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회 자료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김찬선신부-

Margaret K 2018. 1. 29. 21:02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김찬선 OFM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것이 단맛으로 변했습니다”(유언 2-3).

 

1)    로마 순례

2)    나환자와의 만남(가난한 자와의 만남)

3)    가치관의 변화 : 가난과 작음의 길

4)    탐구의 시간, 동굴에서의 기도

 

프란치스코는 주께서 나에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다라는 말로 그의 유언을 시작하고, “세속을 떠났습니다라는 말로 회개 생활 시작 부분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시간에 우리가 볼 것은 회개 생활 시작과 마무리 사이의 중간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회개 생활의 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 친히 나환자와의 만남을 얘기한 후 즉시 세속을 떠났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스뽈레또의 사건을 체험하고 난 후부터 결정적으로 세속을 떠나기 전까지의 그 과정은 어떤 것이었나?

 

1.   머문 세상과 떠나야 할 세속

스뽈레또에서의 하느님 계시는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세상을 떠나 사막이나 광야로 가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향 아씨시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영어를 보면 “World”라는 말을 세상과 세속이라는 의미로 같이 쓰고 있고 라틴어도 “Saeculum:이라는 말이 있지만 “Mundus”라는 말에 세상과 세속이라는 의미를 같이 가지고 있는데, 세속은 떠나면서 세상에 남아 있으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세속을 떠나야 할 그에게 있어서 다시 세상, 그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난 청년이 그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겉으로만 보면 꿈의 좌절일 것이다.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네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듣게 될 것이다.”(세동료6)라는 하느님의 말씀만 없었으면 틀림없이 인생의 실패였을 것이다.

 

아무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 아씨시로 돌아왔고,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기다렸지만 산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로부터 나의 집을 고치라라는 말씀을 듣기까지의 몇 개월, 아마 7~8개월을 프란치스코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아무런 말씀을 하느님으로부터 듣지 못했다. 그러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믿음과 희망을 두고 기다리며 이전에 고향에서 살던 삶을 사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굽히고자 잠시 세상사의 혼잡함에서 물러나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간직하려고 힘썼지만”(1첼라노 6) 동갑나기들은 그를 그들 놀이와 주연의 두목으로 끌어들였고 그 또한 전에 한 대로 주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외적으로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과 한 패가 되어 어울렸지만 내적으로는 전과 같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연이 끝난 후 노래를 부르며 동료들이 시내를 활보할 때 그는 그저 지팡이를 든 채(세 동료 7참조) 그저 그들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러면 왜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의 놀이와 주연에 흥미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참여하였을까? 스뽈레또에서 주인하인중에 주인을 선택하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하인들 가운데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었을까? 더 좋으신 주인의 그 신적인 달콤함”(2첼라노 7; 세동료 7)으로 마음은 이미 하느님께로 향하면서도 왜 여전히 세상 안에 머물로 있었을까?

 

그것은 첫째로 주님의 뜻에 따라 아씨시로 돌아왔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과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 무엇을 해야 할 지 하느님으로부터 대답을 듣지 못한 그가 새로운 관계 방식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전의 관계를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아직도 인간의 시선을 의식하는, 즉 세속적인 허영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첼라노는 인색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그리고 이웃의 호의에 대한 책임을 중하게 생각했기에 프란치스코가 그러하였으며, 주연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전보다 두 배가 될 만큼 맛 좋은 음식을 준비하고 토할 정도로 배를 채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첼라노 7). 마치 우울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더 명랑한 척하듯이, 또는 속으로는 미워하지만 그것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의식적으로 더 사랑을 표시하려 하듯이 그 또한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 그는 이미 변했고, 그리고 변화하고 있지만 그러한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히기는 커녕 오히려 그런 자신을 감추기 위해 두 배로 잔치를 풍성하게 준비하였다고 첼라노는 분석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호의에 대한 책임감이 컸기 때문이라고 프란치스코를 두둔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세 동료의 전기는 단도직입적으로 지상적인 허영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세 동료 8)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좋은 평판을 받고 싶어하는 허영심과 나쁜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같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첼라노나 세 동료 전기의 관점을 종합하여 볼 때, 세속적인 것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추구는 스뽈레또 사건까지의 체험을 통하여 포기되었지만 지상적인 허영과 인간적인 두려움은 아직 얼마가 남아 있었으며, 이전의 인간적인 습관과 성향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 정화해야 할 세속적인 측면과 찾아야 할 하느님의 뜻이 그의 숙제로 남아 있었다 할 것이다.

 

모색과 시도들

그러면 지상적인 허영과 이전의 습관과 성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프란치스코가 이 시기에 자신의 변화, 또는 방향 전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은밀한 기도이다. 주연이 끝난 후 동료들의 뒤를 따라가는 중에도 주님이 방문을 받았던 그는, 그래서 장가들 꿈을 꾼 모양이지?”라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될 정도로 딴 사람이 되곤 하던 그는 가능하면 거의 매일 은밀히 기도하기 위하여 세속적인 소란함에서 벗어나 어디론지 사라지곤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광장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장소에서도 간혈적으로 찾아드는 거룩한 기쁨에 이끌려 기도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인 소란함을 벗어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애쓴”(세 동료 8; 1첼라노 6) 그의 의지적인 노력이기도 하였지만 하느님의 감미로움을 이미 맛본 자의 자연스러운 탐미였을 것이고, 의지적인 노력의 결과였다기보다는 이미 그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신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이었을 것이다. 앞서 실패의 쓰라림을 통하여 그의 삶에 개입하신 하느님은 이제 감미로움을 은총으로 그에게 주시며 차츰 세상 안에서 세속을 떠나게 하시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놓치지 않고 찾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리라.

 

둘째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이다. 여전히 이전의 동료들과 만나고 있었지만, 그리고 이전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자주 은혜를 베풀곤 하였지만 이제는 그의 인간 관계의 주 대상을 가난한 사람들로 삼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이들에 대한 너그러움이 천성적으로 있었고(1첼라노 17 참조) 그래서 만나게 되는 가난한 이들을 단순한 동정심으로 그렇게 대했지만 이제는 그들을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까지의 그의 자선을 나환자와의 만남 이후와 비교하여 여전히 조심스럽게 식별할 필요가 있다. ,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측면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의 자선은 다분히 자기 영혼의 고귀성을 드러내기 위한, 자기 만족적이고 과시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바로 다음에서 보게 될 로마 순례 중의 일화를 통해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로마 순례이다. 로마 순례는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그의 면모와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애쓰는 그의 면모가 함께 담겨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첼라노와 세 동료 전기에 의하면 그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동냥을 청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부끄러움 때문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도시로 가서 거지 체험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로마 순례이다. 거기서 그는 거지 옷을 바꿔 입고 부끄러움 때문인지 습관 때문인지 프랑스어로 동냥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체험이지 그들과 진정 같아지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동냥을 마치고 아씨시로 돌아오면서 거지 옷을 다시 자기 옷으로 갈아입은 것이 이를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의 이러한 행위는 거지의 입장을 세심히 고려한 것도 아니고, 거지와 같이 되고자 한 것은 물론 아니며, 후일 그가 형제들에게 훈계한 바인 그 천하고 멸시받기를 즐겨하는 영적인 자의 행위는 더더욱 아니다.(1회칙 17,14;권고 2; 19 참조) 과시적이고 세속적인 그의 면모를 우리는 또한 로마 순례 중의 그의 다른 행위에서도 볼 수 있다. 동냥을 하다 성당으로 들어간 그는 성 베드로 성당 제대에 바치는 다른 순례자들의 예물의 미소함을 보고 은전 한 움큼을 집어 쨍그렁 소리가 날 정도로,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듣고 놀랄 정도로 집어 던젔다(세동료 10; 2첼라노 8).

이러한 행위에 대해 첼라노와 세 동료 전기모두 사도들에 대한 큰 존경심의 발로였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런 열성과 더불어 비록 무의식적일지라도 과시적인 면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봉헌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모색과 시도 중에 있던 그에게는 정화되어야 할 것들이 틀림없이 그의 어두움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있는 삶과 행위들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의구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 동료 전기는 아씨시의 귀도(Guido) 주교에게 자신의 길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역시 하느님 자신의 직접적인 이끄심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다음에 보게 될 나환자와의 만남이다.

 

11. 나환자와의 만남: 회개의 결정적 사건

여기서 나환자와의 만남에 대한 프란치스코 자신의 말을 다시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위의 매우 짧은 글 안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1) 프란치스코가 회개 생활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 2) 프란치스코 자신의 변화. 3) 관계의 변화. 이제 우리는 여기서 크게 프란치스코 자신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를 위의 유언의 글과 전기들을 통해서 알아보고 이런 변화에 하느님은 각각 어떻게 개입하셨는지 알아보자.

 

프란치스코 자신의 변화

프란치스코는 유아기에서부터 나환자를 만나기까지의 자신을 한마디로 죄 중에 있었다고 아주 단순하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죄 중에 있었기에 나환자를 보는 일이 그에게 너무나 역겨운 것과는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것일까? 다시 말해 죄와 나환자 보는 일의 역겨움 사이의 상관 관계는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성인 당시의 영성에서는 분명 죄와 나환자에 대한 역겨워 함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 나병으로서의 죄를 나환자와 나병에 대한 역겨움과 비교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연관성을 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나환자를 볼 때 두렵거나 역겨운 것은 당연한 것이며 죄일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사람에 따라서 뱀이나 쥐를 보고 징그러워하고 심지어는 보기를 역겨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물론, 죄를 자유 의지에 의한 적극적인 죄에만 국한시켜 본다면 이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특히 오상을 받고 태양의 찬가까지 지을 정도로 완덕의 경지에 올라 유언을 작성한 말년의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는 죄의 개념은 매우 넓은 것이었다. 자유 의지에 의한 적극적인 죄뿐 아니라 자기 중심적 경향의 모든 것까지 그는 죄로 본 것 같다. 그 중의 하나가 <좋다-나쁘다>의 개념이고, <좋아하고=싫어하는> 경향성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중심적 경향에서<좋다-나쁘다>또는 <선과 악>의 양단의 개념이 나오고, <좋아하고-싫어하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어째서 선과 악, 싫고 좋음이 자기 중심적 경향성에서 나오는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지상 선,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1회칙 23,9; 하느님 찬미 3)이신 하느님께는 선과 악의 개념이 없으며, 만드신 그 어느 것도 싫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지혜 11,24 참조: 주님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주님이 만드신 그 어느 것도 싫어하시지 않는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만드셨을리가 없다”)께는 좋고 싫고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무한으로서 경계와 한계가 없으신 하느님은 삼위일체적 무경계를 이루시기에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진 우리, <전 존재적 우리>로서 계시며 자기 중심적 경향에서 자유로우시다. 이에 비해 경계와 한계를 지닌 피조물, 특히 인간은 한계의 다른 표현인 <자기>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 존재 유지를 위한 자기 중심적 선을 욕구한다.. 그리고 당연히 욕구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악을 알게 되고 체험케 된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점을 영적인 권고 2번에서 잘 얘기해 주고 있다. 형이상학에서도 얘기하듯이, 선은 인간의 욕구의 대상이면서 욕구대로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그렇기에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 중에서 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신학과 영성에서 볼 때 선이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이루신 것이요, 하느님의 뜻대로 됨을 말하는 것이리라. 모든 것도 나름대로 다 선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함으로써 하느님 뜻대로 이루신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선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악을 알게 된 것이다. ,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일이나 상황이나 존재가 자기 좋을 대로(존재) 자기 좋은 대로 하기를 바라지만(사실 싫은 대로 되기를, 또는 하기를 바라는 인간을 없다)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그렇게 되지도, 또 그렇게 하지도 못할 때 그것이 고통이요 악으로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얘기하듯 모든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다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 기준이 아닌 인간의 중심적 기준에 땨라서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대상적이고 객관적인 선과 악, <좋다-나쁘다>에 대응하는 인간의 주관적인 정서가 <좋다-싫다>이고 이것은 사실 대상과 결합되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좋음>은 자기의 욕구에 맞음이며, <싫음>은 자기의 욕구에 반대됨인데, 이러한 자기의 주관적인 싫고 좋음에 따라 대상이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하며, 환영받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모든 선이, 심지어는 최고선이신 하느님마저도 인간의 자기 중심성으로 인해 악이 되어도 좋은가?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자기 안에 이미 자기 중심적으로 <싫고-좋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의식적이건 잠재 의식적이건 인간의 의지는 <싫고-좋음>의 자기 기준에 따라 욕구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여기서 욕구되는 것은 <>으로 체험되어지고 거부되는 것은 <>으로 체험되어진다. <체험되어진>다는 말은 체험되는 것들이 그 자체로 <>이나 <>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를 영적인 권고 2번에 비추어서 고찰하면, 자기 의지를 포기치 않고 자기의 것으로 소유(appropriation: 소유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도둑질 함)할 때, 다시 말해서 자기 의지를 자유 의지로 하느님 뜻에 맡기지 않을 때- 이것이 인간의 죄인데- 인간은 선을 알고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은 악도 알게 되고 체험케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을 때, 그래서 자유 의지로 자기 의지를 하느님 뜻에 맞출 때, 그리고 좋으신 하느님이기에 그분이 주시는 대로만 그저 감사히 받아들일 때 모든 것은 선이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나환자와의 만남은 이러한 자기의 죄성을 깨닫게 하고, 이러한 <자기>를 결정적으로 포기케 한 마지막 자기 죽음이었다. 스뽈레또 사건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였다면 이제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게 된 것이다.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듯 감성적으로 매우 예민하고, 그래서 좋고 싫음이 뚜렸했던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그가 가장 싫어하는 나환자와의 포옹과 친구(입맞춤)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전기들은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집 근처는 얼씬조차 하지 않았으며 냄새조차도 싫어하여 코를 막고 지나갈 정도로 나환자들을 싫어하였으며, 그 싫음은 더 나아가 공포로 이어질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상 싫은 것이 너무 강할 때는 그것이 공포,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이토록 두려움의 대상인 나환자와의 만남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앞서 본 바와 같이 자기를 없앰으로써 싫고 좋음이 없어지면 두려움도 사라지겠지만 인간이 과연 자기 의지로, 또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버릴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버려야 할 <자기>가 어디 있느냐?”라고 되묻고 혹자는 불가능하다고도 한다. 프란치스코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주께서 그렇게 해주셨다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주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그저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고 두려움을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기>, 싫고 좋음을 극복할 수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런데 각오한다는 것은 의지적인 것이다. 그리고 각오하는 것은 이미 상당 부분 자기를 포기한 것이며 그러기에 두려움도 그만큼 사라진다. , 각오한다는 것은 의지적으로 상당 부분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만큼 두려움도 제거된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또 보아야 할 것은 각오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각오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 극단적으로는 죽음까지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각오하는 것이다. 그리고 싫은 것, 십자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기에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프란치스코의 나환자와의 만남은 지금까지 마지막으로 거부해온 십자가의 의지적인 선택이었다. (세 동료 11 1첼라노 17참조) 그리고 이 후의 삶은 다미아노의 십자가로부터 사명을 받고, 마침내는 오상을 받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갈망하고 선택하는 삶이었다. 그래서 앞서 동료들의 나쁜 평판이 두려워 어정쩡하게 그들과 어울리던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적인 각오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강인함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고 프란치스코 자신이 얘기하듯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 그런 의지적인 노력을 할 수 있는 힘을, 그런 각오를 할 수 있는 힘을 주께서 주신 것이다. 뻬루지아와의 전쟁에서의 포로, 후유증으로 인한 병상 생활, 기사가 되려는 꿈의 좌절 등을 통하여 그를 이끄신 분도 하느님이시지만, 위로와 감미로움과 힘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었다. 세 동료의 전기는 나환자와의 만남 직전에 어떻게 힘을 얻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어느 날 그가 열심히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주님으로부터 이런 응답이 들려왔다…. 그는 이런 계시를 받고 나서 기뻤다. 이리하여 주님 안에서 강인해진 그는 말을 타고 아씨시 교외를 가다가…”

 

이상을 종합할 때, 회개, 방향 전환이란 자기 좋을 대로에서 하느님 좋으실 대로로 바뀌는 것이며, 그래서 자기 좋을 대로의 좋고 싫음이 없어짐으로써(내면의 변화, 주체의 변화, 싫어하는 것, 고통까지도 좋은 것, 사랑할 만한 것으로 바뀌는 가치의 전도이며, 자기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베푸심과 이끄심에로의 전적인 내어맡김이다.

 

관계적 변화

프란치스코 자신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도 가져왔다.

자기 좋을 대로의 관계는 자기 중심적이기에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도 자기 좋을 대로되기를 바라고 자기 좋을 대로의 존재는 소유하고 그와 반대인 싫어하는 존재는 거부한다. 그런데 자기 좋을 대로관계의 결과는 존재의 소유적 비인격화이다. 왜냐하면 자기 좋을 대로의 사람은 존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존재의 일부 또는 속성을 좋아하며 선택, 아니 소유한 것이기에 그 존재에게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없어지면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약한 경우는 소유욕 때문에 존재를 좋아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확장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진정한 사랑의 일치를 통한 우리로서의 확장이 아니고 다른 존재를 집어삼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소유적 확장을 꾀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기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좋은 것이어야 하기에(다시 말해서 싫은 것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없기에)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에 한동안 만족하며 그 장난감을 가지고 잘 놀았다. 심지어는 그 장난감에 인격성을 부여하여 말도 걸고, 자기 심정을 토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후에는 직전까지도 좋아하며 가지고 놀던 것을 팽개치고 새로운 장난감메만 몰두한다. 부모의 눈에는 옛날 것이 더 좋은 것이어도 아이는 새 것은 무엇무엇이 좋다고 하고 옛것은 무엇무엇이 나쁘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자기 좋을 대로의 관계는 존재를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존재를 소유적으로 비인격화시킨다.

 

이에 비해 자기의 <좋고-싫음>을 포기한 가난한 사람, 그래서 하느님 좋으실 대로로 바뀐 회개자는 존재를 선택할 뿐 아니라 모든 존재를 선으로 선택하고, 모든 존재를 관계적으로 인격화한다. 이 회개자에게는 어떤 존재의 그 어떤이 중요하지 않고 주체인 존재가 중요하며 존재는 곧 선이기에 모든 존재는 다 선이다. 창세기 1장의 보시니 좋더라하신 존재들이 선이 아닐 이유가 도대체 없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과 같이 사람 앞에 붙는 <선한-악한>, <옳고-옳지 못한>의 기준도 사라져 버리고 존재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성 보나벤뚜라가 얘기하듯 모든 존재는 그저 사랑 안에 포용될 선, 우리라는 관계 안에 사랑으로 포용되어야 할 선일 뿐이다. <싫고 좋음>이 포기된 프란치스코에게는 이제 역겨움 때문에 거부되었던 나병환자는 없고, 한 인간이 있을 뿐이고, 거부되고 비 인격화된 한 인간의 고통은 이제 연민과 사랑으로 그 안에 각인된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유언은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습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 역겨운 일이기에 주님 친히 데리고 가시지 않았으면 나환자와의 만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단 프란치스코만이 유별나게 나환자들을 역겨워하고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구약 시대로부터 프란치스코 당대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구약 성서, 특히 레위기 13-14장과 신명기 24 8-9절을 보면 이 질병을 알아보는 방법, 이 질병에 감염된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하여 취해야 할 방법, 공동체로 다시 받아들이는 방법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특히 십자군의 귀환과 더불어 이 풍토병이 서방으로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영양 부실로 인하여 많은 피부병이 발생하였을 때 이 피부병을 나병과 구별해내기 위한 방법도 성서를 통하여 그리스도교권에 유입되었는데 대부분의 피부병들이 나병과 혼동되어 많은 수의 피부병 환자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무튼 나병으로 판명이 되면 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시민권이 상실되어 일정한 거주지에 머물러야만 하였다. 나환자들의 시내 출입은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혹 통과한다 하더라도 번화한 지역은 피해야 했고, 자신의 통과를 알리기 위하여 종을 울려야 했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생계를 스스로 꾸려 가야 했으며, 혹 신심 깊은 은인들이 이들을 도우려 해도 전염의 두려움과 나환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없이 많은 주의들이 부과 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 당시에도 나병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혐오와 경계의 대상이었으며, 나병환자들은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자, 낮은 자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나환자와의 만남 후 이들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받아들였으며, 십자가를 선택하기로 한 그의 삶은 그를 그들 가운데로 데리고 갔다. 나환자와의 첫 만남이 가져다 준 회개 또는 방향 전환은 분명 가난한자 중의 가난한 자들, 특히 나환자를 향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 안에는 나환자에 대한 두려움 대신 사랑이 자리하게 되었고, 자신의 고통 대신에 인간의 공통적인 고통에 대한 이해가 자리하게 되었다. , 자신으로부터 다른 이들에게로, 자신에 대한 고뇌와 고통에서부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고뇌와 고통으로 방향이 전환된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는 다른 고통 당하는 이들도 거부하지 않는다. 아니 거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랑으로 달려간다.

 

이어서 유언은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제 하느님의 인도로 나환자들에게 간 프란치스코는 그들 가운데 머문다. 라틴어의 “Cum illis”, 영어의 “among them”, 우리말의 그들 가운데서는 모두 그들과 다른 사람으로서 그들 밖에 있는 자(Outsider)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서 그들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 이상의 투신이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삶 밖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일할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이도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Leonardo Boff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프란치스코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성부라 불리는 궁극적 신비를 추구하여 위로 향하는 노력인 초월(Transendence)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엇다. 초월은 빛이시며 선의 광체이시고 절대적인 궁극(absolute positivity)이신 하느님만을 발견하기에 그것 홀로 인간 존재의 모든 진실을 다 드러낼 수는 없다. 초월은 분명 충만함(fullness)이지만 아직 통합(integration)은 아니다. 따라서 통합의 충만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공허와 고톡과 고통과 죽음을 대면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초월적 하강(Trans-descendence: 또는 초월적 내재, 초월적 육화)의 체험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충만한 인간 실현을 우리는 얻게 된다. 초월적 하강을 통하여 개인은 아래에 있는 것에 열려 있고, 착취당하고 나병에 걸린 자의 몸에 각인된 가난을 향하여 돌진한다. 점잖고 부드럽게 그들을 받아들일 때 그들은 인간적 나눔을 통하여, 특별히 같이 느끼는 마음인 그 정이 통하는 나눔을 통하여 통합된다. 개인은 인간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고 느낌으로써 자신의 고통이 치유되었다고 느낀다. 프란치스코처럼 초월과 초월적 하강의 이 체험 전부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에게 몸을 굽혀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기에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조물의 찬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먼저 하느님께 대한 초월적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는 나환자들 가운데로 초월적 하강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환자들과 통합을 이룬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그의 영적 권고 1번에서 얘기한 그 성체의 신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그마한 것이지만 번역상의 문제를 하나 짚고 넘어가자. 우리말 번역에서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위에서 본 의미와 연관시킬 때 이 번역은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라틴어 본문 “Feci misericordiam cum illis”도 위에서 아래로, 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내려 주는 듯한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말 번역의 <자비를 베풀다>는 하강식의 자비 실천이며, 그들 가운데 있다기보다는 그들 위에, 또는 그들 밖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는 가난과 작음의 우리 영성과도 일치하지 않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라는 번역보다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행하였습니다”, 또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실천하였습니다.”라는 번역이 더 적절할 것이다. 세 동료의 전기는 나환자와의 만남 이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환자들의 가족이 되었고 반려가 되었으며, 그의 유언에서 그가 말하고 있듯이 그들 한가운데서 머물면서 겸허하게 시중들었다.”

 

탐구의 시간: 동굴에서의 기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환자와의 찻 만남을 통하여 개인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방향 전환을 한 프란치스코는 한편 나환자들 가운데 머물면서 그들에게 봉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굴에서 기도를하며 다시 하느님의 뜻을 찾는 탐구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제는 나환자와의 만남 이전처럼 동료들 사이에, 또는 세상 가운데서 어정쩡하게 있지 않게 되었지만, 그리고 나환자들에 대한 봉사라는 분명한 일이 생겼지만 그는 아직도 하느님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를 찾아야 했다. “거기서 네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듣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직도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라는 하느님의 음성도 없었고, 마음 안에서의 확신도 없었다. 물론 하느님의 음성은 다음 시간에 보게 될 다미아노 십자가로부터, 그리고 더 나중에 사도들 파견 복음에서 듣게 되겠지만, 이 때까지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음성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림과 탐구의 이 기간에 그는 여러 가지를 겪어야 했다. 물론 이것은 어떤 일이나 사건을 겪는 것이 아니고 동굴에서의 기도 중의 내적인 겪음이다. 괴기한 인상의 여자 곱추의 연상 작용을 통해 그가 품은 좋은 생각을 포기하라는 위협을 겪어야 했고, 마음 안에서 깨달을 바를 어떻게 완수해야 할 지를 모르는 답답함을 겪어야 했고, 갖가지 생각들로 인한 혼란스러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 때의 답답함과 혼란스러움은 나환자와의 만남 이전의 그 답답함과 혼란스러움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이전의 것이 아직도 죄의 상태에 있는 자신에 대한 것이라면 이제는 자신을 벗어나 세상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고, 이전의 것이 평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끊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세상과 패배주의적으로 관계을 맺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라면, 이제는 세상과의 세속적인 관계는 청산하고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찾는 적극적인 것이리라.

 

많은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프란치스코도 회개의 과정을 겪었으며 이제 회개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회개의 과정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을 것이다:

1) 세속적 추구의 좌절 병 또는 계획의 실패 등,

2) 자신의 인생에 대한 심각한 성찰 하느님과 세속이 혼재해 있는 상태,

3) 결정적인 하느님 체험 확실한 세속과의 단절

4)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과 카리스마를 찾는 단계.

5) 자신의 사명과 카리스마를 발견한 단계.

프란치스코는 이제 세 번째 단계를 지나 네 번째 단계에 진입하는 단계일 것이다. 머지않아 그는 다미아노 십자가로부터 그의 사명을 듣게 될 것이고,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제자들의 파견 복음으로부터 그의 확실한 가리스마를 찾게 될 것이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고
같은 인간을 나쁘다, 즉 악이라고 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 복음화를 위한 주의 기도의 끝을 이렇게 바꿨습니다.
“그들을 외면하고픈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형제를 악으로 보는 악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기준이 아니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걸 기준삼고,
사랑이 아니라 단죄와 미움을 일삼는 자들을 반대하시며,
그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제자 삼습니다.

그래서 세리 레위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하시자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위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것이 죄이지 다른 무엇이 죄입니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 죄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사람들을 단죄하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단죄하는 그들이 더 죄인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고 모두 주님을 따르라고 부르심 받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구제 받은 죄인과
부르심에 거부한 구제 불능의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