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17장 선교 현존과 활동

Margaret K 2017. 12. 19. 20:13

제17장

선교 현존과 활동


크리스천 선교 역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회칙」에서 이교인들에게 가는 선교사에 대해 특별히 명시한 최초의 창립자이며 그로 인해 세계 복음화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세기 후반에 유럽의 민족들은 대수도원을 통해, 대수도원으로부터 수도자들에 의해 복음을 받았고 문화를 받았다. 이같은 크리스천 형성은 소위 크리스띠아니따스(Christianitas), 즉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도성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도성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봉건체제를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었으며 제국과 성직계, 즉 황제와 교황의 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이 크리스천 도성 내부에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었고, 이단은 그 사회의 기초 자체를 흔들리게 하는 반역죄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도성 경계 밖에 이교인들이 있었고 이들을 개종시키는 것은 정복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교인들 중에 유럽을 계속 위협하면서 그의 경계선에 또 다른 사회적, 종교적 세계가 퍼져 있었는데, 이들은 사라센인들이었다. 십자가와 초생달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의 깃발들이었다.

프란치스코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나타난 시기에 그리스도교 도성의 개념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통치하에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백 년 이상의 십자군 기간은 각각 굳게 뭉친 양쪽 세계간의 대립과 증오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서로 알기 위해서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래서 프란치스코는 크리스천 백성, 특히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인 새로운 민중의 생각과 마음속에서, 같은 지존하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세계간에 무기가 아닌 다른 통교 방법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실은 십자군 운동은 민중의 호감을 잃기 시작할 때이다.


프란치스코의 선교여행의 의미

프란치스코가 더 넓은 세계를 향한 작은 형제회의 활동 반경에 대한 사명을 얼마나 빨리 깨닫게 되었는지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파견의 복음에서 복음적인 사명을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세속을 떠남으로써” “세상을 두루 다니기” 위해 세상의 재물에 대해 해방된 작은 형제들의 생활과 활동의 영역이 세계 전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이것을 확인하면서 말한다: “주님이 여러분을 온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 여러분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EpOrd 9).

프란치스코가 동방으로 떠나려고 한 것은, 형제회가 창립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1212년 말경으로 간주된다.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다. 다음해는 서방의 길을 택하여 스페인의 회교들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병이 나서 선교여행은 실패로 끝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했다.

마침내 1219년 총회에 모인 형제들은 이교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을 조직적으로 계획했다. 네 개의 선교사들의 그룹이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 세 그룹은 그리스도인들과 회교들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세 개의 전선에 파견되어 이곳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 한 그룹은 스페인을 통해 모로코로 가는 길로 떠났고, 엘리아 형제를 인솔자로 하는 둘째 그룹은 시리아로 떠났으며, 프란치스코 자신이 인솔하는 셋째 그룹은 바다를 건너 그리스도교 군대가 포위하는 다미에따(Damieta) 성읍을 통해 에집트로 떠났다. 마침내 에지디오 형제가 인솔하는 넷째 그룹은 상업의 중심지인 튜니지아를 목적지로 했다.

에집트 여행에서 프란치스코는 술탄을 만났다. 프란치스코가 멜렉 엘 카멜(Melek-el-Kamel) 술탄에게 한 방문만큼 사부님 생애에서 문서상이나 객관적으로 잘 증명된 사건은 없다. 토마스 첼라노와 지아노의 요르단과 그리고 프란치스코를 이 여행에서 동반한 일루미나또 형제의 보고를 받은 성 보나벤투라 외에도 수도회 밖의 직접적인 증인으로서 비트리의 야고보와 에르누울은 이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선교여행의 의미, 특히 술탄과의 만남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도회 내의 기록자들이 해석한 것을 잊어버려도 된다. 이들은 프란치스코의 선교여행을 실패로 보고 있다. 성인이 술탄을 개종시키는 일이나 순교의 왕관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로 보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선교여행을 십자군 배경에서 해석하려는 다른 자료도 배제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이 사건에 관한 전설상의 이야기들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 사실 자체이다.

프란치스코는 어떤 보호 추천서나 증서를 소지하지 않은 작은 자의 방침에 따라 누구의 이름으로 이교인들 가운데로 가지 않고 교황이나 왕의 사절 직무를 받아 가는 것도 아니었다. 원군을 데리고 교황사절로 얼마 전에 도착한 벨라지오 추기경은 프란치스코의 계획을 후원하기는커녕 그리스도 교회의 이해관계를 위험에 직면케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홀로 가는 것이고 한 인간으로서,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는 것이다. 술탄의 경비병들이 그를 붙잡을 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당신의 주인을 알현하도록 그분에게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프란치스코는 군주 앞에 나타날 때에, 그가 종교가 다르고 적이며 대립 세계의 지도자라는 점을 상관치 않고 그를 싸고 있는 호화로운 주변에 당황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술탄을 하나의 인간으로 직면한다. 그리고 술탄도 여느 인간처럼 구원의 길을 정의롭게 찾고 있는 사람인 줄 확신하여 성인은 그와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나눴다.

모든 역사 자료가 한결같이 이 방문의 근본적 성공에 동의한다: 프란치스코가 술탄의 호의와 우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비트리의 야고보는 술탄이 프란치스코에게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드시는 법과 신앙을 계시해 주시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덧붙인다.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에 돌아올 때 자기의 모험적 여행이 실패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렇다, 이 여행은 무엇보다도 화해와 평화의 예언적인 증거로서 큰 상징적 가치가 있다. 가장 큰 성공은 크리스천 자료들의 말대로 “온화한 성품”을 지닌 회교도 지도자와 영적으로 마음이 통했다는 것이다. 당대의 한 아랍인 기록자가 전한 바에 의하면, 멜렉-엘-카멜(Melek-el-Kamel) 술탄은 파크르-엘-딘 파리시(Fakr-디-Din Farisi: Francesco D'Assisi의 변형?)라고 불린, 성덕이 높은 수도자의 영향을 받아 정신적으로 크게 변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에집트의 술탄과 십자군의 총사령관인 예루살렘 왕 브리엔네(Brienne)의 요한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는데, 이것도 프란치스코의 선교여행의 성과가 아닌가 짐작된다. 후에 브리엔네의 요한 왕은 작은 형제회에 입회했다.

이 선교여행에서 돌아오면서 프란치스코는 죽을 때까지 자기를 괴롭힐 눈병도 걸려왔지만 마호메트 추종자들 가운데서 지켜지는 종교적인 가치도 발견하고 왔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회교승이 사원의 탑 꼭대기에서 기도시간을 알리자 신도들이 하루에 몇 번씩 머리를 땅에 대고 흠숭행위를 거행하는 것이었다. 실은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배운 대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보내신 편지」를 통해, 종소리나 다른 신호를 통해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하느님께 찬미드리도록 초대하는 관례를 온 크리스천 백성에게 널리 보급하였다(참조: 떾ㄷㅊ 7-8; EpCus 18).


회칙에 명시된 선교활동

창립자 프란치스코가 1221년 회칙에 삽입한 제16장은 위에 말한 세 개의 선교 여행의 체험을 요약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각 선교여행은 장래를 위해 유익한 교훈을 제공하였다. 튜니지아에 도착한 선교 그룹은, 모슬렘인들과 긴장관계를 피하려는 그리스도인들 자신들에 의해 즉시 귀향하도록 강요되었다. 모로코로 여행을 떠난 다섯 명의 형제들은 순교할 열망에서 세빌랴에 도착하자마자 마호메트교를 멸시하고 마토메트를 모욕하기 시작하여, 즉시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로코 수도에 끌려갔다. 마침내 1220년 1월 16일, 군주(Abu-Yacub, Emir-디 Mumeniu)는 그들의 목을 치도록 명하였다. 순교소식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기쁨에 넘쳐 “이제야말로 정말 다섯 명의 참된 작은 형제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외쳤다. 시리아로 떠난 형제들의 선교활동은 십자군들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어려움 없이 뿌리를 내렸고, 얼마 안 가서 선교사들은 동방교회 지도자들과의 협상에 성공하였다.

결과적으로 프란치스코의 선교여행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다른 형제들의 선교여행에는 부정적인 면들이 적지 않았다. 비트리의 야고보는 성 프란치스코가 술탄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반면 다른 형제들이 십자군이 정복한 지역에서 사라센인들에게 설교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사라센인들은 작은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신앙과 복음적인 교리를 설교할 때에 그들의 말을 기쁘게 듣기는 했지만, 마호메트를 공격하기 시작할 때면 그들을 거짓말쟁이, 배반자라고 욕하며 그들을 때리려고 들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선교체험과 함께 다른 형제들의 경험도 고려하여 회칙에서 선교의 목적, 선교 소명의 의미 그리고 이교인들 가운데서 따라야 할 사목적 방법을 정하고자 했다.


1. 프란치스칸 선교

제16장은 “형제들이 세상을 어떻게 다닐 것인가”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는 제 14-15장 다음에 놓여있다. 창립자의 생각에 의하면 “사라센인들과 이교인들에게 가는” 선교 사명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파견된 작은 형제들의 일반적인 복음화의 사명의 당연한 결과이며 일부이다.


2. 선교의 소명

공통적인 복음적 소명과 마찬가지로 「제2회칙」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교인들에게 가는 소명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데에서 유래된다. 선교 소명은 특별한 부르심이므로 이것을 받은 형제는 실행으로 옮길 권리가 있다. 관구장의 역할은 자원자가 파견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뿐이고, 그가 적합하면 허락을 거절할 수 없다. 프란치스코는 “살과 피가 섞이지 않은 가장 높은 순명은 그들의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 혹은 순교의 열망으로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비신자들에게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허락을 요청하면 하느님께서 이를 가장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3. 근본적인 방법: 크리스천 증거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의 선교 방법론에서 두 개의 방법과 시기를 구분한다.

물론 두 방법에서 “영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미 14장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영적으로 산다”는 의미는 “사람들 가운데서 살기로” 한 근본적 선택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결과이다.

첫째 방법과 시기는 실은 두 「회칙」에서 정해진 대로 작은 형제가 세상을 어떻게 다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침을 재확인하는 것인데, 즉 “말로서 논쟁을 벌이거나 다툼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이와 반대로 ··· 온유하고 화목하며 겸양하고 양순하며 겸허해야”한다는 것이다(RB 3,10-11).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선교사 형제들에게 권한다: “한 가지의 방법은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들에게 복종하고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RnB 16,6).

참된 복음적인 사람은 논쟁을 벌이거나 오류에 대해 남을 설득시키려고 하지 않고, 더군다나 자기를 받아주는 나라의 종교, 문화, 풍습을 멸시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자기가 만나는 체제에 적응하려고 한다.

아마 1226년 3월에 모로코의 형제들을 위해 교황으로부터 특전을 얻으려고 힘쓴 사람은 프란치스코 자신인 것 같다. 이미 이때에 성인이 제시한 벙법 덕분으로 모로코에서 형제들의 현존이 굳혀지고 있었는데 성직자의 삭발도 하지 않고 다니는 것과, 아랍인들의 풍습에 따라 털을 깎지 않는 것, 그리고 돈 받고 사용하는 것 들을 허용하였다. 이것을 볼 때 모슬렘 가운데서 “영적으로 살기”위해 사회적인 토착화 문제를 신중히 고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적합한 시기에 말씀을 전하는 일

“다른 방법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이 ··· 하느님을 믿도록, 또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RnB 16,7).

선교사의 예언적 현존은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길을 닦는다. 복음화의 직접적인 시기가 왔다고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조바심이 아니라 하느님이 정하시는 유익한 때이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 자체도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의 문화적이고 영적인 상태에 달려 있다: “이 가르침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다른 가르침들을 비신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RnB 16,8).


5. 순교할 마음

옛 프란치스칸 사료에서 선교적 소명은 오로지 순교를 위한 소명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라센인들에게 가려는 프란치스코의 목적도 이런 측면에서 보고 있다. 회칙의 말씀은 이같은 사상을 반증하고 있지만, 사실 당대의 상황에서는 이교인들에게 간다는 것이란 생명을 바칠 계기가 된다는 것이 하나의 가정만이 아니었다. 16장 시작의 성서 구절이나 특히 후반부에 나오는 구절은 전적으로 순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실은 프란치스코에 있어서 순교할 마음은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이다: “그리고 모든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봉헌했고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 때문에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원수들에게도 자기 자신을 내놓아야 합니다”(RnB 16, 10-11). 후에 성 보나벤투라는 기술한다: “우리 수도회에 입회를 청하는 사람은 순교할 마음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글라라와 성 다미아노에서 함께 사는 자매들은 사라센인들에게 떠난 형제들의 선교여행, 특히 프란치스코의 선교여행의 소식을 염려와 감동과 관심 속에 기다리고 있다가 프란치스코가 돌아오자 그들의 기쁨은 말할 나위 없이 너무나 컸었다. 성녀 글라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열망으로, 갈 수만 있다면 선교지에 가서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글라라 자매는 성령의 열정으로 충만해 있었으니,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의 영예를 얻기를 자원하였는데, 모로코에서 몇 형제들이 순교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도 거기 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 원의를 표현하였다.” 이날은 성 다미아노에서 감격스러운 축제 분위기였다. 이때 글라라의 나이는 젊음의 활기를 띤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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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띠아니따스(Christianitas), 즉,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도성 건설”의 시대가 지난 지는 이미 오래다. 오늘날 사람들을 “크리스천 세계”와 “이교도의 세계”로 구분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미 지리상으로나 문화상으로 “구원의 보편적인 신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교회가 어디에 상존하든 선교적 교회다. “외방선교”라는 표현도 의미를 잃어간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우리 모두에게 선교의 보편적인 인식을 되찾고 회개의 메시지가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회개의 메시지는 “세상 어디서나 현재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모든 국가와 모든  국민들”(RnB 23,7)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교의 효과를 이교인들 가운데서 행해지는 진실한 크리스천 생활의 증거에 내맡기고, 이렇게 해서 복음의 선포나 교회의 건설을 위해 땅을 준비한다는 프란치스코의 선교 작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공표한 「교회의 선교활동에 대한 교령」(Ad Gentes)에서 제시한 가르침과 꼭 들어맞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