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 Francis'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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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 성 안의 성지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1228년 7월 17일 프란치스코의 시성식이 지난 며칠 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현재의 대성당(Basilica)의 초석을 놓았다. 프란치스코의 유해 이전은 1230년
5월 25일에 있었다. 성당 외부는 건축된 이래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성당은 건축가 마에스트로 야고보 테데스코가 설계 건축을 맡았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아씨시에서 주요 성지로 일컬어질 만큼 웅장하다.
1층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2층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내부 오른쪽에는 성서적인 영감을 받은 그림이 가득차 있다.
옷을 벗기신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신 모습 등,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그림들이다. 왼쪽의 벽면에는 재물포기, 인노첸시오 3세의 꿈, 새들애게 하신 설교, 오상, 장례식 등 주로 성 프란친스코의 생애들이 표현된 그림들이 있다.
이 그림들은 1250-1650년까지 4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렸다.
한편,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1754년에 이 대성당을 교황 경당과 더불어 총 대성전으로 선언하였다.
성당 지하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무덩미 있는데 성인의 무덤 모퉁이에 작은 형제회 초기 회원인 안젤로, 맛세오, 레오, 루피노 형제의 휴해가, 맞은편에는 야고바 부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평생 세명의 여성만 알고 재냈다고 하는데 성인이 어머니와 글라라 성녀, 그리고 야고바 형제라고도 불린 야고바 부인이다.
성당 지하의 유물 보관소에는 그 당시 교황으로부터 인준 받은 회규 원본, 성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회교도 왕인 술탄에게서 받은 상아뿔(설교할 때 군중을 모으거나 침묵을 명할 때 쓰임), 야고바 부인이 수놓은 자수 수건 두 장이 있다. 그 중 한 장은 프란치스코가 돌아가실 때 그의 땀을 닦은 수건이라 한다.
가서 나의 집을 고처라
프란치스코 대성당 위쪽 중앙부에는 지오토아 그의 문하생들이 성인의 일대기와 기적을 그린 28개의 프레스코와가 그려져 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의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 이렇게 쓰러져 가는 것이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는 소리를 듣는 모습,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장면, 교황 이논첸시오 3세가 라테라노 대성당을 받치고 있는 프란치스코의 꿈을 꾸는 장면, 새들에게 설교하는 모습, 라베르나 산에서 기도 중에 오상을 받으시는 모습,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프란치스코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자꾸 의심을 품자 교황의 꿈에 나나타 자신의 오른팔을 들고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컵 가득히 받게 하는 그림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나와 골목길에 들어서자 조그만 스테파노 성당이 보였다. 성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임종할 때 이 성당의 종이 저절로 울려 성인의 죽음을 알렸다고 한다. 그 외에 성프란치스코가 젊은 시절 말을 타고 놀던 곳과 나환자를 마난 우물가, 그의 부모 동상이 세워진 성인의 생가가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
아시시의 중심부에서 조금 내려가면 성 다미아노 상당이 있다. 프란치스코처럼 살려고 한 성녀 글라라와 성녀 아네스 및 동료 자매들이 성인의 도움으로 세속을 버리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이 성당은 입구가 2층에 있어 일일이 사다리를 타야만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성녀 글라라와 자매들만 지낸 곳이기에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1230년, 전쟁으로 성당이 위험에 처하자 ㅅ어녀 글라라는 다락방으로 성체를 모셔오게 하였다. 글라라 성녀가 병든 몸을 이끌고 두 자매들에게 의지하여 성체를 들고 기도하자 수녀원 회랑까지 들어온 피르드리히 2세와 사라센 군인들이 물러가 수녀원과 아시시를 구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241년 사라센 아베르사의 비타레 침공 때도 되풀이 되었고 도시는 다시 평화로워졌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성당 앞의 막대기위에 그러져 있다.
이어 성 프란치스코, 성녀 글라와 그녀의 동생 성녀 아네스가 세레를 받은 성 루피노 성당을 둘러보고 글라라 대성당에 들어셨다. 성당지하에는 글라라 성녀가 밀랍되어 있는데 그 모습에서 강직한 성인의 내면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도했던 성 다미아노 십자가도 이곳에 옮겨져 있다. 십자가를 보고 있노라는 예수님이 마치 나에게 "내가 이렇게까지 너희들을 사랑한다. 그것만이라도 알아다오" 하시는 듯 한 느낌을 갔는다
글라 대성당에서 1시간을 걸어 나환자 시설과 광디의 집에 다다른다. 당대의 보통 젊은이들처럼 영화를 꿈꾸던 프란치스코는 나환자와의 만남으로 기적을 경험한다. 말을 타고 아시시의 시골길을 달리던 길에 나병환자를 만난 프란치스코는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켰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이끌려 말에서 내려와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 사건 이후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두어 시간을 더 걸어 리보토르토에 다다랐다. 리보토르토는 성인이 포르치운쿨라에 정착하기 전 첫 거처로 삽은 곳이다 초기 움막은 1455년 성모님께 봉헌된 한 성당 주변에 세워진 경당으로 옮겨졌고 지금의 모습은 여러 번의 재건을 거친 것이다. 성당 지하에는 경당이 십자가와 함께 있는데 오른쪽 방은 자는 곳, 왼쪽 방은 식당으로 이곳에서 탁발하며 살았다고 한다. 여기 아시시의 성당은 대부분 이곳 처럼 경당을 안에 두고 ㅅ어당을 지어 작은 경당들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야경
성당 전면의 넓은 광장은 1246년 이래 아시시 시가 이 대성당의 경관을 보존하기 위하여 모든 건축을 금지시킨 공간이다. 또한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당시 평야지대에서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베네딕토회 수도규칙을 따르는 수녀회들이 이 대성당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대 수도원으로 부터 300칸네(1칸나는 2-3미터)의 공간에 성당이나 수도원을 짓지 못하게 금지시켰다.
단순하고 우아한 성당 전면은 둥근 창들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동심(同心)의 아치들로 된 현관, 장미창과 삼각형의 아치들로 이루어진 두 개의 문들을 포함한 고딕 양식의 큰 아치에 의해 집중되어 있다. 가운데 부분은 네 복음사가들로 상징된 둘러진 이중의 장미창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래는 기둥들과 장미창의 다른 부분들은 성당 전면에 엄청난 화려함을 가져다준 모자이크 세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여러 색의 거대한 꽃과도 같았다. 윗부분은 가운데에 채광창이 있는 삼각형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성당 전면의 왼쪽에 1607년에 르네상스 양식의 아치들로 된 복도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예배실이 건축되었다. 이것은 '축복의 연단'이라고 불린다.
사각의 우뚝 속은 종탑은 로마 비잔틴 양삭으로 높이 53,50미터이다. 윗부분의 각 면은 세 개의 아치들로 뚫려 있다
로카 마죠레
요새가 자리하고 있는 전략상의 장소 로카 마죠레
로카 마죠레는 긴 세월 동안에 걸친 수난으로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르네상스의 군사 건축의 한 좋은 예를 보존하고 있다. 이것은 부등사변형의 벽들로 막힌 커다란 직사각형으로 축조된 것으로서 모퉁이들에는 네 개의 망루가 서 있다.
언덕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이 성은 격동했던 과거의 교황권과 황제권, 아시시와 페루지아, 마요레스와 미노레스 간의 충돌과 알력에 대한 말없는 증거가 되고 있다. 이 장소의 방문은 우리에게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활을 생각케 한다.-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무로룹토의 성 야고보 성당(San Giacomo Murorupto)
이 성당은 성이 시작되는 곳의 성벽에 직접 기대어 있다. 이 성당은 1088년 파르파의 수도승들이 아시시의 우베르티노 귀토네로부터 기증받은 땅에 건축하였다.
성 니콜라오 성당
이 성당은 현재의 우체국 자리에 있었으며 중세에는 시장에 아주 가가운 곳에 있었다. 지금 이 성당 지하실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들의 큰 관심을 끄는 장소이다. 그 까닭은 1209년 프란치스코가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와 함께 성 니콜라오 성당에 가서 세 단계, 즉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고 거룩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성경을 세 번 펼침으로써 '사도들의 제비 뽑기'를 받아들여 북음서로부터 첫 자문을 구했던 일화를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거기서 찾은 복음 내용들은 초기 형제체의 지침이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인준한 원회규의 핵심 부분을 이루었다.
성 루피노 성당(San Rufino)
아시시의 첫 번째 주교 성 루피노에게 봉헌된 현제의 주교좌 성당은 10세기부터 성인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던 장소에 자리잡게 되었다. 한 옛 전승에 따르면 412년경에 주교 바실리오는 238년에 순교했던 성인의 유해를 코스타노에서 아시시 중심으로 옮겨왔고 거기에 작은 경당을 짓도록 명하였다. 아시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 루피노 성당과 광장은 젊은 기사와 관리며, 온 시민의 집회 장소로서 시의 또 하나의 중심이었다.
성당 전면은 밑에서 위로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경판들로 구분되어 있는 아래 부분에는 상징적 동물과 기하학적인 잎무늬들과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다. 중앙문의 반월창에서 해와 달 사이의 옥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옆에 동정 마리아와 성 루피노인 듯한 초상을 볼 수 있다.
출생지
성녀 글라라는 1193년 또는 1194년 지금의 주교좌 성당을 들어오기 전 왼쪽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바로네는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아시시에서 가장 뛰어난 명문가엿던 쉬피 백작 가문 혹은 코코라노 가문 출신이었고 사쏘로소 백작의 칭호를 지니고 있었다. 글라라가 태어난 이 집은 불규칙한 형태의 것으로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많은 손질이 가해졌다. 그리고 이 집이 글라라의 아버지 파바로네의 소유였다고 신뢰할만한 사료가 전해준다. 즉 , 1148년의 공증기록에는 글라라의 할아버지 오프레두쵸가 건축상 주교좌와의 조화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그의 집의 높이를 올리지 않는데 약속했다는 내용이 있다.
세례대
한 전승에 따르면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 그리고 성녀 아녜스가 세례를 받은 세례대이다. 이것은 이전의 주교좌였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있었던 바로 그 세례대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기도하고 설교하였던 곳이다. 초기 동료의 일원이었던 실베스테르 형제는 이 주교좌 성당의 의전사제단의 한 사제였는데 1209년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체의 삶을 눈여겨보고 프란치스코의 뒤를 따랐다. 그는 형제회의 첫 사제 형제였으며 여러 해 동안 카르체리 은둔소에서 살았다.
새 성당(Chiesa Nuova)
새 성당은 1615년 세례자 요한 비니의 소유였던 한 오래된 집터 위에 건축되었다. 옛집의 흔적은 현재 반원형 후진에 남아 있다. 이 곳은 1570년 루이지의 증언에 따르면 프란치스코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집터였다. 세례자 요한 비니는 1615년 거기에 예배 장소가 건축되어지도록 옵세르반티의 작은 형제들에게 이 집터를 1,300 스쿠도에 팔았다.
성당 전면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수수하고 우아하다. 성당 안은 그리이스 십자가 형태로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네 개의 작은 둥근천장과 하나의 중앙 둥근천장이 솟아 있다. 새 성당 앞 광장의 성 프란치스코의 부모들의 상은 1983년에 세워진 것이다. 성당 내부 왼쪽 벽에 프란치스코가 갇혀 있던 독방(그 안의 프란치스코의 상은 17세기의 것임)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창살이 설치된 베르나르도네의 원래의 집문이 있다.
주교관(Vesecovado)
1207년 초에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부모와 결별하고 굽비오로 떠난다. 1225년 6월 태양의 찬가의 일부인(10-11절) 용서의 노래를 이 곳에서 작성하여 이미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작곡한 피조물의 노래에 첨가시켜 형제들로 하여금 부르게 함으로써 아시시 주교 귀도와 시장 오포르툴로 사이의 불화를 화해로 이끌었다. 현재의 주교관은 프란치스코의 회개 과정의 친구요 협조자였던 귀도 2세 주교가 살았던 13세기와는 다르다. 1832년 지진으로 사라졌다. 주교관 마당에는 성 프란치스코 탄생 700주년을 맞아 1881년에 만든 주교좌 성당의 대리석 상을 복제한 성 프란치스코의 청동상이 있다.
성모 마리아 성당(Santa Maria maggiore)
이 성당은 아시시의 첫 주교좌 성당이었다. 1216년에 프란치스코가 이 성당의 보수에 협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당 내부는 세 개의 주랑으로 나뉘어 있다. 내부는 프레스코화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1832년 지진으로 거의 훼손되었다. 왼쪽 벽의 움브리아 유파의 "성탄"이 빼어나다.
성녀 클라라 대성당
성녀 클라라 대성당 자리에는 성 죠르죠 성당이 있었다. 클라라 자매들은 1253년 성녀 클라라가 귀천하자 성 다미아노와 성 죠르죠 성당을 바꿀 것을 주교좌 의전사제단에 제안하였다. 수많은 어려움 끝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개입으로 현재의 대성당은 캄펠로의 필립 형제의 감독 아래 1257년 시공되어 1260년 주요 부분들이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위층을 본떠 건축되었다.
이 성당은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1190년경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라틴어를 읽고 쓰는 것을 배웠다. 그는 여기서 첫 번째 설교를 하였으며, 여러 차례 설교직을 행하였다. 클라라도 여기서 그의 설교를 들었다. 또한 그의 시신이 1226년 10월 4일부터 1230년 5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옮겨지기까지 제단 아래 석관묘에 안치되어 있었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장엄하게 복된 프란치스코의 시성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가 프란치스코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곳이다.
성녀 클라라 대성당의 건축 양식은 로마약식과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 외부벽들은 연분홍색과 흰색의 돌로 된 수평의 장식이 특징적이며 성당 왼쪽은 둥근 아치 형태이다. 성당 전면은 두 개의 둥근관에 의해서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즉 상징적인 두 동물에 의해 호위된 단순한 아치로 둘러싸인 출입문, 정교한 살로 된 이중의 장미창, 삼각형의 윗부분을 뚫은 구멍과 채광창이 그것이다. 종탑은 아시시에서 가장 높으며 그 체적과 높이의 훌륭한 배분 덕으로 조화와 우아함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 원본이 모셔진 경당 남쪽 봉쇄구역 안의 작은 경당은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시신이 모셔져 있던 곳이다. 십자가 경당에는 클라라 자매들이 성 다미아노에서 이 곳으로 옮겨 올 때 가져온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 진본이 보존되이 있다. 십자가 맞은편 유물보관소에는 레오 형제의 주가 덧붙여진 프란치스코의 성무일도, 성녀 클라라가 만든 긴옷, 성 프란치스코의 투니카, 성녀 클라라의 투니카와 머리칼, 성녀가 말꼬리로 만든 고행복이 있다.
1850년 9월 23일 성녀 클라라의 시신이 8일동안의 발굴 작업 끝에 상하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 관의 크기로 보아 성녀의 신장은 약 155센티미터였다. 1872년 성당 지하실 건축이 마무리되어 성녀의 시신을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또한 1893년 마틸데 로씨 원장 수녀가 봉인된 함에서 성녀의 옷들과 함께 들어있던 클라라 회규의 원본을 찾아내었다. 1988년 성녀의 얼굴과 손을 밀랍으로 봉해진 뒤 안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지하에는 놀랍게도 800 여 년 전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는 옷과 그녀의 머리카락, 구두 또한 지금까지 보존되어있다.
누오바 성당 Chiesa Nuova
성프란치스코의 생가이자 그가 숨을 거두었을 곳 이라고 추정되는 장소에 성당이 세워졌다. 새로운(Nuova: New)이라는 뜻을 가진 누오바 성당은 아씨시에서 가장 최근에(1615년) 지어진 종교적 건축물 이라고한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보았다.
작고 아담한 것 외에는 여느 성당과 다를바가 없어보이는 이곳엔, 미스터리하게 여겨지는 작은 문 두 개가 나 있다 (중앙재단이 바라보이는 곳 끝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찾을 수 있다).
문 하나에는 입구, 다른 하나에는 출구 라고 써 있는 것 같았다.
B 가 조심스레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문은 작은 마당이 딸린 집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이 조그만 집에는 따로 재단이 만들어져있고, 관람할 수 있게끔 박물관 처럼 꾸며두었는데 어떤 용도로 쓰여졌던 집인지는 알지 못하고왔다.
2000년 도 엔가? 정확한 숫자가 기억나지 않으나, 꽤 최근에 들어서 이 집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증명패가 건물 바깥쪽에 붙어있다.
사진 아래> 누오바 성당 내부에서 이어지는 작은 집
성 다미아노 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은 의사로서 순교한 동방의 두 성인 고스마와 다미아노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9세기 또는 10세기 초에 처음으로 건축되었을 것으로 본다. 성 루피노 성당에 보관된 한 사료에 따르면 이 성당은 처음에 베네딕토회 소유였다. 13세기 초에는 아시시 교구에 속했으며, 아시시 주교의 관리 아래 있었다. 1213년 초에 클라라와 아녜스 몇몇 동료 자매들이 판쏘의 성 안젤로 수녀원에서 귀도 주교로부터 양도받아 이 성당으로 옮겨왔다.
산 다미아노는 아시시 성 외곽 움브리아 평야로 내려가는 언덕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1205년 이 허물어져가는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였고, 그로부터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는 메세지를 받았다. 1206년경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은 이 황폐한 성당을 재건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벽돌을 나르고 쌓아 올린 곳이어서 성인의 손길을 더욱 느낄 수 있는 곳이며, 1224년 질병으로 이곳에 머무르셨을 때 "태양의 찬가"를 지으신 곳이기도 하다.
성당 전면은 매혹적인 작은 광장 주변의 수도원 외부와 전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다. 입구 현관은 아랫부분에 성당의 채광창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으며, 아직도 12세기 말 확장 이전의 원래 건물의 흔적을 관찰할 수 있다. 성당 안은 좁은 편이고, 아기 예수와 동정 마리아, 성 다미아노, 성 루피노의 그림이 있다. 내부에는 식당이 있는데 긴 의자와 식탁은 그 당시에 사용했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228년 글라라가 그레고리오 9세의 권유로 빵을 축복하자 모든 빵에 십자가가 새겨진 빵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글라라의 작은 정원과 작은 경당이 있다. 글라라와 자매들의 침실이 있는데 돌바닥과 돌벽에 나무 십자가만 걸려 있다.
1983년 9웍 22일 이 성당과 수도원이 "기도와 피정의 장소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작은 형제회에 넘겨졌다. 현재는 작은형제회의 움브리아 관구 수련소가 있다.
프란치스칸 성지 - 성 다미아노 성당
아시시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난 성문을 벗어나면 아래로 올리브 나무 밭이 이어진다.
평화로운 햇살 아래 흔들거리는 올리브 나무를 바라보며 그 가운데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그래서 정감이 어려있는 집처럼 정겹게 맞이해 주는 다미아노 성당을
만나게 된다.
다미아노 성당의 기원 및 역사
의사로서 순교한 동방의 두 성인 고스마와 다미아노에게 봉헌된 이 성당은 9세기 또는
10세기에 처음으로 건축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성당은 처음에 베네딕토회 소유였다. 그러다가 1212년 말 또는 1213년 초에 클라라와
아녜스 및 몇몇 동료 자매들이 이 성당으로 옮겨오게 된다.그리고 1260년 클라라의 자매들이
성녀 클라라 대성당으로 옮겨가고 이 성당은 아시시 주교 참회의 소유로 남게 된다.
다시 1380년에는 바올루쵸 트린치의 옵세르반티 형제들에게 양도되었다가 1604년 개혁파
형제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관구 중심 수도원으로 남게 된다.
16세기에는 수도원 혹장 및 수도원 마당의 건축, 임구 현관 건축 등이 있었다. 그러다가 18660년
이탈리아 정부 소유로 넘어갔고 1867년 월 일 형제들은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폐쇄된 기간에는
단 두세 명의 형제들만이 수도원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79년 리폰의 후작이며 인디에의 총독인 로빈슨 경은 이 성당을 매입하였고, 같은 해 4월 15일자
계약을 통해 개혁파 형제들의 복귀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소유자였던 로티안의
푸작 피터 케르 경은 1983년 9월 22일 이 성당과 수도원이 "기도와 피정의 장소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형제들에게 넘겼다
프란치스코의 회개 삶의 시작
오상을 받은 라베르나 산이 그의 영적 여정의 마지막이라면 그의 영적 여정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 곳, 다미아노 성당이다.
1205년 늦가을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에서 가까운 폴리뇨에서 돌아오던 중 이 성당에서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하는 도중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영적 투쟁의 길을 시작하게 되는 곳이 바로 이 다미아노 성당이니,
우리 프란치스칸들에게는 뿌리가 닿아 있는 곳이 된다고 할 수 있다.(첼리노 제2생 10)
프란치스코는 이제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어느 날 거의 다 허물어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성 다미아노 성당 근처를 걷고 있었다.
그는 성령의 이끄심에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려고 십자가 앞에 겸손하고 경건하게 엎드렸다. ...
십자가에 달리신 고상이 입술을 움직이면서 말을 하였다. 고상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였다.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가서 수리하여라."....
그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대한 애처로움이 그의 거룩한 영혼에 뿌리를 내렸고, 아직
살에는 찍히지 않았지만 경이로운 오상이 그의 마음 속 깊이 찍혔음을 경건히 추측할 수 있다.
성당에 얽힌 이야기들
이 다미아노 성당은 또한 클라라의 자매들의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한 곳이며,
사라센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미 쇠약한 클라라 성녀가 자매들의 부축을 받으며 성체를
모시고 회랑까지 나아가 기도하면서 아시시를 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이 포르치운콜라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그의 시신이 죠르죠 성당을
옮겨가는 도중 글라라 성녀가 머물고 있는 이 성당에 멈추어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곳이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지만 1228년 어느 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청으로 클라라가 빵을
축성하자 모든 빵에 십자가가 새겨진 사건을 표현한 두 폭의 프레스코화가 지금도 식당의 벽면에
남아 있다.
태양의 찬가 가 만들어진 곳
오상으로 인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성인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세주를 사랑으로 따르는 길에서 오랫동안 단련되어 많은 병과
고통에 신음하는 자기 육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눈이 멀게 되어 성인은 형제 태양의 빛을 못보고 있었다. 오히려 태양의 빛이 그의 눈에게
아픔을 주었고, 주위의 소리와 소란 그리고 피조물 모두가 그를 괴롭히기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밤을 지내고 나서 성인은 형제들을 불러모은 후에 사랑과 기쁨의 무아경
속에서 그들에게 태양의 노래를 가르쳤을 것이다. 이 곳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러니까 아마도 1225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눈병 치료를 위해 리에티로 떠나기 전까지 이 곳에 머물면서 태양의 찬가의 일부 11-9절
"태양의 찬가"를 썼던 것이다.
[완덕의 거울 100]
그 이튿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기 동료들을 보고 "나는 내 질병과 고통 때문에 기뻐해야
하고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하느님이신 성부와 성령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 언제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큰 영광을 허락하셨고 당신의 보잘 것 없는 종인 나는 아직
이 현세에 살고 있는데도 당신의 왕국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송하며 우리의
위안을 얻고 이웃을 제도하기 위하여 나는 새로운 <태양의 찬가>란 것을 짓고 싶습니다.
잠시 후... 그는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자비하신 주님..."하고 중얼거리더니 그 말에 멜로디를 붙여 자기
동료들에게 암송하여 부를 수 있도록 가르쳤다.
다미아노 십자가
1205년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주님으로부터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 하는 음성을 들었다(2첼라노 10). 그는 즉시 이 성당의 보수에 착수하였고, 이후 성 베드로 성당과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도 보수하였다. 주님의 이 말씀이 교회 재건을 의미함을
그는 나중에 깨닫게 된다. 따라서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삶에 있어 중대한 전기를 마련해 준 이 십자가는
타우 십자가와 더불어 프란치스칸들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이 십자가는 1260년 성 다미아노의
클라라 자매들의 이전과 더불어 성녀 클라라 대성당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다.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Portiuncula - '작은 몫'이란 뜻)포르치운쿨라를 초기 전기들은 작은 집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 그와 첫 동료들이 갈대와 진흙으로 지은 움막에서 머물렀다. 포르지운쿨라는 프란치스코 생애와 형제회의 중요한 사건들은 이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
1211년 프란치스코는 수바시오 산의 베네딕토회의 아빠스인 테오발도로부터 포르치운쿨라를 영구히 점유할 허락을 공식적으로 얻게 된다. 프란치스코 사후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 주변에 여러 건물들이 덧붙여졌는데 그 가운데 반원형 후진에 맞붙어 있는 형제들의 기도를 위한 가대의 주름진 선, 오른쪽의 한 경당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새 대성전의 초석은 1569년 3월 25일 아시시의 주교 필립 제리에 의해 놓여졌다. 공사는 트리덴티노 공의회 폐막 때 밝힌 도미니코회 출신 교황 성 비오 5세의 원의에 따라 건축되었으나 1832년 지진으로 경당의 둥근천장을 흠없이 남기고는 대성당의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다.
1836년 2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교황서한을 통해 루이지 폴레티에게 복구 공사를 위임했고 루이지는 1840년에 완공하였다. 대성당 정면은 성 프란치스코 서거 700주년을 맞아 건축가 체사레 바싸니가 설계한 현재의 신 바로코 양식의 회랑이 건축되었다. 교황 성 비오 10세는 이 대성당을 위해 "전 작은 형제회의 머리요 어머니"라는 칭호를 확인하였고, 교황 경당과 더불어 이 성전을 총 대성전의 지위로 부상시켰다.
작은 경당 포르치운쿨라(4m 7m)는 작은 형제회의 못자리요 이 대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가장 사랑햇던 이 곳은 그만큼 그분과 초기 동료들, 작은 형제회의 삶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던 곳이다. 성당 전면은 프레스코화로 되어 있으며 위쪽에는 "프란치스코야, 너의 청을 받아들인다"라고 적혀있고, 아래쪽에는 "이것은 영원한 생명의 문이다"라고 적혀있다.
성당 전면에는 네 폭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중에는 천사들에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가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들어 하느님께 청해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에게 전대사(완전한 용서)를 주게 하였다는 내용의 그림도 있다.
성당 오른쪽으로 난 회랑을 지나다보면 웅지를 감싸고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 상이 있다. 그런데 신비스럽게도 하얀 비둘기 두마리가 항상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 성당을 나와 프란치스코의 장미정원이라 불리는 곳을 둘러보았다. 이 정원의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성인이 기도 중에 마귀의 유혹을 받자 유혹을 떨치려고 장미덤불에서 알몸으로 뒹굴었는데 그 뒤로 그의 몸이 닿은 곳은 가시 없는 장미덤불로 변해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27살 때 손수 벽돌을 찍어 수리한 이 소성당에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 10,9-10)는 복음 말씀을 깨닫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요 원하던 바요,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것"이라며 즉시 신발을 벗어버리고 지팡이를 치우고 한 벌 옷에 만족하는 청빈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프란치스코는 또 이곳에서 첫 동료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한다. 그리고 늘 소망했던 대로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3일 이곳에서 선종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 포르치운쿨라를 '성 프란치스코의 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포르치운쿨라에 들어섰을 때 마침 한국에서 프라도회 사제로 살았던 프랑스 생드니교구장 오영진(올리비에드 베랑제) 주교가 교구 사제단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합창하는 사제들 목소리가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었다. 미사후 순례단을 본 오 주교는 우리말로 "반갑습니다"라며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좋은 순례가 되길 빌며 축복해 주었다.
오 주교 일행을 환송하고 소성당에 들어갔다.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을 그대로느낄 수 있는 성당이었다. 장식없는 벽면과 작은 돌제대, 언제 그렸는지 모르겠지만 소박한 제대벽화가 전부다.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듯이 포르치운쿨라에서는 입고 있는 옷 그 자체가 사치인 듯 싶었다.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얼른 성당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미련이 남아 고개를 돌려 포르치운쿨라를 다시 한번 보았다. 그러면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모든 것, 하늘의 태양과 바다의 별, 땅 위의 나무와 나는 새들, 그리고 나환자에게까지 "형제, 자매"라며 사랑할 수 있었던 그 힘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바로 포르치운쿨라처럼 가식없는 삶. 자신을 드러낼 만한 어떠한 꾸밈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득 차 있는 실체! 그것이 성 프란치스코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열을 식히기 위해 성당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구에 지난 1986년 교황청 주최로 이곳에서 열린 '세계종교지도자회의' 사진 동판이 붙어 있었다. "그래 2000년 대희년을 기념해 열린 세계종교지도자회의도 이곳에서 열렸지!". 아시시가 평화 도시임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순례를 떠나기 전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소책자를 읽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어록 중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어 묵상용으로 취재 노트에 옮겨 놓은 것이 있었다.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까르첼리 은둔소
까르첼리 은둔소(Eremo delle Carceri)는 해발 791미터에 자리잡고 있다.
1205년과 1206년 사이에 이 산에 프란치스칸의 삶이 자리잡게 되는데, 젊은 프란치스코가 기도를 통하여 그의 삶의 길을 찾기 위하여 자주 찾던 바로 그 곳이다. 그 때에는 이웃 성 베네딕토 수도원 부속의 작은 은둔소 하나와 그 주변에 흩어진 몇 개의 동굴들만이 있었다. 그 이후부터 초기 형제들이 침묵과 기도를 하기 위하여 자주 이 곳을 찾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1210년(또는 1211년)에 사순절을 여기서 보냈다. 1211년 실베스테르 형제가 이 곳을 찾았는데,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관상과 활동생활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클라라와 그에게 자문을 청했기 때문이다(대전 12,2; 잔꽃 16).
126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이 은둔소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수도원(Sacro Convento) 소속이었다. 그 때에는 이미 몇 개의 방들 또는 적어도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몇 개의 동굴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 초에 이 곳은 요한 22세의 분노로부터 아시시 시의 보호를 받은 프라티첼리라는 이단 그룹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1340년에 오디의 제라르도 총봉사자에 의해 추방되었다. 1370년에서 1373년 사이에는 바뇨쏘 트린치의 바올루쵸 형제에 의해 추진된 개혁 센터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때부터 15세기 내내 카르체리는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여기에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 즉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마르케의 성 야고보, 복자들 안토니오 포르넬리오, 스트론코네의 요한, 스트론코네의 안토니오(그는 여기서 30년을 살다 1461년 성 다미아노에서 죽었다), 펠트레의 베르나르디노, 바르나바 마나쎄 등이 머물게 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회규준수’(Osservanza)와 초기의 정신에로 되돌아가려는 옵세르반티 운동이 일어났다.
카르체리 은둔소는 프란치스칸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은둔소들(코르토나의 첼레, 몬테카살레, 포지오 부스토네, 그레치오, 폰테콜롬보, 나르니의 스페코, 스폴레토의 몬테루코, 체토나 등) 중의 하나이다.
옛 수도원을 나와 왼쪽으로 향하면 작은 15세기의 성당(2)이 나온다. 이 성당은 ‘성 베르나르디노 경당’이라고도 하는데, 그 벽에는 14세기 첫 중반에 그린 지오토 유파의 ‘십자가 형’이 있다. 이어지는 옛 경당(3) 또는 초기 은둔소라고 부르는 곳은 성 프란치스코 시대에 이미 있었던 곳으로서 주변 동굴들에 거처하던 초기 형제들이 공동기도를 바치던 곳이다. 제대 위에는 십자가형을 표현한 13세기의 프레스코화 위에다 1506년에 그린 아기 예수와 동정녀 마리아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프레스코화가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동굴은 성 프란치스코의 돌 침대와 경당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동굴의 출구에는 동굴을 막는 ‘악마의 구멍(Buco del diavolo)’이라 부르는 붉은 돌이 있다.
숲 위쪽 가까운 곳에 맛세오, 루피노, 그리고 작은 다리를 건너 숲 아래쪽에 레오, 베르나르도, 실베스테르 그리고 복자들 에지디오, 스펠로의 안드레아(†1254), 스트론코네의 안토니오 형제 등이 자주 찾았던 동굴들이 있다.
한편, 막달레나 경당 오른쪽의 다리 부근에는 1882년에 빈첸소 로시뇰리의 청동 작품 ‘산 비둘기를 한 소년에게서 놓아주는 프란치스코’(잔꽃 22 참조)가 있다. -발자취를 따라서에서 발췌-
그레치오
리에티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해발 705미터의 조용한 마을 그레치오(Greccio)는 중세의 유서 깊은 마을로서 라체로네(Lacerone)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50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곳에서 “가난의 풍요로움”을 찾을 수 있었으며, 이 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인은 이 마을을 아낌없이 칭송하면서, “나는 그 어떤 도시에서도 이 그레치오라는 작은 마을에서만큼 많은 회개가 이루어진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페전 34). 이 곳 주민들은 아직도 성인의 이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223년 가을 프란치스코는 로마에서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회규의 인준을 기다리며 로마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마침내 11월 29일 회규 인준을 받았다. 팔레스티나 순례의 인상을 생생하게 가슴속에 보존하고 있는 그는 교황 알현 때에 성탄을 보다 생생하게 지낼 수 있는 허락을 청했다. 폰테콜롬보에 돌아온 그는 그레치오의 요한을 불러 부탁을 하였다. 성인은 생생하게 강생의 신비를 재현하였으며, 전승에 의하면 성탄 자정 미사 중에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께서 눈을 뜨셨다고 한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신앙의 눈으로 분명히 살아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이 구유의 기적은 가슴 안에 잠자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워, 신자들이 그분을 살아 계신 모습으로 뵙게 되기를 초대하고 있다.
이 곳을 순례하는 신자들은, 성지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곳 특성에 맞게 성탄 미사를 봉헌한다. 또한, 새 성당에서 구유 동굴까지 아기 예수님을 모시는 행렬도 특징적이라 할 수 있겠다. 전례나 행렬이 없을지라도 신자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성당 혹은 구유 동굴 혹은 프란치스코의 침실에 잠시 머물며 묵상하는 모습은 강생의 신비에로 우리를 부르는 또 하나의 초대장이다. / 내용은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에서 발췌
리보토르토(Chiesa Nuova)
리보토르토는 꼬불꼬불한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수바시오 산에서 흘러나와 성당 옆을 지나가는 개울에서 그 이름을 취하고 있다. 처음에 리보토르토에는 양우리가 있었는데 성 프란치스코는 1209년 4월 16일 퀸타벨레의 베르나르도, 피에트로 카타니 형제와 함께 그의 거처로 삼았다. 4월 23일 성 죠르죠 축일에 아시시의 에지디오가 새로이 합류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에지디오 형제와 함께 마르케 지방으로 첫 사도적 선교를 떠났다. 그리고 1209년 여름 선교를 마치고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왔을 때 사바티노와 모로코, 카펠라의 요한 필립보 통고가 그에게 합류하였다. 이어 그들은 같은 해 가을 또는 겨울에 리에티 계곡에서 제 2차 선교 활동을 하고 1210년초에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왔다. 이 때 산 코스타노의 요한, 바르바로, 베르나르도 비질란테, 안젤로탄그레디가 합류하여 12명이 되었다.
그들은 리보토르토에서 극도의 가난과 형제애를 추구하면서 머물렀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시시의 회개자'라 불렀다.리보토르토에 모여 사는 최초의 그룹은 세상의 걱정에서 해방되고 불타는 신심과 열성으로 성령의 열정을 뚜렸하게 체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형제들은 그들의 젊은 창립자가 성령의 계시로 자기들의 숨은 행동과 생각까지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210년 봄 형제들의 수가 증가했을 때 프란치스코는 생활양식의 인준을 교황에게 청하기 위하여 리보토르토로부터 형제들과 함께 로마로 갔고,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구두 인준을 얻은 뒤 형제들은 새로운 거쳐를 찾아야만 하였다.성 프란치스코와그의 첫 동료들 이후에도 복자들 외피다의 코라도 형제와 에지디오 형제는 여러 해 동안 여기서 거룩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1300년대 후반에는 사라센인들에게 순교당한 세베니코이 복자 니콜라오도 여기에 거처했었다.
초기 움막은 1455년 프란치스코 사카르도 형제에 의해 경당으로 옮겨졌다. 그 경당은 성모님께 봉헌된 한 성당 주변에 건축되어진 것이다. 1491년 교황 식스토5세는 좀더 큰 성당의 건축을 요구하였고, 그것은 1640년 경에 완공된다. 이 때까지 아주 조그마한 수도원이 있었는데 5년 뒤에 큰 수도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어 1854년 2월 11일의 지진 피해로 베르나르도 티니 형제의 설계에 따라 신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909년 세 개의 주랑을 가진 현재의 성당이 이전의 잔재 위에 지어졌다. 1926년에는 옛날 모양에 따라 움막이 복구되었다.
성당 입구 문 위에는 "이 곳이 작은 형제들의 시초(HIC PRIMORDIA FRATRUM MINORUM.)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 성당이 대성당이며 교황 경당임을 선언하는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칙서가 새겨져 있다. 중앙에는 1926년 복구와 더불어 14세기의 관점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오른쪽 성 프란치스코의 거처에는 성인의 방을 상기시켜주는 눕혀진 목각상이 있다. 2. 중앙에는 전면에 부조가 걸려 있는 작은 경당이 있다. 3. 왼쪽은 주방과 불피우는 방이 있다. 성당의 복구 과정에서 19세기의 회화로 장식된 대리석들을 잃게 되었다. -발자취를 따라서에서 발췌-
포지오 부스토네 성지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성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을을 끼고 있는 곳이 바로 포지오 부스토네이다. 마을 골목을 지나다보면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리에티 (Rieti)를 중심으로 라 포레스타, 포지오 부스토네, 그레치오, 폰테 콜롬보가 위치해 있는데, 포지오 부스토네는 라 포레스타를 먼저 방문하고 가는 것이 편하다.
포지오 부스토네는 1209년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동료 수사들과 함께 고향의 반대자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Assisi로부터 나와 도착한 곳이다. 이곳 산위에서 성인은 기도하였다. 성인은 이곳에서 만나는 주민들에게 “좋은 사람들, 안녕하세요”라는 단순한 인사를 나누곤 했다. 수 세기 동안 프란치스코의 이 인사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단다.
벽화 |
성지 뒤편 높은 산에 있는 외진 두 동굴에서 성인은 기도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인은 신적 명상 중에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았으며 동료 수사와 지원자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것을 계시 받았다.
라 포레스타 성지에서 한참 들판 길을 굽이굽이 가다보면 멀리서 포지오 부스토네 산위 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 성지가 위치해있는 산꼭대기 중간에 있는 놀이터 중앙에는 평야를 내려다보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 동상이 세워져있다. 당시 동료수사들을 피해 이곳에 온 프란치스코 성인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시나무가 성인의 다리를 칭칭 감고 있다. 동상 주위에 동네 젊은이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가 외지인인 우리가 다가가자 ‘차오!’ 하며 인사를 한다. 이탈리아 젊은이들은 놀이터, 광장은 물론 동네의 후미진 작은 공간이라도 상관없이 모여 주로 입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이곳을 지나 버스가 서는 공간 맞은편에 있는 벤치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나와 한담을 하고 있었다. 경사가 심한 길을 차가 낑낑대며 오르자 막바지에 확 트인 공간이 보이며 성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가 이곳 성지를 방문했던 날은 이곳에서 마을 주위에 사는 젊은이들을 위한 사순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피정에 참석하려고 젊은이들이 한두 명씩 무리를 지어 성지로 올라왔다.
성지순례는 지상에 있는 성당을 거쳐 내부 경당, 지하 동굴 등을 지나서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끝나는데, 바로 그 순간 눈앞에는 절벽이 나타나고 그 아래에 펼쳐진 녹색의 들판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건물 외벽으로 난 계단을 올라오면 성지입구와 다시 만난다. 경당을 지나고 경사진 복도를 내려가다 보면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도했던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듯 말듯 한 동굴이 있다.
성당 |
동굴 |
성지 출구 외벽 |
성지에서 본 파노라마 |
성지 왼편에 있는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십자가의 길을 할 수 있도록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각기 다른 작가들이 한 처씩 맡아 제작했다.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동산 꼭대기에는 하느님께서 엎드린 프란치스코 성인을 다정하게 당신 품에 안는 동상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네 죄는 용서받았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땅에 철퍼덕 앉아서 하느님과 성 프란치스코의 팔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면 그대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품속인 듯 푸르른 하늘로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이 순간을 포착하려고 카메라로 한 컷 찍었다.
십자가의 길 |
네 죄는 용서받았다 |
하느님의 자비 |
동산에서 내려오는데 성지 마당에 고백성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자전거를 타고 사진도 찍었다. 동네 아저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성지 광장에 있는 젊은이들 |
집에 돌아와 컴퓨터에 찍은 사진들을 옮기면서 보니 날씨가 흐려 바깥 풍경사진들이 너무 민민했다. 해서 시간을 내어 한 번 더 성지를 방문하기로 했다. 두 번째 방문한 날은 날씨가 청명하였으나 우리가 성지로 출발한 시간이 늦은 오후여서 제발 구름이 하늘을 가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다행히 성지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하늘은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았던 베르나 성지를 빼고는 다른 성지를 방문할 때마다 한 번에 원하는 장면들을 찍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최소한 두 번 같은 곳을 가야했다.
출처: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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