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한 15,9-17)
"As the Father loves me,
so I also love you.
Remain in my lo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며,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려 해도 그가 한 일이 떠올라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행실을 고치고, 더불어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을 풀어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용서하고 싶어도, 기회를 놓치고 그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나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나에게 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 위함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난 평창 동계 올림픽 때에 외국인들이 인터넷 속도에 깜짝 놀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에 길들여 있어서 일까요? 조금만 인터넷 속도가 느리면 짜증과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느리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빠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할 것 같지만, 그렇게 많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 없는 것까지 보게 되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주변의 작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를 타고 가면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천천히 걸어야 볼 수 있는 경관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느림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한 기쁨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담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빠른 것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빠르게 얻을 수 있을까요? 한 눈에 반한 사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랑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천천히 다가가는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화를 내고, 그 사람의 마음이 좁다면서 상대방에 대한 섣부른 판단까지 합니다. 사랑은 절대로 빠르게 얻을 수 없습니다.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의 일방적인 집착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부터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겠다.’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의 노력을 통해서만이 그분의 큰 사랑 안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그 노력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을 하는 사람만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요한 사도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참조).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은 할 만큼 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사랑하지 않는 이유만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 사도도 오늘 제1독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사도 10,34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하지 않는 모습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빠르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히 사랑은 아주 천천히 다가가야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기쁜 소식과 함께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끔찍한 죽음까지도 선택하면서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배반한 제자들을 혼내기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사랑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요한 15,11 참조).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운 장미가 자신을 이렇게 자랑합니다.
“내 가시는 아주 뾰족하고 날카롭지. 그래서 초식동물들이 내 잎을 갉아 먹을 염려가 없어. 나의 이 촘촘하고 날카로운 가시들을 봐라. 아마 새들도 내 가지에는 앉지 못할 걸?”
그러면서 주변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를 보면서 말합니다.
“너는 덩치는 그렇게 크면서도 자기 몸을 지킬 무기가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하니? 딱따구리는 네 몸에 구멍을 파고 있고, 다른 동물들이 잎을 마구 뽑고 가지를 함부로 부러뜨려도 가만히 참고만 있어야 하잖아.”
어느 날 아이들의 숲속으로 소풍을 왔습니다. 그 중에 한 소녀가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었지요. 이 소녀는 활짝 핀 장미를 보고 다가서다가 그만 장미의 가시에 찔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떡갈나무를 끌어안으면서 말합니다.
“너는 장미처럼 예쁜 꽃은 없지만, 가시가 없어서 이렇게 내가 껴안아 줄 수 있구나.”
화려하지만 가시와 같은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편한 사람은 쉽게 다가서고 그래서 편하게 안아주기도 하지요.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일까요? 화려하지만 외로운 삶? 아니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함께 하는 삶일까요?

아름다운 구속
-전삼용신부-
제가 본당에 있을 때 한 비신자 부모님이 고등학생인 아들 둘을 데리고 상담을 하자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워낙 속을 썩여서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고 2짜리 형이었는데, 그 아이는 학교에 안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로는 학교 간다고 하고는 밖에서 놀다 들어오고 또 직접 학교까지 데려다 주어도
2교시를 못 버티고 나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공부를 안 해도 좋으니 학교 마치는 시간까지만 붙어있어 달라고 애원해도
머리는 끄덕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학교 안 가고 PC방에서 놀다가 주인의 돈까지 훔치려 하여서
부모님이 불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 부모님을 화나게 하는 것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아무리 물어보아도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랬다는 것입니다.
보고 있던 저도 답답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자퇴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면 또 자퇴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아이가 사귀는 여자 친구도 자퇴한 아이인데
그 아이에게 자퇴만은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어떤 누구의 말은 안 들어도 여자 친구의 말은 듣고 따르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모든지 할 수 있어.’라고 하는 노래가사처럼
사랑을 얻기 위해서 그 친구의 말은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안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도 알게 됩니다.
내가 의사인지 알면 의사의 일을 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와 떨어질 때 불안해 우는 이유는 어머니가 사라지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앞에서 자신이 자녀임을 알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젖을 빨 수 있고 웃어줄 수 있고 말썽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구속되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불안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들까지 하게 됩니다.
위의 친구들은 부모님이 있어도 또 학생으로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들도 답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춘기란 더 이상 사람의 애정으로는
자신이 충족될 수 없음을 아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부모님의 애정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마치 아이 때는 우리가 조국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태어났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도
어른이 되어서는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처럼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진정 의미 있는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다행한 일인지는 몰라도 그 아이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 줄 대상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 여자아이의 애인으로서 무언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그 여자의 말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래야 지금 죽더라도 적어도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 받던 ‘무언가’로
죽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엔가 어떤 의미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잘 나타낸 시가 김춘수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누군가가 없다면
꽃은 그저 의미 없는 식물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어진다면, 누군가의 관심을 받게 된다면
그 꽃은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바로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참으로 자신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안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마치 자신이 꽃인지 모르는 식물에게 “너는 꽃이야!”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너는 마리아야!”라고 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하던 아담의 직무였습니다.
아담의 역할은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 존재이유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이름을 불러주시며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분을 만나야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자캐오는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즉,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당연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명령하시는 것을 구속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 아름다운 구속이 참 자유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쾌락과 돈과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캐오도 돈의 노예로 살았지만 이제 돈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무엇’으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Nothing)은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 것에 집착하지만, 이제 무엇(Something)이 되어버렸다면
더 이상 세상 것으로 자신을 들어 높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아직도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친구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자유롭게 가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자유이고 해방이고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그분께 구속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조재형신부-
우리는 부활시기의 정점에 와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6주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할 제1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돌아가신 그분의 몸이라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자매님이 서울에서 적성성당으로 미사참례를 하러 오셨습니다. 새벽에 집을 나와서 버스를 3번 갈아타고 오셨습니다. 저의 강론을 듣고 싶어 하셨지만, 자매님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갈망은 의무감보다 강합니다. 갈망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들을 구원하고자하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2주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습니다. 곧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만남의 중심에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치유의 기적을 보여 주실 때 ‘믿음’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제3주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저는 서품성구로 시편 126장 5절의 말씀을 정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 사제생활 27년을 하면서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려고 합니다. 중용 23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일이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성직자, 수도자들은 착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합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착한목자는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가 활력을 잃어간다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착한목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착한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착한목자인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도의 모범, 신앙의 모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포도나무와 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야만 성장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삶의 장소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없으면 잘려나간 가지처럼 말라버리고,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살기 편한 집은 있지만 따뜻한 정이 흐르는 가정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편리한 시설과 아름다운 성당 건물은 있지만 기도와 사랑이 넘치는 성당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 하느님과의 친교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과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질서와 자유의 조화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부활 제6주일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열정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어쩌면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잠시 인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의 여정旅程
-서로 사랑하여라-
-이수철신부-
오늘 부활 제6주일이자 5월 첫 주일은 생명주일입니다.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세상에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오늘 한국교회는 생명주일을 지냅니다.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사랑과 직결되는 생명입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과 더불어 생명충만한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유롭고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와 의무,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사랑의 여정-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말씀도 온통 사랑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주일에도 잘 어울리는 주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문제는 사랑결핍에서 시작됩니다. 만병의 근원은 사랑결핍이요 만병통치약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 없어 허무한 삶이요, 사랑 있어 충만한 삶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았음이 바로 사랑의 사람의 본질임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엔 영원한 초보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평생 사랑을 공부해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 참 내가 되어가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인간 성장과 성숙도 결국은 사랑의 성장, 사랑의 성숙을 뜻합니다.
올해로 요셉수도원에 정주한지 만30년이 됩니다. 30년전이 지나니 요즘 수도원은 완전히 신록의 숲이 되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내적성장을 상징하는 숲 같습니다.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영적 사랑의 성장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과연 내적으로 이처럼 성장해가는 우리의 사랑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오늘 저는 ‘사랑의 여정’ 인생에서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는 가르침을 네 측면에 걸쳐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주님 사랑안에 머무르십시오.
주님은 ‘내 안에 머물러라.’ 말씀하시고 이어 더 분명히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 말씀하십니다. 세상 안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머무를중 모르는 것이 병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영육을 충전하는 관상시간이 정말 필요한 세상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시편말씀도 생각납니다.
정주의 핵심 역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자신을 찾는 머무름의 시간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충만한 기쁨입니다. 삶의 허무를 사랑의 충만으로 바꿔주는 마무름의 관상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름의 관상과 활동은 우리 삶의 리듬입니다. 예수님도 낮의 활동후에는 반드시 밤에는 외딴곳에서 머무름의 관상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역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영육을 충전시키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으니 관상가와 신비가는 우리 모두의 성소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상에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다음 4.29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부활 삼종 기도 중 봉헌한 교황님의 ‘한반도 평화를 비는기도’가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주님/남북정상회담이 긍정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핵무기가 없는 한반도를 위해/진정한 대화의 길에 나선 두 정상에게 용기를 주소서/한반도에 평화로운 미래와/남북간 돈독한 형제적 우애를 주시어/남북한이 계속 협력해/사랑하는 한국 국민과 전 세계를 위해/선의하는 열매가 맺게 하소서.”
둘째, 주님 사랑을 배우십시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을뿐 아니라 주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교를 나누면서 주님 사랑을 공부하는 시간이 머무름의 시간입니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란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도 보고 배웁니다, 바로 예수님도 아버지의 사랑을 평생 보고 배워 실천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끝이 없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집착함이 없는 사랑, 끊임없이 선사되는 무조건적 일방적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안에 태어나 사랑 안에 살다가 사랑안에 떠나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우리 인생입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깨달은 바처럼 차별함이 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을 다 받아 주십니다.” 고백하는 베드로입니다.
이어 하느님은 무상의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신록의 사랑 가득한 5월의 자연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책, 교과서 같습니다. 도대체 하느님 선물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감동과 감격이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하느님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자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바로 요한 사도가 예수님이 최고의 선물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나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공부가 하느님 사랑 공부입니다. 이래야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주님 사랑안에 머물러 사랑을 배웠으면 자연스럽게, 당연히 따라야 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관상의 머무름은 추상이 아니 구체적 사랑 실천의 결과임을 다음 주님 말씀에서 깨닫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관상과 활동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임을 봅니다. 관상의 열매가 사랑의 실천임과 동시에 사랑실천의 열매가 관상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참 쉬운 듯 하나 어렵고 중요한 것이 서로 사랑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나를 사랑하라고도, 아버지를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바라시는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분들이 원하시는 바 형제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서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개방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여 사랑도, 개방도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개방하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 두려움 때문에 개방하지 못하는 약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요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랑이 정말 하느님 다운 관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할 때 두려움의 벽은 활짝 열린 문이 됩니다. 두려움에 대한 답은 사랑뿐입니다.
넷째, 주님 친구답게 사십시오.
참 좋은 자랑스런 명칭이 주님의 친구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할 때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겠다 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친구 예수님과의 우정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순교성인들입니다. 과연 사랑의 여정과 더불어 친구 예수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가는지요.
주님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친구인 우리들입니다. 주종관계가 아니라 친구관계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들에게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줍니다. 그러니 예수님 친구와의 우정이 깊어져 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공부도 깊어질 수뿐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제자로 뽑아 주셨고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만 충족시키면 제자답게, 친구답게 살 수 있으니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애의 실천입니다.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가 친구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구인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도 기꺼이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친구답게 살고 싶습니까? 평생 예수님 친구와의 우정을 계속하고 싶습니까? 인생의 성패가 달린 영원한 친구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길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인생 허무와 죽음에 대한 유일한 답도 예수님과의 우정, 이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신자가,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 사랑은 규칙들이나 계명들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내적자세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모두는 내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여정중에 끊임없이 예수님 친구를 닮아 우리의 전존재가 사랑으로 변모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우 총명해지는 것도, 성공적이 되는 것도, 부유하게 되는 것도, 유명해지는 것도 아닌, 참으로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사랑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의 모두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친구 예수님의 간곡한 명령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서로 사랑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
-이영근신부-
부활 6주일입니다. 그리고 생명주일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계속해서 예수님의 마지막 담화, 곧 유언에 해당하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 당신과 그 제자들의 관계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는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 간에, 그리고 아들과 제자들 간의 사랑이, 제자들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을 선포하시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이는 놀라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다는 선포임과 동시에, 당신의 그 사랑의 원천이 아버지의 사랑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랑을 받아먹은 존재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거룩한 사랑에 머무름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됨에 동참하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뿐만 아니라,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미리 제시해 주십니다.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밝히시는 이유도 말씀해주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그러고 나서, 비로소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당신께서는 십자가에서 본보기로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3-14)
그런데,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곧 우리가 적이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닐까?
그래서 그레고리오 교종은 이렇게 해설합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때,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도 우리의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가 되는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한분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알게 된 까닭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또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친구가 됩니다. 그것은 당신과의 신의와 친교를 뜻하는 것으로, 당신께서 알려주신 아버지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우리는 그 신의를 몸으로 드러내면서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당신이 하신 것처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면서 친구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불러 뽑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5-16)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우리를 천사로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더 존귀한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친교와 우정을 나누는 하느님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친구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들어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시고, 친구로 선택하시고,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알려주셨으니, 우리는 친구로 초대받았음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분을 알려주신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 예수님의 친구일까? 또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일까?
예, 그렇습니다. 설혹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친구로 뽑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 “가장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분명, 예수님의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친구로서, 우리도 역시 바로 이 사랑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라’는 바로 이 “가장 큰 사랑”에 초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형제애를 통한 일치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하는 형제적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서의 가장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그 근거를 요한에 의한 서간에서 제시하고 있다.
제1독서: 사도 10,25-26.34-35.44-48: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데 있어서 어떤 차별을 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해 주신다(44-46절).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게선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34-35절).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비록 살인자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제2독서: 1요한 4,7-10: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으므로 사랑의 모상이다. 이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나게 된다(7절).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사랑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다. 이 사랑의 계명은 주님의 "명령"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지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생활을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신(8절)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15,9-17: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오늘의 복음은 지난 주일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결속과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당신의 깊은 뜻을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비록 떠나시지만 사랑으로 가지와 포도나무처럼 그들과 함께 계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란 우리가 그분의 기쁨이라는 것이고 그 기쁨이 충만해 진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가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기쁨은 은총이며, 그것이 또한 우리의 기쁨이기도 하다. 이 기쁨은 우리 신앙인들 모두가 언제나 간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있다. 그 기쁨을 갖기 위해서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 가질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이길 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이라고 하였다. 악마는 믿지만(야고 2,19 참조)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계명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1티모 1,5)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원칙을 말씀하셨다. 이 원칙에 따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서로를 위하여 죽어야 하겠는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주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로마 5,10)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라고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교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친구만이 친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되는 것도, 원수가 되는 것도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율법 때문에 종이 되었지만, 당신의 말씀으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것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종이 아니라 자녀로 만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ㄱ절) 이 말씀은 우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은총을 받도록 정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나아가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우리는 선하게 되도록 사악했던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 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것을 행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열매로 잘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에 지극히 바람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지명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는 열매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지키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김혜숙 선교사-
오늘 복음을 좀 더 깊이 만나려면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신 앞부분으로 거슬러 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별단계에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신명 6,5; 레위 19,18)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새καινός(kainos)”는 그리스어에서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의미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절대적 새로움, 바로 “~것처럼”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9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12절)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함께 가까이 가 볼까요?
“것처럼…”,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무게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그 근원을 말합니다. 내가 행하는 사랑이 나의 외적 행위에 의해 단순히 측량됨이 아니라 어느 근원에서 솟아나는 것인지를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9절)이라 먼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어떤 열매가 아니라 한 인격을 만나는 것으로 인해 분출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사랑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으로 주어졌고,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해 외적 행위로 시작되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랑(카리타스)이 원인이 되어 나의 자유와 의지로 재창조하는 것이기에 ‘완전히 새로움’입니다. 사랑은 나의 내면에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현존이 먼저이고 그분의 사랑이 나를 매료시키고 초대하는 큰 사건이지요. 내 사랑의 원천이 바로 여기이며 이곳에서 분출됩니다. 그래서 지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이름이요 인격이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옛 것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완전 새로움입니다.(1요한 2,7-8)
이 관계가 성립되려면, 나의 문을 열어 그 사랑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반복되게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들려줍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와 함께 머무는 행복입니다. 우리도 함께 머물러 봅시다.
“머물러라, 머무르는 것처럼, 머무를 것이다”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머물다μένω(menō)’는 특별한 관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머물 수 있는 관계는 바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인격 즉, 그분의 사랑에 머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나누는 사랑의 관계는 완벽한 이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함께 걷는 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론 자신의 욕망이나 세상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많이 흔들릴 때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럴 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사랑을 지니신 그분의 위대한 의지 앞에 나의 의지와 자유를 성장시키는 시간이 흔들림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에서 친구로 발전하는 희망의 신호입니다.
13-15절에서 “친구”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친구는 ‘영혼의 보호자’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표지입니다.(집회 6,14.16) 사랑의 계명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호하고 지키는 이가 친구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제자들은 토라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당시 문화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당신 스스로 제자를 선택하시고 더 나아가 친구라 부르십니다.
당신 친히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 곧 자신의 마음 속 비밀을 보여줄 수 있는 사이이자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영혼 속에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친구는 그 친구의 지혜에 참여함으로써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지혜 7,27)가 이루어집니다. 벗과 예언자로서 그분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이 친구는 이제 큰 명령을 받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17절) 불란서 어느 대학 논술시험에서 사랑이 명령형이 될 수 있는지 논하라는 적이 있다고 합니다. 과연 개인의 자유가 없는 사랑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명령형으로 말씀하셨을까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새로운 계명은 ‘성령의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곧 성령 자체로부터 선사된 나의 새로운 내면을 말합니다. ‘이미 내가 너희에게 주었으니, 이제 너희도 서로 주어라.’ 아니면 ‘내가 너에게 왔으니 나를 주어라’ 하면 더 이해하기가 좋을까요? 받은 것을 내어줄 때 기쁨은 차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11절) ‘사랑하라’가 명령형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방식은 상호 교환과 사랑하는 이의 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두 인격 간에 교환되는 이 사랑은 정의로우며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지속됩니다. 예수님과 성부의 관계에서 우리는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아들이 늘 아버지를 바라보았던 것은 그 사랑의 원천이 바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사랑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누는 사랑을 보는 것은 주님을 보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육화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연유는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에게 육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밖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왜 이토록 사랑을 주려고 하셨을까?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물려주려고 애씁니다. 어떤 이는 돈을, 어떤 이는 권력을, 어떤 이는 진리를, 어떤 이는 사랑을…. 하느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체였습니다.
파스칼은 하느님을 ‘철학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말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은 인간 마음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곧 나의 가장 깊은 내심에 현존하는 분, 그럼으로 인해 그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분을 이룬 것입니다. 신화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서강진 신부-
* 사랑 1
10년 전 본당신부로 있을 때 관면혼배를 하기 위해 한 커플이 찾아 왔습니다. 혼인면담이 나와 첫 대면이었던 총각, 딱 보아도 행복에 가득 차 들떠 있던 그 청년이 대뜸‘와이프가 될 이 아가씨 참 예쁘죠?’저는 얼떨결에‘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참 좋을 때다’라는 느낌과 흐뭇한 미소를 갖게 합니다. 그때 사랑은 전염되는구나! 저 역시 보기가 좋았으니 말입니다.
* 사랑 2
한 청년이 저에게 하소연하였습니다. 2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꿈에서라도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돌아가셨을 당시 자신이 너무 어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다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 청년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혹시 나이가 들면서 주위에서‘너 아버지 닮았다’는 이야기 들은 적 없습니까? 비록 20년 전 돌아가셨지만 이미 당신 안에 계세요. 당신의 외모, 말투, 생각, 버릇까지도 당신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잘 살피세요. 당신이 열심히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곧 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 3
6년 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1년 정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그 1년은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같이 어디 좀 가자’하셨습니다. 남천동에 있는 사제 제의를 만드는 수녀원이었습니다. 빛이 바랜 제의를 보시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끔, 저를 찾아와 손을 꼭 붙잡으며 기도하고 있다고 당부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저와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낯섦에‘어떻게 저를 아세요?’하고 물으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부탁하셨다 하십니다.
그렇구나! 어머니는 저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내어놓으셨던 겁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의 제의를 준비해 주셨고, 만나는 사람마다 아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생에서 챙겨줄 수 없어 미리 입혀주셨고 채워주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십시오.


돈보스코, 보시는 것처럼 저는 지금 행복이 가득한 곳에 서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즉위 5주년을 맞이하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세번째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를 반포하셨습니다. 복음의 기쁨, 사랑의 기쁨에 이어 세번째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고객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살아있는 성인입니다.
1855년 6월 24일 돈보스코가 마흔살 되던 해 영명축일 때의 입니다. 오라토리오 아이들은 성극이나 성가, 합창이나 시낭송 등, 정성껏 축제를 준비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지극한 사랑에 크게 감동을 받은 돈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받고 싶은 선물을 쪽지에 적어 내게 주세요. 뭐가 됐든 여러분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이 대목에서 돈보스코의 양떼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명 축일에 이것 저것 선물이나 금일봉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오라토리오의 수많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선물을 해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크게 돌아보게 하는군요.
수많은 종이 쪽지들을 들고 당신 사무실로 돌아온 돈보스코는 하나 하나 쪽지를 열어봤습니다. 어떤 아이는 작은 성모상을 신청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운동화를 적었습니다. 짓꿋은 한 아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초콜릿 100킬로 그램’
수많은 쪽지들 가운데 유난히 돈보스코의 눈길을 끄는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1842~1857)가 쓴 것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깜짝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크게 감동받은 돈보스코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비오! 성인이 되는 비결을 네게 선물하고 싶구나. 자, 여기 있다. 첫째 명랑하게 지내는 것이다. 둘째, 네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 공부와 기도의 의무에 충실한 것이다. 셋째, 친구들에게 선을 베풀거라. 설령 네게 희생이 따르더라도 항상 네 친구들을 도우렴. 이 세가지만 잘 지켜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천사표였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가 선물로 주신 세가지 성화의 비결을 마음 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오라토리오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매일 매일 충실히,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그 결과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래 지나지 않아 꿈에 그리던 성인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15세 되던 1857년 3월 9일 병사(病死)한 그는, 1954년 6월 12일 비오 1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한번은 세상을 떠난 도미니코 사비오가 돈보스코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 보시는 것처럼 저는 지금 행복이 가득한 곳에 서 있습니다.”
이어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 장미, 바이올렛, 백합, 용담꽃, 밀이삭이 어우러진 풍성한 꽃다발을 한 아름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꽃다발을 신부님의 아들들에게 보여주세요. 장미는 사랑을, 바이올렛은 겸손을, 용담꽃은 회개를, 백합은 순결을, 밀이삭은 성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답니다. 돈보스코, 그럼 안녕히!”(양승국 스테파노 SDB)

-서공석신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지난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예수님으로부터 삶을 배우는 그리스도신앙인 안에 흐르는 생명도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으로부터 가지인 우리에게로 흐르는 생명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기적(利己的)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또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읽은,「요한 제1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에게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이해타산(利害打算) 없는, 헌신적인 사랑에 우리는 매우 인색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교정(校正)되고 구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인류는 불안할 때, 하느님을 생각하였습니다. 대자연은 광활하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운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대자연은 갖가지 천재지변(天災地變)을 일으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높고 강한 사람은 고마운 때도 있지만, 두려운 때가 더 많습니다. 크고 강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혜택이기도 하지만, 또한 위협과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원시시대(原始時代)부터 인류는 대자연을 지배하는 위대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천둥과 번개, 지진과 홍수 등은 하느님의 분노로 인식되었습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은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은 축복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믿음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압제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율법과 제사에 대한 노예적 자세로 표현되었습니다.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하는 율법, 바쳐야 하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이신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거나,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하여서 하느님이 내린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그분은 사람을 버리지도, 벌주지도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그분을 죽일 때도,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이라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그 계명을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스도신앙인은 성서가 전하는 말씀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 지를 알아듣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사랑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그 사랑에 대한 신뢰로써 인류역사로부터 받은 유산(遺産)인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축복하시기에 자기도 그 자비와 축복을 실천하며 삽니다. 그것이 이웃과의 유대를 만들어 줍니다. 그 유대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성서 안에도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게 하는 표현들이 없지 않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진다.” “지옥에 던져진다.”(마르 10,43.45) 등의 표현들입니다. 그 표현들은 불행하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통용되던 그 시대의 언어들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그 언어를 사용하였고, 그것이 복음서들 안에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강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전능하거나 강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사람들을 제압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상대(相對)를 제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듯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상대에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합니다. 그리고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사랑 안에 크게 돋보이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처신하는 종은 겸손하지 않고 비굴합니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서 더 큰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스스로를 애완동물로 비하하는 일입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낮출 이유가 없는 곳에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주는 마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랑은 일방적이고, 상대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것은 횡포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생명에 숨결이 있듯이, 사랑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어떤 겸손이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세리, 죄인 등과 예수님은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상대방에 맞추어서 스스로를 낮춘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겸손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며 과시(誇示)하기를 좋아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라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듯이, 우리 이웃이 우리 앞에 초라하게 보여도, 그 이웃과 함께 있고,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머무는 일입니다. ◆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
-한상우신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은
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중한
목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목숨입니다.
소중한 목숨이
다욱 아름다운 것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생명으로
가는 길은
목숨을 내놓는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숨을 목숨답게
사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친히
우리를 위해
바치십니다.
사랑에 대해
생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숨은 열매를
생명은 나눔을
향합니다.
바치고 내놓는 것이
사랑의 신비임을
깨닫게됩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에서
복음이 시작되길
기도드립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내놓는다는 것이며
내놓는다는 것은
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이란
사랑이기에
사랑하지 않고서는
예수님 곁에
나란히 머물 수 없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사랑의
나날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5월 10일 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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