랑의 기준입니다. 예수님 친히 이런 친구의 모범을 보여 주셨으니 친구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처음에 이어 마지막도 못박듯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형제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자 예수님과의 우정관계를 깊이하는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예수님 사랑의 진정성의 검증 잣대는 이웃 형제들에 대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종이 아닌 주님의 친구답게 사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길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뽑아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방적 짝사랑의 우정이 되지 않도록 이웃형제들 사랑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임으로 주님 사랑에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우리가 이런 사랑의 열매를 맺어 그 사랑의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을 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다 주신다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친구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다음 구절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원로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형제들간의 우정에 전제되는 바, 영원한 친구이신 예수님과의 우정관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친구인 예수님과의 우정이 전제되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깨끗한 형제적 사랑의 우정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들 상호간의 우정에 앞서 예수님과의 우정이 전제되어 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루살렘 사도들의 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하여 예수님의 은총하에 분별의 지혜를 잘 발휘할 수 있었음을 봅니다. 새삼 분별의 잣대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필수적인 사항들만 남기고 부수적인 것들은 다 떨어버리는, 짐을 덜어 가볍게 해주는 형제적 사랑의 분별의 지혜가 참 고맙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형제들간 서로 사랑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 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 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 ...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영근신부-
오늘도 우리는 여기 공동체에 모여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요?
우리가 꼭 함께 모여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대체 왜 모여 살아야 하나요?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는 “서로 사랑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 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먼저 함께 있어야 하니까요. 곁에 함께 있지 않고서 서로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 사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해야 서로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벗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왜, 벗을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대체 “벗”이 누구이기에, 그러실까? 나에게는 그러한 벗이 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벗이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15 참조),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친구란? 깊은 친교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친숙하고 깊은 관계로 사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계명 실천을 통해, 당신과의 신의를 몸으로 드러내면서 친구임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하신 것처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벗”인 우리 주님과 함께 즐거운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이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서로 사랑하라.
-조욱현신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이라고 하였다. 악마는 믿지만(야고 2,19 참조)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계명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1티모 1,5)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원칙을 말씀하셨다. 이 원칙에 따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서로를 위하여 죽어야 하겠는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주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로마 5,10)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라고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교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친구만이 친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되는 것도, 원수가 되는 것도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율법 때문에 종이 되었지만, 당신의 말씀으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것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종이 아니라 자녀로 만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ㄱ절) 이 말씀은 우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은총을 받도록 정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나아가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우리는 선하게 되도록 사악했던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 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것을 행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열매로 잘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에 지극히 바람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지명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는 열매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지키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류지인신부-
벗이신 하느님
“전능하시고, 사랑이시며,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 기도 중에 하느님을 부르는 많은 수식어 중에서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친구’라는 표현은 참으로 친밀하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친구란 어떠한 사람인지 먼저 생각해봅니다.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거스를 것도 감출 것도 없는 가볍지만 무거운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여 친구의 개념을 발전시키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거룩함, 그 사랑을 갖춘 친구가 우리 곁에 서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약을 중심으로 가르치시던 엄위하신 ‘구약의 하느님’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네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랜 친구처럼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목숨마저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그 진정성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율법학자의 권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내 것을 남김없이 보여줌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립니다. 마음을 움직여 사랑의 진수를 깨닫게 하고 동참을 이끌어내는 친화력의 승리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목숨마저 내려놓으라는 예수님의 엄중한 실천 명령이 온화한 부르심과 초대로 우리를 이끄는 까닭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 17)
-한상우신부-
당부가 아닌
명령은 다름아닌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의 삶으로 참된
사랑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죽어있는 사랑을
다시 살리는 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미움은
미움으로 이어집니다.
서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의
관계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사랑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진실된 사랑만이
거짓된 자아를 다시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인격을
드높여줍니다.
가장 소중한 명령을
서로 실천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
그래서
사랑은 우리의
목숨이고 우리의
주님이고 우리의
실천이고 우리를 향한
가장 준엄한 명령입니다.
끝까지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만이 우리
목숨을 살리는
영원한 생명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4월 29일 금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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