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사랑 그리고 우정의 길 글라라
-한상봉-
귀지를 파주는 엄마의 무릎처럼 찬찬하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인 마리아처럼 언제든 하소연하고 기댈 구석이 필요한 게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은, 특히 남성은 여성을 요구합니다. 몇 년째 관계를 맺고 있는 백명이 넘는 예술치료협회 치료사 가운데 남자라고는 목사님 한 분과 대학원생 한둘 그리고 저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치료사의 본분이 우리 안에 있는 심리적 어린이를 돌봐줄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여성이 훨씬 더 모성적 돌봄을 잘할 수 있으니까요. 예술치료란 엄마인 치료사가 마련한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그림이나 동작을 통해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수다를 떠는 것입니다. 정해진 규칙과 간섭하는 아버지 없이 아이가 되어 실컷 놀아보는 것입니다. 치료사는 결코 내담자의 손에 답을 쥐어주지 않습니다. 뒤섞여 수다를 떨다보면 은근하게 차오르는 해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예술치료란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말합니다. 남자인 저도 그런 아이들을 위한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되려면, 내 안에 있는 나의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카를 융은 말합니다. 남자인 내가 내 안의 여성성을 흠모하여 달려가고, 그 여성이 나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통합된 전체로서 온전한 인격이 된다고 합니다. 하느님 역시 제게 아버지며 어머니가 되시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버이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면 우리의 부성과 모성, 남성과 여성이 통합되어야 합니다. 전체를 보면서도 세심하게, 굳세면서도 다정하게, 저항하면서도 관대하게, 합리적이면서 신비롭게, 결단력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목표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주변의 이웃을 헤아리는, 생각뿐 아니라 몸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런 사내였습니다. 그래서 새들조차 손끝에 날아와 수다를 떨곤 했지요, 그 곁에는 항상 글라라 성인이 있었습니다. 분신처럼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서로 열렬히 사랑했으므로 한 사람은 남성을 넘어 여성에게로 건나갔고, 한 사람은 여성을 넘어 남성에게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두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복음적 관상 생활로 부르심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영적인 아버지와 딸의 관계였습니다. 글라라(1193~1253년)는 일생 동안 그를 ‘우리의 거룩하신 아버지 프란치스코’라고 불렀지만 그녀는 딸 이상이었지요. 글라라는 그의 가장 충실한 동료이며 프란치스코가 주님께 받은 꿈과 삶의 방식을 가장 완전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글라라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른 여성으로 프란치스코를 보완해 주는 존재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생활은 처음부터 남성적이며 여성적인 요소를 모두 보여주었습니다. 길 위의 형제들은 가난한 부인들의 관상적 삶을 풍요롭게 하였으며, 가난한 부인들의 관상적 삶은 형제들의 사도적 생활과 설교에 힘을 더해 주었습니다.
글라라는 1210년 사순절, 겸손하고 가난하며 열정적이고 기쁨에 찬 설교를 하는 프란치스코를 만나면서 그와 같은 복음적 생활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녀는 18세 되던 해 성지주일 밤에 가족 몰래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으로 달려가 가난, 정결, 순명을 서약하였고, 스승이요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듣도 삭발한 그녀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글라라는 뒤따라 복음적 생활을 선택한 동생 아네스와 몇 명의 동료와 함께 성 다미아노 성당을 중심으로 ‘가난한 부인회’를 시작하였고,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복음적 권고와 생활지침에 따라 42년 동안 출가 생활을 하였지요, 그녀는 본래 귀족 출신이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소유하고자 갈망하였기에 프란치스코보다도 더 단호하게 극기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동료수녀들한테는 어머니처럼 인자하였지만, 나중에 글라라회의 규칙이 된 문서는 너무 엄격해서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교황청 승인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글라라는 ‘아주 맑은’이라는 뜻인데, 그녀의 관상 생활을 ‘거울’을 통한 것이었지요, 글라라는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인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자신 또한 그리스도의 거울이 되어 다른 자매들과 세상 사람들이 그 거울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아보기를 바랐습니다.
다미아노 수도원 수녀들은 맨발로 지내면서 맨바닥에서 자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대침묵을 지켰습니다. 글라라는 식탁 옆에서도 환자들을 돌보았고, 수녀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녀는 27년 동안 중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수도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임종할 때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평화로이 출발하시오. 당신은 좋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없이 가시오.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셨으며 항상 당신을 보호하셨고 어머니처럼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축복받으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 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의 사도적 생활은 글라라의 관상 생활을 통해 보완되고 통합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할까?
글라라가 이렇게 열렬히 관상 속에서 가난하고 복음적으로 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물론 하느님의 자비에 원천을 둔 것이었지만, 아마도 프란치스코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 힘입은 바가 클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갈망했으며, 그 사랑을 하느님과 나누는 우정 안에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궁정기사와 귀부인들이 나누었던 낭만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과 자발적 가난이라는 복음적 이상을 제 몸으로 살아가려는 영적투쟁 속에서 생긴 깊은 우정으로 일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볼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상대방의 수난과 투쟁을 알았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거룩한 여정을 따라 걸었지만 가난한 그리스도의 부르심 안에서 여전히 마음과 영혼이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런점에서 성 프란치스코 이야기는 글라라 없이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그녀의 이야기 역시 프란치스코 없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르날도 포르티니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행적』에서 두 사람이 엮어낸 이야기 하나를 이렇게 전합니다.
언젠가 두 사람이 함께 여행할 기회가 있었답니다. 도중에 어느 집에 들러 음식을 얻어 왔는데, 집주인이 두 사람을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시 눈 쌓인 시골길을 걷다가 프란치스코가 갑자기 “글라라, 당신은 그 사람들이 넌지시 말하는 것을 이해했나요?”하고 물었죠. 글라라는 두려워서 목구멍에 말이 걸릴까 봐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가 말했죠. ‘우리가 떨어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당신은 해질녘까지 산 다미아노에 닿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홀로 계속 걸어갈 것이고, 하느님께서 어디로든 나를 이끄실 것입니다.” 글라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잠시 기도하더니 뒤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한참을 가더니 숲에 닿자 걸음을 멈추었지요. 작별인사도 없이 헤어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프란치스코가 숲으로 들어오자, 글라라가 묻습니다. “아버지시여, 우리 둘은 언제 다시 만나게 되나요?” 프란치스코가 대답합니다. “여름이 돌아오고 장미가 다시 피어날 때입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나무와 덤불과 산기슭이 온통 장미로 뒤덮인 것입니다. 깜짝 놀란 글라라는 장미 한 다발을 꺽어 프란치스코에게 주었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영적 여행에서도 친밀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농밀한 사랑이라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맺는 도반들의 우정 같은 것입니다. 혼자 힘만으로 먼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현존은 곧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선물인 것이지요.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가 나누었던 존경과 사랑, 우정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 친구들이 있었고, 특별히 아끼던 요한,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친밀함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우정이나 친밀함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에도 몹시 아팠을 때 글라라에게 가까이 있기 위하여 산 다미아노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우정의 빛에 잠겨 그 어두운 순간에 ‘태양의 찬가’를 쓸 수 있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여, 자매인 달과 별들을 통하여 당신은 모든 찬미를 받으소서, 하늘에서 당신은 그들을 빛나게 또 아름답게 하시나이다.” 우리는 혼자 있어야 하고 또한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고 우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부라 해도 더 큰 하느님의 우정 안으로 잠겨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집착이 되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 안에서 그 사람 너머에 계신 그 분과 만나야 합니다.
-출처: 야곱의 우물 2008년 3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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