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13장 “형제적 순종” -2

Margaret K 2017. 12. 18. 21:48


제13장 “형제적 순종” -2

자기 의지 포기

창립자 프란치스코는 한편으로 장상이 권위주의적 태도에 빠지지 않도록 온갖 주의를 다 시켰지만 다른 편으로는 형제들로부터 양심과 서원한 생활에 반대되는 일 외에는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주님께 지키기로 약속한 모든 일에 있어” 재빨리 순종해야 한다는 근본적 이유는 “하느님 때문에 자기 의지를 포기했다는 것”에 있다.

프란치스칸 순종은 장상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형제는 그가 올바른 지향에 따라 자발적으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순종 안에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성령의 활동에 순응하여 책임있게 하느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길을 택할 줄 알아야 한다.

순종의 출발점과 마지막 동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험”에는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있게 마련인데, 부르심을 받은 각 사람은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모험의 길을 걸어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장상뿐이라는 사상과 그가 명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판단하지도 않고 아랫사람의 할 일은 오직 장상께 순종해야만 한다는 사상은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외에도 프란치스칸 순종은 은둔자 생활 시대부터 내려온 “장님”의 순종도 아니고, 자기 뜻을 꺾으려는 목적하에(fractio voluntatis) 수도자는 장상이 명하는 것 외에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으며 다른 형태로 할 수도 없다는 그러한 순종도 아니다.

순종과 자유, 이 두 요소는 사랑을 목적으로 할 때 참된 크리스천의 차원에서 조화를 이룬다. 욕심과 남용 혹은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순종과 양심의 자유사이에 충돌이 생길 경우, 그 해결책은 교만한 반항심에 있지 않고 장상인 형제와 형제들의 집단과 일치의 유대를 끊지 않는 겸손한 자세로의 저항에 있다.

이에 대한 가르침은 비할 데 없이 의미가 깊은 「제3권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는 형제들이 한 지역의 장상 밑에 여기저기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지만, 아직도 서로 흩어져 살고 있었고 각 형제는 많은 활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창립자 프란치스코는 다음의 세 가지 가능한 경우를 생각해서 말한다: 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형제의 경우, 이 형제는 순종 안에 사는 것인가? ② 형제와 장상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는 경우, 해결책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③ 형제가 장상이 명하는 것을 양심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양심 문제가 생기는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세 가지 경우에 형제가 가져야 할 복음적 자세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운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칠 때까지 완전히 포기하며” “장상 손안에서 자기 전부를 내맡기는 것이다”.

첫째 경우에 성인의 대답은 확실하다: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형제는 그가 하는 행동이 장상에 의해 금지된 일이 아니고 그리고 그 자체로 선한 일이라면 "참된 순종 안에 사는 것이다“.

둘째 경우에는 형제적 일치라는 우선권을 고려하여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형제는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자기의 의견을 포기하고 장상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동체 형제들은 모든 이의 유익 때문에 각 형제가 공동체의 책임자의 결정을 따르도록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각 사람의 포기는 사랑의 순종, 즉 사랑을 위하고 사랑에 의한 순종이 되는 것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셋째 경우에 대해 성인은 매우 예리하고 깊은 대답을 하는데,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죄와 잘못이 되는 일에 대하여는 아무도 그 누구에게 순종할 순종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EpFid II 41).그러나 그것 때문에 박해를 당해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장상이나 그 장상을 지지하는 형제들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욱 사랑하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불순종의 행위는 오히려 “완전한 순종”으로 변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형제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이미 포기한 자기 의지에 되돌아가는 사람은 순종을 벗어님으로써 도둑이 되는 것이다.

성녀 글라라는 자기「회칙」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회칙」에 표현한 순종의 개념을 글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지만, 「유언」에서는 의미있는 새로운 말을 덧붙인다: “‘자원하여’ 스스로 주님께 약속한 대로 자기 어머니에게 순종하기를 나는 바랍니다”.

능동적 순종을 배우기가 쉽지 않은 것은 순종하는 사람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떤 형제가  에지디오 형제한테 가서 자기 원장을 원망했다. 기도의 고요함을 누리고 있는데, 원장이 애긍하러 보냈기 때문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에지디오 형제가 말하기를 “형제여, 당신은 아직도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에지디오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첫 동료들에게 명령받은 것을 재빨리 조건없이 실행하도록 가르쳤고, 이렇게 하는 것이 형제적 사랑과 내적 가난의 요구라고 가르쳤다. 사부는 형제들에게 거듭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은총을 주셔서 수련 입회한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은 수련자일지라도 나의 원장이 된다면 나는 그에게 가장 오래된 원로 형제나 가장 거룩한 형제에게처럼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아래 형제는 장상 안에서 인간을 볼 것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 순종을 서약하게 되었는가를 명심하여 장상 안에서 바로 그분을 볼 것입니다. 명하는 사람이 비천할수록, 순종하는 사람의 겸손을 그만큼 하느님이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수도회에 대한 총책임을 내놓았을 때 성인은 특별 대우받기를 거절하였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며 장상 손에 내맡기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기와 함께 살 형제들을 정하는 것까지 포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총대리에게 부탁하였다:

“이제 나는 자유의 특전에서 오는 예외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여기저기 다닐 형제들을 주께서 영감을 주시는 데에 따라 정해주기를 바랍니다.”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강아지를 앞세워 먼 길을 가는 맹인 하나를 본 일이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생의 마지막까지 장상들을 “봉사자”, “종”이라 부르기를 강조하였다. 또한 성인은 장상들이 아래 형제들을 주인과 같이 대하면서, 이들한테서 이용당하기를 원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성인은 「유언」에서 본인의 순종서약에 대한 약속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나는 이 형제회의 총봉사자께, 그리고 그분이 임의로 나의 수호자로 정해 주는 그 형제에게 순종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의 주인이기에, 그분의 뜻과 순종을 벗어나서는 어디에 가지도, 무엇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분의 수중에 매여 있기를 원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엘리아 총장에게 “나의 주님”으로 인사할 때에도, 예의를 지키려는 태도 이상으로 순종에 대한 깊은 뜻을 보여주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생애의 마지막에 순종을 특별히 강조하게 된 이유는 한편으로는 형제회가 증가됨에 따라 순종생활이 문란해졌고, 다른 편으로는 어떤 형제들이 창설자의 권위 외에 다른 장상들의 권한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순종에 관한 사부님의 이상은 매우 아름답고 위대하다: “형제들의 책임”을 지는 형제는 다른 형제들을 “주인”과 같이 섬겨야 하고 그리고 순종하는 형제는 “종”인 형제를 주인과 같이 생각하면서 그분의 수중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어야 한다. 각자 자기 위치를 잘 인식하면서 서로서로 섬기기 위해 앞을 다툼으로서의 순종이다.

참된 순종과 순종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를 표현하려고 성 프란치스코가 사용하는 “시체”의 비유는 얼마나 올바르게 그분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지 모른다(성 아냐시오는 같은 비유를 300년 후에 사용했다). 「제2생애」에 실려 있는 이야기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형제회가 수도원 중심으로 조직된 후 씌어진 것으로서 교육적 용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비록 이 비유의 말씀과 가르침이 사부님의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순종과 관련해서 볼 것이 아니라, 「권고」 말씀 제4와 19의 가르침에 따라 겸손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자진하여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발아래 있기를 열망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프란치스칸 순종의 모험

이와같이 형제의 순종이 아름답고 해방적인 만큼 장상의 봉사직은 그만큼 어렵고 무거운 것이다. 자기 개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뿐만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장상의 명령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까지 가지는 형제들의 공동체를 다스리는 것은 장상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무거운 짐을 자기 몸에서 체험한 어느 관구장이 면직을 청하면서 성 프란치스코에게 편지를 썼다. 성인은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은둔생활로 피신하려는 유혹에 기울지 말고 관구장직을 계속 수행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성인은 이 편지를 통해 그가 느끼고 있는 실망의 원인을 지혜롭게 지적하였다. 즉, 그것은 바로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알고 있는 완덕의 길을 다른 형제들에게 강요하려 했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나는 그대의 영혼 사정에 관하여 이야기할까 합니다: 그대가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하고, 또 형제들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든 그대를 때리면서까지 방해하는 사람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이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다들이십시오. 이것이 주 하느님과 나에게 할 수 있는 참다운 순종이 됨을 아십시오. 나도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순종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대에게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그대에게 주시는 것 외에 형제들에게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면 하고 바라지 말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그대에게는 은둔생활보다 더 좋은 것인 줄로 여기십시오.”

장상과 아랫사람의 관계를 프란치스칸 양식으로 이해할 때, 여기서 한 가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질서의 결핍이다. 수도자들이 자기의 높은 이상을 잃고 순종의 내적인 의미를 잃게 될 때 무질서가 생기게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질서의 결핍이 생기면 그 해결책으로서 장상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규칙생활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서 장상들은 수도자들에게 질서를 지키게 하고 수도회 행정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순종을 방편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 이를 때 순종 개념을 중심으로 순종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수덕적 원칙과 비교육적인 구체적 방법을 세운다. 불행히도 이러한 원칙과 방법은 때때로 깊은 신학적 근거가 없고 하느님의 자녀들의 자유에 대한 성숙함도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순종의 목적이 각 개인이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에만 있다면 - 순종을 그러한 방법으로만 여긴다면 - 순종과 규율은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칸적 의미에서 볼 때 순종은 명령의 기능을 첫째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종에 반드시 규율과 질서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따른다 하더라도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프란치스칸 순종의 가치와 모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순종하는 작은 형제는 자기 인격을 성장시키는 방법을 자발적인 순종에서 발견하며 순종함으로써 받은 카리스마를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자기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순종의 이러한 차원에서만 프란치스칸 역사가 보여주는 큰 인물들의 탁월한 인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순종의 정신이 희박해질 때 대부분의 수도자들의 생활은 어떠한가? 주어지는 자유를 편한 생활이나 자유로운 생활을 위한 기회로 삼고, 상호 봉사의 자리에 에고이즘이 자리하게 되고 형제적 공동체는 허물어지고 만다.

성 프란치스코 자신도 이 두 갈래의 길을 잘 인식하여 마음이 아프면서도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관구장들에게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형제들을 엄격히 다룰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성인은 사람을 믿어야 한다는 자세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고, 아랫사람들이나 장상들이 성령에 순종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부는 아래 형제들을 장상의 권위주의에서 보호하려고 하는 동시에 장상들의 권한을 법적인 규칙으로 정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예를 들어, 「회칙」에 의하면 장상들은 “하느님의 뜻에 알맞다고 생각하는 대로”행동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관구장들, 특히 총장의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다. 이들은 총회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

순종과 권한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하기 위해서 엘리아 형제가 총장으로 있었던 시기의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순종생활을 벗어난 형제들은 법의 엄격한 조치를 당해야 했음은 물론이지만, 창설시의 단순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포기하지 못한 사부님의 그 열심한 동료들도 법 태두리와 조직이 무거운 짐을 견디어야 했다. 행정가로서 능력이 뛰어난 엘리아 형제들의 반발심이 생겨났고 결국은 회헌을 작성할 필요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239년에 독재체제를 벗어나기 위하여 법적인 조치, 즉 회헌 작성에 나선 형제들도 실은 초창기의 정신에 되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엘리아 형제의 총장 시대와 비교하면 행정체제가 더 “민주주의적”으로 되었으나, 더 “형제적”인 것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수도회의 행정은 실질적으로 사제들에게만 한정되었다. 공동체 생활은 모든 수준에서 -수도원, 관구, 중앙행정 - 이때부터 “피라미드식”형태를 가졌고, 권한의 한계를 법적 뒷받침을 요구했고, 질서를 지키기 위한 필요성이 심지어 이것들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 장상이 위치가 차차 놓아졌고 대수도원의 전통을 본떠서 공경과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새로 입회한 사람들에게 장상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교육을 시켰다.

그후에 개혁자들은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원칙하에 창설 당시의 자발성을 회복시키고 장상과 아랫사람의 관계를 가족적인 분위기로 평등화하려고 큰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장상들의 “봉사”태도를 보존하기 위하여 봉사직을 제도화시키는 해결책밖에 찾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은 장상들이 직책 임기를 최대한도로 제한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것은 살림베네(Salimbene) 기록자 형제가 말한대로 “수도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장상ㄷ르이 자주 바뀌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의 내부생활을 복음에 따라 보존하기 위해서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을 싫어하였고, 그는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안에서 친히 활동하심을 믿고 있었다. 권리를 정학하게 정하는 길은 형제적 공동체에게 생기를 돋우어주는 것이 아니다. 서로 불신하는 데서 제도가 생기는 법이고, 이것으로써 “형제적 순종”을 죽이게 된다.

오늘날 프란치스칸 여러 가족이 쇄신의 작업에 들어서서 성 프란치스코가 원하였던 순종의  참된 의미를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고 그 목적지에 가까이 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성인이 순종에 대한 「권고」말씀을 표현하고 기록할 당시 장상은 형제들의 활동을 계획하고 배치하는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각 형제는 순종 안에 살면서도 자기 능력과 소질에 따라 자유로이 일을 택하는 것이었기에, 노동일이나 말씀의 봉사나 나병환자들의 봉사 등은 각자가 스스로 택한 일이었다. 공동체는 그 자체로써 어떤 외부활동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었다. 봉사자요 종인 장상의 역할은 일하는 형제들을 보호하고 방문하고 충고하며 지역이나 공동체 안에서 일치시키는 것뿐이었고, 형제들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순종과 명령은 수도회의 어떤 일의 성과나 기능에 의하여 평가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획자로서나 행정가로서 유명한 엘리아 형제의 시대에 와서는 순종의 의미에 큰 변화가 왔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을 받아들인 보나벤투라 성인은 공동체를 주관하는 장상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상은 공동체의 몸에서 머리의 역할을 한다. 지체들이 각자에게 해당되는 일에 종사하는 동안에 머리는 모든 일을 주관하고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거룩한 순종과 관련되는 명령과 허락을 통해 모든 지체의 기능에 개입함으로써 모든 것을 다스리고 모든 지체에게 활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오늘날 순종은 “명령을 내리고 허락”을 줌으로써 움직이는 기계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노동과 증거생활을 하고 있는 여러 작은 규모의 프란치스칸 공동체들은 초창기 프란치스칸 공동체적 상황에로 돌아가려는 원의가 대단한다. 그리고 작은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대도시에서 사도직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 다양한 활동, 융통성있는 시간의 배치, 다양한 일의 실행과 수단 등은 머리 역할을 하면서 수도원 내부 공동생활이나 외부활동을 기께처럼 조절하려는 장상의 “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공동체 책임자는 맨 위에 자리잡고 있는 머리의 역할이 아니라,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 유대의 중심 역할, 중단없는 쇄신의 누룩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포기의 정신과 실천적 사랑으로 가득 찬 영신적, 형제적인 분위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장상은 아래 형제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에 신뢰를 두어야 한다. 즉, 아래 형제가 봉헌생활을 진실하게 하고 있음을 믿으면서 그에게도 실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아래 형제는 장상에 진실하게 그리고 양심대로 직무를 수행하려고 함을 믿고 장상도 한계성이 있는 인간이기에 그에게도 권한을 남용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