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 6장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태도

Margaret K 2017. 12. 18. 21:42

제 6장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태도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형제인 인간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제1권고」시작에서 요한 복음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부님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요한 14,6-9). ··· 아버지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1디모 6,16).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요한 4,24).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18). 그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주기에’(요한 6,63)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성인은 “아버지”라는 말을 89번 사용하고 있고, 이 명칭을 구별없이 어떤 때는 삼위일체의 제1위격을 칭하고 다른 때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칭한다. 그중에 26번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써 프란치스코는 “우리의 형제”가 되신 아드님과 한마음이 되기를 원하며 특히 자녀다운 마음으로 “거룩하신 아버지, 의로우신 아버지”의 표현을 통해 기도하신다.

성녀 글라라의 글에도 하느님을 칭하는 아버지의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그 중에 특히 예수의 고유한 표현이었기에 프란치스코가 좋아한 “하늘의 아버지”와 ‘자비의 아버지“라는 표현들이 그렇다.

한편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자신들의 흠숭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은 초월적인 존재이므로 그분을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즐겨 부르면서, 그 초월성에 알맞은 속성을 붙인다. “창조주, 지존하신 분, 변할 수 없는 분, 헤아릴 수 없는 분, 볼 수 없는 분, 최고이신 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두 성인은 하느님을 인격적이고 가까운 분으로 느낀다. 즉, 예수에 의해 계시되신 신약의 하느님으로서 사람을 구하려고 각 사람과 계속 대화하시는 하느님,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인간의 모든 상황과 인간의 기쁨과 슬픔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마음에는 다른 신적인 종류의 속성들도 솟아나는데, 이것들은 학파의 신학 책에 실려 있지는 않지만 참으로 서서적인 색조를 띤 속성들이다. “자비로우시고, 감미로우시고, 양순하시고, 순수하시고, 부드러우시고, 평화로우시고, 의로우시고”등이고 혹은 명사형을 되는 “사랑, 자비, 감미로움, 굳셈, 피난처, 겸손, 온화, 인내 안식처, 기쁨, 위안, 희망, 온갖 보화”등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의 그들의 태도는 “당신은 누구이시며 ···· 저는 무엇입니까”라는 깊은 존경심을 표하는 것인 동시에 신뢰심과 감사와 사랑과 자녀로서의 큰 기쁨을 느끼면서 아버지의 뜻을 더 빠르게 실행하려는 마음이었다.

두 성인들의 글은 그들의 영적인 열정으로 차 있을 때 그들의 마음에 흘러넘친 감정에 대해 증명한다. 특히 「제1회칙」23장에서 성서적인 색조를 땐 다함없는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신 우리 창조주와 구세주이시고 유일하시고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양순하시고 감미로우시며 달고 달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 우리는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도 만족하지도 맙시다. ···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든지,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과 때에, 매일 그리고 계속해서,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삼위이시고 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당신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시작도 마침도 없이 변할 수도 볼 수도 없는 분이시고 표현할 수도 이루 다 말할 수도 없는 분이시며 이해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찬양을 받으실 분, 지존하신 분, 높으신 분, 감미로우신 분, 사랑하고 겸손되이 믿어 마음속 깊이 모시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찬미하고 찬양하며 영광과 영예를 드리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

이 말씀에 이어서 하느님에 대한 속성이 열일곱 개나 열거된다. 성인이 사랑에 빠진 마음의 고삐를 놓을 때면 사전도 바닥이 난다. 그러나 어떤 기도문도 성인이 오상을 받은 후에 자기 손을 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기도와 비교할 수는 없다. 이 기도는 성서적이고 시적인 억양이 뛰어난 정열에 넘친 기도문이다. 여기서는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명사형 속성들 중에서 세 개의 신학적 덕이 명시되어 있다. 즉, 사추덕이라는 네 가지 덕 중에서 세 가지만 적혀 있고 “지덕”은 빠져 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느님을 ‘당신은 신중함이시나이다“라고 부를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았다.

성녀 글라라는 자신의 어떤 기도문도 남겨두지 않았지만, 그녀의 글과 「시성식 증언록」을 살펴보면, 성녀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늘의 아버지” 앞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태도를 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이시고 모든 선의 샘이신 하느님

이것은 고유한 프란치스칸 개념으로서 프란치스코가 자기에게 매우 소중한 후렴과 같이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당신은 충만한 선, 완전한 선, 최고선이시고 모든 선의 샘이시며 당신밖에는 어떤 선도 없나이다.” 그리고 사부님이 직접 이러한 표현을 쓰는 글 외에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 많다. 하느님을 선으로 묘사하는 것은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바라보는 결과요, 피조물을 상대적인 가치로 보는 결과이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의 가치를 모르는 분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프란치스코만큼 자기와 각 형제와 각 사람과 각 사물 안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모든 것을 발견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는 당신의 복음적인 여정에서 가치관에 대한 등급을 확실히 파악하면서 하느님이 홀로 참된 선이시고 “우리를 흡족하게 하는 온갖 보화”(LauDei 4)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물리적인 선함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선함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것은 “하느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다”(루가 18,19).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사람은 모든 선이 그분의 것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어떤 선이라도 그분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나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선을 행하시고 나의 형제 안에서 나의 형제를 통하여 선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혜이다. 최고의 은인이시고, “합당한 사람이건 합당치 못한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관용과 사랑으로 애긍을 베푸시는 위대한 분께서” 모든 선물을 거저 주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혜이다. 혹은 성녀 글라라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하느님은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이 흘러나오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임이시다“. 하느님을 쾌히 ”은혜를 베푸시는 임“이라 부르는 글라라는 매일 그분으로부터 수많은 은혜, 특히 성소의 은혜와 거룩한 생활의 향기를 풍기는 은혜를 받는다고 확신한다. 글라라에게도 하느님은 우리를 흡족하게 하는 온갖 보화이시며 선이시다.

그래서 감사의 정이 프란치스코의 글, 특히 기도문에서 끊임없이 흐른다. 「인준받지 않은 회칙」제 23장은 대축일 감사송과 같이 꾸며져 있으며 성인은 여기서 먼저 하느님 자신 때문에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다음에 창조와 육화와 구속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재림, 즉 구원의 역사 때문에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에 드신 아드님만 합당하게 감사드릴 수 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하늘과 땅의 교회 및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마음을 일치하도록 초대하면서 최고의 선이신 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도록 한다.

성녀 글라라의 글에도 자신이 하느님의 유일한 은혜로서의 자기 존재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유래되는 선물과 같이 여겼다.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간호해 주던 자매들은 글라라가 자기 영혼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안전하게 그리고 평안히 떠나라. 든든한 호위대가 너를 동반할 것이다. 너를 창조하신 분이 너를 거룩하게 하였다. 그리고 너를 창조하신 후에 네 안에 성령을 부여하셨다. 그분은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보살피듯이 너를 언제나 보살펴 오셨다.”

그리고 글라라는 삶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 비록 이 세상에서 수많은 고통과 노고에 시달리고 있지만 - 이승에도 아름답고 이제 시작하려는 저승의 한없이 아름다운 삶을 노래하며 덧붙였다“

“나를 창조하셨으니, 주님, 찬미를 받으소서.”

마침내 성 프란치스코의 「성무일도 전에 바치는 찬미경」끝부분에 실린 기도문만큼 지극히 높으신 분에 대한 감탄과 응답의 정을 잘 표현하는 글은 없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며 지존하신 하느님이시여, 모든 선이시고 지상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하신 당신께, 모든 찬미와 모든 영광과 모든 감사와 모든 존경과 모든 찬양을 드리오며, 온갖 좋은 것을 돌려드리나이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프란치스칸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프란치스칸 신학, 특히 성 보나벤투라 신학의 특징이라고들 말한다. 이것은 아마 일반적으로 프란치스칸 영성에도 적용될 수 있다. 초기 전기 작가들의 글에 나타나는 프란치스코의 개인 신심을 연구할 때, 모든 것에 그리스도의 생활과 십자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 자신이 쓴 글을 연구할 때는, 지금까지 본대로 구세주와 구세주의 신비들이 지니는 큰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삼위일체가 정점을 차지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Adm 1,5-8). 사도 요한과 바울로의 신학에 나타는 것처럼, 삼위일체는 각 위가 하시는 역동적인 활동, 즉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성화를 이룩하시며 사람들을 사랑의 일치에로 초대하시는 활동에서 관상된다.

프란치스코는 놀랄 만한 직감으로 교부들의 전통에 기초를 둔 용어를 사용하면서 삼위일체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한다: 삼위의 온갖 현존과 활동은 아버지로부터 아드님을 통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각 위의 고유한 속성에 따라 이루어지도. “완전한 삼위이시고 단순한 일체이신”(EpOrd 52) 하나이신 하느님의 활동이시다. “창조”의 사업은 “아버지의 거룩한 뜻에 따라 당신의 외아드님을 통해 성령 안에서”(RnB 23,2) 이루어지고, “거룩한 간택하심과 이에 뒤따르는 축성은 삼위의 영원한 사람의 결과이며”(참조 Salvirt 2: OffPass 후렴), “육화”나 “구속” 사업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이 신비들의 영속인 성체는 삼위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은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로 내려오시고”,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시는 주님의 영이 주님의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이며”, “당신 뜻하시는 대로 주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일하신다.” 끝으로 신자들 안에서의 거룩한 “머무심은”성 요한의 말씀에 의해(요한 14,20-33) 삼위의 각 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신자들을 풍요롭게 하면서 나누시는 정배적인 사랑이다.

“우리는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 머무르실 수 있는 자리와 거처를 우리 안에 마련합시다”(RnB 22.27). "그리고 이것들을 실행하며 끝 날까지 항구 하는 모든 남녀들에게 주님의 영이 그들 위에 임하실 것이고 그들을 당신의 거처와 집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기에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들이요 형제들이요 어머니들이 됩니다. ··· 오,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 위로되시고 아름다우시고 감탄할 만하신 정배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아버지의 마음에 드시고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시고 달콤하시고 사랑할 만하시고 또한 무엇보다도 바랄만한 그러한 형제와 아들을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일인지! ···“

성 프란치스코가 그의 글에서 여러번 사용하는, 성삼에게 바치는 전례적인 기도 끝맺음은 그에게 단순히 형식적인 기도뿐이 아니라, 성삼위 각위에게 바쳐지는 존경심과 흠숭에 대한 충성의 표현인 동시에 모든 축복을 내려주시는 성삼에 대한 감사의 표다.

“이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의 축복을 충만히 받고, 땅에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위로자 성령과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기를 비는 바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당신은 사랑이시오며 자비이시나이다”(LaudDei 4). 성인이 그렇게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도록 권하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때, 성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정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강조하고 간천할 때 사부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라는 표현을 쓴다. 하느님의 존재와 계획이 드러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인의 신심은 사람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분위기, 영성의 특징, 형제회의 첫째가는 법은 사랑이고, 작은 형제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가정 근본적인 메시지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도 바로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모든 장애물을 제거시키는 “신심의 정신”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모든 선을 내려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되돌리게 해준다.

"세속을 떠난 우리에겐 지금 오로지 주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밖에 다른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무슨 보상이나 업적이나 이익을 얻을 핑계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주님한테서 떨어지게 하거나 떼어놓지 않도록 힘써 우리 자신을 지킵시다.“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에게 몸과 마음과 생명을 모두 다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시는 주 하느님을,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속량하셨고 온전히 당신 자비로써 구원하실 주 하느님을, 불쌍하고 비참하며 부패되고 추악하며 배은망덕하고 악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셨고 또한 주고 계시는 주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마르 12,30) ‘지혜를 다하고’(마르 12,33) 능력을 다하고 정력을 다하고 노력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애를 다하고 소망과 뜻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합시다.” (1회칙 23,8)

 

프란치스코는 사랑의 초대에 민감하여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마치 밖에서 말하는 사람의 소리의 활이 마음 안에서 있는 현을 켜는 듯이 곧 자극을 받아 꿈틀거렸으며 불이 붙었다. 그리고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한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곤 하였다. 이같은 사랑의 열정은 그의 신심,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마리아에 대한 신심, 인간들에 대한 친밀감, 그리고 창조물에 대한 그의 형제적 태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청하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이 표현을 그분 앞에서 조심스럽게 사용하였다.

「세 동료들의 전기」는 성인을 “하느님의 사랑에 도취된 사람”이라고 부른다. 단테는 그를 “사랑에 불타는 세라핌적 사람”이라고 부른다. 세계 문학이 성 프란치스코에 붙인 이름은 “세라핌적 사람”이라고 부른다. 세계 문학이 성 프란치스코에 붙인 이름은 “세라핌적 사부”인데, “세라핌적”이라는 형용사는 “프란치스칸”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성 보나벤투라로 말미암아 “사랑”은 신심과 관상에서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으뜸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사자

“하느님의 보물 도둑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내어주시고 그 외에도 수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은 당연히 상호적인 사랑의 의무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체험을 증거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도록 외쳐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선물을 우리의 것으로 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 된다. 게다가 작은 형제들이 세상에서 전해야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도 이것이고, 이것으로써 회개의 설교도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성인은 「인준받지 않은 제1회칙」에서 형제들이 어느 때든지 주님의 축복을 받아 어느 사람에게도 전할 수 있는 “찬가”를 소개해 준다.

“여러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주 하느님, 삼위이시며 일체이신 주 하느님, 전능하신 주 하느님, 만물의 창조자이신 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며 찬미하고 찬양하며 감사드리고 흠숭드리십시오.”

프란치스코는 자기의 형제들이 모두 성삼을 찬미하고 기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하였다. 에클레스톤(Eccleston)의 토마스 형제는 성인이 프랑스의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다음과 전해주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한번 자기 손으로 편지를 쓰셨는데 이 편지를 받은 형제들에게, 편지를 받자마자 기쁨에 흘러넘쳐 삼위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아버지와 아드님을 성령과 함께 찬미하세’하고 찬미의 노래를 부르라고 전하셨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시작에 토비아서에서 영감을 받아, “세상을 두루 다니는” 소명을 받은 형제들이 마치 세상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사명을 받았음을 알고 그들에게 권고한다“

“여러분은 행동으로 그분을 찬미하십시오(토비 13,6). 주님이 여러분을 온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토비 13,4 참조) 여러분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들이 ‘주님 외에는 전능하신 분이 아무도 없다’(토비 13,4 참조)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자녀들의 이러한 사명, 즉 하느님의 실재와 사랑의 증인이 되는 사명은 오늘날에 매우 시급한 것이다. “무신론은 현대의 극히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가지론의 형태로나,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존적인 인도주의의 형태로나, 모든 초월적인 차원, 특히 종교적인 차원이 인간을 지상 국가 건설에서 외면케 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적인 형태로 나타나든간에 무신론은 오늘날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현대인에게 할 수 있는 좋은 봉사 하나는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전능한”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도와주고, 동시에 우리 현대인에게, 신을 우리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현상에서 정화된, 더 복음적이고 더 “육화”적인 하느님에 대한 모습을 소개하는 것이다. 현대의 신앙인은 역사와 우주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는 특별한 예민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의 삶에 나타나는 차원으로서 하느님을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 드러나시면서” 한 많고 상처받기 쉬운 우리 인생의 흥망성쇠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으로, “죄 외에는 모든 일에 있어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신” 하느님으로 알아볼 줄 아는 예민성이다(참조: 로마 8,3: 필립 2,7: 히브 4,15). 육화의 신비란 당신의 손으로 지어내신 업적을 존중하며 특히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 선물을 존중하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영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불행, 즉 온갖 재난, 전쟁, 억압과 조악의 상태 앞에서 무능하게 보이실 정도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무죄하시고 순수하신 분”으로 부르고, “당신은 인내이시나이다”라고 노래할 때 참으로 옳은 말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