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베르나: 프란치스칸의 갈바리아 < La Verna >
라 베르나: 프란치스칸의 갈바리아 1
라 베르나(La Verna)는 아페니노 산맥의 한 부분인 고립된 하나의 둔덕이다. 최고 높이는 1,283 미터에 이르나 성지는 해발 1,128 미터이다. 그 일단은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들과 드러난 바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바위들 가운데 일부는 깊은 균열을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오랜 세기 전에 있었던 강한 지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산은 13세기 초에 키우시의 오를란도 카타니(Orlando Catani) 백작의 소유였다. 그는 이 산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 오를란도는 이 지방의 지주였으며 군사적 정치적인 수완으로서보다는 성 프란치스코와의 우정을 통하여 역사에 알려졌다. 1213년 프란치스코는 마로코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프란치스코는 레오 형제와 함께 로마냐의 몬테펠트로(Montefeltro)에 이르렀고 인근 성 레오 성에서 멈추게 되었다. 새 기사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하여 프란치스코는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성 레오 광장에서 설교하였고, 이에 감명을 받은 오를란도 백작은 사적으로 자신의 영신 사정에 대해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일련의 대화 이후 백작은 라 베르나 산을 성 프란치스코에게 선물할 뜻을 밝혔고, 프란치스코는 그 곳이 속죄와 기도생활에 적합한 산이라면 백작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하였다.
몇 달 뒤 프란치스코에 의해 파견된 두 형제가 이 산을 답사하였고 마침내 형제들은 기도와 관상에 아주 적합한 조그마한 봉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어 그 장소에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들과 성인의 거처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오상 2 참조).
프란치스코가 라 베르나에 처음 올라간 것은 1214년으로 보고 있고, 그 뒤 다섯 차례, 즉 1215년, 1216년, 1217년, 1221년 그리고 1224년에 그 곳에 간 것이 확실하다. 1224년의 마지막 체류는 아마도 좀 더 길었던 것 같고 분명히 더 기억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는 9월 14일경 이 곳에서 오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9월 30일 오를란도 백작이 보낸 나귀를 타고 보르고 산세폴크로, 몬테카살레, 치타 디 카스텔로를 거쳐 포르치운쿨라로 돌아갔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 곳에 머물렀던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아마도 1230년 6월과 10월 사이였을 것이다. 1250년 경에야 계속적인 체류에 관한 근거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때는 이미 더욱 견고한 건축물들이 있었다.
1259년 9월과 10월 사이에, 당시 총봉사자였던 성 보나벤투라는 여기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과 “삼중도(三重道)”를 저술하였고, 또한 아시시의 클라라 수녀원의 클라라 자매들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1260년(8월 20일?)에는 성 보나벤투라와 인근 지역의 7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축성이 있었다. 2, 3년 뒤 오를란도 백작은 세상을 떠났는데, 나중에 그는 이 성당에 묻혔다.
카살레의 우베르티노는 1305년 3월 19일부터 9월 29일까지의 그의 체류기간에 그의 유명한 작품 “예수의 십자가 생명나무”(Arbor vitae crucifixae Jesu)를 썼다. 그리고 라 베르나의 복자 요한(1259-1322)은 거의 30년 동안 이 곳에서 보속과 관상의 삶을 살다 132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443년 9월 당시 이탈리아 관구들의 총봉사자 대리였던 요한 카페스트라노는 그의 보살핌 아래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지침서(회헌)를 작성하기 위하여 이 곳을 찾았다. 그가 작성한 회헌(Capisteranenses 1443, pro Observantibus Cismontanis)은 회규에 대한 주석 형태의 것으로서, 옵세르반티 형제들의 이상을 담고 있었으며, 형제들이 지켜야 하는 개별 규정들이 덧붙여졌다
'라 베르나 성 프란체스코(La Verna Santuario Francescano) 수도원' 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 아레쪼 지방의 고립된 아펜니노 산맥 정상 부근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해발 1,128m 의 고지에 위치한 라 베르나 수도원은 그 역사가 천년에 가까운 카말돌리, 발롬브로자니 수도원과 더불어 이탈리아 중부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서깊은 수도원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회의 창설자이자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성인으로 불리는 프란체스코 성인께서 예수의 오상(예수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힐 때 입었던 다섯 상처가 성인들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받은 성지로도 유명합니다.
지금의 프란체스코 교황님께서 이 프란체스코 성인을 따라 '가난한 삶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시기도 했지요.
현재 라 베르나 수도원에는 여전히 '청빈' , '정결', '순명'의 수도원 정신을 실천하면서 많은 수도사분들이 생활하고 계십니다.
라 베르나 2
오상 경당
오상 경당은 전승에 따라 프란치스코가 십자가의 상흔을 받았던 그 장소 위에서 1263년 8월 20일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4년 뒤 이 경당을 돌보는 형제들을 위한 5개의 작은 방들이 지어졌다. 1310년 9월 5일 오상 경당의 축성이 있었고, 1348년에 대성당의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1509년에 완공이 되어 1568년 4월 22일 장엄하게 축성되었다.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은 장소에는 현재 13세기 말에 만들어진 불규칙 육각형의 대리석 표시가 있는데, 네 개의 작은 기둥과 하나의 띠가 그것을 보호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고딕체로 다음과 같은 오래된 후렴이 쓰여 있다: “천상의 광채가 빛났고, 새로운 태양이 빛났으며, 바로 여기에 세라핌 천사가 나타나 프란치스코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청하면서 여기에서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흔을 박아주셨도다.”원문: ‘Coelorum candor splenduit, novum sidus emicuit sacer Franciscus claruit, cui Seraph HIC apparuit obsignans eum HIC charactere in volis, plantis, latere dum formam Crucis gerere vult corde, ore, opere.’중앙을 가로질러: “여기에서 주님, 당신의 종 프란치스코에게 우리 구원의 표지를 보여주셨나이다.”원문: ‘Signasti, Domine, HIC, servum tuum Franciscum signis redemtionis nostrae.’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환시를 본 뒤에 오를란도 백작에게 천주의 성모께 봉헌할 성당을 지어줄 것을 청하여 포르치운쿨라와 같은 크기로 천사들의 성모를 위한 성당이 지어졌다(1216-1218년). 이 장소와 성당의 규모는 성모님 친히 알려주신 것이라 한다. 이 성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이다.
대성당
대리석으로 세공한 중앙제대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 안토니오의 상들로 둘러싸인 하나의 웅대한 작품을 이루고 있다. 1772년에 빼어난 제단 조각물들과 현재 왼쪽 첫 번째 제대에 있는 승천에 관한 커다란 도자기품을 바꾸는 공사가 있었다. 승리의 아치 양쪽에는 도자기로 된 두개의 부조가 있다.
오른쪽 유품 경당은 1988년에 배치한 것으로 진짜 유품들이 있다: 성인이 오를란도 백작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사용한 식탁보, 거룩한 나무 십자가,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의 피가 묻어 있는 천, 1224년 성인을 아시시까지 태우고 간 당나귀의 멍에 조각, 잔, 포도주에 수프를 만들었던 사발, 고행도구인 채찍(1617년에 사망한 복자 살루씨오의 바르톨로메오의 것이었을 듯), 성인의 지팡이와 오를란도 백작의 띠 등이 있다.
오 형제의 동굴
이 동굴은 오상 경당 오른쪽 암벽의 윗 부분에 있다. 오상 제대 쪽의 작은 문을 나아가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 동굴에 이른다. 이 높이에서 프란치스코의 이 열심한 보조자는 프란치스코의 동정의 많은 것을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성지 입구의 성 프란치스코 상
성지 입구에 잔 꽃송이 제 22장의 내용을 표현한 청동상이 있다. 아마 시에나에서 있었던 일로서, 동물들에 대한 사랑이 많은 프란치스코의 말을 들은 한 소년이 팔려던 비둘기들을 그에게 건네주었고, 그 비둘기들은 성인과 형제들과 친해져 성인에게 순종하였다는 내용이다. 그 소년은 성인의 말대로 형제회에 입회하여 거룩한 삶을 살았다. 이 상은 1902년 빈첸소 로시뇰리가 만든 작품이다. 처음에는 해시계 광장에 있었는데, 1935년 ‘새들의 경당’ 근처의 말길 쪽으로 옮겨 세워두었다가, 1985년부터 지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새들의 경당
이 경당은 1602년에 전에 커다란 떡갈나무가 있던 곳에 건축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프란치스코가 맨 처음 라 베르나에 왔을 때(1214년)에 이 떡갈나무 아래에서 쉬었는데 숲 속의 많은 새들이 날아와 그를 맞이하였다고 한다(잔 꽃송이 ‘오상에 관한 고찰’ 제 1장). 경당 내부에는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1887년에 만든 수수한 상이 있다.
라 베르나 3
『프란치스코가 자기의 영혼을 하늘에 되돌리기 2년 전, 그러니까 그가 라 베르나 은둔소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환시 안에서,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 하나를 자기 위에서 보았다. 그 사람은 두 손을 뻗고 있었으며, 두 발은 모아진 채 십자가에 고착되어 있었다. 날개 둘은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고, 두 날개는 날으려는 듯이 펼쳐져 있었으며, 나머지 두 날개는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지존하신 분의 복된 종은 이것을 보자 그만 감탄하였지만, 이 환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너그럽고 인자한 세라핌의 모습에 그는 무척이나 즐거웠고 기뻤다. 그 천사의 아름다움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천사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는 사실과, 그 찌르는 듯한 아픔이 차츰 프란치스코를 두려움으로 몰아갔다. 그러자 그는 일어섰다. 그는 이를테면 슬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으며, 즐거움과 괴로움이 그 안에서 서로 교차하였다. 도대체 이 환시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의 영혼은 그 뜻을 알아내려고 노심초사하여 괴로워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그 뜻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게 되었고, 그 불가사의한 환시가 성인의 가슴을 곤혹스럽게 만드는가 했더니, 그 못자국들이 성인의 손과 발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가 방금 전에 그의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에게서 본 그대로의 자국이었다. 그의 손과 발 한가운데가 못으로 뚫린 것 같았고, 못대가리가 손바닥과 발등에 나타났으며, 뾰족한 못끝은 반대편에 있었다. 손의 자국들은 손바닥 쪽에서는 둥글었고, 손등 쪽에서는 길어져 있었다. 손등 위로 밀려 솟은 작은 살점들은 못의 끝모양을 하고 있었다. 발에도 마찬가지로 못자국이 찍혀 있었고, 그렇게 비슷하게 딴 살보다 솟아 있었다. 또한, 오른쪽 옆구리는 마치 창에 찔린 듯하였고, 그 상처로 피가 자주 쏟아져 나와 그의 투니카와 속옷을 여러 번 물들였다.』첼라노 제 1생애 94-95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주님, “당신은” 홀로 거룩하시오며,
“기적을 하시는” 주 하느님이시나이다.
당신은 힘세시고 위대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극히 높은 분이시며 전능한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거룩한 아버지시며 하늘과 땅의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삼위이시고 일체이시오며 신들의 주 하느님이시나이다.
당신은 선 자체이시며 모든 선이시며 지상 선이시나이다.
당신은 살아계신 주님이시오며 참 하느님이시나이다.
당신은 사랑이시오며 자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오며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오며 아름다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온화이시오며 안식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저희의 평화이시오며 기쁨이시나이다.
당신은 저희의 희망이시오며 즐거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정의이시오며 절제이시나이다.
당신은 저희를 흡족하게 하는 온갖 보화이시나이다.
당신은 아름다움이시오며 온화이시나이다.
당신은 피난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저희의 보호자이시오며 방어자이시나이다.
당신은 힘이시오며 휴식이시나이다.
당신은 저희의 희망이시오며 저희의 믿음이시나이다.
당신은 저희의 사랑이시나이다.
당신은 저희의 온전한 감미로움이시오며,
당신은 저희의 영원한 생명이시나이다:
위대하시고 감탄하올 주님,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운 구세주이시여!
라 베르나는 프란치스칸 갈바리아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묵상하고 기도하였으며,
그 결과로 1224년 9월 14일경에 이곳에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새겨 받았습니다.
로마에서 라 베나로 가려면 기차를 타고 아레쪼에서 가서 비비엔나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합니다.
아레쪼는 프란치스코가 마귀를 쫓아낸 곳입니다.
"아레쪼라는 마을이 당파 싸움으로 갈라져 서로 분열이 일어나 도시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실베스텔 형제와 함께 아레쪼 마을에 당도한 그는실베스텔 형제를 마을 안으로 보내며 다음과 같이 이릅니다.
'큰 도시 성문으로 올라가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악마들은 즉시 순명하여 떠나라고 명하시오.'
실베스텔 형제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 이후 마을은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 보나벤투라의 대전기 6,9)"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귀도가 집 아래에 서서 마리아를 부르면 열쇠를 던져주던 장면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는 곳입니다.
아레쪼 역 풍경입니다.
역 앞 화단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꽃입니다.
역 앞에 있는 건물들의 모습입니다.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아 다니다가 앞에 있는 건물 오른쪽으로 가니까 롯데리아 같은 패스트 푸드점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메뉴는 비슷했지만 조금 더 비싼 편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기구와 그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고 기차 시간이 있어서 마을을 돌아 다니다가
역으로 갔는데 수도복을 입은 수사님을 만났습니다. 함께 간 형제가 라 베르나를 어떻게 가느냐고 질문을
하니까 자기도 그 근처에 간다고 했습니다. 평일에는 비비엔나로 가는 기차가 있었는데 주일에는 버스만 있었습니다.
어쨌든 자기 옆에 앉으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수사님과 비비엔나역 근처에 내려서 서로 갈길을 갔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까말돌리회 수사님 이었을것으로 추정됩니다.
평일에는 라베르나로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주일에는 없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형제와 연락을 해서 라베르나 성지
근처에 있는 수녀님들이 와서 데려다 준다고 했는데 역 앞에서 4시간이 넘게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을 하고 성지 성당에 들어가니까 형제들이 저녁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라 베르나 성당의 모습입니다.
라 베르나 산은 카우시의 올란도 카타니 백작의 소유였는데 그는 이 산을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았다고 합니다.
1213년 프란치스코가 마로코를 향해 가는 도중에 레오 형제와 함께 로마냐의 몬테펠트로에 이르렀고 산 레오
성에서 멈추게 되었는데 새 기사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레오 형제가 광장에서 설교를 하도록 했고 감명을 받은 올란도 백작이 프란치스토와 대화를
하다가 산을 선물할 뜻을 밝혔고 프란치스코는 그 곳이 속죄와 기도생활에 적합한 산이라면 백작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여 프란치스칸 공동체의 삶의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당 오른쪽 벽에 있는 십자가상의 예수를 안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벽에 있는 해시계 입니다. 1612년 야고보 리고씨(Jacobo Ligozzi)가 설계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당 정면에 있는 십자가입니다.
대 성당 내부 전경입니다.
형제들의 유해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도복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유품 경당이라고 하는데 1988년에 배치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1224년부터 임종 때 까지 입으셨던 수도복입니다.
성당 오른쪽에 있는 예수 탄생 모습입니다.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의 도자기 작품입니다.
라 베르나에 있는 도자기 작품은 모두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Andrea della robbia)의 작품입니다.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1435.10.24 - 1525.8.4)는 마르코 델라 로비아의 아들로 피렌체에서 테어 났습니다.
그의 형은 루까 델라 로비아 입니다. 안드레아는 루까의 제자가 되었고, 당대의 가장 중요한 도자기 공예 작가 였습니다.
그의 가장 최근의 작품은 1515년 동방박사들의 경배로 피렌체 근처에 있는 Pian di Mugnone의
작은 성당을 위한 것 이었다고 합니다.
왼쪽에 있는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의 도자기 작품 주님의 승천입니다.
아래에 형제들이 기도를 하는 가대와 오르간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센서등이 있어서 사람이 다가가면 조명이 켜지고 물러서면 꺼집니다.
성모상 입니다.
가운데 길을 따라 내려가서 왼쪽으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 있습니다.
앞 부분은 1250년부터 10년간 확장된 부분이라고 합니다.
왼쪽에는 예수의 탄생, 오른쪽에는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모습의 도자기 작품이 있습니다.
안쪽 부분은 1216년에서 1218년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동정 마리아의 환시를 본 후에 올란도 백작에게 천주의 성모께 봉헌할 성당을 지어줄 것을
청하여 포르치운쿨라 성당과 같은 크기로 천사들의 성모를 위한 성당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 성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이며 1224년 9월 30일 라 베르나를 떠나면서
이곳에 형제들을 불러 모아서 형제들과 인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1262년(또는 1263년) 6월 30일 라 베르나 산을 기증한 올란도 백작이 세상을 떠났는데 이 성당에 묻혔다고 합니다.
안쪽 성당의 모습입니다. 제대 바닥에 올란도 백작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모승천의 모습입니다. 오른쪽부터 성 보나벤투라, 성 프란치스코, 성 토마스, 성 그레고리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첫 독방으로 알려져 있는 막달레나 경당입니다.
세리보티비 경당입니다.
기도를 위한 초가 봉헌 되어 있었습니다.
갈라진 바위(Sasso Spicco)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형제들이 머물며 피정과 기도를
하던 장소 가운데 하나이며, 프란치스코가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던 곳입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갈라진 바위에 큰 돌이 끼여 있습니다.
오상 회랑이 보이고 세리 보티비 경당이 있는 곳입니다. 수선화가 피어 있습니다.
피에타 경당입니다.
중간에 있는 문을 통해 내려가면 성 프란치스코의 침대가 있습니다.
벽 위에 프레스코화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담고 있는데 1929년에서 1962년 사이에바쵸 마리아 바치
(Baccio Maria Bacci)가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1431년 안드레아 형제가 대성당과 오상 경당을 오가는 것을 시작한 이래 형제들은 계속 행렬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강한 눈보라 때문에 형제들이 행렬을 할 수 없었는데 다음날 아침 행렬 구간의
눈 위에 숲속 짐승들의 발자국이 발견되었고 그것으로 행렬이 대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회랑을
건축한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매일 오후 세시 구시경 후에 행렬을 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쉬고 기도하던 장소입니다.
루피노 형제가 이 동굴 안에서 마귀를 쫓아 냈었다고 합니다.
회랑에 그려져 있는 그림 중의 일부입니다.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를 받아들여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창설했다는 내용의 그림입니다.
은둔소의 입구가 있는 곳입니다.
은둔소 입구입니다.
성 미카엘 대천사 경당입니다.
프란치스코가 1224년에 거처했던 움막이 있었던 위에 지어졌는데 두 번째 독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움막에서 사순절 동안 '친구 매'(2첼 168)와 오상을 받으신 다음 이 곳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레오 형제를 위한 축복'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2첼 49; 대전 11,9참조).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경당입니다.1263년 성 안토니오가 거처했던 움막이 있었던 위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오상 경당입니다.
1263년 8월 20일 지어지기 시작하여 1310년 9월 5일에 오상 경당의 축성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15세기 중엽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의 작품 '십자가에 못 박하심'이 제단 조각 작품으로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십자가 아래쪽에 성 프란치스코, 동정 마리아, 성 요한 복음사가, 성 예로니모의 모습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은 장소입니다.
육각형을 둘러서 써있는 글은 "천상의 광채가 빛났고 새로운 태양이 빛났으며,바로 여기에
세라핌 천사가 나타나 프란치스코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청하면서 여기에서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흔을 박아 주셨도다" 입니다.
가로질러 있는 내용은 "여기에서 주님, 당신의 종 프란치스코에게 우리 구원의 표지를 보여주셨나이다"입니다.
너도 밤나무 경당입니다. 1518년에 복자 요한이 자주 기도하던 너도 밤나무가 있던 곳에 건축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자 요한에게 나타나 옆구리와 발을 껴안도록 허락하셨다고 합니다(잔꽃송이 49 참조).
복자 요한 경당입니다. 움막이 있던 곳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잔꽃송이 제 22내용을 표현한 청동상입니다.
프란치스코으l 말을 들은 소년이 팔려던 비둘기들을 그에게 건네 주었고 그 비둘기들은 성인과 형제들과 친해져서
성인에게 순종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소년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1902년 빈첸소 로시뇰리가 만든 작품인데 처음에는 해 시계 광장에 있던 것을 1935년 '새들의 경당'
근처에 두었다가 1985년에 현재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앞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름이 BECCIA입니다.
'새들의 경당' 경당으로 가는 길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습니다.
새들의 경당
1602년에 전에 커다ㅓ란 떡갈나무가 있던 곳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1214년 프란치스코가 처음
라 베르나에 왔을 때 떡갈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는데 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그를 맞이한
것을 기념하여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새들의 경당 내부입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 옆에 피어난 꽃입니다.
바위 위에 지어진 라 베르나 성지의 모습입니다.
성당을 통해서 들어가는 수도원 입구의 모습입니다. 회랑이 이어져 있습니다.
문 위에 앙증맞은 모습의 아기 예수가 지구의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수도원 방 창문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수도원 복도(회랑)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벽 위에 성 파스칼 회랑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수도원 복도는 모습이 같기 때문에 자기가 있던 곳을 잘 알아두지 않으면 찾기가 어렵습니다.
도둑이 수도원에 들어 왔다가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서 잡혔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
베키아 마을로 내려와서 성지로 차를 타고 올라가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태양과 달 조각이 있는 집입니다.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정원이 있어서 찍었습니다.
건물 가운데 성모상이 모셔져 있는 건물이 있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성모상 모습입니다.
오른쪽에 올란도 백작의 성이 있습니다. 폐허가 된 성의 모습이 인간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합니다.
2003년에는 없었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파티마의 성모상이 있습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라베르나 성지의 모습입니다.
이 곳에는 수련자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련소인 것입니다.
우연히 생일을 맞은 수련자가 있어서 축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명 축일을 지내는데 이태리에서는 수도원 인데도 생일을 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스페인에서 온 선교사 형제들이 있는데 그들도 영명축일을 지내지 않고 생일을 측하합니다.
7일간을 수도원에서 머물며 기도하고,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고 오상 경당 행렬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도원 경리 형제의 배려로 차를 타고 아래 마을에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비비엔나 역으로 가서
다음 머물 장소인 코르토나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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