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12장 복음적인 형제적 공동체

Margaret K 2017. 12. 18. 21:46

제12장 

복음적인 형제적 공동체

 

성 프란치스코는 복음적 생활의 이상으로 형제적 공동체를 발견하기 전에 형제인 인간을 발견했고, 형제인 인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그리고 성인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모든 이의 아버지시라는 것과 하느님의 자녀들이 한 가족을 이룬다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이 가족 안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물론 모든 인간들과 우주의 만물까지 서로 형제가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여러 기도문에서 “아버지, 자녀, 형제”등에 관한 복음의 구절을 자주 인용하였다: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또 서로간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내가 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프란치스코가 생각하고 있는 공동체는 “많은 형제 중에 맏형이신 그리스도”(로마 8,29)안에 기초를 두어 모든 사람들을 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공통된 구원의 은총으로 뭉치는 형제적 공동체이다. 이 구원이란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가 얻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형제들”로서 구성된 이 가족의 일치는 성령의 내적인 활동으로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 꽃핀다.


“주님이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습니다"(Test 14)

예수님이 원하셨던 대로 함께 형제애를 나눔으로써 일치의 신비를 실현하려는 열망이 하느님 백성 가운데 항상 살아 있었다. 초기 교회의 공동체는 일시적으로나마 그 이상을 이룩하였고, 이후 모든 수도 단체들은 공동생활을 택함으로써 크리스천 일치를 성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복음적 이상을 진실되게 실천하려면 참된 형제적 공동체가 요구된다는 깨달음이 어느 때보다도 12세기말과 13세기에 분명해졌다. 이 당시의 모든 종교적 운동과 단체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집단까지도 상호 유대와 목적 그리고 공통 사명을 표현하기 위해서 형제적 공동체의 양식을 택한 것이다. 이 당시에 발생한 수도 단체들은 예외 없이 “형제”라는 명칭을 택했고 오늘까지도 이 수도회 회원들이 프라뜨레스(Fratres)라고 불린다. 그리고 창립시의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오늘의 쇄신작업에 따라 이 모든 수도회는 “형제적 공동체”(Fraternitas)라는 이 요소를 매우 강조하면서 우선적인 가치로 삼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공동체를 세울 때 기존 수도회의 양식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베네딕도회는 회원들이 수도원 안에서 계급제도를 지키면서 작은 규모로 교회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의 지도하에 수도승은 물질적으로나 영신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공동체로부터 받는 동시에 모든 활동과 일을 공동체를 위해 바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노동으로 이뤄지는 베네딕도회 생할의 기초는 “정주제도”(stabilitas)였다. 성 아우구스띠노 회칙하에 11세기부터 “대성당 참사원”(canonici regulares)들을, 13세기부터 “은둔자”(hermitani)들을 한 수도회로 통일시킨 아우구스띠노회 공동체는 공동생활의 규범으로 사도 시대의 예루살렘의 공동체 생활을 택했다. 여기서는 개인적 가난과 형제적 사랑의 생활이 상징적으로 “공동생활”(vita communis)을 통해 표현되었다. 따라서 공동생활이란 같은 지붕 밑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공동으로 기도함을 의미했다. 프레몽트레회와 여기서 영향을 받은 도미니코회 회헌을 연구해 보면 “공동생활”은 또한 공동생활 규범의 준수를 의미한다. 이 두 수도회가 사도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 외부생활까지 공동생활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란치스칸 공동체에 있어서, 위에서 말한 의미로의 “공동생활”은 베내딕도회나 아우구스띠노회에서처럼 근본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지원자가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공동체에 속하기 시작할 때 개인 재산을 포기한다. 가난을 서약한다는 것은 개인 재산을 포기함으로써 공동체에서 삶에 필요한 것을 누리고자 하는 것보다 가난하신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결합되어 다른 형제들과 함께 지상적인 근심에서 해방되는 의미를 가진다. 비트리의 야고보(Iacobo de Vitry)는 작은 형제회의 입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작은 형제들은,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섭리에 자신을 내맡기는 연고로 자기 수도회로 모든 종류의 지원자들을 받아들인다. 하느님이 그들을 보살펴 주심을 믿기 때문에 아무 어려움 없이 그 수도회의 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입회하는 지원자들에게 띠와 수도복만 제공해 주고 나머지는 하느님의 보살핌에 내맡긴다.”

사적인 이익을 포기할 때 작은 형제는 입회시부터 다른 형제들을 보편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자유로운 마음을 갖추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지극히 높은 가난 때문에”겪어야 할 어려움과 고생의 보상을 법적 공동생활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의 따뜻한 사랑을 통해 받기를 원했다. 작은 형제들이 본받아야 할 원형은 베네딕도회 공동체에서처럼 “지상에서 하느님의 도성”도, 아우구스띠노회에서처럼 “초기 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도 아니고 “사도들의 생활”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같이 행하신 양식에 따라 말고 생활의 증거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글에는 한 번도 예루살렘 최초 공동체의 모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수도원 공동체가 형성된 후에야 공동생활의 동기를 강조하기 위해 전기 작가들이 한두 번쯤 그것을 언급한다.

프란치스코의 글에서는 첫 제자들의 그룹은 항상 형제적 공동체라 일컫는다. 두「회칙」과 「유언」과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형제적 공동체”라는 단어를 10번, ‘형제“라는 단어를 179번 사용한다. 글라라의 글 중에 ”자매“라는 말은 「회칙」에서 60번, 「유언」에서 17번, 기타 글에서 18번 사용되고 있다. 이 형제적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 따라서 작은 자들의 공동체로서 지상의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어 선교자적인 정신으로 사람들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글라라는 기성 여성 수도 공동체 중에 베네딕도 수녀회와 아우구스띠노 수녀회의 공동체 모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수녀원들에서는, 남자 수도원 이상으로, 경제적인 안정 보장과 함께 수녀와 노동 자매들간의 계급제도와 대수원식의 공동체의 리듬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이외에도 수공예업 사회에서 발생한 기도와 자애봉사에 종사하면서 손수 일하고 사는 베기네(Beguinae)와 후밀리아띠(Humiliati)의 여성 단체들이 새로운 공동체 모형들로 등장했다.

비트리의 야고보는 자기가 목격한 여러 형태의 공동체를 기술하면서 일반적으로 작은 형제들의 운동의 독창성에 중점을 두되, 특히 “작은 자매들”이라는 이들의 생활양식을 강조한다. 작은 자매들은 기성 수녀회 수녀들과 달리 대수도원에 살지 않고 “숙박소”에 거주하면서 손수 일했고, 그러나 베기네와 후밀리아띠의 여성 단체들과 다르게 도시 밖에서 은거생활을 했다고 말한다.

“작은 자매들”의 공동체는 작은 형제들과 달리 순회하는 공동체가 아닐지라도 자매들도 나그네와 순례자의 정신으로 살았다. 자매들은 형제들과 같은 복음적 소명을 받았으므로, 절대적인 가난과 삶의 궁핍과 순수함과 기쁨을 담고 있는 내부적인 원동력을 가지고 형제들과 공동으로 살아간 것이다.


작은 형제들의 공동체의 특징

1.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형제적 공동체

성 프란치스코는 「제1권고」에서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형제들 가운데 실제로 계심을 굳게 믿고 있음을 확인한다. 형제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을 공경하고 모실 때나 “믿음을 통하여 자기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심을”(에페 3,17) 체험할 때마다 주님의 현존을 느꼈다.


2. “영적인”형제와 자매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이시며 각 형제들과 각 사람과 각 조물 안에 “형제로서” 머무르신 그리스도의 현존은 창조되지 않으신 사랑이시며 아버지와 아드님의 선물이신 성령의 현존으로 완성된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영감”과 “감동”으로 지원자들을 형제회에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각 형제들 위에 내려오시고 그들 안에 머무시면서 그들을 “영적으로” 서로 결합시키신다. 따라서 성령의 현존하심과 “거룩한 활동으로” “영적인” 형제와 자매가 된 이들은 성령에 순응하여 “육”에 따라 살지 않고 “영”에 따라 살아야 한다. 프란치스코가 「회칙」에서 성령을 들어 작은 형제회의 총장이시라고 선포하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3. 말씀으로 생명을 얻는 형제적 공동체

첫째로,  형제적 공동체는 “영”과 “생명”이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육된다. 다음에, 형제적 공동체는 인간의 말, 각 형제와 각 자매의 말로 생기를 얻는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침묵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기도의 정신과 형제들의 고요한 사생활을 보존하기 위하여 침묵을 지킬 때가 있었지만 서로 기쁨을 나누기 위해 자유롭게 말할 때도 있었다. 「제1회칙」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면 그때마다 침묵을 지키도록 힘쓸 것입니다”라고 규정한다. 이 규정의 배경에서 볼 때 침묵을 지켜야 하는 동기는 사랑이었다. 사부님의 동료들 중에는 베르나르도, 실베스텔, 에지디와 같이 침묵의 은혜를 받은 형제들이 있는가 하면, 영적 대화로써 공동체의 분위기를 명랑하게 하는 형제들도 있었고, 쥬니뻬로 형제와 같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침묵을 지키고 말하기도 하는 형제도 있었다. 그리고 위선 때문에 완전한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 몸짓으로만 행동한 형제도 있었다.

성 다미아노의 여성 공동체는 최초의 3년간 침묵에 관해서는 프란치스코가 은둔소에 사는 형제들을 위해 정해 놓은 규범과 비슷한 양식을 따랐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시토회의 영향을 크게 받은 1219년의 우골리노 추기경의 회칙은 ‘다미아떼“자매들에게 ”계속적인 침묵“을 명하였고 병든 자매들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지켜야 할 이 규범은 원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서로 이야기하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다음의 인노첸시오 4세의 「회칙」도 똑같이 ”계속적인 침묵“을 지킬 것을 매우 엄격하게 반복하고 있으며 자매들은 시토회의 풍습에 따라 ”경건하고 품위있는 신호“를 사용해야 했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 이 엄격한 규정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를 1228년에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쓴 첼라노가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다: “그들은 극기와 침묵의 특수한 은총을 얻음으로써 육의 동작에 제동을 걸고 혀를 억제하는 데에 조금도 고통을 받지 않았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말을 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를 않아, 말을 꼭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거의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마침내 글라라는 자기 공동체에게 프란치스칸 득색을 지닌 고유한 생활양식을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계속적인 침묵”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였고 특별히 지켜야 할 시간과 장소에 한정시켰다. 게다가 침묵의 규정이 무엇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는 사랑 앞에서 절대적으로 양보할 장소가 있는데 이곳은 병실이다. “병실에서 자매들은 앓는 자매들을 위로하고 봉사하기 위해 조심하면서도 말은 항상 할 수 있습니다”(Reg CI 5,3).

관상 수도원의 정상적인 분위기는 평온하고 고요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이것과 동시에 글라라는 말을 통한 의사전달이 개인과 공동체 화목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한 말을 짧게 낮은 목소리로 언제 어디서나 속삭일 수 있습니다”(Reg CI 5,4).

수도원을 중심으로 공동생활이 정착된 후로는 작은 형제회에서도 대수도원에서 지켜왔던 ‘복음적 침묵“과 ”수도적 침묵“의 구분이 도입되었다. ”복음적 침묵“은 쓸데없는 말을 삼가는 것을 의미하고 정한 시간에 엄격히 지켜졌던 ”수도적 침묵“은 공동생활의 리듬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형제적 공동체가 말을 통해서 건설된다는 것이 사실이나, 혀가 사랑으로 인해 움직이지 않을 때 형제적 공동체는 말을 통해서 파괴될 수도 있다. 프란치스코는 비판을 매우 싫어하였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잇을 때나 똑같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형제 앞에서 사랑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뒤에서 말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두 개의 「회칙」에서 비판을 일삼는 형제들에 대해 엄한 경고 말이 나오고 있고 성인에 대한 전기를 보면 어떤 공동체에서도 생길 수 있는 이 악습을 볼 때 성인이 얼마나 흥분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성녀 글라라도 중상과 비평에 관해 자매들에게 권고한다(참조 RegCI 10,4).


4. 기도로 양육되는 형제적 공동체

일치시키는 그리스도의 현존, 빛을 비추는 성령의 활동, 그리고 말씀에 대한 순응성은 기도 안에서만 그 분위기와 기초를 두고 있다. 진정으로 크리스천 집단이 되려면 반드시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마음이 매일 하느님께 열림이 없이는 형제들에게 열림이 불가능하다. 복음적 공동체는 믿음의 도움을 받아 점진적으로 “일치”의 신비를 발견해 나아가야 한다.

이미 8장에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실천하고 가르친 개인 및 공동체적인 기도의 다양한 면을 다루었다.


5. 복음적 사랑을 기초로 하는 형제적 공동체

첼라노는 첫 형제들의 공동체의 내부의 삶을 아름답게 기술하고 있다. 거기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졌기에 기쁘게 실천되는 완전한 가난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정결은 단순하고 진실한 사랑의 실천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사랑은 가난과 정결 때문에 포기한 것과 궁핍함을 넘치게 채워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큰 사랑이 경건한 단체 안에서 피어올랐던가! 어디 가든지 혹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사랑이 솟구쳐 올랐고, 다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실한 애정의 씨앗인 사랑을 서로 뿌렸다. 이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었는가? 우아한 포옹, 부드러운 애정, 거룩한 친구, 즐거운 대화 품위있는 웃음, 즐거운 모습, 단순한 눈매, 순종의 정신, 온화한 말씨, 부드러운 대답, 목적의 단일성, 기꺼운 순종, 지칠 줄 모르는 노력 등을 우리는 그들에게서 볼 수가 있었다.

참으로 그들은 모든 지상적인 것을 가볍게 보고 절대로 이기적인 사랑으로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온 사랑을 공동체에 쏟았다. ··· 그들은 큰 바람으로 서로 모여들었으며 기쁨 가운데 머물렀다. 동료들과 헤어짐을 서로 슬퍼했으니 그것은 쓰라린 이별, 참혹한 적조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전기 작가는 다음 세 가지 점을 밝혀준다: 형제적 사랑을 위해 마음 준비시키는 가난과 정결의 해방적인 역할, 서로 뭉치게 하는 봉사와 순명의 의미, 그리고 포옹, 애정의 표시, 웃음 등으로 표현된 형제들간의 인간적인 분위기다. 이와같이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우월감을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형제들은 정서적인 욕구들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토마스 데 에클레스톤(Thoma de Eccleston)도 영국에 입국한 최초의 형제들에 관해 비슷한 내용의 기록을 전해주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1228년에 성녀 글라라를 중심으로 사는 성 다미아노 공동체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무엇보다도 그들 가운데는 첫째로, 상호적이고 영속적인 애덕이 우거져 있다. 그 애덕은 그들의 뜻을 하나로 묶어 40명 혹은 50명이 함께 살아도 어디서나 다양성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한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1253년에 성녀 글라라의 「회칙」을 인준하는 「칙서」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이 자원하여 받아들인 생활양식, 곧 서로 함께 정신의 일치 속에 그리고 지극히 높은 가난의 서약에 따라 살아야 하는 생활양식을 확인해 줄 것을 우리에게 겸손되이 요청한 바 있습니다:”(Reg CI Apr 1).

진실한 사랑 안에서 사는 “영적인” 형제들과 자매들에 있어서는 영적으로만 혹은 육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존재를 통해 사랑하는 법이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형제적 공동체를 한 가족과 같이 생각하고, 그 가족 안에서 형제들 혹은 자매들간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어떤 강한 사랑보다 더욱 다정하고 헌신적이기를 원하였다: 즉,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강하기를 바랐다: “형제들은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기르는 것처럼, 각자는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따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기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감정에만 그치면 안되고 착한 행실로 드러나야 했다(「제1회칙」 11 참조). 성녀 글라라도 「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매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여러분이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랑을 행동을 통해 외적으로 드러내십시오. 이렇게 자매들은 이 표양으로 자극을 받아 하느님 사랑과 서로간의 사랑 안에서 언제나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녀 글라라는 어머니와 같이 딸들을 따뜻하게 대하였다. “성녀는 추운날에 자매들의 잠자리를 돌아보시고 자기 사랑스러운 손으로 잠든 자매들을 덮어주셨다.”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사용한 애정의 표현만 보더라도, 성녀의 자매들에 대한 그 따뜻한 사랑을 알 수 있다.

사랑이 요구할 때면 옛 수도생활의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첼라노는 성인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더욱 사랑을 가지도록 권하면서 그들에게 서로서로 붙임성있고 가족적인 친근감을 보이라고 타일렀다. 그가 말하였다: ‘나는 나의 형제들이 한 어머니의 자녀들임을 보여주기를 바라며, 만약 누가 투니카나 띠나 그밖에 다른 물건들을 요구하면 다른 형제는 너그럽게 그것을 그 형제에게 주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은 책과 필요한 물건들을 돌려가며 써야 하고, 그래야만 누구도 다른 형제에게서 물건을 뺏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는 ··· 앞장서서 이러한 일들을 실천했다.”


6. 서로 받아들임

심리학이 증명하듯이 어떤 집단 소속 일원이 그 집단에 의해 완전하게 그리고 조건없이 받아들여지는 동시에 자기가 그 집단의 다른 이들과 더불어 집단 자체의 이상과 목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이간 집단도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은 크리스천 집단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바울로 사도가 그 비결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받아들이시오”(로마 15,7).

만약에 어떤 공동체가 구성원들을 선택할 때 그들의 성격, 나이, 학력, 사상, 취미 등을 따지고 고른다면, 이 단체는 복음적 공동체가 되지 못할 것이고 오래 지탱하지도 못할 것이다. 형제들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격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각자는 정화와 회개의 수련을 진실히 밟아야 한다. 이 정화란 각자가 자존심과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형제들에게 답답하게 보이는 각자의 습성이나 악의적 경향을 억제하는데 있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그 비결을 제시해 준다: 이것은 각 형제, 각 자매를 있는 그대로, 즉 하느님이 주신 서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참조: Test 14; TestCi 7). 성인은 친히 수하 형제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는 데 실패하여 실망에 빠지 어느 봉사자에게 준 대답에서 이것을 확인한다: “그들이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면 하고 바라지 말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십시오”(EpMin 7). 이미 이 책 2장에서 프란치스코가 복음에서 인간들의 상호관계에 대해 황금의 원칙을 발견하였음을 보았다. 이것은 항상 형제의 입장에 서서 그러한 경우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남에게 해주어야 하는 원칙이다(마태 7,12 참조).

각자가 어떤 집단에 예속하고 산다는 의식을 알기 위한 확실한 표시 중의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것은 책임자들에게도 해당된다. 프란치스코는 「제1회칙」과 「유언」과  「편지」에서 이렇게 하고 있으며 특히 자매들 중의 자매인 글라라는 자기 글에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이 형성하신 제자들의 공동체는 다양했고 인간적으로 볼 때 교양이 부족하고  독특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하느님이 프란치스코에게 주신 공동체를 볼 때, 예수의 제자들과 비교하면 나은 점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첫 형제들의 성격을 살펴본다면 서로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베르나르도와 에지디오, 실베스텔과 쥬니뻬로, 맛세오와 루피노의 성격은 각각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형제들과 같이 기쁘게 살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각 형제의 장점만 보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모든 형제들의 장점을 모아놓을 때, 이상적인 작은 형제의 모델이 나오는 것이었다.

「완덕의 거울」에 의하면 베르나르도 형제의 신앙심과 가난에 대한 사랑, 레오 형제의 교양과 단순성과 순결, 안젤로 형제의 친절함, 맛세오 형제의 교양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호감과 인기, 에지디오 형제의 관상의 정신 루피노 형제의 부지런함과 꾸준함, 쥬니뻬로 형제의 고통을 견디어 내는 인내심, 로디의 요한 형제의 영적 그리고 신체적 힘 - 당대의 가장 유명한 경기 선수였음 - 로제리오 형제의 자비심, 그리고 루치도 형제의 친절한 돌봄 - 이 형제는 한곳에 오래 살지 않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천국 아니고서는 안정된 곳을 찾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로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음 - 등이 뛰어났다. 이렇게 모든 좋은 덕행을 함께 모을 때, 참된 작은 형제들의 모델이 완성된다.


7. 완전한 평등을 기초로 하는 형제적 공동체

최초 전기 작가는 배운 사람들과 세속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형제회에 입회할 때 포기해야 할 포기 사항에 대한 창립자의 말씀을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붙인다:

“참으로 경건한 가르침이다. 이렇게 ‘불평등의 세계’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세속에 대한 애착심을 겸손의 실천으로 깨끗이 씻어 없애는 것보다 더 필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불평등의 지역”이라고 불렀다. 그와 반대로 세상을 떠나 “영적인”형제들과 자매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평등의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성인의 간절한 원의와 세심한 관심사는 “같은 성령이 형제로서 살도록 모으신” 형제들간에 일치의 유대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성인은 “신분이 높은 형제와 낮은 형제가 한데 어울리기를 바랐고, 지혜 있는 형제와 단순한 형제가 형제적 사랑으로 결합되기를 바랐으며,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들끼리도 그들이 사랑의 힘으로 묶여 있기를 바랐다.”

프란치스코는 성녀 글라라와 성 다미아노의 자매들에게 보내신 「노래 형식의 권고」를 통해 자매들의 일치를 강조한다:

“가난한 자매들이여,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매들이여, 여러 지방과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자매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순종에 충실하여 죽을 수 있도록 진리에 언제나 충실하십시오.”

당대의 사회구조를 살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평등 위에 공동체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당대의 사회는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각자는 출생에 따라 귀족계급(maiores)이나 평민계급(minores)에 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노예계급을 아씨시에서 법적으로 폐지한 것도 불과 몇 년이 안되었다(1212년).

대수도원에서는 보통으로 귀족 출신만 수도승의 신분을 누릴 수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차별을 수용하면서 “꼰베르시”(conversi), 즉 노동 형제나 노동 자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대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이러한 차별은 공동생활과 노동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성 과정과 입어야 할 의복에까지 차이를 초래했다. 성녀 글라라보다 1세기 전에 살았던 베네딕도 수녀원 원장 성녀 힐데가르다는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입장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황소와 당나귀와 양과 염소간의 차이를 두지 않고 도대체 누가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한 외양간에 집어넣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도 확실하게 차이를 두어야 합니다. 당신 백성 안에 이러한 차이를 정해 놓으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지상에서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차이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제1회칙」에서 형제들의 평등의 원칙이 잘 보장되어 있지만 여기서 이미 불평등과 차별을 초래할 수 있는 원인들이 조심스럽게 예상되고 있다. 첫째 원인은 형제회의 행정과 조직에 따른 위계제도화(hierarchyzation)이다. 그래서 「제1회칙」은 장상들이 봉사자들이며 다른 형제들의 종임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아무도 장상(prior)이라고 부르지 말고 반대로 모두를 구별 없이 작은 형제들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발을 씻어줄 것입니다.”

둘째 원인은 배운 사람들이 형제회에 입회함으로써 그들의 수가 증가됨에 따라 발생한 교육 수준의 차이였다. 당연히 배운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형제회 안에서 지도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형제회를 교회에 대한 봉사에로 이끌어 나갔다. 학자들과 배운 사람들을 고마워하고 극히 존중하는 프란치스코는 이들이 형제회를 이끌어 나갈 때 단순성과 겸손의 정신 그리고 특히 형제적 일치가 보존될 수 있을까를 크게 염려하였다. 창립시에는 성직 형제나 평형제들간에 평등의 원칙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직 지망자들을 위하여 교육 과정이 도입되고 그 과정을 거친 성직자들의 그룹이 성립될 때면 형제회 내부에 배운 사람들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간의 차이가 생길 위험성이 분명했다. 결국은 수도회가 성직화(clericalization) 될 날이 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성인은 성직화에서 나올 수 있는 문제를, 시편집을 가지려고 자기에게 허락을 청한 어느 수련자에게 한 말로 잘 지적하였다:

“시편집을 가지고 있을 때 성무일도서를 얻으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성무일도서를 얻고 나서, 높은 성직자들이 하는 것처럼 안락의자에 앉아서 다른 형제더러 명령할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머리를 삭발해 주는 형제에게 둥근 테를 크게 만들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하곤 하였다: “나는 나의 머리의 둥근 테가 단순한 형제들의 경우와 같은 크기이기를 바랍니다.”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대하시며, 총봉사자이신 성령께서는 가난한 형제들과 순박한 형제들 위에 똑같이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회칙 원문에 집어넣기를 원하였지만, 이미 교황의 인준 「칙서」가 공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요한 빠렌떼(parente) 총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도회가 걷잡을 수 없이 “성직화”되어 갔다. 1239년의 총회는 적합한 사제형제들이 있으면, 평형제들이 장상직에 임명되는 것을 금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241년에 하이몬 데 파베르샴(Haymn de Faversham)총장은 평형제들의 직책 자격을 박탈했다. 이때쯤 또한 평형제들의 입회가 제한되었고 집안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한도 내에서만 이들의 입회가 허용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평형제의 개념이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형제적 공동체에 대한 이미지가 큰 변화를 가지게 되었고 수도회가 성직화되어 버렸다. 형제들간의 직책의 차이는 양성 기간에서 차이점과 권리 행사에 있어서의 차별을 초래했다. 더 나아가 학위의 취득이나 사목직의 위치나 형제회 안에서 수행한 직책을 중심으로 해서 차차 특권을 얻은 형제(privilegiati)와 특권을 얻지 못한 형제, 면속을 얻은 형제(exempti)와 면속을 얻지 못한 형제간에 불평등이 심해졌다. 마침내 대수도원 제도에 기원을 두고 있는 서열제도(praecedentia)가 도입되었다. 아직 이런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던 시대에 성 보나벤투라는 이런 이유 때문에 작은 형제들을 교양없는 사람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박하러 나섰다. 아직 성 보나벤투라의 시대에 수련자들은 가대에서나 식당에서 자리를 자유로이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에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개혁들(Observanti, Guadalupani, Capuchini, Descalci, Reformati, Recollecti)은 성 프란치스코가 원했던 단순성과 평등의 이상으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했지만, 그들도 차차 계급의 차별과 학위 취득 및 특권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것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개혁 이전에 사회의 외부 상황과 이러한 상황에 발을 맞추려고 하는 의무적인 교회법의 흐름을 벗어나기가 매우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에도 절대적 평등을 정하던 성녀 글라라의 원의와 반대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성녀 글라라가 둔 불가피한 차이점이 있었다면 하나는 성무일도를 바칠 때 “글 아는 자매들과” “글 모르는 자매들”의 차이였고 또 하나는 외부 자매들이 봉쇄를 서약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외부 자매들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자매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렸다. 그러나 1337년에 시토회 출신 베네딕도 12세는 외부 자매들에게도 봉쇄의 서약을 의무화시켰고, 이때부터 이 자매들은 공동체 안에서 “노동 자매”라는 하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성녀 콜레따의 개혁은 다시 모든 자매들의 직책 평등에로 복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