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 11장 “단순성의 길”

Margaret K 2017. 12. 18. 21:46

제 11장

“단순성의 길”


복음적 가난은 이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사람을 해방시킨다. 세상 근심 걱정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순수한 기쁨을 빼앗아 가고 그 대신 마음을 야심과 거짓으로 어둡게 만든다. 그와 반대로 온갖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켜 주는 복음적 가난은 정신적인 장애물을 물리칠 힘이 있다. 그 결과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벼움과 자유스러움, 깨끗함과 개방의 상태를 누리게 된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면처럼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자기 발길을 비추는 사랑에 이끌려 진리 안에서 살고 밝은 생활을 하게 된다.

프란치스코의 영적 시야에 의하면, 우리가 자아포기를 하는 만큼 우리 안에 덕행들이 싹트고 자라므로 모든 덕행은 복음적 가난이 가져다주는 해방의 효과에서 유래한다: “온 세상사람 그 누구도 먼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여러분(덕행들) 중 어느 하나라도 가질 수 없습니다.” 가난과 직결되는, 나아가 가난의 기둥도 되고 열매도 되는 덕행들 중 신덕 다음으로 망덕을 꼽을 수 있다. 망덕이란 지상 여정 중에 신앙의 눈을 항상 내세의 보화에로 집중하는 믿는 자의 자세이다.

이외에도 보통으로 수덕학 교화서가 잘 다루지 않는 몇 가지 복음적 덕행들이 있는데, 성 프란치스코가 높이 평가하는 이 덕행들 중에 단순성과 기쁨을 들 수 있다. 단순성과 기쁨은 크리스천 체험을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꽃피는 덕행들이며, 결국 성령 현존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조기 교회는 바로 이러한 “기쁨과 단순성”의 분위기를 살았다(참조: 사도 2,46; 로마 12,8; 2고린 8,2; 9,11; 11,3).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성”

“단순성”혹은 “순진함”이란 단지 인간의 본성이나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신적 자세이다. 구약성서에서 단순성은 의로움과 도덕적 충실함을 의미하고, 복음서에서는 가난한 정신에서 나오는 마음의 자세와 동일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이리떼 가운데 파견된 양처럼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기”를 원하셨다(마태 10,16).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진하고 신뢰를 하며, 생활과 말에 있어서 솔직하고 교활한 사람들 때문에 이용을 당할망정 거짓과 두 마음이 없기를 가르치셨다(참조: 마태 5,33-42; 6,1-6). 성 바울로는 “솔직하고도 진실하게 살아왔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2고린 1,12)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는  “흠 잡힐 데 없고 순박한 사람이 되어 악하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하느님의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필립 2,15). 성 아우구스띠노는 수도자들의 단순성과 일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단순한 수도자들은 한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한 수도자의 가면은 여러 가지 마음을 품을 수 있다.”

타고난 성격으로 마음이 밝은 성 프란치스코는 단순성의 복음적인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단순성을 형제적 공동체를 위한 마음의 자세로 보고 있다. 성인에게 단순성은 마음의 가난과 의로움의 열매이다. 또한 단순성을 정의하면서 하느님만을 소유할 때 만족하고 다른 모든 것을 멸시하도록 하는 덕행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형제들이 “은총의 딸이요, 지혜의 자매이며, 정의의 어머니인 거룩한 단순성”을 가지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첼라노는 단순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단순성은 하느님을 두려워함을 자랑하고 악행을 할 줄 모르며 악한 말을 할 줄 모른다. 이러한 단순성은 자신을 반성하기 때문에 아무도 단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권리를 탐하지 않으며 더 나은 사람에게 그것을 양보한다. 이러한 단순성은 헛된 학문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배우거나 가르치기보다 행동을 택한다. 이러한 단순성은 성서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완곡과 꾸밈, 말장난이나 거드름과 까다로움을 멸망할 자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껍질이 아닌 알맹이를 찾으며, 거죽이 아닌 속을, 양이 아니라 질을, 그리고 최고의 영원한 선을 찾는다. 지극히 거룩하신 사부님은 배운 형제들에게나 배우지 못한 형제들에게나 이 덕을 요구했으며, 이것을 지혜와 반대되는 덕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지혜의 참다운 자매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이 덕을 더 쉽게 얻고 별 어려움 없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엮고 있다; ‘여왕이신 지혜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당신의 자매인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성과 함께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성인은 단순성이 지혜의 자매라고 한다. 지혜란 지식보다 체험을 우선으로 하는 탁월한 학식이며, 성숙한 신앙심과 하느님의 풍부한 빛을 전제로 한다.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이성과 마음의 순종이 요구된다. 지혜는 복음의 말씀대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에게”(마태 11,25) 하느님이 베푸시는 당신 신비에 대한 깨달음이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의 공동생활을 생각해서 단순성과 지혜를 함께 묶어둔다. 심플리치따스(simplictas)라는 단어는 또한 단순함이나 소박함을 뜻하는 동시에 무식함과 아둔함을 뜻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뜻에서 자기 자신을 과정적인 표현으로 “무지하고 바보”라고 소개하면서 배우지 못한 형제들의 집단에 놓는다. 여하간 그는 지혜와 소박함, 현명과 단순성이 서로 보완되면서 형제들 가운데 함께 꽃피기를 원하였다.

“이야기할 때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또한 함부로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말해야 할 것과 대답해야 할 것을 지혜롭게 미리 생각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단순성은 또한 “솔직함”을 뜻한다. 첼라노에 의하면, 성인은 이 덕행을 뛰어나게 지녔다.

“성인은 언제나 거룩한 단순성에 유의하였다. 그는 그곳(Rivotorto)의 협소한 장소 때문에 마음의 위대성이 저해를 받도록 하지는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에게 자기의 실생활과 약점에 대하여 아무것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한번 몸이 쇠약해서 사순절 동안 고기를 안 드실 수 없었는데, 이 사실을 숨기지 않으려고 자기와 함께 있던 형제에게 밧줄로 자기의 목을 매고 마치 강도를 다루듯 온 동네를 끌고 다니며 다음과 같이 소리 질러 알리라고 명령하였다: “여러분이 모르는 동안에 닭고기를 먹고 뒤룩뒤룩 살이 찐 이 걸터듬이 좀 보십시오!” 뽁기오 부스또네(Poggio Bustone)에서도 대림절 단식재를 마친 후에 똑같은 식으로 행동하였다.

그리고 또 한번 병든 위장을 따뜻하게 보호하기 위해 원장은 수도복 안에 털옷을 껴입으라고 그에게 명하였다. 성인은 장상이 명한 대로 순명했지만 다른 형제들이 그런 것조차 모르고 지내지 않도록 수도복 밖으로 똑같은 털옷을 붙이기를 원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첼라노는 곧이어 감탄하면서 말한다:

“오, 당신의 말과 생활이 일치합니다. 안팎이 하나입니다. 당신은 수하 사람이 되든 장상이 되든 언제나 같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떤 일에 실수하였을 경우 설교를 할 때 자기의 실수를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다. 만일 어떤 사람에 대하여 어쩌다 나쁘게 생각하였을 때 ··· 그 사람에게 아주 겸허하게 죄를 고백하고 그의 용서를 빌곤 하였다.”

한번은 망토를 어떤 노인 여자한테 준 후 자기 마음에 허영심을 품었을 때 자기 숨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단순성은 또한 삶의 통합을 뜻한다, 성인에게 인생이란 자기가 복잡하게 풀어나가야 할 이론적이며 추상적인 수수께끼가 아니라 신뢰심으로 하늘의 아버지께 가는 길이다. 이런 사상은 현실을 사는 사람한테서 환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실은 성인은 소박함 때문에 오해를 받았고 형제회를 이끌어 나가는 일에 있어서 다른 형제들이 그에게 분별력을 가지고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지적할 때 프란치스코는 즉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형제들이여,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 단순성의 길로 부르셨고 단순성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할 때도 하느님이 완전한 삼위와 순수한 일체를 이루심을 강조한다(EpOrd 52참조). 단순성은 하느님 자체의 속성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 단순한 일치에 도달하려면 “거룩한 복음의 완덕을 따라”(Form Vit 2)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밖에 없음을 프란치스코는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참된 영적 지혜를 얻기 위하여 “아버지의 참된 지혜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자기 안에서 모셔야 하고”(EpFid II 67).깨끗한 단순성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영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RnB 17,15 참조).

자기 자신의 인생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단순하고 통일된 비전을 얻기 위해서 지상의 것에 관한 복잡성, 다양성, 분리성을 초월하는, 보나벤투라의 말대로 “체험과 지식이 하나 되는 참된 지혜가 필요하다”.

성 보나벤투라가 말하는 지혜는 프란치스코가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말하는 개념과 동일하다: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성은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육신의 지혜를 부끄럽게 합니다”(SalVirt 10). 성 프란치스코는 세속적이고 육적인 면학에 대해 항상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것이 형제적 일치생활에 위험한 것이 될까 보아 세상의 배움의 길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학자들을 높이 존경하면서도 성인은 자기에게 계시된 대로 그들이 복음적 이상을 순수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는가를 염려하였던 것이다.

성인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든 형제들과 함께 놀라운 단순한 생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형제들의 상호 유대에서의 단순성, 형제들이 서로 마 음을 여는 데에서의 단순성, 명령을 내릴 때나 빨리 순종할 때의 단순성, 서로 외적으로 사랑을 나타낼 때의 단순성, 모든 생활에 있어서 거짓 없고 위선이 없는 단순성이 생활이었다. 첼라노의 증거대로 “거룩한 단순성이 형제들의 마음을 채웠고, 때묻지 않은 삶이 그들을 이끌었으며 정결한 마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표리부동한 마음이란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성 프란치스코를 중심으로 모여든 첫 형제들의 생활양식은 책임감이 있고 잘 짜인 계획이 있는 생활양식을 읽을 때와 최초 10년간 생활 중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읽을 때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인상을 받기가 쉽다. 시간이 흘러서 「잔 꽃송이」는 이러한 아름답고 영웅적인 에피소드를 엮으면서 최초 프란치스칸 생활의 가장 고유한 모습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기 들어가 있는 깊은 의미를 생각할 때 「잔 꽃송이」는 단순성을 자기 생활의 이상으로 삼는 복음적인 사람들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에 의해 “천주의 어린 양”이라고 불리어진 레오 형제, 어린아이의 순진함과 신사의 품위를 겸한 맛세오 형제, 남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순박한 쥬니뻬로 형제, 음유시인의 기질과 더불어 금언을 통해 숙고한 성격을 드러낸 에지디오 형제, 그리고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순박하기 때문에 프란치스코가 특별한 동료로 삼으신 “단순한” 요한 형제와 같은 분들은 역사적인 인물이 되어버렸다.

복음적인 단순성이 성녀 글라라의 영성에 차지한 위치에 관하여 전해주는 증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시성식 과정에서 증언한 자매들에 의하면, 성 다미아노의 공동체 생활이 자연스럽고 순진하고 솔직한 분위기 속에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글라라는 자신의 영적인 체험과, 꿈꾸었던 이야기와, 한번 어떤 고양이가 수건을 예의있게 가져다줌으로 해서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 등을 자매들에게 단순하게 말하곤 하였다. 글라라는「유언」에서 “거룩한 단순성과 겸손과 가난의 길을” 충실히 따를 것을 자매들에게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브르쥬의 에르멘뚜르디스 자매에게 “거룩한 가난과 솔직한 겸손 안에서 섬기기 시작한 하느님을 끝까지 섬기라”고 격려하고 있다.

단순한 생활은 성 프란치스코 제자들의 특징이었고,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프란치스칸을 가까이 느끼고 좋아하는 이유도 그 단순성에 있다.

오늘날 사회인들은 매너리즘, 형식, 화려함에 대해 반항적 자세를 보인다. 지나친 장식의 바로크 스타일은 우리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세계는 진실성과 솔직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솔직성과 단순성의 메시지는 현대세계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진다. 복음적 솔직성과 단순성은 천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정화와 수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덕행으로서, 진리를 구하며 교만과 허식에서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와 같이 “안팎이 하나 되어” 속으로나 겉으로 똑같이 밝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한계와 약점을 인식할수록 이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 어떤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때문에 그 한계나 약점을 복잡한 모양, 위장, 형식, 가면 등으로 덮으려는 법이다. 그러나 진복팔단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안과 밖에 있는 사건들을 진리 안에서 판단할 줄 알기 때문에 자신감과 안정감을 누리면서 마태오  5,37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다: 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프란치스칸 기쁨: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해방된 사람은 삶의 기쁨을 누린다. 가난만을 주장하면서 우울하고  비통한 이상을 제시한 당대의 개혁자들과는 달리,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기쁨을 함께 연결시키는 공을 세웠다.

흔히 사람들은 부유함을 행복과, 가난을 불행과 연결시키지만, 감정을 영적인 것과 결합할 때 기쁨이 솟아나는 법이다. 인간이 간절히 갈망하는 기쁨은 주님의 기쁨을 함께 누릴 때 완성을 이룬다. “당신은 온화이시오며 안식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평화이시오며 기쁨이시나이다”라고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하였다(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4). 이와같이 영원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충만한 기쁨에 인간들을 참여시키려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요한 15,11; 17,13).

기쁨은 하느님 자녀들의 유산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위선자들처럼 침울한 표정을 짓고 얼굴에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방법을 질색하시고 단식할 때도 사람들이 기쁘게 그리고 매력있게 행동하기를 원하셨다(마태 6,16-18). 그리고 성 바울로는 재차 기쁨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끊임없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기”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기쁨은 술을 마시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풍부함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에페 5,18; 고로 3,16).

신앙으로 복음적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크리스천들에게 성령의 기쁨이 주어진다(1데살 1,6; 사도 8,39; 13,48-52). 기쁨은 크리스천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열매이고(갈라 5,22).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지체들과 상통하시는 생명의 일치의 표현이다(로마 14,17; 필립 4,1). 그러므로 신앙과 은총이 성장할 때 기쁨도 커지게 마련이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기쁨의 분위기를 충만히 누렸다. “한 마음이 되어 기쁘고 순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4). 그리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박해와 고난이 닥쳐올 때 신자들의 기쁨은 더욱 커졌으며 더욱 순수한 기쁨으로 변했다(참조: 사도 5,41; 13,52). 그리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박해와 고난이 닥쳐올 때 신자들의 기쁨은 더욱 커졌으며 더욱 순수한 기쁨으로 변했다(참조: 사도 5,41; 13,52). 그들은 재산을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고통을 기쁘게 견디어 냈다(히브 10,34 참조). 그리고 극빈 가운데서 기쁨에 차 있었다(2고린 8,2 참조). 그리고 극빈 가운데서 기쁨에 차 있었다(2고린 8,2 참조).

어떤 공동체든지 크리스천 이상을 깊이 살고 체험하는 공동체에서는 자연적으로 기쁨이 꽃핀다. 기쁨의 은둔자라고 불리는 2세기의 성인 헤르마스는 기쁨이 교회를 건설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덕행 중의 하나라고 가르치고, 반면에 슬픔은 교회를 파괴하고 그의 모습을 추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성인은 덧붙여 말하기를 “악령 중에서도 가장 악한 악령인 슬픔을 뽑아버리고 하느님이 항상 기쁘게 받으시는 기쁨을 입어라. 명랑한 사람은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울한 사람은 악행을 품고 기쁨을 위해서 주어진 성령을 슬프게 한다. 우울한 사람의 기도는 하느님 대전까지 올라갈 힘이 없다”고 말한다.

크리스천이 기쁘게 살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필립 4,5). 이미 완성된 구원의 사건과 더불어 영원한 기쁨에 대한 기대와 희망만이 여정 중에 있는 교회의 생명에 생기를 준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 주년 안에서 알렐루야로 기쁨을 끊임없이 드러내며, 미사와 「성무일도」의 여러 기도문에서 기쁨을 표현한다.

성격상으로 명랑한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도 해방적 이탈로 인하여 기쁨을 누렸고, 기쁨의 원천의 비밀을 발견한 그는 자기 주변에 그 기쁨을 뿌렸다. 첼라노에 의하면, 프란치스코의 첫 제자들의 공동체는 항상 흘러넘친 기쁨으로 생활하였고 그것은 지상적 만족에서 해방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기쁨을 외부로 아니 나타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토마스 데 에클레스톤(Thomas de Eccleston)의 증거에 의하면, 영국에 도착한 첫 프란치스칸들이 서로 쳐다볼 때 웃음을 참지 못했기 때문에, 지키기로 되어 있었던 대 침묵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형제적 친교를 촉진하기 위해서 초창기에 모든 형제들이 매년 모여 총회를 가지곤 하였는데 총회의 첫째 목적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서로 나누려는 것”이었다. 복음적 이상을 깊은 수준에서 살고 증거하기 위해서 순수한 기쁨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성 프란치스코는 「제1회칙」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를 한다: “어디에 있든지 또 어느 곳에서 만나든지 형제들은 ··· 겉으로 슬퍼 보이거나 음울한 위선자들같이 보이지 말 것을 명심할 것이며 오히려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명랑하며 분에 맞게 쾌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부인인 가난”을 즐겁게 해주려면 형제들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내적, 외적으로 명랑해야 하고 기쁨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사도가 되기를 성인은 원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슬프게 보이는 형제들을 참지 못하였고 기분이 나쁘게 보였던 어떤 형제를 다음과 같이 나무랐다. ”죄는 당신의 방에서 반성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하느님 앞에서 울고 신음하십시오. 형제들에게 돌아올 때는 슬픔을 없애고 다른 형제들과 어울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 점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악마는 하느님의 종에게서 마음의 기쁨을 채어갈 수 있을 때 통쾌해 합니다.  ··· 그렇지만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면 뱀이 맹독을 품어도 허사입니다. 악마들도 그리스도의 종이 거룩한 기쁨에 충만해 있는 것을 보면 해꼬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혼에 우울한 생각이 들고 어둡고 슬픔이 쌓이면 영혼은 그 슬픔에 압도되어 버리든가 아니면 헛된 즐거움을 향하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울함을 ‘바빌론적인 악“이라고 부르고 이 병에 걸리는 형제는 마귀의 올가미에 빠져 유혹에 떨어지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우울함과 슬픔의 병을 고치기 위한 치료 방법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만약 어떤 형태로든지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만 당장 일어나 기도해야 하며, 구원의 기쁨이 다시 채워질 때까지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자신도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어내고 성격으로 인한 기분의 파도를 조절하기 위해서 기도의 방법을 찾았다. 이외에도 마음의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는 다른 정당한 수단을 택하는 데 서슴치 않았다. 한번은 “눈이 매우 심하게 아파 육신 형제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 세속에 있을 때에 악기를 잘 다루던 형제에게 비밀로 기타를 마련하여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그 형제는 남들이 무어라고 할까 두려워 성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날 밤에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악기로 고운 노래를 들려주어서 성인은 자기 영혼에 큰 위로를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병이 들어 육신이 쇠약하기 전에는 노래하기를 좋아했고, 노래로써 울적한 마음을 즐겁게 하곤 하였다. 회개 당시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씨시의 숲속을 다니면서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업적을 노래로 찬양하였고”,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마련하기 위해 노래하면서 집집마다 애긍하러 다녔으며, 에지디오 형제와 함께 전교하러 갈 때 노래하면서 길을 떠났다.

감정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때때로 어렸을 때 배웠던 시를 프랑스어로 읊었고 바이올린을 모방한 악기를 막대기와 줄로 만들어서 주님의 찬양의 노래를 연주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기의 영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라우다(Lauda)라는 찬미가를 노래하길 좋아했다. “하느님 찬미에의 초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드리신 인사”,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 등이 바로 라우다라는 종료의 작품들이다. 「제1회칙」 마지막 부분에도 성인은 몇 가지 찬미가를 실었다. 그리고 회개 이전이나 이후에 삶을 노래하면서 지낸 성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자매인 죽음도 노래하면서 맞이하였다.

성인이 형제들을 양성시키는 데 있어 기쁨의 요소는 교육 방법에 포함되어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참된 기쁨과 거짓 기쁨을 구별하면서 유머의 소질이 있는 형제들이 이것으로 공동체 생활을 명랑하게 하는 것을 좋게 여겼지만 추잡스러운 소리나 지나친 빈정거림은 싫어하였다. 성인은 “참된 기쁨이란 깨끗한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기도 생활로써 획득된다”고 가르쳤고 참된 기쁨의 열매는 ‘열성과 부지런함, 선한 일을 기쁘게 하기 위한 마음의 재빠름과 내적, 외적 마음가짐“이라고 하였다.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 업적 외에 다른 데서는 흐뭇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또한 그것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에로 인도하는 수도자는 복됩니다. 쓸데없고 헛된 말을 즐겨 하면서, 또한 그것으로 사람들을 웃기려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가장 완전하고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충성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기쁨은 영적인 것이며 성령의 열매이다. 크리스천 기쁨은 고통을 제외시키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양육되는 것이다.

한번은 레오 형제와 함께 포도원 앞을 지나다가 배고프다고 말하는 레오 형제를 위하여 성인은 포도 한 송이를 따서 그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포도원 주인이 나타나, 레오는 도망갔지만 주인은 프란치스코를 붙잡아 몽둥이로 때렸다. 수도원까지 가는 길에서 성인은 몸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후렴처럼 노래로 불렀다. “레오 형제는 배를 잘 채웠고 프란치스코 형제는 몽둥이로 잘 맞았다. 레오 형제는 실컷 먹었고 프란치스코 형제는 자기 몸으로 충분히 그 대가를 보상했다.”

「잔 꽃송이」에 기록되어 있는 “참된 기쁨”의 이야기는 성인의 사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고린토 전서 13장의 순서에 따라 엮어져 있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불완전한 기쁨으로부터 완전한 기쁨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성인이 한 수도회의 창설자로서 걸은 인생의 과정이 아니가 추측할 수 있다. 어떤 단계에도 완전한 기쁨이 없고 오직 형제들에게서 멸시와 오해를 당할 때 흥분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견디어 내는 것에 완전한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위의 「잔 꽃송이」의 이야기는 성 프란치스코가 1220년이나 1221년에 레오 형제에게 기록케 한 사부이 영적인 권고, 즉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라는 권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형제회가 위기에 처해 있었던 이때에 설립자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의 책임자들로부터 소외당했음을 느끼고 수도회의 행정 책임을 사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썩 물러가거라. 배운 것 없는 무식한 놈아 ·· 우리는 이제 사람들이 많고 훌륭한 사람들도 많으니, 너 같은 놈은 필요없어. ··· 이러한 경우 만약에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면, 바로 여기에 참된 기쁨이 있다고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

레오 형제는「뻬루지아 전기」에서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뽀르치웅꿀라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소집되는 총회가 가까웠을 무렵에 성 프란치스코는 동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으면 작은 형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총회에 모인 형제들에게  설교한 후에 형제들이 나를 반대하여 일어난다고 가정합시다. 그들이 너더러 ‘형제는 전혀 웅변술도 없고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촌스럽고 능력이 없는 당신을 장상으로 모시기가 부끄럽습니다. 차후로는 당신을 우리의 장상으로 모시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후 나에게 망신을 주고 총회에서 쫓아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나를 영예롭게 여기고 존경할 때와 똑같이 그들이 나를 장상으로 원치 않아 나를 비방하고 수치스럽게 내쫓을 때도 내가 기뻐하지 않으면 나 자신 스스로 작은 형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학교에서 교육받은 에지디오 형제는 말한다: “거룩한 신심 안에서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순교의 월계관과 상급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성녀 글라라는 자기 병약과 가난을 위한 투쟁 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명랑한 마음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택한 가난한 생활이 그녀와 함께 성 다미아노에서 봉쇄를 지킨 그 자매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께서 ··· 우리가 궁핍도 고생도 시련도 수치도 세속의 멸시도 그 어느 것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 그 모든 것들을 더없는 기쁨으로 우리가 여긴다는 것을 보셨을 때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의 자매들은 「시성식 증언」 중에서 성녀가 기도에서 돌아올 때 기쁨에 넘치는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성녀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였으며 흥분한 모습을 아예 보여주지 않으셨다.” 고 증언한다. 그리고 글라라가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보내신 편지」들은 그녀가 지닌 영적인 기쁨의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넘치는 기쁨과 영적인 즐거움으로 기뻐하십시오.” “그대가 시작한 여정의 놀라운 진보를 전해 듣고 ··· 나는 주님 안에서 대단한 기쁨과 즐거움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 지금 나는 하늘 아래서 내가 바랐던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그 기쁨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 지극히 사랑스러운 그대도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늘 즐거워하며, 슬픔이나 우울이 그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사랑하는 자매여, 천사들의 기쁨이요 우리 자매들의 왕관인 그대여~”

삶의 우수운 면을 뽑을 줄 아는 유머의 기술은 인격적인 성숙함의 표시이며 결국은 자아 포기 자세의 열매이다. 성 토마스 모어는 이렇게 기도 하였다: “주님, 저로 하여금, 자아라는 이 귀찮은 것에 대해 신경을 너무 쓰지 않게 해주시고 항상 유머의 감각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