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 10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Margaret K 2017. 12. 18. 21:44

제 10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에 관하여 일정한 정의를 말하지는 않았다. 성인은 이론적인 정의를 내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특별한 카리스마를 입은 사람들처럼 실질적인 행동과 생활양식을 통해 가난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가난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성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가난이란 성인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서 발견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생활로서 복음에서 발견한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의 가난한 생활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가난은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신분을 취하신“야훼의 종의 비하와 모욕과 일치된다. 그래서 성인은 이 두 요소를 함께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이라고 말한다. 성녀 글라라도 자기 글에서 똑같이 연결시킨다.

오늘의 성서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나타나는 가난과 겸손의 신비를 케노시스(kenosis)라고 부른다. 우리도 가난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정신으로 성서의 원천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성인은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구약의 구절을 읽기 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에 희망을 두고 야훼의 구원을 기다렸던 가난한 의인들의 소리를 자기 기도양식으로 삼았다. 첼라노가 말한다:

“그는 불타는 애정과 크나큰 기쁨으로 가난을 이야기하는 시편을 항시 노래하였다. 이것이었다: ‘없는 이라 하여 영영 잊혀질 리 없으리라’(시편 9,19). ‘없는 이 보고들 즐거워하라’(시편 68,33).

“야훼의 가난한 자”와 관련된 이러한 구절들을 성인은 「주의 수난 성무일도」에 실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자 되셨다”(RB 6,3)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인은 신약성서를 읽고 묵상함으로써 가난의 신학적인 뜻을 발견했다:

성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가난에서 발견한 가난의 참된 뜻과 가난한 생활을 본받으려는 성인의 우선적인 동기는 전통적 수도생활에서 실천해 온 것과 같이 금욕적, 수덕적 생활을 위한 길도 아니고 복음에 돌아가려는 의도하에 당대의 복음적 운동의 개혁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은 교회 쇄신을 위함도 아니며, 개혁적 이단운동에 대항하여 참된 크리스천 생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프란치스칸 가난의 결과에서 나오는 결실이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동기는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난이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이다.

회개의 첫 단계에 기사 정신에 이끌린 성인은 가난을 자기 생의 목적과 이상으로 삼았지만 가난한 자, 특히 나병환자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복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 가난을 항상 그리스도의 생활과 그에 대한 사랑에 직결된 것으로 여겼다. 첼라노가 시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성인이 그렇게도 열렬하게 가난 부인을 사랑한 것은, 가난이 하느님의 높으신 아들의 신부이며 여왕이면선 신랑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버림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으신 가난”을 위한 성인의 충실성은 가난이 되시고 겸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충실성이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가난의 신비를 분명히 밝힌다.

“하늘에 계신 지존하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위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화로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임하시리라고 ··· 연약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은 모든 가난을 왕다운 지위로 들어 높이며, 가난한 생활을 따르는 자들을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한다”(RB 6,4). 성인이 우골리노 추기경께 말하기를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저에게는 왕다운 지위가 되고 특별한 고귀함이 됩니다.” 그리고 애긍을 청하러 가는 것을 꺼리고 부끄러워하는 형제들에게 권고하였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아드님은 우리보다 훨씬 고귀하신데도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가난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돈냥하러 나가는 일을 부끄러워해서는 아니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라는 이 신비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프란치스칸 가난의 신학적 기조이고 첫째가는 동기이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생애중 그리스도의 비하와 겸손이 드러나는 가난을 무엇보다도 “베들레헴”과 “갈바리아”의 신비에서 발견한다. “베들레헴”이 가난한 동정녀의 궁핍한 모습과 세상에 들어오시는 말씀의 비참한 모습을 말해준다면, “갈바리아 산”은 가난이 구세주를 십자가상까지 동반하고 완전한 비하에 이르기까지 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난과 겸손의 신비가 이 세상에서 성체성사 안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확신한 성인은「제1권고」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Adm 1,16-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분의 가난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라라 성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난을 내용으로 한다:

“나 작은 형제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높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의 생활과 가난을 따르고 끝 날까지 그 생활에 항구하기를 원합니다. 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간청하며 권고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이 생활과 가난 안에서 항상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누구의 가르침이나 권고 때문이라도 이 생활을 절대로 떠나지 않도록 온갖 조심을 다하십시오.”

성녀 글라라는 그의 「회칙」과「유언」과「편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 다미아노 성당의 생활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부님한테 받은 「유언」을 끝까지 증언한다.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가 가난의 길을 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마음속에 같은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글라라는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었다. 아시시에서도 몇째 안 가는 화려하고 돈이 많은 귀족 가정의 저택을 버리고 프란치스코에게 서약한 순명을 통해 가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께 자기 자신을 내맡겼다. 얼마 후에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룩한 복음의 말씀에 따라 ”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도록 했다. 글라라의 여동생 아네스와 베아트리체도 똑같이 했고 그들을 따른 자매들도 그랬다. 왜냐하면 성 다미아노에 입회한 자매들은 그리스도를 절대적인 가난을 통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의 결심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노동과 “주님의 식탁”에서 살면서 공동체 전체가 매일매일 해방적인 가난을 체험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글라라는 비록 재산과 소작료를 통해 생활이 충분히 보장되는 성 베네딕도의 「회칙」을 서약할 수밖에 없엇지만, 즉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으려고 서둘렀고, 그 후임자들에 의해서도 재확인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교황이 글라라에게 허락한 「가난의 특전」의 다음의 내용 중에서 분명히 글라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여러분은 오로지 주님께 봉헌하기를 원하므로 지상 재무에 대한 욕정을 끊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 되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그분의 발자취를 완전히 따르기 위해 절대로 어떤 재산이라도 가지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에 대한 결핍도 이 결심을 바꾸지 않게 하는 것은 ···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 들의 백합꽃을 입히시는 분이 여러분에게 양식이나 의복이 부족하지 않도록 돌보시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의 요청에 응하여 사도적 권한으로 지극히 높으신 가난에 따라 살려는 여러분의 결심을 재확인하며 이 칙서를 통해 아무도 재산을 받도록 강요하지 않기를 허락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글라라가 유언에서 표현하듯이 “주님과 우리 거룩한 사부 프란치스코께 약속한” 결심이며,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나 동시에 강하게 교회의 최고 권한자 앞에서 대행하면서까지 지켜왔고 충실하려고 하는 유산이다. 글라라는 영적인 딸 프라하의 아네스에게 같은 굳은 결심을 당부하고 있다.「아네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그녀가 천상 경배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가난을 택한 결심을 함께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은 가난의 찬가를 노래한다:

“가난을 사랑하고 포옹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부를 부여하는, 오 복된 가난이여! 가난을 소유하고 또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를 약속하시고 의심할 여지없이 영원한 영광과 복된 생명을 주시리니, 오 거룩한 가난이여! ··· 하늘과 땅을 다스리셨으며 지금도 다스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황송하옵게도 무엇보다 특별히 포옹하신, 오 성스러운 가난이여!”「둘째 편지」에서는 프란치스코가 준 마지막「유언」을 읽을 때마다 “작은 나무”인 글라라의 마음에 울려진 감동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만약 누가 그대의 완덕에 방해가 되거나 그대의 거룩한 성소에 반대되는 듯한 말을 하거나 다른 제안을 암시하면, 그를 공경은 해야 하겠지만 그의 조언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가난한 동정녀여,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포옹하십시오.”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회칙」이 공포된 후(1247)에 글라라가 「유언」을 작성하기로 한 목적은 바로, 자신이 죽은 후에도, 남은 “작은 양떼”를 위해 그렇게도 투쟁해 왔던 공동 가난에 대한 충실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을 앞에 두고 가난의 특전을 담은, 교황이 인준한 자기 「회칙」을 손에 잡게 될 때 글라라는 너무나 행복하였다. 성녀의 특성이 가장 잘 찍혀 있고, 「회칙」의 중심부가 되는 세 개의 장은 복음적 가난을 내용으로 할 뿐만 아니라, 복음적 가난을 바로 자매들이 서역하는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생활과 우리 가난의 양식을 영구히 지키기로 서약한다“(RegCI 2,8): ”우리가 서약한 가난의 양식을 서약하기 전에는“(Reg CI 8,3) 아무도 원장직을 맡을 수 없다. 「시성식 칙서」에서 글라라는 ”가난에 반한 사람, 지칠 줄 모르는 가난의 변호자“라고 칭송되고 있다.


“소유 없는 생활”

“하느님은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십니다”(RnB 23.9). "모든 좋은 것이 그분의 것임을 깨달아 ··· 우리는 모든 좋은 것을 그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RnB 17,17-18). "우리 것이라곤 악습과 죄악뿐입니다”(RnB 17,7). 이러한 표현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믿음과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봉건세계의 표현을 인용하면서 소유권에 대한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세운다. 하느님만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그분은 지상의 것을 사람들에게 봉건의 조건하에 임시로 위탁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하느님이 맡겨 주신 지상 사물을 관리하는 사람들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받은 모든 좋은 것을 자신의 원의대로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 할 수 없이 돌려드려야만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답고 유쾌하고 유익한 것을 만드신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사랑의 공물을 돌려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피조물을 남용하여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할 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죄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범할 때 자기 안에서 밖에 있는 것을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그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소유” 의식은 하느님과의 친교의 길을 막는 동시에 다른 인간 공동체에 대해서도 나눔의 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영주의 돈을 감추고 자신을 위해 남겨 둔 신하의 비유를 들어 여러번 이야기한다. 대표적인 예는 「권고 」제 18번이다:

“모든 좋은 것을 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종은 복됩니다. 실상 어떤 것이라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는 사람은 자기 주 하느님의 돈을 자기 안에 묻어두는 사람이 되며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성인은 이 세상의 죄악이 들어온 비극의 순간을 사람이 자유의 선물을 올바르지 않게 소유한 결과로 보고 있다:

“주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법적인 소유가 죄가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흥분하는 일도 죄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권한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그 죄를 (판단할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 때문에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은 진정코 아무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따라서 사부님의 사상에 의하면 「회칙」에 나오는 “소유 없이” 산다는 표현은 단지 물질적 재물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무엇보다 영적인 재산까지 포함한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 외적 재물에 대한 포기는 오직 복음적인 가난이 요구하는 내적 마음 자세를 갖추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성인은 형제회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우선 외적인 소유 재산들을 먼저 바침으로써 세속에 이혼장을 써 주고 그런 다음에 내적으로 자신들을 하느님께 바치라고 가르쳤다. 재산을 모두 주어버려 동전 한 닢도 남겨놓지 않는 그런 사람들만 형제회에 받아들였다. 이것은 거룩한 복음의 말씀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간수한 돈주머니로 인한 불미스러운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입회하기 전에 지원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자기에게 주신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은총인 영적 선물마저 올바르지 않게 소유하고 남용할 수 있다. 이 선물들을 자랑거리로 삼거나 영예와 인기를 얻기 위해서 사용하거나 가볍게 외부로 드러낼 때는 남용하는 것이 된다. 또한 공동선을 위하여 주어진 이러한 선물들을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도 남용이다. 이렇게 할 때 사람은 주님의 재화를 훔치는 죄를 범한다고 성인은 생각하였다.

성인은 모든 덕행을 내적 가난과 관련시켜서 생각하였고 반대로 모든 악습들은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소유욕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선을 거스르는 육신”은 하느님의 소유인 것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려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으로 삼는다. 반대로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또한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선을 분별하도록 해주시고, 이 선에 대하여 하느님께 온갖 영광을 돌리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헛된 영광과 시기심은 하느님의 주권을 거스르고 하느님의 재화를 빼앗는 것으로 여겨 진다:

“주님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주시는 선보다, 자기를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주시는 선을 더 많이 자랑하지 않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질투하면, 모든 선을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헛된 영광은 사람의 착한 행실에도 흠을 만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기도를 바치고, 많은 신심행사에 참석하고, 육신의 절제와 고행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생명의 보험을 내세우려 하지만, 이들은 역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만 희망을 둔다:

형제 개개인보다 공동체에게 해당되는 또 다른 종류의 은밀한 소유가 있는데 이것은 수도회 행적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다. 성인은 이러한 자랑을 어떻게 보았을까? 얼마 전 모로코에서 순교한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다. 그런데 그들의 훌륭한 행적을 전함으로써 그들에게 돌려야 하는 영광을 우리들의 명예를 위하여 차지하면 되겠느냐?”

그래서 모로코에서 순교한 다섯 형제들의 행적을 전하면서 형제들이 그것을 자기 자랑거리로 삼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인은 그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성인은「권고」제6번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학식을 가진다는 것도 완전한 포기의 정신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공부가 내적 가난에 대하 될까봐, 성인은 배운 형제들에게 특별히 포기의 정신을 요구하고 “소유 없이” 살라고 경고하였다.

사람이 지식을 가질 때 그것을 자기 소유처럼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형제회 초창기에 성인은 공부에 대하여 아주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성 안토니오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임을 알고서야 성인은 그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칠 것을 허락하였다.

「설교하는 형제들에게 특별히 내적 가난이 요구되었다. “아무도 설교의 직책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 것입니다”(RnB 17,4). 그러므로 설교의 성과를 자랑하는 설교자는 곧 설교직을 소유하는 것이 된다.

“나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모든 형제들, 즉 설교하는 이들, 기도하는 이들, 노동하는 이들, 성직 형제들이건 평형제들이건 모두에게 간청합니다: 매사에 자기 자신을 낮추도록 노력하고,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혹은 여러분을 통해서 어떤 때 행하시고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좋은 말과 일에 대해, 더 나아가 어떤 선에 대해서도 자랑하지 말고, 자만, 자족하지도 말며, 혹은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설교자는 자기 설교의 성과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을”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내적 가난이 없는 곳에 겸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서로의 봉사를 기초로 하는 공동체 생활도 무너진다. 특별히 장상들은 “형제들에 대한 봉사와 공익을 위한 봉사자로서”(RB 8,4) 자기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성인은 장상직을 자기의 것으로 하거나 그 직책에서 면직된 데 대하여 흥분하는 장상을, 자기를 위하여 재산을 모든 사람과 비교한다. “봉사자는 아무도 형제들에 대한 봉사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 것이다”(RnB 17,4: 참조: Adm 4). 그리고 형제들의 순명도 내적인 이탈을 전제로 한다.

공동체 안에서 가난과 사랑의 관계는 이러해야 한다: 가난은 형제적인 사랑을 위하여 형제들이 마음을 열도록 준비시킨다. 그리고 사랑은 궁핍중에 사는 가난한 형제들을 굳게 뭉치게 하며, 물질적 가난으로 고생하는 형제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부유하게 채워준다. 성인이 「제2회칙」6장에서 가난에 이어서 형제적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성녀 글라라도 「아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상의 것을 사랑할 때 사랑의 열매는 맺지 못한다”고 말한다. 형제적 사랑의 첫째 원수는 “이기적인 사랑”(amor privatus), 즉 다른 형제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이다. 공동체 안에서 모든 종류의 이기주의는 서로간에 거리감을 일으키는 소유욕과 같은 것이다. 이 중에 하나는 유별나게 사는 사람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로써 이 형제는 다른 형제들의 생활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와같이 형제들을 교육시키는 프란치스코의 교육방법은 고유한 것이고, 이것은 복음에 영감을 두는 것으로서 완전히 내적인 가난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말한 28개 「권고」에서 한 번도 물질적인 가난을 열거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창립자는 가난 부인을 용감하게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의식주에서 드러나야 할 가난을 이해시키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의 자유의 길과 외적인 것과 내적인 재산에 대한 깊은 이탈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 하느님과 타인을 위해 가난하고 개방된 마음을 갖추기에 방해가 되는 수많은 소유욕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교육시키는데 많은 노력이 있어야 했다. 소유 없이 사는 방법에 대한 주제는 대부분의 영적인 「권고」뿐만 아니라 두 개의 「회칙」과 「편지」와 전기 작가들이 전해주는 사부님의 가르침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소유에 관한 개념을 기초로 해서 「제2회칙」 6장에 나오는 “형제들은 아무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이라는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집과 장소와 기타 물질적인 재산에 대한 이탈은 - 외적인 가난 -  가난한 정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사람들이 재물의 힘으로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며 사는 것을 목격한 후 한 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 즉, 형제들이 개인적으로만이 아니고 공동체적으로도 “지극히 높은 가난”의 보물 외에 하늘 아래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그들은 참된 “작은” 형제들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사부님의 가르침은 공동 소유권에 대한 법적인 포기보다도 “소유”(appropriatio)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에 따라 넓은 뜻의 복음적 가난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제1회칙」7장에서 바로 이 의미를 재확인한다:

“형제들은 은둔소나 다른 곳 어디에 있든지간에, 어떤 장소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고, 또 누구와 싸워서 그것을 지키려 하지도 말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 벗이나 원수, 도둑이나 강도 등 모두를 친절하게 영접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자신은 「유언」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회칙의 의미를 조명시키면서 전에 금하였던 고정적인 거주지를 받아들여 글자보다 정신을 중요시하고 있다(Test 2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