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16장 프란치스칸 사도직

Margaret K 2017. 12. 18. 21:50

제16장 

프란치스칸 사도직


“탁발 수도회” 탄생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발생한 수도생활의 새 양식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사도적 생활”(vita apostolica)이다. “사도적 생활”이라고 할 때 그 당시에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제시하신 생활양식 이상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생활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전의 수도자들은 수도원의 울타리를 떠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며 유럽 사회가 그리스도화 되도록 일하였다. 수도자들의 정착(stabilitas)생활의 증거 자체가 복음의 전파에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정착생활이야말로 그 당시 유럽 유목민들이 일전한 지역에 정착하고 사회적 ·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봉건체제가 쇠퇴함에 따라 사회가 크게 변천하였다. 즉, 상업과 수예공업이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새 도시나 길드 조합들이 형성되었으며,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와 생산과 무역에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시민”의 의식 가운데서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는 사람들의 신앙심에도 필연적으로 변화가 뒤따랐다. 즉, 실생활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주관적 신앙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크리스천 이상을 증거하는 일이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도 새로운 선교 방법이 필요했다. 즉, 사람들이 사는 데로 가서 그들의 생활 리듬에 맞추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선포해야함 했다.

성령의 인도에 순응하여 시대의 표징을 올바르게 해석한 프란치스코는 자기와 형제들의 소명은 바로 “세상에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깨달았다(참조: RnB 14; RB 3). 수도생활에 도입된 이 “새로운 요소”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트리의 야고보(Lacobo de Vitry)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작은 형제들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려고 둘씩 찍지어 복음을 전파하러 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이다.”


위대하신 하느님의 사신

프란치스코에 있어서 사도적 활동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의식이 점차로 확실해졌다. 그는 회개 당시에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길이란 바로 다미아노 성당에서 주님 친히 명하신 “허물어져 가는 내 교회를 고치라”라는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알아들었다. 첼라노는 이 주님의 말씀 속에서 교회 전체를 쇄신시키려는 프란치스코의 미래의 소명을 예지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우선 하느님의 뜻이 더욱 확실하게 밝혀지기를 기다리면서 일차적으로 성 다미아노, 성 베드로, 천사의 모후 성당을 고치는 데 온 정성을 다 바쳤다.

다음에 아버지 앞에서 재산을 포기함으로써 가난한 몸, 자유로운 몸이 된 그날부터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체험한 바를 밖으로 전하지 않고서는 못배겼다. 그래서 그는 숲속을 거닐면서 프랑스어로 하느님의 찬가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나는 위대한 하느님의 사신입니다”라고 그들에게 대답했다. 강도들이 그를 때리고 그의 몸을 눈구덩이로 던졌는데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이것으로 큰 기쁨을 느끼어 더욱 숲속을 크게 울리는 소리로 창조주를 찬미하였다.

성인은 성당 수리에 필요한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음유시인들과 같은 방법으로 애긍을 청하면서 아씨시의 길거리를 다녔는데 이 일 자체도 참된 설교의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주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하신 파견의 복음을 듣기까지는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파견의 복음을 듣고서야 비로소 성인은 자기가 체험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자기를 불러주셨음을 깨달았고 하느님이 원하신 생활이 바로 그것이었음을 밝히 보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띠와 투니카를 입고 맨발로 “모든 이에게 큰 열정과 기쁨으로 회개를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소박한 말고 위대한 말로 모든 이들을 교화시켰다. 그의 말은 흡사 심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타오르는 불과 같았으며, 듣는 모든 이의 마음을 감탄으로 채웠다.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듯하였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으며 땅을 보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 그는 설교할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전에 항상 먼저 평화를 기원하였다.‘주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만나는 모든 남녀 행인들에게도 언제나 열심히 평화를 전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첫 동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에지디오 형제가 말하기를 “어느 날 성인은 우리를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주님께서는 우리만 구원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마을로 가서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의 좋은 표양으로 세상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서 겁이 많은 것을 본 성인은 하느님께 신뢰심을 두고 성령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도록 권고하면서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작은 형제들이 설교하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간단한 말로 평화와 회개를 전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대답해 주고, 모욕과 박해를 당할 때 그것을 기쁘게 견디어 내는 것이라야 했다. 형제들은 이렇게 훈련을 받고 둘씩 짝지어 여러 곳으로 떠났다. 이 첫 번 선교여행은 매우 힘든 경험이었다. 선교여행을 마치고 다시 함께 모여서 각자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였는바 그것은 바로 조롱과 모욕과 고통을 당했다는 경험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련으로 강해진 형제적 사랑을 프란치스코와 함께 다시 나눔으로써 지난날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많은 평신도 이단자들이 설교하면서 돌아다니고 있던 이때, 교회의 정식 인준을 받지 않고 설교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의 생활양식을 인준할 때 설교할 수 있는 허락도 함께 주었다. 교황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들이여, 하느님과 함께 떠나십시오. 주께서 계시하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설교하시오.”

이래서 프란치스코는 이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교회에 대한 참된 봉사의 길임을 확신했다. 이때부터 성인은 사도적 여행을 하기 시작하여 가는 데마다 확신했다. 이때부터 성인은 사도적 여행을 하기 시작하여 가는 데마다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스뽈레또 계곡, 움브리아 지방, 마르카 지방, 이탈리아 중부 전체는 프란치스코가 새롭게 들려주는 신앙의 메시지를 기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설교는 구원을 전하는 담화와 같았고 성인은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로망스어로 길가와 광장과 성당에 설교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설교할 때 장황한 수식이 없이 음유시와 넘쳐흐르는 영감을 동반하는 간단한 담화의 형식을 취하였고, 그의 설교는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교회시키거나 논쟁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크리스천 생활을 살도록 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최초의 전기 작가는 프란치스코가 설교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자주 전파하면서도 마치 친한 동료에게 스스럼없이 하듯 확신있게 말하였다. 그는 많은 군중을 한 사람처럼 대했으며, 또한 많은 군중에게 하듯이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설교하였다. 그는 맑은 마음을 지녔기에 설교중에 신념을 보여줄 수 있었고, 미리 준비하지 않고도 전에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이야기를 모두하게 하였다.”

스팔라토의 토마스(Thomas de Spalato)는 “그 도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성 프란치스코가 1222년 8월 15일에 볼로니아 광장에서 한 강론을 논평하면서 저술한다: “그는 수사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고 청중들과 이야기하듯이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의 내용 전체는 적대감을 풀고 평화의 합의를 회복시킬 것을 목적으로 했다. ··· 그분의 외모는 보잘것이 없었지만 ··· 하느님께서 그의 말에 크나큰 능력을 부으신 결과로 많은 가정이 서로 화해하였다.”

그런데 열정적인 무리들이 자기 설교를 들으러 모여드는 것을 보고서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기가 택한 사도직의 길을 이처럼 축복하신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면서부터 성인은 자기 마음 안에서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관상적 체험은 하느님과의 친교가 가져다주는 깊은 평화를 맛보려는 강한 열망으로 프란치스코를 이끌고 있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사도적 여행보다 하느님과의 영적 대화의 날들을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 유익하지 않는가를 자문하게 되었다. 그는 이 점에 대하여 초창기에도 자주 망설인 바 있었지만, 특히 동방의 첫 여행 계획에 실패하였을 때 이러한 내적 갈등을 심하게 느꼈다. 프란치스코는 만사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선교 여행에 실패하였을 때에야 자기가 혹시 하느님의 뜻을 무리하게 해석하지 않았던가를 반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 맛세오와 필립보 형제를 불러 글라라 자매와 실베스텔 형제에게 보냈다. 관상의 특은을 받은 실베스텔 형제는 그 당시에 수바시오 산에 있는 은둔소에서 살고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보낸 두 형제가 글라라와 실베스텔 형제에게 가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성령의 빛으로 알아보아 달라고 그들에게 청하였다. 얼마후에 하느님과 가까이 지내는 거룩한 두 분의 대답을 들은 두 형제가 프란치스코에게 돌아와서 하느님이 글라라와 실베스텔 형제에게 똑같이 계시하신 메시지를 그에게 전하였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성화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눠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를 듣자마자 프란치스코는 벌떡 일어나 형제 두 명을 불러 “하느님이 이름으로 전교하려 나가자”고 하였다. 길을 가다가 베베냐(Bevagna) 근처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새들의 무리였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새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사도적 성소를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관상적 생활과 사도적 활동을 서로 반대되는 요소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의 내용을 먼저 고요한 침묵 속에 묵상할 필요성을 날이 갈수록 깊이 느꼈다.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왔던 이유는 바로 그분이 먼저 영의 말씀을 체험한 후에야 설교한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한 얼마 후 올란도 백작한테서 프란치스칸 관상의 자리가 될 라 베르나 산을 희사받았다.

내적 가난을 완전히 실행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소유해서는 안됨을 깨달은 성인은 관상에만 전심한다는 것이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유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 깊이 일치를 이룰수록 주님을 더욱 잘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차지하지 않고 우리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적으로 바치신” 그분과 같이 행동해야 되겠다고 깨달았다. 즉, 다른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을 악용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 것인가. 모든 이를 위해서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살 것인가.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그에게는 큰 갈등이었다.


성 다미아노, 사도적 풍요로움의 샘

프란치스코는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에서, 교회생활에서 서로 보충되는 두가지의 차원, 즉 관상과 활동의 차원을 말하고 있다. 루가 복음서(10,38-42)의 이야기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관상적인 차원은 마리아에 의하여, 활동적인 차원은 마르타에 의하여 상징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와 형제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따름이 양면으로 표현되는 관상과 활동의 생활을 겸하는 생활을 택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는 글라라와 그의 자매들의 생활에서 하느님께서 그녀들에게 “가장 좋은 몫”을 주셨다는 것, 즉 “빼앗기지 않을 차원”을 주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는 성령께서 당신의 거처를 정하시는 이들의 결정적인 소명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설교를 통해서보다도 글라라 자매가 거룩한 어머니 교회의 건설을 위해 더욱 효과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도 다른 데서 이미 언급된 것처럼, 성 다미아노의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면서 똑같은 확신을 품고 있었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셨으니, 기도중에서 나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시 시민들은 성 다미아노가 도시의 가장 든든한 방패임을 믿고 있었고, 실은 1240년의 사라센인들의 습격 사건과 1241년경의 아베르사(Aversa)의 비딸레(Vitale) 포위 사건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녀 글라라는 고유한 관상적 성소에 따라 자매들과 함께 봉쇄생활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의 공동체에서 고립되거나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무관심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성녀는 봉쇄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생기는 즐거운 일이나 즐겁지 못한 일에 관하여 주의깊은 관심을 두고 살았고, 봉쇄생활을 하는 형제적 공동체가 “세속에 사는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와 거울이”(Test CI 6) 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사명 안에서 일치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한 성녀 글라라는 자매들이 자기 성소에 불충실할 때 이것으로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에 손상을 입힌다”(Test CI 22)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봉쇄생활을 하는 자매들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대를 하느님 자신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의 넘어지기 쉬운 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로 여기고 있습니다”(EpAgP III8).

성녀의 전기 작가는 성 다미아노의 공동체가 널리 광채를 비추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영적으로 쇄신에 들어선 수녀원들, 크리스천 생활을 더 열성적으로 영위하기로 결심한 가정들,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기로 택한 남녀 경우가 그랬다. 이 사실을 기록한 후 첼라노는 계속한다:

“ 이 천상적 축복의 물결이 일정한 영역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섭리 아래 강으로 흘러들었으니, 강물의 줄기들이 교회의 도시들을 온통 즐겁게 하였다. 이 위대한 일들의 신선함이 이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그리스도를 위한 영혼들을 어디에서나 얻기 시작하였다. 갇혀 있으면서도 글라라는 온 세상을 비추기 시작하였고, 그녀의 광채는 그녀의 빼어난 찬미의 노래로 세상을 눈부시게 하였다. 그녀의 덕망은 귀부인들의 방을 채웠고, 공작부인들의 저택에 도달했으며, 여왕들의 궁중에까지 찾아들었다.”

하느님께 상처를 입힌 죄는 글라라의 마음을 매우 슬프게 하였다: “가끔 어떤 세속적인 사람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어떤 짓을 했을 경우, 그녀는 놀랍게도 울면서 그 사람에게 충고하고 회개하도록 열심히 그에게 권고하였다.” 세속에 사는 평신도 중에 성녀 글라라의 마음 씀씀이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개한 우골리노라고 불린 귀족이 있었다. 이 사람은 성녀의 시성 조사 증인으로 나가, 20년 동안이나 부인을 버린 자기가 많은 사람들의 권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도를 바꾸지 않았지만, 마침내 글라라로부터 회개하라는 진지한 전갈을 받고 깊이 마음을 돌리면서 자기 부인을 다시 맞이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증언하였다.


프란치스칸 사도직의 특징

프란치스코의 사도적 열성의 동기는 다름이 아닌 구세주에 대한 사랑이다.

“프란치스코의 사랑의 강렬함이 그를 온갖 피조물의 형제가 되게 하였을진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창조주의 모습이 찍힌 사람들과 더 친절한 형제가 되게 한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못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흔히 구령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말하였고 그 증거로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황공하옵게도 영혼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사실을 자주 제시하였다. 그는 기도에 전력하였고, 설교에 지칠 줄 몰랐으며, 표양을 보이는데에 한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했던 영혼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을 그리스도의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프란치스코의 생각에, 사도직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은 각 사람의 영신적인 사정보다도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이었다. 그래서 형제들이 설교할 때 첫째 목적으로 두어야 할 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인정하고 삼위일체를 기쁘게 찬미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죄를 짓고 영원한 멸망에 빠질 위험 속에 살 때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과 사랑이 위태롭기 때문에 설교가 거두어야 할 직접적인 결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데 있다. 회개의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인데,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초창기 형제들에게 이 설교를 허락하였다. 회개의 설교는 신학에 대한 특별한 지식수준이나 그것을 선포할 공적인 설교대를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회개의 설교는 민중이 알아듣지 못한 라틴어의 사용도 요구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의 설교가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그분이 일반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도시 행정과 문학, 법학에서 공적으로 인준을 받기 시작한 로망스어는 작은 형제들이 크리스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매개체로 사용하였다.

후에 많은 학자들이 형제회에 입회할 때 “교리적” 설교가 생겼고 충분한 훈련과 자격 없이는 이런 설교가 허락되지 않았다. 「제1회칙」에 의하면 관구장들이 설교할 허락을 줄 수 있고, 「제2회칙」에 의하면 총장만이 이 허락을 주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 “교리적” 설교라도 “회개적” 성격을 분명히 나타내야 함을 강조하였다: “설교할 때 형제들의 말은 백성에게 유익하고 감화를 줄 수 있도록 선별된 말이라야 하고 순수한 말이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들은 악습과 덕행, 벌과 영광을 간결한 말로 선포하시오”(RB 9, 3-4). 그리고 성인은 주교는 물론이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본당신부라도, 그들의 뜻을 벗어나면서 형제들이 설교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Test 7 참조).

프란치스코는 설교자들이 으레 만나는 유혹, 즉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도구로 하여 은총을 내리신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자기 것인 양 설교의 성공을 자랑하면서 “설교직을 소유”하려는 유혹이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하였다(RnB 17,4-7 참조). 성인은 “헛된 영광을 대가로 받기 위해 자기의 수고를 팔아버리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또한 “죄인들을 변화시킨 것은 나의 순박한 형제들의 기도였는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자신이 그 사람들을 회개시켰다고 자랑합니까?”라고 말하였다. 성인은 웅변적 수식에만 신경을 쓸 뿐 경건한 자세 없이 설교하는 설교자들에 질색하였다. 그리고 설교자들이 조용한 곳에 피난처를 찾아 영혼의 사정을 돌보고 영혼을 양식으로 기르는 것을 볼 때면 매우 흐뭇해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설교해야 함을 가르쳤다. 말로 하는 설교는 모든 형제들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적 생활의 증거로 하는 설교에서는 아무도 제외되지 못한다: “모든 형제들은 행동으로 설교할 것입니다”(RnB) 17, 3). 작은 형제는 본질상 작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모든 사람들의 종이기에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하며 내 주님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전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EpFid II, 2).

사도적 열성으로 가득 찬 성인은 돌아다니며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몸이 쇠약해저 사도적 여행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단순성과 함께 열성을 담고 있는 편지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형제들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이 편지들이 복사되고 널리 퍼지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대로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사도직의 확고한 방법으로서 “하느님의 음유시인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을 생각하였다. 이들은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도록 초대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사도적 생활이란 “사도적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도적 생활은 그리스도와 복음에 충실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헌신적인 자세는 프란치스칸 사도직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작은 형제는 크리스천 공동체가 요구하는 무슨 봉사라도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작은 형제에게 적합하지 않은 봉사의 분야들이 있다면 너무 많은 시설과 인력을 필요로 함으로써 형제들의 유용성을 제한시키는 그런 사업들이고, 명예와 권위를 줄 수 있는 사업들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형제들은 우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일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 형제적 생활과 가난에 알맞은 일, 특히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활동과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즉, 사회나 역사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이름난 제도로 자신을 내세운다는 것은 작은 형제회에 적합하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때 작은 형제들의 사도직은 복음의 누룩과 같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작은 형제는 어떤 상황에도 쉽게 적응할 줄 알고 찾아오는 누구에게도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에 프란치스칸 사도직은 어디에서든지 호감을 받는다. 성 프란치스코의 아들은 외교세계에서 평화의 사신 역할을 할 때나, 민중 가운데서 강론을 할 때나, 약한 사람들의 편을 들 때나,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변호할 때나 언제나 자유롭게 행동할 줄 안다. 물론 형제들이 사람들의 걱정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가운데서 어려움은 따르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고 할 때 모든 이들을 똑같이 대할 수 없고 한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작은 형제가 억압을 당하는 사람의 편에 설 때 필연적으로 억압의 제도와 이런 제도를 유지하려는 권력자와 맞서야 할 때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럴 때 작은 형제는 아무것도 잃을 것 없는 겸손과 가난에 힘을 얻어 적의를 품는 마음 없이 부정에 항의할 줄 알고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사도직에 있어서 활동과 기도생활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프란치스코는 이 두 가지 생활 형태의 균형을 잘 유지하여 생활하였다. 프란치스칸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도적 활동의 팽창 시기에 반드시 기도와 은둔생활을 집중으로 하는 기간이 앞선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을 만나는 가운데서 작은 형제는 내적 생활을 새롭게 하고 힘을 회복할 필요성을 느낀다.


현대의 프란치스칸 사도직

“생활의 쇄신에서 활동의 쇄신으로” 나아갈 때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도적 쇄신의 비결이 프란치스칸 생활을 먼저 내적으로 사는 데 있음을 깨달아 작은 자로서의 생활을 충실히 살면, 현대세계와의 복음적인 대화나 적응의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형제들의 태도와 생활이 많이 쇄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수도적 행위와 생활의 리듬과 공동체 내부의 편의 때문에 생긴 많은 관습에 대하여 형제들이 많은 점을 양보해야 할 것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이미 그 당시에 네 종류의 “착한” 수도자들을 구분한다:

첫째 종류: “악한 행실을 범하지 않지만 선행에도 열중하지 않는 착한 수도자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이 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쁜 행실로 악한 표양을 주지 않는다. 타고난 성격으로 평화스럽고 남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이들은 착한 사람으로 인정 받는다.”

둘째 종류“ ”악한 행실을 범하지 않을뿐더러 자주 선행에 열중하는 착한 수도자들이다. 이들은 절제, 정결, 겸손, 이웃사랑. 기도의 생활에 때때로 열중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로 만족하고 더 완전한 생활을 열망하지 않는다. 이들은 절제, 포기, 기도, 단식, 일 등 모든 생활에서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높은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셋째 종류: “선행에 최선을 다하는 착한 수도자들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나서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할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이들은 내적 덕행, 내적 신심의 맛,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 하느님의 사랑의 체험을 간절히 열망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오로지 자기 자신과 하느님께만 모든 관심을 쏟고 살기 때문에 선교 열정이 부족하다. 이들은 이웃의 선익에 자기 자신의 평온을 앞세운다.”

넷째 종류: “가장 완전한 수도자는 위에 말한 세 종류의 착한 수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덕행을 가지고서도 자기 자신만 덕행생활에 열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모범을 따라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께로 이끌기까지 쉬지 않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분을 모시는 즐거움과 그분과 일치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그분의 명예와 흠숭이 널리 알려지고 퍼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장 착하고 완전한 수도자는 만민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섬기고 흠숭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때때로 많은 "착한“수도자들의 게으름이 하느님의 왕국 확장에 방해가 되었다. 오늘날 오히려 수도자들은 표면적 활동의 노예가 되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의 급속한 변화, 과학의 정복과 창조 의식에 의거한 현대인의 실존주의적 태도, 그리고 인간적이고 크리스천 연대책임 의식등은 우리의 생활 리듬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장에 관한 우리의 개념까지 변화하도록 요구한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 당시에 오늘과 비슷한 시대를 만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당시에 도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의 원동력은 이전의 체제적이고 정착적인 생활을 밀어 떨어뜨리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새 시대의 징표를 개방적이고 낙관적인 정신으로 받아들여 소화시킬 줄 알았다. 프란치스코는 새 사회의 사람들과 한마음이 되어 그 가운데서 작은 형제회가 뿌리를 내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대 사회 속에서 발생한 부정적 요소 - 비 복음적 요소 - 를 잘 진단할 줄 알았다. 이렇게 해서 성인은 그 고유한 직감으로 그 시대가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성공하였다. 체스터튼(Chesterton)은 성인의 직관을 지적하면서 “각 시대는 그 시대를 제일 많이 반대하는 성인에 의해 구원된다”고 말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활양식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창조력이다. 창조력이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았거나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에 일의 종류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 어떤 일을 창조력으로 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마다 그 일에 자기의 고유한 개성의 날인을 새기는 것, 하는 일마다 마음을 다 바치는 것, 하는 일마다 그 태도의 동기를 자기 안에서 찾는 것을 의미한다.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운동은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유명한 미국 심리학자인 에릭슨(E. Erikson) - 전에 프로이트(Freud), 로저스(Rogers)와 같은 학자들이 말하였지만 - 은 “성숙한 창조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성 프란치스코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프란치스코가 생애의 모든 상황 속에서 사물을 교묘하게 다루지 않고 깨끗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의 사도가 주위 세상의 생활변화 앞에서 당황해하거나 오늘날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아이디어에 억지로 이끌려 나가기만 한다면, 이런 사도는 현대인에게 알맞은 메시지를 전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깨끗하고 기쁨에 넘친 생활을 증거하고 참된 형제애의 메시지를 현대인에게 전하는 작은 형제라면 솔직함과 사랑을 열망하는 오늘날의 사회인들에게 좋은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핵무기 전쟁의 위기에 떨고 있고 물질주의에 싫증을 느끼며 기쁨 없이 사는 현대인은 사람들 가운데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서 기쁘고 가난하고 겸손하고 형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음유시인들”을 반갑게 환영할 것이다. 현대인은 권력과 명예를 찾지 않고 교회의 다른 봉사자들과 경쟁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대의 징표 속에서 “주님의 영과 그 거룩한 작용”에 순종함으로써 사랑의 증거를 보여줄 사도를 간절히 원하고 있고 또 필요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