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회 자료실

황홀한 성 프란치스코-죠반니 벨리니 (1485)유채 템페라, 미국 뉴욕 프릭(Frick) 컬랙션

Margaret K 2018. 1. 13.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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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성 프란치스코, 죠반니 벨리니(1485), 124X 141cm,유채 템페라,  미국 뉴욕 프릭(Frick) 컬랙션>

‘가난한 이의 친구’, ‘제2의 그리스도’라는 별호의 성인. 그만큼 가난의 덕목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신비로운 오상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을 체득하며 사랑을 체화한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도를 통해 탈혼이 된 순간을 표현한 그림이 있으니,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년)가 그린 ‘광야의 성 프란치스코’이다.

벨리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로, 그윽하고 부드러운 공간 이미지와 미묘한 광선을 통한 색채의 아름다움 그리고 정확한 리얼리즘을 구가한 능숙한 유화 실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벨리니가 자신의 고유한 화풍을 고수하면서도 특유의 간결하고 검박한 필치로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영적 수난체험을 간접으로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더욱이 벨리니는 이 그림 속에 다양한 그리스도교 도상과 상징물을 동원하여 성인의 삶을 압축 요약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성인의 삶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성인이 있는 장소는 인간의 세속적 향기와는 거리가 먼 광야, 곧 고독의 땅이며, 정신적 은둔과 기도, 참회의 땅이다. 그가 있는 곳의 암벽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수난과정을 고스란히 체험하려고 물러났던 곳이며, 1224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그리스도의 오상이라는 고통을 체험한 라 베르나 산을 상징한다.

대자연 앞에서 탈혼에 빠져 스스로를 하느님께 의탁하는 성인의 손에 희미하게 오상의 성흔이 나타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인의 뒤편, 그가 걸어야 했던 고난의 여정을 암시하는 그림자를 지나 성경과 해골이 있는 책상만 덩그러니 놓인 동굴이 보인다.이 동굴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는 동안 계약의 궤를 모신 장막을 의미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성경을 덮어놓은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독서를 초월해 오로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한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을 암시하며, 해골은 골고타의 상징으로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수난과 고통의 여정이자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속의 욕망과 유혹, 비난, 미움, 슬픔을 떨치고 주님의 품에 오롯이 안긴 신앙과 사랑의 힘든 과정을 나타낸다.

동굴 입구에는 십자가 모양의 나무에 의지해서 위로 기어오른 세 줄기의 포도나무가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품에 안기고자 애쓰고 정진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신앙과 열망의 간접적 표현이다.

그리고 동굴 입구 바닥에 놓인 물병과 벗어놓은 신발은 신앙인으로서 검소하고 가난을 즐긴 성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맨발의 성인은 호렙 산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의 행위와 일치하는 것으로,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시편 43,4)라는 찬양의 노래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윗부분의 양들을 이끄는 목자 역시 모세를 의미하는데, 이는 벨리니가 당시 복음을 망각한 채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락의 길을 걷는 교회를 쇄신하려고 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의지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고 광야에서 인도하는 모세에 비유해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벽을 끼고 돋은 나무는 무화과나무이다. 무화과는 그리스도교 도상에서 상반된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데, 범죄와 육욕이라는 부정적 의미와 번영과 구원의 긍정적인 의미가 그것이다.

그 긍정성의 기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한 모세와, 야훼만이 참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자 엄청난 시련을 감내한 엘리야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오상 체험을 비롯해 온갖 고통을 인내하고 결국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에 보이는 청로새와 당나귀를 비롯해 그 주위의 왜가리, 알락해오라기, 토끼 등 나약한 동물들은 모두 고독의 상징물이다. 고독의 길은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께 스스로를 인도하는 여정이 아닌가?

그렇기에 이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선택해서 걸어야 할 신앙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은 스스로를 당나귀에 비유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걸어야할 신앙의 길에 놓인 고난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인간의 나약한 심성으로 스스로에게 주어진 신앙의 소명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자신과 한 약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당나귀가 성인이 라 베르나 산을 오를 때 동반했으며, 예수께서 수난을 위해 예수살렘에 입성할 때 타고 가신 동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나귀는 고난과 수난의 고독한 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위에 푸른 하늘과 흰 구름과 함께 묘사된 도성은 하느님의 나라로, 한편 힘든 난관의 여정을 극복한 참된 신앙인의 마지막 여정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 오상체험을 통해 주님의 고통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 프란치스코 성인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성에 이르는 산허리의 길과 다리는 좁고 험하며 보잘것이 없다. 도성의 벽도 허술할 뿐이며 도성의 모습 자체도 투명하기보다는 그림자에 싸여 모호하게 보일 뿐이다.

어려운 질곡의 여정으로 표현된 도성에 이르는 길은 영적 삶의 고통을 암시하는 것으로, 17세기 영국 작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연상시킨다.

이런 고난의 모험과 정신적 대장정을 무사히 극복한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성이 상징하는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이런 수난과 고통의 신앙 여정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영광이라는 사실이 그림 왼쪽 윗부분의 햇빛과 아울러 그 아래에 커다랗게 펼쳐진 월계수, 고대부터 영광의 상징으로 통하는 이 나무를 통해 다시 한 번 강조되어 있다.

이 영광은 오상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고 그 깊은 사랑을 체득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광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하늘을 향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얼굴은 햇빛을 받아 찬연하게 빛나고, 표정은 충만한 은총으로 가득하게 보인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태양의 노래’, 최민순 역).

지금 이런 고난과 사랑이라는 신앙의 과정을 통해 영광의 은총을 가슴 깊이 새긴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느님의 작품인 자연과 세상 만물을 향해 홀로 열린 자세를 취한 것은, 성인이 몸소 체험한 하느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초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 경향잡지, 2008년 2월호,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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