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15장 모든 피조물에 열려 있는 형제적 공동체

Margaret K 2017. 12. 18. 21:49

제15장 


모든 피조물에 열려 있는

형제적 공동체


인간은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자기 삶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하등 창조물 세계에 대해 해방을 얻으려는 수고스러운 여정에 있어, 철학이나 종교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창조물 세계 앞에서 항상 올바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주위의 창조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목적을 알지 못해 자기 스스로 물질세계 속에 빠져버리는가 하면 때로는 창조물에 신령이 있다고 믿고 태양, 산, 나무, 짐승 등을 우상으로 숭배하였다. 혹은 창조물을 범신론(pantheism) 사상으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소수의 극단주의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감정이 매우 높은 단계에 이를 때 때때로 하등 창조물에 대하여 비관적인 태도가 발생하였다. 고대에 발생한 마니교와 중세기에 다시 나타난 카타리파 사상은 크리스천 영성에 침투해 이원론을 통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이원론은 물질을 본질상 악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물질에서 해방을 얻으려면 자신이나 외부 창조물 안에 있는 물질을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서적 계시는 사람에게 모든 창조물을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의 업적으로 보도록 가르친다. 예수는 창조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 세계 역사 안에서 아버지의 섭리, 인간적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도록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리스도 교회가 이 점에 관하여 전해 온 메시지는 디모테오 전서 4,4,에 요약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론 우리가 신앙을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창조세계가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 자체의 탓이 아니라, 창조세계를 악용하며 더럽히는 인간들의 죄 탓이다. “실상 창조물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드러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19). 성 바울로가 세상에 관하여 가지는 비전에 의하면 창조된 우주 전체가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작이요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다. 만물이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의 머리가 되실 것이다(에페 1,3-14 참조).


창조세계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해석

아르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피조물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정말 그렇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첫째 책, 근본적 메시지와 계시는 당신의 창조사업이다. 그래서 인간이 이 최초의 책을 읽을 줄 알면, 볼 수 있는 외적인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올라갈 수 있다(로마 1,20 참조).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창조라는 책을 읽을 줄 아는 기술을 가진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노가 시작하여 성 빅토르의 학파를 거쳐(12세기) 성 보나벤투라에게 내려온 신비신학 학파의 사상에 의하며, 창조된 세상은 상징적 표징으로 심오한 신비를 나타내는 성사(secramentum)이다. 비유로 말한다면, 창조된 세상은 서예로 쓰어 있는 책이다. 사람이 죄가 없다면 이 글씨를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오관과 감각과 “에고이즘”에 사로잡힌 현 노예 상태에서 서예의 장식만 감상하려고 할 뿐 그 책에 기록된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다. 다른 비유를 사용하자면 세상은 암호로 되어 있는 책이다. 타락한 사람은 그 암호의 풀이를 알아야 그 책을 읽을 수 있고 그 의미를 풀 수 있다. 그런데 이 암호의 풀이는 우리에게 이미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화로 축성된 창조물 전체가 새로운 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중세기 저술가들은 거울의 비유로 자주 사용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완전한 모습을 반사하는 거울이시고, 따라서 인간에게 삶의 초자연적인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래서 감각적 세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정화된 사람만이, 모든 창조물의 근원이신 육화된 그리스도와 통교를 체험한 사람만이, 창조물의 숨은 메시지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위에 말한 학파들의 사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그는 창조물의 암호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풀이하였고 창조세계를 깨끗한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의 업적으로 발견한 그 낙관적이고 기쁜 메시지를 만인에게 전하였다.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피조물이 그 자체로 사랑스럽게 보였다. 성인은 자신의 성격의 궁핍을 채우기 위해 만물과 운이 맞았고 민감한 마음을 지닌 시인으로서 피조물과 쉽게 마음이 통했다. 성인은 땅의 먼지 위에 어렵게 기어다니는 구더기를 애정어린 마음으로 동정하였다. 말이나 사람의 발에 짓밟혀서 죽지나 않을까 하루살이 애벌레의 생명을 염려하여 손으로 집어 길가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 주어서 나비로 변화된 후 들판을 빛내도록 한 것이다. 성인은 어느날 선물로 받은 아기 산토끼를 풀어놓아 주었고,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다시 물로 돌려보냈다. 목동이 새끼 양 두 마리를 어깨에 메고 도살장으로 팔려 가는 것을 보았을 때는 일단 자기 망토의 값으로 그 양들을 산 다음 잡아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벌들이 겨울에 굶어죽지 않도록 꿀과 단 포도주를 먹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동물만이 아니고, 식물이나 감각이 없는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도 동정과 사랑을 느꼈다. 누가 이것들을 예의 없이 다룰 때 분노했다. 형제들이 산에서 땔나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찍을 때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뿌리에서부터 찍지 못하게 했다. 채소밭을 갈 때도 마음이 아팠고, 밭의 일부를 풀과 꽃들이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자기 수도복에 불이 붙었을 때도 빨리 끄려 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끄려는 형제에게 나무라기를 “형제여, 자매 불을 아프게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촛불을 끄려고 할 때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자매 물을 짓밟힐 곳에 버리지 못하게 했다.

아와같이 동정을 베푼 일 외에도 동물들과 이야기하고 통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다. 자매 새들에게 설교를 들려준 후에 노래하도록 권유하는 이야기, 밤기도 시간에 매일 깨워준 자매 매의 이야기, 성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린 형제 꿩에 이야기, 성인의 권고로 8일 동안 하느님을 노래로 찬양하고 그의 허락으로 자리를 떠난 자매 매미의 이야기, 흙색 옷차림, 들에 먹이를 찾아다니는 발걸음, 공중에서 자유롭게 명랑하게 노래하는, 작은 형제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자매 종달새의 이야기 등이다.

피조물과 서로 통할 수 있는 이러한 말고 언어는 프란치스코만이 알고 있었다. 인간이 하등 피조물과 화목을 이루는 이런 세계는 바로 창세기에 의한 원죄 이전의 낙원의 생활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성격상의 민감성을 넘어선 강한 신앙심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의 신앙심은 추상적인 이론보다도 산 체험으로 굳세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성인에겐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전하는 표징들이며,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도구들이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서 발견하는 “미”와 “선”을 통하여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올라갈 줄 알았다.

“진정 그는 창조주의 지혜와 힘과 선을 관조하면서 해를 쳐다볼 때, 달을 바라볼 때 그리고 별과 창공을 응시할 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경이로운 기쁨에 자주자주 도취되곤 하였다.”

성인이 새들에게 설교한 이야기를 말 한 후 첼라노는 덧붙인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날부터 그는 모든 새들과 동물 그리고 파충류에게까지, 비록 감각 없는 피조물에게까지도 그들이 창조주를 찬미하고 사랑할 것을 열의를 다하여 권하였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피조물을 형제 자매로 불렀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아무도 알 수 없는 탁월한 방법과 예민한 감성으로 사물의 숨겨진 비밀을 간파하였다. 이미 그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된 자유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사람, 동물, 식물, 광물은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성인은 자매 새들이나 자매 꽃들에게 혹은 자매 물, 자매 바람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권할 때 이들이 자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고 결국은 피조물의 말을 빌려서 그리고 대신해서 창조주를 찬양하는 것이다.

또한 성인은 피조물 안에서 신앙의 눈으로 직갑적으로 항상 창조물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만물은 각각 제 나름대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포함하며 선포하고 있다. 이렇게 성인은 길에서 만나는 벌레에서 “사람도 아닌 구더기 야훼의 종”(시편 21,6)을 묵상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다가 자유를 준 어린양에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요한 1,36) 혹은 “묵묵히 어린양처럼 끌려가신 야훼의 종”(이사 53,7)을 생각한다. 발을 돌 위에 놓을 때는 “돌이신 그리스도”(1고린 10,4)를,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향기를 맡을 때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햇순”(이사 11,1)을 묵상한다.

“성인은 특별히 하느님의 아들과의 유사성이 비유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주 다정하게 안았고 더없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동물들을 형제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갖가지 동물 중에서도 온순한 것을 더 좋아하였다.”


피조물의 자율성을 존중함

프란치스코의 영성에서 매우 고유한 특징이 되는 이 점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남긴 최초의 전기 작가들은 이것을 수덕적 · 신학적 측면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토마스첼라노는 「제1생애」에서 이 주제의 표제를 “창조주 때문에 모든 피조물을 사랑한 프란치스코”라고 부르면서 사건을 목격하거나 그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으로서 단순하게 자기가 받은 첫인상을 전해준다. 반면에 「제2생애」에서는 창조물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7장으로 묶어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함”이라는 표제를 붙이면서 신학적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성 빅토르 학파의 신비적 해석으로서 이미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마침내 성 보나벤투라는 창세기 1,28에 대한 성서 해석을 중심으로 스콜라 철학에 따라 또 다른 설을 세우는데, 이것은 “모든 피조물이 프란치스코의 명에 복종함”, 즉 피조물에 대한프란치스코의 지배를 강조하는 것이다. 소전기에서는 이러한 해석을 더욱 분명히 하여 “창조주의 복종과 하느님의 허락하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에피소드를 성인의 글, 특히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의 배경에서 읽을 때 거기서 흘러나오는 프란치스칸 측면은 매우 다르다.

“거룩한 순종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가축과 야수들에까지 복종케 하고 그들 수중에 있게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이 하늘에서 하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이것들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SalVirt 14-18).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피조물의 노예도 주인도 아니었다. 피조물의 “미”가 그의 마음을 노예로 만들거나 좁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넓혀 하늘과 세상으로 날아가도록 한다. 프란치스코는 자유를 누리면서도 하등 피조물을, 각자에게 정해진 자연 목적을 거슬러 그것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고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동료로 삼아 그들과 함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순례의 길을 간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느님이 피조물을 인간에게 이익이 되도록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나. 인간의 욕심과 만족을 채우려고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한때는 프란치스코 자신도 피조물 자체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찾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의 생애에 들어가서 성인에게 단 것이 역겨운 것으로 변하고, 역겨웠던 것이 단 것으로 변한 후부터는 피조물 세계가 그에게 이전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회개 시작 시 성인에게 있었던 변화에 대해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병이 다소 차도를 보이자 ··· 하루는 밖에 나가 주위의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들판의 아름다움, 포도원의 쾌적함, 그리고 그 밖의 보기에 좋은 것들도 그를 즐겁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갑작스런 자신의 변화에 놀랐고,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자들을 가장 어리석다고까지 여겼다.”

그러므로 내적으로 변화된 사람, 회개한 사람만이 피조물로부터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이고, 피조물들이 장애물이 아니라 해방의 길임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생활에서 그가 자매 자연을 보고 기쁨에 넘쳐 자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지만, 전기 작가들은 한 번도 피조물들이 풍기는 그 아름다움 자체를 즐기고 감상하는 그의 모습을 전해 주지는 않는다. 모든 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사람이 욕심으로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그 자체 때문에 즐긴다면, 하느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전해야 하는 피조물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이다.

“자매 매미에게 자유로이 날도록 자유를 주자 이미 이 자매는 많은 위로를 주었다. 육적으로 헛된 영광을 차지하지 말도록 주의를 기울이자.”

프란치스코의 민감한 마음과 신앙심은, 숲속에 살고 자유로이 노래하도록 창조된 새를 애완용으로 새집에 가둔다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향기와 색깔을 통해 자연을 즐겁게 하도록 만들어진 꽃 한 송이를 개인의 만족을 위해 꺾어 버리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을 때마다 사람이 음식으로 삼는 작은 동물들에까지 자유를 주려고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자연 존중을 생존권과 자유권을 누리는 각 형제 자매 생물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그래서 그는 생태학자들의 주보성인으로 공식 인준을 받았다. 프란치스코를 주보성인으로 선포하는 1979년의 교황 칙서는 생태학 단체들의 요청에 의해 공포된 것이었다.


피조물의 찬가(「태양의 노래」)

우리가 아름다운 작품인 「피조물의 찬가」 혹은 「태양의 노래」를 읽을 때 우리는 언뜻 생각하기를 성 프란치스코가 이 작품을 빛나는 한 아침, 자연의 미가 오관을 충만히 만족시키는 한 아침, 태양의 빛으로 모든 자연이 반짝이는 한 아침에 만들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시인인 성인이 자연을 감상하면서 자연의 미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우러나와, 성인의 몸과 마음이 즐거움에 가득 찬 상태에서 노래를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 경위는 정반대이다. 오상으로 인해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성인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구세주를 사랑으로 따르는 길을 오랫동안 닦아 오면서 성인은 많은 병과 고통에 신음하는 자기 육신을 다스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눈이 멀게 되어 성인은 형제 태양의 빛을 못보고 있었다. 오히려 태양의 빛이 그의 눈에게 아픔을 주었고, 주위의 소리와 소란 그리고 피조물 모두가 그를 괴롭히기만 하였다. 성녀 글라라가 성 다미아노 수녀원 정원에 사부님의 안식을 위하여 작은 방을 만들어 드렸는데 거기서 성 프란치스코는 50일 동안 눈의 아픔 때문에 휴식을 찾지 못하였고 하루 밤새도록 정신적 · 육체적 고통 때문에 아주 심하게 아팠다. 모든 창조물이 프란치스코를 괴롭히려 모여든 것 같았고 쥐까지도 무리지어 그의 아픈 지체 위에 뛰어다니며 밤새 쉬지 못하게 했다.

바로 이같은 고통스러운 밤을 지내고 나서 형제들을 불러 모은 후에, 성인은 사랑과 기쁨의 무아경 속에서 그들에게 「태양의 노래」를 가르쳤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이것을 목격한 세 동료들은 성인이 육신이 아프면 아플수록 이 노래를 자기가 만든 곡조로 형제들에게 불러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는 감미로움으로 괴로움과 고통을 잊었던 것이다. 그분은 임종 때까지 이렇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정화된 사랑으로 엮어진 회개자가 도달한 삶의 절정이다. 프란치스코가 피조물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선함과 유익한 것을 감지하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모든 소유적인 독점에서 해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고통의 원인이 되더라도 그에게는 모든 피조물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창조세계를 향락과 이익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결코 창조물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느님에 대한 찬미를 노래로 하는 방식을 발견한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자신을 위해서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방법으로 택하기를 원하였다. 사랑과 기쁨을 선포하는 그의 평화의 메시지는 노래하면서 전해야 되는 것이고, 이러한 시 작법 기술이 당대의 사람들의 의해 늘 대환영을 받고 있었다. 작은 형제들은 “하느님의 음유시인이 되어,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 피조물 합창대의 노래를 감상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각 피조물 속에 감춰 있는 목소리를 파악하고 피조물을 존경심과 형제애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사용하도록 도울 수 있다. 피조물은 아름답고 쓰임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때 프란치스코는 모든 사람이 더 형제적으로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의 노래」가 이미 작곡되고 하느님의 음유시인들의 합창대가 빠치피코 형제의 지휘 아래 조직되었을 때, 아씨시 주교와 시장은 아씨시에 추문인 날 만큼 서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태양의 노래」에 “당신 사랑 때문에 용서해 주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라는 구절을 덧붙이며, 각각 수행원들과 함께 모여 있는 주교와 시장 앞에서 「태양의 노래」전체를 부르도록 자기 음유시인들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로 그 두 사람은 감동되어 서로 포옹하였고, 평화가 회복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글라라와 그의 자매들을 위해 상호 사랑과 마음의 일치를 주제로 하는 「노래 형식의 권고」를 작곡하고 형제들의 합창대를 통하여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글라라는 수녀원의 봉쇄로 인해 세상의 아름다운 피조물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였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의 마음과 똑같이 울렸다. 글라라는 외부 자매들을 수녀원 밖으로 보낼 때 “그들에게 아름다운 나무들과 꽃들 그리고 숲들을 보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상기시켜 주었으며, 이와 마찬기지로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보게 될 대 모든 것에 대해서 모든 것 안에서, 그분께 찬미드리도록 하였다”. 글라라는 창조주께서 피조물 안에 심어놓으신 선하심을 누릴 필요도 없이 각 피조물의 자매가 되었다.

「태양의 노래」는 프란치스코가 누워 있는 자리에 밤낮으로 울려 퍼졌다. 여기서 이웃 도시 습격을 방어하기 위해 아씨시 시청의 명으로 교대로 보초를 선 군인들은 위로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미 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프란치스코의 명성을 보존할 책임을 느끼고 있던 엘리아 형제는 사부님의 임종자리에서의 노래와 축제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을 알아챘던 프란치스코는 “형제여, 나의 고통 가운데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그에 대한 찬미를 통해 기뻐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하고 엘리아에게 부탁하였다. 의사가 그에게 죽음이 임박함을 알려주자 마음에 기쁨이 넘쳐 “내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하고 외쳤다. 그리고 자매 죽음을 모든 이의 아버지가 형제적 공동체에게 보내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며 「태양의 노래」마지막 부분에서 자매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크리스처니즘은 인격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학과 그의 사랑의 업적인 창조사업에 대한 신앙, 종교의 내면화의 강조 그리고 하느님을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려야 한다”는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자연을 혼동하는 이교도의 사상을 초월했다. 어떻게 보면 크리스처니즘은 자연을 비신격화했다. 그렇지만 교회는 자연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현존의 표시이며, 하느님을 향한 길이며, 하느님의 섭리의 증거물임을 믿어 왔다. 그래서 중세기에 모든 “외적인 존재”(피조물)가 그 상징적 성격 때문에 “신학”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분석하는 자연과학이 생기고 자연과 인간의 신비를 풀어가는 자연기술이 생긴 후, 현대인에게는 자연은 하느님이 상징이라는 성격이 상실되었다. 자연과학은 이제 자연을 다른 존재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그 자연 자체를 분석하고 연구 자료로 삼고 이용하며 그의 심오한 힘을 다스린다. 가면 갈수록 자연을 인간과의 관계에서 보게 되고 무엇보다도 인류의 발전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현대인에게는 하느님의 상징으로나 현존으로 사라지게 된 창조물에 대한 비전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와 인간의 목적에 대한 비전마저 깊은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비전, 세상의 비전은 세속화되었다. 그러면 이 새로운 비전이 비 크리스천적인가? 많은 신학자들은 이러한 비전에서 오히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자연 안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하여 차원이 한층 더 높은 더욱 성숙한 과정을 발견하고 있다. 창조물 안에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자유와 책임과 사명감을 인식하는 현대인이라면, 자기가 발전시키고 변하게 하는 자연의 힘을 통하여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해서 우주가 “성사”라는 새로운 비전이 생기고 있다. 즉, 자연은 하느님이 정해 주신 질서에 때라 자율성을 가지고 무한한 힘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분열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것이다. 자연적 현상을 이렇게 이해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상징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과학적 확실성의 차원에서 새로운 대화가 이루어지고 형제적 관계가 깊어진다. 창조세계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의 메시지이며 인간의 초월적인 목적의 증거물이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저술가들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Theilhard de Chardin)의 「물질에 대한 노래」와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의 유사성을 말하고 있다.

창조세계에 대한 프란치스칸 비전은 여기서 새로운 쇄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현대의 신앙인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에 있어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감지할 민감성을 가진다.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과 지혜와 섭리를 발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무엇보다도 그분이 보여주시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는 수많은 사건 - 홍수, 지진, 전쟁, 기형아 탄생 - 들은 하느님이 안 계시거나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을 육화되신 하느님을 통해 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육화하시어 인류의 역사 흐름 속에 일부가 되시고 죄 외에는 여느 인간과 같이 한이 많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삶을 취하셨으며, 십자가에서 못박힐 때 원수들 앞에서  무력해하셨다.

프란치스칸 정신을 지닌 사람에게 서로 반대되는 듯한 하느님의 전능과 나약함의 모습을 조화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겸손하고 명랑한 프란치스코는 이점에 대하여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관상한다:


주님, 당신은 힘세시고 위대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사랑이시오며 자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오며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나이다.

당신은 안식처이시나이다(LaudDai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