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14장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형제적 공동체 -1

Margaret K 2017. 12. 18. 21:48

제14장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형제적 공동체 -1

제14장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형제적 공동체


당대의 외부인인 한 기록자는 “짧은 시간에 온 땅을 채운” 새로운 수도회의 급속한 팽창과 성공을 지적한 후에 그 이유로 “작은 형제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는 생활양식을 택했다”는 것을 덧붙인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자기 회개 시작에 나병환자들 가운데서 지낸 지간을 기록한 후 “얼마 있다가 세속을 떠났습니다”(Test 3) 하고 말한다. 그리고 형제들에게도 “세속을 떠났다”(RnB 22,9)는 인식을 깊이 박아주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프란치스코는 회개한 후에도 동료들과 함께 계속 도시의 거리와 세상의 사방 길을 두루 다니면서 노동, 동냥, 나병환자 들을 위한 봉사, 설교, 전례 봉사 등을 통해 사회생활에 침투해 살았다.

그래서 여기서 “푸가 문디”(fuga mundi), 즉 “세속을 떠남” 혹은 “세속의 도피”라는 개념에 있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수도생활 역사에서 예부터 내려온 “푸가 문디”라는 의미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종”인 수도자 사이에 격리를 두는 것이었는데, 수도자는 사막에 은둔하거나 혹은 대수도원 울타리 안에 은수처를 찾으면서 세상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프란치스코는 이 점에 있어 수도생활 역사 이전 시기로 되돌아간다. 최기 교회 시기에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동정녀들과 금욕자들은 신자들의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신자들과 같은 조건하에 살면서도 사회 안에서 고유한 특징을 유지하고 살았다. 교회의 초기 동정녀들과 금욕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요한 17,11.15) 사는 특별한 사명을 받았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로 자기 형제들과 함께 예수의 최후만찬 기도 대상에 자신을 포함시키려고 하였다.

회개와 예언이 현존하는 삶

작은 형제들에게 있어서 관상 및 형제들의 친교의 달콤한 맛을 맛들이게 하는 은둔생활과, 일반 사회에 침투하여 다양하게 펼쳐지는 활동생활 사이에 중용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기 형제들이 형제적 친교의 보물을 발견하자 자기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첼라노에 의하면, “그들은 ··· 사람들과 섞이어 살아야 하든, 아니면 한적한 곳으로 가야 하든지간에 서로 상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 중에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임을 알았다.

그러기 위하여 성인의 가르침대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은 형제가 어디를 가든지 항상 자기 안에다 은둔소를 만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디에 가든지 우리의 방을 함께 지고 다녀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 육신이 우리의 방이며 우리 영혼은 그곳에서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묵상하며 생활하는 은둔자입니다. 만일 우리 영혼이 그 방 안에서 고요와 적막 속에 살지 못한다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외적 방이 수도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작은 형제들은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면서 은둔생활의 고요함은 물론 대수도원의 교회적 · 경제적 자치권을 포기한다. 이렇게 그들은 평신도들 가운데 끼여서 이들의 매일 걱정거리에 참여하고 마음을 다하여 모든 이에게 봉사하며 또한 신자들의 애긍에 내맡겨야 하고, 결국은 신자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외부활동을 하러 수도원에서 나간다고 해서 공동체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사는 형제에게도 형제적 공동체가 일시적으로나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실은 초기 “수도원”이 생기기 전에 “수도원에서 나간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형제들이 모여 사는 장소들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제1회칙 」7장 13-14절에 의하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형제적 공동체의 인연은 항상 남아 있다. 형제적 공동체는 세상에 다니는 형제에게 힘을 주고, 밖에 있을 때도 형제들의 포근한 분위기를 그리워하게 하며, 일이 끝나는 대로 다시 자기 가족에게 기쁘게 돌아오도록 한다.

초기 10년 동안 형제들에게는 거주하는 장소가 문제되지 않았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수도원이 없었지만 밤이 되면 아무 자리나 보금자리로 삼았다. 그들의 수도원은 넓은 세상이었다. 낮에는 둘씩둘씩 짝지어서 도시와 지방을 돌아다니고 저녁에 어둠이 내릴 때 나환자 거주지나 은둔소나 작은 성당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형제적 일치의 외적 표시로서 둘씩 다니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첫 동료들을 둘씩 짝지어 그들에게 말했다: “자,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 둘씩 짝지어 세상 곳곳으로 떠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회개로 죄를 용서받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환난 중에 인내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목적과 약속을 이룩해 주시리라고 확신하십시오. 질문하는 자들에게 겸손하게 대답하시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해치고 중상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이 복음에서 둘씩 제자들을 파견하셨기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도 그 교훈을 글자 그대로 따랐다. 둘씩 다니는 일은 세상의 길을 다니는 작은 형제들의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 먼저 체험한 사랑을 외부로 증거하는 좋은 표시였다.

첫 형제들의 집단이 주위 사람들에게 개방된 “장소”에 살고 있었을 때는 서로 마음으로 통하는 동조를 이뤘다. 그렉치오(Greccio) 마을이 바로 이러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매우 가난하고 단순한” 이 마을 사람들의 일과는 산비탈 숲속 은둔소에 사는 형제들이 일과의 연장이었다: “그렉치오의 형제들은 저녁에는 주님께 대한 찬미를 노래로 불렀습니다. 그럴 때면 주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집 밖으로 나와 읍내 앞길에 서서 형제들과 주고받으며 큰 소리로 ‘주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하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적 생활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생활이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형제들이 처음 간 곳에서 그들의 옷차림, 생활양식,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사고방식, 생각하고 말하는 양식은 매우 이상하게 여겨졌다. 꿈꾸는 사람,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은 보통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호기심 때문에 혹은 복음적 생활에 대한 갈망 때문에 사람들이 “왜 그런 생활을 하느냐”고 질문할 때, 작은 형제들은 사랑과 평화와 회개의 생활을 기쁜 마음으로 설교하였다. 스뽈레또(Spoleto) 계곡에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과 알프스 산 너머 형제들이 처음에 겪었어야 할 모욕에 대한 이야기를 첼라노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보편적인 크리스천 사랑에서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았다. 죄인, 이단자, 사라센인도 제외되지 않았다. 몬테 카살레(Monte Casale)의 형제들 간 이야기에서 성인의 마음과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의 예언적인 고발

프란치스코는 혁명당원이 아니었고, 더구나 고발자나 항의자도 아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의 악습을 질책하는 예언자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오직 회개자로서 그리고 회개자 집단의 대표로서 이들과 함께 교회와 세상에 회개와 화해를 강하게 증거했고 회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메시지가 모든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예언적인 효과를 발했을 뿐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사명의 예언적인 의미를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엘리아 형제였다. 엘리아 총장은 “형제요 사부”이신 프란치스코의 죽음을 형제들에게 통보하는 편지에서 그러한 특징을 밝히고 있다. 다음에 성인의 첫 전기 작가 첼라노는 성인을 “우리 시대의 예언자”라고 부르고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지상적인 일들의 어둠에서 풀려났고 그의 지성은 가장 높은 곳으로 날아갈 듯이 자유로웠고 빛 속으로 잠겨들 만큼 순수했다. 이렇게 영원한 빛 줄기의 조명을 받아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말을 뽑아내어, 그 뽑아낸 것을 자기 언어 안에서 메아리치게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씨시 가난뱅이의 높은 예언적인 사명을 그린 분은 성 보나벤투라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 서문에서 성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고유한 관점으로 성인의 예언적인 특징을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인의 전기 자료들이 그의 예언적인 카리스마, 즉 예언의 영에 관해서 말할 때는 무엇보다도 남의 마음의 비밀을 꿰뚫어보는 은총과 장래를 예언하는 은총을 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회개시부터 시작해서 프란치스코의 삶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 예언적인 각도로 펼쳐지고 표현된다. 그는 개혁의 계획을 설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순수한 크리스천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충분했다. 저술가 에른스트 레난(Ernest Renan)은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 다음으로 하나밖에 없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그의 참된 독창성은 한없는 믿음과 사랑의 충동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담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덧붙인다.

성인의 메시지는 실은 다 복음의 메시지나 다름이 없다.

“마지막 시기의 이 새로운 복음 전파자는 낙원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처럼 전 세계에 복음의 물을 뿌렸고, 하느님의 아들의 길과 진리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설파하였다. 그 결과로 그분이 계심으로써 그분을 통하여 미처 몰랐던 행복과 거룩한 새로움이 온 세상에 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옛 종교의 싹은 오랫동안 냉담했던 사람들이나 매우 늙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쇄신을 갑작스레 가져다주었다.”

프란치스코의 회개와 복음적인 여정에서 놀라운 것은 그의 독립심이다. 그는 어떤 제도적이고 수덕적인 규격 없이 단순히 “주님의 영”의 인도에 따라 길을 걸을 수 있기 위해 고의적으로 기존의 테두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당대의 회개자 집단에도 입회하지 않았고, 움브리아 지방을 포함해서 사방에 퍼져있던 복음적 운동의 어떤 집단과도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의 생활 방향을 기존 수도회에로 돌리도록 권유하던 아씨시의 주교와 요한 꼴로나 추기경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복음적 소명의 독창성을 주장했고, 다음에 시토회의 생활양식에 매력을 느끼던 일부 형제들 앞에서도 그랬다. 성인의 제도적 교회에 대한 복종 역시 소명의 독창성의 포기를 그 대가로 하기는커녕 그 고유한 소명에 대한 충실함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주민적 체제나 봉건적 체제이건, 종교적 집단이나 운동이든간에 프란치스코는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 평민이나 귀족, 평신도와 성직자, 정통파나 이단자, 신자나 비신자 할 것 없이 모든 이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든 이의 종이요” 자유인으로 행동하였기에 개인의 이익이나 집단의 이익을 찾는 살마인 양 의심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비동맹인”으로서 충돌과 논쟁을 일으키지 않고 귀족과 중류계급, 주인과 농노, 성직자와 평신도의 세계, 대수도원의 전례와 민중이 신심 등 사회와 교회의 여러 계층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리스도 교회의 테두리와 경계선을 넘어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정신을 자아냈다.

이제부터 당대의 비복음적인 세계, 즉 “세속”이라는 것 앞에서 프란치스코가 내세운 예언적인 태도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또한 쇠퇴해진 당대의 봉건사회에서나 새로 출현하는 기술 및 상업 사회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발견하고 수용했던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겠다. 프란치스코가 봉건사회에서 취한 참된 크리스천 가치관으로서 이상주의, 기사의 정신, 음유시 문화의 상상력과 삶의 시적인 이미, 예의바름과 충성을 열거할 수 있고, 그리고 새로운 사회에서 수용한 가치관으로서는 창의력과 이동성, 협동 정신, 형제적 공동체 정신, 순회생활 방식, 심화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종교심, 복음에로의 귀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양쪽 사회에서 부정적 가치관이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그는 그들 앞에서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1. 불평등한 사회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세속을 떠난” 후부터는 귀족계급이나 부요함이나 높은 학벌 때문에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도록”(EpFid II, 47) 자극시키는 모든 것을 용감하게 “세속”으로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회를 거부하면서 반응하지 않고 단순히 사회적 계급에서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취하였고 모든 사회적 계급에서 열려 있는 복음적인 공동체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기뻐하였고”(RnB 9,2) 그러면서도 예의바른 사람으로서 귀족들과도 관계를 맺을 줄 알았다. 실은 귀족들 가운데서도 친구와 열광적인 지지자가 있었고 주교들과 추기경들의 접대에도 부담없이 응하였다. 「세 동료의 전기」는 이러한 모습을 잘 표현한다:

“그는 거룩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사제들을 공경하였고 귀족과 부자들인 높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함께하였다. 그는 모든 이에게 섬기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2. 사치와 허례허식 앞에서

유럽의 새로운 돈의 권력자들은 사치와 허례허식에 매혹되어 있었다. 12세기말 유럽에서는 비단과 우단의 사용이 널리 퍼져 있었고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해서 염색 직물산업이 유명해졌다. 이런 것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수덕적인 교만이나 고발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단순히 형제들에게 권고한다:

“형제들은 남루한 옷을 입을 것입니다. ···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권하며 충고합니다. 부드럽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나 맛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업신여기거가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각자가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업신여기십시오”(RB 2m16-17).


3. 학식의 교만과 문화 앞에서

이미 앞에서, 공부가 형제회 안에 도입됨에 따라 이에 대한 성인의 태도를 언급한 일이 있다.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아는 그는 마침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제7권고나 성 안토니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허락을 주는 사건의 배경 속에서 공부가 작은 형제의 직업에 알맞은가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훌륭한 태도를 찾아낼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학자들에 대해 감사와 존경심을 보였다. 그러나 자기 형제들을 영적인 길로 교육시키는 데 있어 ·· “온갖 교만과 헛된 영광 ··· 이 세상의 지혜에서”(RnB 17,9) 자신들을 지키도록 애썼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다른 이들이 재산과 사회계급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자는 학식을 “자기의 것으로 해서는”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학식을 못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받은 다른 선물과 같이 소유욕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성인은 기타 문화 세계, 즉 음악, 시, 문학, 사회 및 민중 행사 등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 중에 음유시에 사용, 몬테펠뜨로(Montefeltro) 백작 아들의 기사 작위 수여식에 참석, 그 자리에서 오르란도 백작에게 “축제에 함께하시고 당신 친구들의 접대에 신경쓰시오”라고 하는 대답, 그리고 악기 사용을 귀중히 여겼다는 것을 들 수 있다.


4. 돈의 욕심과 권력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돈의 폭력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돈이라는 새로운 권력에 대한 성인의 태도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첼라노에 의하면 이미 회개하기 전에도 프란치스코는 돈을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즉각적인 향락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겼다. 돈을 절대시하지 않으려는 그의 경향, 더 나아가서 돈은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붙인 것은 다음의 두 사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성 다미아노의 사제가 성당 수리할 돈을 프란치스코로부터 받고 그것을 거절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파견의 복음을 들은 후 복음적 소명을 완전히 발견했을 때이다. 결과적으로 프란치스코는 돈을 단죄하거나 돈 가진 사람들을 멸시하는 일은 없었지만, 자신은 개인적으로나 자기 공동체의 생활에서 돈의 사용을 절대적으로 포기하였다. 그것이 바로 가장 예언적인 고발이 되었다.


5. 세력과 억압의 폭력 앞에서

프란치스코 시대에는 폭력이 널리 퍼져 있었고 약한 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 적대감이 있는 도시간의 전쟁, 가문 및 귀족간의 경쟁심, 구엘포파와 기벨린파간의 정치적인 투쟁, 이슬람교를 거슬러 일어난 십자군 운동 등의 여러 모양으로 폭력이 퍼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프란치스코는 확실하게 비폭력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형제들이 세상을 두루 다닐 때에 비폭력의 산 증인으로서 논쟁을 벌이는 일 없이 양순하고 겸허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따라 원수들과 박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함을 강조한다. 프란치스코의 평화 메시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한다.

프란치스코가 위정자들 앞에서 취하신 태도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적지만, 기회가 생기면 그들에게도 적절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1209년 리보또르또 오두막에서 황제 오토 4세에게 편지를 써 주었다. 「제1회칙」에서 하느님의 백성의 지체들 가운데서 “왕들과 왕자들”을 “가난한 자들과 빈궁한 자들” 그리고 “노동자들과 농부들” 사이에 열거한다(RnB 23,7). 작은 형제들의 임무는 모두에게, 즉 “왕들과 왕자들과 백성들에게 단순하고 용기있게 회개를 전하는 일이다.”

신앙인인 프란치스코의 시각에 의하면 어떤 정치적 · 사회적 계층도 세례 때 받은 신앙의 요청과 회개의 요청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판사와 법관들에게 자신들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인만큼 사람들을 “자비롭게 판단할 것을”(EpFid II, 28) 서슴없이 상기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용감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보내신 편지」를 통해 “통치자들과 집정관들과 판사들과 지도자들에게 ··· 죽을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명심해서 ··· 깊이 회개하도록” 초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 현세에서 지혜와 권력을 더 가진 자일수록 지옥에서 그만큼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러고 경고한다(EpRec 1-8).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범한 불의와 횡포 때문에 의지할 것 없는 농부들과 지주와 농노들이 소리없이 앙심을 품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들과 고통을 함께하고 있었지만 그 해결책으로서 증오심을 격화시키고 복수심을 일으키는 길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뻬루지아 근처 꼴레스뜨라다(Collestrada)마을에서 있었던 일은 매우 교훈적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전부터 알고 있었던 한 가난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물었다: “형제여, 그동안 별고 없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자기에게서 모든 재산을 빼앗아간 자기 주인에게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주인놈, 참 고맙기도 하지요,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놈에게 앙화를 내리기를 빌고 있습니다. 나는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딱한 사정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무엇보다도 끝없이 증오하는 그의 영혼이 가엾어 주인을 용서해 주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그 가난한 사람은 억울함을 풀어주기 전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느라고 고집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그 사람을 화해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사랑의 표시로 자기 망토를 주었다. 이러한 사랑의 표시에 그만 마음이 풀리고 움직여 그는 자기에게 있었던 불의를 용서하였다.

이와같이 억압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미움을 추방시키려고 노력한 프란치스코는 설교를 통해 억압자들의 욕심을 치료하려고도 하였다.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종결 부분에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에 대해 말할 때 간음한 자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을 예로 들지 않고 “온갖 거짓과 사기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재산을 모든 죄인의 예를 들고 있다(참조: EpFid II, 72-85).

프란치스코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설교자들 중에 성 안토니오만큼 민중의 마음속에 파고들어간 사람은 없다. 그의 시성식(1232년)을 계기로 씌어진 전기는 안토니오가 빠도바와 그 인근 지방에서 거둔 큰 사도적 성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원수가 된 사람들 사이에 형제적 평화를 회복시키고, 감옥에 감금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얻어주고, 폭리와 강탈로 얻은 재산을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며, 못된 짓을 하기로 잘 알려진 강도들에게 남의 것을 훔치려는 욕망에서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성 안토니오는 그 설교에서 사회적인 악습과 악의를 강하게 고발하는 표현을 사용하며 아무도 그 복음적인 메시지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제후, 봉건주, 교회의 고위 성직자, 부자, 양심이 없는 고리대금업자 등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공의로우신 하느님 앞에 서도록 했다. 그리고 성 안토니오는 그들의 편을 들면서도 가난한 자들의 악습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미 다른데서 프란치스코가 강도와 습격자들을 회개에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한 솜씨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6. 고위 성직자들의 악평 앞에서

“거룩한 어머니 교회”에 대한 구체적이고 존경스러운 신앙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적인 의로움과 충실성을 지닌 프란치스코에게 당대 개혁 지도자들이 고발하는 성직자들의 흉한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고위  성직계는 속화되고 성직 매매와 관련이 있었고 야망이 많으며 때때로 폭행과 파벌을 일삼았다. 하위 성직계는 교육 수준이 낮고 독신생활에 문제가 많았으며 소명의식 없이 살면서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란치스코는 단순히 믿음과 사랑과 존경심과 순명으로 표현되는 복음적인 노선을 택했는데, “그분들은 설사 죄인이라 하더라도 서품을 받아서 성직에 봉사하는 분들”(RnB 19,3; EpFid II, 33)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4장에서 이 주제를 길게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프란치스코가 교황 호노리오 3세와 추기경들과 로마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에게 설교한 사건만 언급하겠다. 이때에 프란치스코는 시편집에서 우연히 찾아낸 구절, 즉 “내 망신이 바로 내 앞에 항시 있나이다”라는 구절을 주제로 하여 그들에게 “솔직하고 열성적으로”말하면서 그 내용을 교회의 상황에 대담하게 적용시키고 교회 모습을 흉하게 하는 악습에 빠진 고위 성직자들을 회개에로 이끌었다.


7. 위선과 금욕적인 매너리즘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복음에서 배운 대로 형식주의와 거리를 두려고 최선은 다했지만, 그가 몇 세기 동안 내려온 수도생활의 전통에 속하는 행위로, “하느님의 사람”인 수도자의 통상적인 모습과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자세와 풍습과 맞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작업은 형제회의 내부 방향과 깊은 관련이 있었고 불행히도 프란치스코의 의도와는 달리 교황청의 지지를 받고 있는 시토회 모델이 형제회 내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잘 알고 있는 바와같이 향정을 맡고 있었던 소위 “신중한 형제들”과 프란치스코간에 긴장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신중한 형제들”이 수도회의 명성과 위신을 높이기 위해 단식을 늘리고 금육제를 대수도원의 전통에 따라 정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위선의 또 다른 형태에 빠지려는 위험성도 있었는데, 이것은 회개와 가난을 주장하는 당대의 어떤 운동 추종자들과 같이 세상을 멸시하려는 목적으로 이상한 옷을 입고 유별나게 처신하는 것이었다.

성인의 태도는 분명하다. 이는 복음에 충실한 길이다. 세상을 다닐 때 유별나게 행동하지 말고, 형제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차려주는 대로 먹고, 겉으로 슬퍼 보이거나 움울한 위선자들처럼 보이지 말고, 겉으로 드러나는 신심과 성화를 얻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라는(요한 4,23)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소유의 죄”로 고발하는 것 중의 하나는 “여러 가지의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절대로 “형제 육신”을 즐겁게 하려고 하는 일이 없었다.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물리적인 존재로서 육신은 귀중히 여겼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작용에 반대하는 이기주의적이고 세속적인 경향의 표지로서의 육신은 “원수로”선언하였다. 그래서 육신을 경계하고 긴 여행의 피로와 가난에 따르는 불편함에 굴복시키며 밤낮으로 기도할 수 있게 깨어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친히 육신을 들어 “당나귀 형제”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분명치 않다, 「뻬루지아 전기」에 나오는 대로 “만일 육신이 영적인 일에 나태하거나 게으르거나 혹은 잠만 잔다면 그때는 자기 일도 하지 않고 또 책임도 다하지 못하고 먹르려고만 하는 고약하고 게으른 당나귀처럼 벌을 주어야 합니다”하고 경고하는 프란치스코의 말을 근거로 해서 첼라노는 「제2생애」에서 프란치스코가 반역하는 육신을 “당나귀 형제”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침내 성 보나벤투라는 결정적으로 “프란치스코는 자기 육신을 당나귀 형제라고 불렀다”고 단언하고 있다.


8. 이단과 이단자들 앞에서

당대의 교회 안에서 비신자도 이단자도 설 자리가 없었다. 어떤 이단이 싹트게 되면 교회 책임자들뿐만 아니라 봉건 영주들도 가장 위험한 일 앞에서처럼 방어 대책을 세웠다.

프란치스코가 복음적 모험을 시작한 당시에, 전체 분위기는 이러한 반 이단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실은 그럴 만한 근거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평신도들은 새로운 기술과 상업의 사회생활에서 설 자리를 요구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도 그러하였다. 게다가 권력자들이 모아놓은 재산과 권력을 볼 때 평신도들의 고발적인 태도와 탈선 행위는 불가피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글에서 한 번도 이단자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단자들을 거슬러 싸우는 그 사회에서 프란치스코만이 그들을 모르는 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전기 작가들이 성 프란치스코가 이단자들을 거슬러 어떤 말을 했다든가 어떤 태도를 보였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작은 자에게 알맞은 방법을 따라 가톨릭 신앙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증거하면서 교계 교회에서 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운동, 특히 카타리파와 바타레니파가 부인하는 진리를 꿋꿋하게 선언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논쟁하고 공격하는 일 없이 일반 신자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