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 8장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흠숭한다.

Margaret K 2017. 12. 18. 21:43

제 8장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흠숭한다.


프란치스칸 기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회개의 은총과 함께 기도의 특은을 받았다. 그래서 성인에게는 회개한 후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특별한 기도양식이 필요없었다. 자기 마음속 깊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의 작용에 마음을 여는 것이 그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기도는 일정한 시간표에 얽매여 있는 행위가 아니었고,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먹을 때나 마실 때나 ···” 언제나 밤낮으로 그는 중단없이 기도하였다. 여러 사람 앞에 있을 때 갑자기 주님이 방문하시면, 프란치스코는 내적 감정을 감추기 위하여 망토나 수도복 소매로 자기 얼굴을 가리곤 했다. 그러나 자기 방이나 숲속에 혼자 있을 때 주께서 방문하시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불타는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찬미가와 몸짓과 감탄의 외침으로 드러내어 표현했다.

첼라노는 성인의 이 같은 근본적인 차원을 정확히 요약한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스스로가 곧 기도였다.”

성인을 목격한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그 중에 하나는 구이도 주교였다. 그는 한번 프란치스코를 방문하러 뽀르찌울꿀라에 들렀는데, 노크하지 않고 성인이 기도중에 있는 그의 작은 방에 들어가려다가 “고개를 디밀자 ··· 냅다 끌려 나와 저만큼 뒤로 밀려났다.”

프란치스코 자신이 기도에 대해 뛰어난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 프란치스칸 1세기의 자료를 연구해 보면, 크리스천 쇄신을 가져다준 그 새로운 시작에 있어 관상생활이 그들의 자연적인 분위기라 되었으며 초기 형제들의 개인 및 공동 생활에 있어 핵심적인 구성이 되었다.

창립자는 기도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하고 효과적인 기도의 방법으로 자기에게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인도해 준 회개의 생활을 택했다.

사도들이 예수에게 하였듯이, 그의 동료들이 프란치스코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그는 예수님과 같이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주의 기도」를 외우시오”하고 대답하였다. 깨끗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성령의 활동에 자기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자녀와 같이 아버지께 마음을 열어드린다는 것, 여기에 바로 프란치스코의 훈련 방법의 비결이 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주의 기도」는 구송기도의 가장 완전한 기도양식이 될 뿐만 아니라. 관상기도에 있어서도 가장 전형적인 모델이 된다: 성인이 작성하신「주의 기도 풀이」라는 아름답고 깊은 기도문을 살펴보면 분명히 그러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프란치스코는 동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의 묵상에 맛들이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복음서와 더불어 그들의 눈앞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놓았다. 이외에도 그는 세 번째 책, 즉 최고선이신 분이 내려주시는 선물이며 영원한 메시지가 되는 창조물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구속된 온 세상을 교회적인 차원에서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다. 「유언」에서 성인은 추억에 잠겨 초기 형제들의 기도문을 상기하고 있다:

“주님이 성당에 대한 크나큰 신앙심을 주셨기에, 다음과 같은 말로 단순하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의 거룩한 십자가로써 세상을 구속하셨사오니, 우리는 여기와 전세계에 있는 모든 성당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찬양하나이다.“

프란치스코는 「제1회칙」22장에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합하는” 기술의 노선을 그려두었다. 전제조건은 회개이다. 즉, 악습과 죄악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이기주의적인 경향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다음에는 “세속을 떠난 후에”, 하느님의 뜻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하느님의 말씀과 작용에 “좋은 땅”을 제공해 드리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잘 묘사한다. 삼위일체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세속적인 걱정과 이익과 보상 때문에 주님한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22장의 대표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무슨 보상이나 업적이나 이익을 얻을 핑계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주님한테서 떨어지게 하거나 떼어놓지 않도록 힘써 우리 자신을 지킵시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는 봉사자들과 다른 형제 모두에게 부탁합니다: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온갖 근심 걱정을 멀리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님이 무엇보다도 요구하시는 일, 즉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으로 섬기고 사랑하며 존경하고 흠숭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전능하신 주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머무르실 수 있는 거처를 우리 안에 마련합시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 늘 깨어 기도하여라.’ ‘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라는 요한 복음의 텍스트를 자주 인용하면서 하느님을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한편으로 하느님의 탁월성과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체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죄인이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기도라는 것이 필수조건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림도 오로지 위에서 받는 은총이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대화를 시작하시는 분도 주님의 성령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따라서 성인은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을 자기 것인 양 차지하는 자를 하느님의 보화를 훔치는 도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 프란치스코가 정상적으로 바쳤던 기도는 그리스도처럼 찬미와 감사의 기도였다. 성인이 기록으로 남긴 기도문 대부분은 이 종류에 속하는 것이다. 하느님 “당신 때문에”, 당신의 무한한 완전하심과 사랑, 특히 당신 아들을 주심으로써 보여주신 은혜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공경하고 찬양하며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가 무엇보다도 성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RnB 23,1-4). 왜냐하면 당신 사랑으로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고 모든 것을 채우신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잊어버리고 인간이 자기와 자기 문제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세를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이 성인에게는 아무런 뜻도 없었다.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공경과 감사의 정에 충만하여 성인은 자기 형제들도 그러한 메시지를 만민에게 전하는 사도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와 「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모든 사람들이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을 찬양하도록 권하였다(EpRec 7-8: EpCus 6).

프란치스코의 학교에서 사부님의 가장 충실한 제자는 글라라 자매였다. 글라라는 뛰어난 관상가였을 뿐 아니라 관상하는 영혼들의 비할 데 없는 스승이 되었다

이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한 증거를 남겨준 사람은 첼라노의 토마스이다. 첼라노가 1228년에 「성 프란치스코의 제1생애」를 기록하였을 때에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인 글라라의 나이는 34세였고, 주님이 주신 자매들과 함께 성 다미아노에서 봉쇄생활을 한지 16년이 되었다.

“글라라가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통해 하느님께 회두한 이래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선익을 가져다주며 수많은 무리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 목표에 항구했고 신적 사랑에 대한 욕망에서 열렬했으며 천부적으로 지혜를 지녔고 겸손에서 탁월했다. ···

마지막 일곱째로, 관상의 극치에 오르니, 이는 자매들에게 당연한 구결이 되어 그 극치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혹은 피해야 할 모든 것을 배웠다. 그리고 행복하게도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마음을 비우는 법을 알고 있어 밤이나 낮이나 그분께 대한 찬미와 기도에 끊임이 없었다.

“여기서 자신들이 해야 할 혹은 피해야 할 모든 것을 관상의 극치 안에서 배웠다”라는 표현은 지적할 만하다. 글라라는 약 50명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생활리듬을 많은 규율적인 규범을 맡기지 않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지식, 성령에 대한 순응성과 올바를 행동의 결실을 맺는, 관상의 극치에서 오는 그 탁월한 지식에 맡겼다. 「글라라의 시성식 조사」에서 증인으로 나간 자매들은 거룩한 어머니가 관상의 은총을 받았음을 만장일치로 증거한다.

“그녀는 낮과 밤에 한결같이 기도하였다” “그녀는 묵상과 관상기도에 근면하였다: 기도에서 나올 때 그녀의 얼굴은 태양보다 밝고 아름다웠으며 그녀의 말씀은 그녀의 삶이 온전히 천상적인 것인 양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미로움으로 흘러넘쳤다.”

글라라의 영적인 가르침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기쁨과 감미로움이 얼굴의 표정과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행복한 일치를 반영하였다. 이것으로써 선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도록 초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자매가 이렇게 증거하였다“: ”글라라는 기도에서 나올 때 늘 하느님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을 권고하며 격려하였다. 이는 허영심과 같은 따위의 말을 말하기도 듣기도 싫을 정도로 늘 하느님에 대한 말씀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래서 글라라가 기도에서 나올 때 자매들은 그녀가 천국에서 내려오듯이 기쁨으로 넘쳤다.

「프라하의 아네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에서 글라라는 틀림없이 자신의 깊은 체험을 밝히고 있다:

“지극히 사랑스러운 그대도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늘 즐거워하며, 슬픔이나 우울이 그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사랑하는 자매여, 천사들의 기쁨이여, 우리 자매들의 왕관인 그대여,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신적 실체의 형상 가운데에 두고, 그대의 전 존재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태초부터 하느님 몸소 마련해 놓으신 숨겨진 감미로움을 맛보면서 그대도 그분의 벗들이 느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글라라가 침묵과 고요함 가운데서 하느님과의 일치의 감미로움을 맛보는, 관상에 전념하는 특별한 순간은 하루에 세 번 있었다. 즉, 밤에 독서의 기도를 마치고 나서 오랫동안 성당에 혼자 남아 있을 때와, 아침에 삼시경 후 「회칙」에서 명해진 공동 노동을 시작하기 전, 그리고 정오의 육시경 때였다.

성녀는 자기「회칙」에서 글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로 이것을 얻도록 힘쓰십시오: 즉,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도록 힘쓰십시오”(RegCI 10,7)라는 구절도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프란치스칸 기도는 정적인(affectiva), 즉 마음의 감정을 포함시키는 기도이다. 따라서 항상 천상적인 빛과 은총으로 인도되는 프란치스칸 기도의 특징은 자유와 자발성이다. 또한 관상기도이다. 즉, 보나벤투라 성인의 가르침과 같이 자기 자신을 비우고 사랑의 길로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목표로 하는 지혜적(sapientialis) 관상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영혼은 성령의 작용을 은밀한 자기 마음 안에서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접근하시려고 사용하시는 가지가지의 표지 안에서도 발견한다. 즉, 성서, 창조물, 각 사람의 존재, 역사 등의 표지들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누구보다도 모든 사물과 사건 안에 하느님의 “표지”(sacramentum)가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나그네 길에서 만나는 구체적, 외적 실체를 통하여 하느님께 자기 영혼을 들어올렸다.


전례기도

형제회의 탄생 초기부터 프란치스코 중심으로 모인 형제들은, 그들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표시하기 위해, 공동기도를 바쳤다.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밝히듯이 초기에 이 공동기도는 매우 단순했다. 첼라노도 이것을 증언한다: “하느님 앞에서 단순하게 생활하였고 ··· 형제들은 염려나 괴로운 근심 걱정에 마음 쓰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성령의 불에 타올라 정해진 성무일도 시간만 아니라 어느 때도 항상 탄원하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의 기도」를 노래하였다.”

이 증언이나 비슷한 다른 증언을 근거로 해서, 형제들이 초기에 성무일도를 대신하여 각 시간경마다 몇 번의「주의 기도」를 바쳤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당대의 회개자들의 집단과 평신도 공동체에서는 관례였었다.「주의 기도」는 후에 형제회의 평형제들에게 성무일도 대신 의무적인 기도가 되었고, 성직자 형제들은 다fms 성직자와 같이 성무일도를 바쳤으며 때때로 그 지역 성직자들과 함께 바칠 때도 있었다.

형제회에 아직 경당이나 성당이 없을 때, 형제들은 자기들이 사는 곳의 성당에서 미사와 다른 전례 행사에 참여하였다. 은둔소에는 보통으로 예부터 있었던 작은 경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222년부터 불가피한 형제들의 증가에 따라, 특히 독일과 영국에서, 교황청은 형제들이 자기들의 경당에서 이동 제대위에 전례를 거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기 시작했다. 1224년 12월 3일자로 발행된 「칙서」에 의하면 “신자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댄다.

실은 순회생활을 하는 초기 형제들에 있어 성무일도를 바치기 위한 좋은 방법을 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무일도는 성가대용 사본 전례서를 사용해서 공동체에서 노래로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약식으로 로마 교회의 성무일도서가 보급된다는 것을 대환영하였다. 형제들이 시편집과 로마 성무일도서만 가지고도 성무일도를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성무일도를 바치는 관습을 보급시킨 분은 프란치스코였다. 이것은 법적인 의무로써가 아니라 영혼에게 양식을 주고 교회의 공식 기도에 참여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특별히 좋아하던 기도의 방법이 있었는데, 이것은 구송기도로써 성서와 전례에서 인용된 구절들이 개인 신심의 감정과 조화를 이루는 기도였다. 그 예로서 몇 개의 「찬미경」과 「주의 수난 성무일도」를 들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공동체에서 거행되는 미사 성제와 마찬가지로 형제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성무일도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규정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형제들이 초기에 가졌던 자발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혹은 때때로 전례에 대해 생겼던 그릇된 경향으로 인해 성무일도가 바쳐지는 방법과 그 본문까지 지나치게 자유로이 변경되는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어떤 형제들이 대수도원 양식을 본받으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한편으로 일반 수도승과 도미니코회에서 따랐던 고유한 전례와 달리 성무일도를 미사와 같이 “로마 교회의 규범에 따라” 바칠 것을 명함으로써 교황청에 대한 충성을 보장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다른 편으로는 작은 형제들의 특징이 되어야 할 단순성과 신심과 마으의 일치를 보장할 의도를 보이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이미 형제들이 일정한 장소에 거처를 둔 다음에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쓰고 있다. 먼저 “회칙이 명한 대로 성무일도를 바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내가 게을러서도 그랬고 병약해서도 그랬고 무지하고 배우지 못해서도 그랬습니다”하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그러므로 나의 주인이신 총봉사자 모 형제에게 할 수 있는 한 간절히 청합니다. 회칙을 모든 형제들이 어김없이 지키게끔 하십시오. 성직자들은 목소리의 음률보다는 마음의 일치에 관심을 두어, 하느님 앞에서 열심히 성무일도를 바치게끔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목소리는 마음과, 마음은 하느님과 일치시키고, 목소리를 곱게 내어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보다는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도록 하십시오.”

성 프란치스코는 결코 성 베네딕도가 「회칙」에서 명하는 것, 즉 “시편을 외울 때는 우리의 마음이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라는 말을 반대하는 뜻은 없다. 그러나 두 성인들이 전례기도에 대하여 가지는 영적인 태도가 다르다는 것은 틀림이 없고 또한 당연하다.  대수도원 공동체를 위해서는 전례 거행의 외적인 태도가 공동생활(koinonia)의 표시와 표현으로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반면에 작은 형제들의 공동체를 위해서는 기도를 가로막는 어떤 걱정이나 분심이 없이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는 것”(RnB 22,19)이 더욱 중요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미사를 드리는 성직자 형제들에게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EpOrd 14).

더욱이 작은 형제들은 개인 관상을 위해 좋은 분위기와 충분한 시간을 마련해야 하고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설교하고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애긍을 청해야 했기 때문에, 작은 형제들의 공동체의 생활 리듬은 시간표가 전례를 중심으로 짜여있는 대 수도원 공동체의 일과와는 같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초기에 성 다미아노 공동체에서 전례기도가 어떻게 거행되었고 1215년 이후로 성 베네딕도의「회칙」이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우골리노 추기경은 1219년에 “다미아니떼” 자매들을 위해 정한 “생활양식”에서 장엄한 대수도원의 전례와 프란치스칸 색조를 띤 새로운 정신간에 타협점을 취하는 것 같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께 밤낮으로 드려야 할 성무일도에 관해서는 시간경과 시편을 읽을 줄 아는 자매들은 성무일도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노래를 할 줄 안다면 우주의 주님을 찬미하면서 정해진 시간경에 노래로 바치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이것이 듣는 이들에게 유익하고 좋은 표양이 되도록 온갖 엄숙함과 검소함 그리고 겸손과 깊은 신심으로 바칠 것이다. 시편을 모르는 자매들은 관례대로 정해진 시간경에 「주의 기도」를 바칠 것이다.”

1247년의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회칙」은 “글을 알고 노래할 줄 아는 자매들은 작은 형제들의 관례에 따라 성무일도를 바칠 것이되, 엄숙하고 검소하게 할 것이다”라고 명하고 있고, 글 모르는 자매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에서 평형제들을 위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주의 기도」를 바치라고 명한다. 이외에도 관례대로 성모의 소성무일도를 바치라는 것을 부각시킨다.

마침내 성녀가 친히 쓰신 「회칙」에서는 글 아는 자매들은 성무일도를 바치라는 것을 포함해서 작은 형제들의 성무일도를 그대로 정한다. 그렇다고 두 종류의 자매, 즉 가대 자매와 노동 자매간에 차별을 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 성녀는 글 아는 자매들도, 때때로 적당한 이유가 있으면 “다른 자매들과 같이 「주의 기도」를 바치기를” 원한다.

성녀 글라라의 「회칙」의 가장 특징적인 규정은 성무일도를 바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상기 말한 두 개의 「회칙」과는 달리 그리고 이미 작은 형제들의 성당에서 행해지는 것과는 달리, 글라라는 “성무일도를 노래로 하지 말고 읽을 것입니다”라고 명하고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당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남용에 반하여 작은 자의 정신과 성 다미아노 수녀원의 고요함과 친근함의 분위기에 꼭 맞는 것이었다. 당대에는 자주 성무일도를 노래로 바치는 것을 수녀원에 대한 전시 역할과 신자들을 자기 성당으로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좋은 오르간과 기타 악기를 장만해야 했고, 노래 잘하는 사람도 필요했다. 글라라는 또한 이것이 평등의 원칙, 따라서 형제적 일치를 거슬러 다른 수녀원들처럼 성가대 자매들과 대다수인 다른 자매들간에 차별을 일으킬 수 있음을 염려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녀는 무엇보다도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이에 대해 하신 단호한 권고를 모를 리가 없었다.

오늘날 성녀 글라라의 자매들은,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회칙」의 규범의 정신을, 시간경을 노래로 바치도록 권하는 최근의 교회 규범에 적용시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글라라회 자매들의 공동체 전례 행사는 기품이 있는 단순성과 간결한 요소와 적절한 표현들을 지니는 것으로 특징지어야 한다. 이로써 마음은 부담없이 하느님을 향하게 된다.

전기 자료를 통해 알고 있는 바와같이, 성 다미아노에서의 성무일도는 하루 일과가 밤낮으로 성화되도록 배정되어 있었다. 글라라는 부지런함과 열성으로 자매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글라라는 밤 12시경에 어떤 신호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자매들을 조용히 깨워주었다. 성녀가 친히 성당의 촛불을 켰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밤기도 종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종소리에 일어나지 않는 자매들을 신호를 통해 스스로 깨워주었다.”

“글라라는 몸이 건강하였을 때는 밤 12시경에 기도하려 일어났고 자매들을 조용히 흔들어서 깨웠다.”

어떤 전례 역사가들은 성 프란치스코를 개인적인 요소들이 전례생활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한 선구자로 보고 있으며, 이들에 의하면 이러한 강한 개인적인 영성의 발전으로 인해 15세기와 16세기의 전례에 대한 의미 자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과 반대로 프란치스칸 운동은 바로 예절에 치우친 기도와 개인 신심간에, 즉 경신례와 대중 신심생활간에 조화를 이루면서 평신도들이 크리스천 신비들과 전례 시기에 대한 의미를 되찾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13세기의 사회, 즉 상업과 공업과 길드 집단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시민 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사회는, 이전 시기에 대수도원 성당을 꽉 채웠던 농노들로 구성된 사람들의 사회와는 많이 변했다. 이 새로운 시민들은 전례에서 생활과 가깝고 공감하는 내용, 개인 묵상과 조화를 이루는 내용을 찾고 있었으며, 마음과 상상과 인격 전체가 펼쳐지는 내용을 찾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프란치스칸 운동의 영향으로 한편으로는 개인 기도와 사도직 활동으로 성무일도가 간추려졌고, 다른 편으로는 미사 전례에 층계송과 부속가 부분이 도입되었으며 개인 신심에 도움이 되는 허원 미사가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을마다 길드 단체들과 신자들이 열성을 다투면서 준비하고 참여하는 종교적 연극과 행렬 등이 실시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례 자체는 물론 그 신학적인 순수함과 장엄함은 잃었지만, 사목적인 면에서 볼 때는 교회의 생활이 생생하졌고 평신도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신비들을 열심히 살게 되었다.


은둔소: 하느님과 형제적 사랑을 체험하는 장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중단없는 역설적 요소와 더불어 고요함 중에 하느님과의 친밀한 생활을 목말라하는 갈망과, 사람들에게 나아가려는 충동을 느끼는 긴장 가운데서 움직였다. 이러한 긴장은 그를 몇 번이나 이른바 “정체성”에 처하도록 만들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심각했을 때는 1212년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기위해 실베스텔 형제와 글라라 자매에게 기도를 청하며, 그들과 상의하기로 결정했을 때이다. 그들의 대답은 프란치스코가 이미 천상의 빛으로 알아낸 것과 같이 관상의 선물을 자기의 것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사람들을 위한 헌신적인 투신은 그에게 은둔소의 평화를 찾도록 이끌곤 했다.

이와같이 프란치스코는 집중적인 기도와 형제적 사랑의 나눔이 이루어지는 장소로서의 은둔소를 창시한 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둔소는 은수자가 고독을 생활의 조건으로 삼으면서 자기와 사회 사이에 격리를 두는 옛 은수생활과는 다르다. 프란치스칸 은둔소는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있다. 즉 하느님을 만나고 형제를 만나는 장소이다. 침묵의 분위기와 자연, 공기, 햇빛과의 접촉 등 이런 가운데서 조성되는 좋은 외적 환경에서 사는 은둔자는 친밀하게 하느님을 만나고, 개방과 단순성 가운데서 형제를 만난다. 비록 각 형제가 은둔소의 방이나 암자, 숲 가운데서 고독을 찾지만, 그는 다른 형제들의 동반과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은둔소의 공동체는 서너 명의 형제들로 구성된 작은 것이지만 서로 밀접히 일치되어 있다.

따라서 은둔소는 사도적 활동 후에 영신 세계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고요함을 되찾는 형제들의 개인적인 필요성에 응하는 목적 외에도, 순회하는 형제들에게 매우 중대한 목적을 제공해 주었다: 즉, 형제들이 뽀르찌웅꿀라에서 가졌던 총회와 같은 즐거운 모임에서뿐만 아니라, 몇 주 몇 달 가는 은둔소의 친밀한 만남에서 서로 알고 깊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은둔소는 초기에 형제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였지만,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특히 형제들이 수도원에서 정주하게 될 때부터, 더 영구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은둔소의 생활양식에 대해서는, 성 프란치스코가 친히 “은둔소에서 수도생활을 하기 원하는 이들을” 위해 쓴 「회칙」에 그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바, 형제들의 상호 관계가 성령 안에서 단순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그려져 있다.

후에 형제들의 생활이 도시 중심으로 수도원에서 정착하게 되면서 은둔소는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충실한 동료들과 영신파 형제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총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은둔소 생활을 체험하기 원하던 성 보나벤투라는 은둔소들을, 기도와 단순성과 가난이라는 근본적인 가치에 응하는 곳으로서, 수도회에 필요한 장소로 여겼다. 14세기에 없어졌지만 엄격주의(Observantia)의 창시자들이 다시 은둔소를 부활시켰고, 그후 15세기와 16세기에 개혁자들이 더 많이 세웠다.

오늘날에도 공동체의 삶이 약해지고 형제들이 갈수록 흩어져 살기 때문에 은둔소의 보충 역할이 절실히 느껴진다. 이것은 은둔소의 설립이나 기도와 자유스러운 형제적인 만남이 활성화될 수 있는 “집중적인 기간”으로 충당해야 할 것이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사도적 권고」에서 수도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현대생활이 빠른 탬포로 진행되고 지나친 긴장을 요구하느니만큼 “일상기도가 충분하지 않고 더 오래 계속되는 기도 시간”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