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제4장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Margaret K 2017. 12. 18. 21:41

제4장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마태 28,20)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여러 모양으로 이루어진다: 이 약속은 먼저 성체성사 안에서, 다음에 교회의 교계를 통한 행정과 교도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백성 전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님의 몸과 피의 신비


성 프란치스코의 시대에는 신자들이 자주 영성체하는 습관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원인은 세 가지 역사적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① 미사에 대한 공동체 의식이 점차적으로 결핍됨. ② 경건한 중세기 신자들이 거룩한 성체를 모시기에 부당한 죄인이라는 지나친 의식을 가졌음. ③ 성체를 모시기에 앞서 화해성사를 받기 위한 절차가 복잡해졌다는 이유였다. 성 프란치스코 자신도 자주 성체를 영하지 못했다. 성녀 클라라는 <회칙>에서 영성체하는 날들을 일곱 번으로 전한다. 즉, 1년 중에 가장 중요한 일곱 개의 대축일이다(Reg Ci 2,14). 1221년의 회개회(재속회)의 <지침서>는 1년에 “세 번, 즉 성탄과 부활과 성령강림 대축일에 영성체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주일마다 성체를 영하는 초기 교회 관습이 이미 400년 전에 없어졌고, 그 후에 교회는 모든 신자들에게 1년에 세 번 영성체할 것을 정했던 것이다.


한편 1215년에 개최된 라떼라노 제4차 공의회는 영성체에 대한 의무를 1년에 한 번, 부활 대축일 시기로 한정시켰지만, 그 반면에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현존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일으킬 목적으로, 특히 성직자들의 부주의로 발생된 악습을 거슬러 <지침서>를 공포했다. 그리고 1219년 11월 22일, 교황 호노리오 3세가 공포한 <칙서>는 성체 공경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규정을 정한다.


이 당시에 프란치스코는 동방에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그는 항상 걱정해 왔고 시급한 것으로 여겼던 이같은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법” 규정의 대변이 되는 사명감을 느꼈다. 실은 그는 <유언>에서 회개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는 은총 중에서 사제들에 대한 신뢰심과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믿음을 열거하고 있다. 그의 사랑은 성체가 부당한 곳과, 더럽고 버려진 성당에 모셔져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초기에는 동네를 두루 다니고 성당을 청소하기 위하여 빗자루를 들고 다니곤 하셨습니다. 사실 그분이 성당을 찾았을 때 대개 성당은 너무 더러워서 마음이 편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백성들에게 설교를 마치신 후, 평신도들이 모르게 사제들을 따로 불러 한 곳에 모으시고 그분들에게 영혼들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특히 성당과 제대 그리고 거룩한 신비를 거행한 온갖 제구를 깨끗이 해야 할 의무를 깨우치시곤 하셨습니다.”


1222년경 프란치스코는 직접 “하느님의 향기로운 말씀”을 전하기가 불가능하게 될 때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설교 방법, 즉 편지를 통한 설교 방법을 사용해서, 성체 공경을 목적으로 켐페인을 시작했다. 영적인 권고 <제1권고>를 포함하면 성체를 주제로 하는 성인의 편지는 여섯 개나 된다. 이 편지에서 그는 주로 주님의 몸과 피의 신비에 드려야 할 합당한 공경과 성당의 청소와 이 크나큰 신비와 관계되는 모든 것, 즉 성당 제대, 성작, 성작 수건, 제대보 등의 정돈에 대해 강조하는 동시에 성체가 모셔져야 할 마음의 깨끗함과 성체를 밖으로 모실 때 가져야 할 존경심을 강조한다. 성인은 또한 “주님의 거룩한 이름과 성체를 축성하는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가끔 거론하는데, 이것은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제대 위에 놓는 양피지로 된 미사경본이다. 사부님의 가장 대표적인 문헌은 다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이다.


“모든 성직자들이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 거룩하신 그분의 이름과, 그리고 그분의 몸을 축성하는 기록된 그분의 말씀에 관하여 사람들이 저지르는 엄청난 죄와 몰이해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우리는 먼저 말씀으로 축성되지 않으면(주님의)몸과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고, 또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1요한 3,14) 구원된 그분의 몸과 피와 이름과 말씀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이 지상에서 지존하신 그분을 절대로 모실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성사에 봉사하는 모든 이들, 특히 조심성 없이 봉사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봉헌하는 데 사용되는 성작과 성반 그리고 성작 수건이 그 얼마나 초라한지를 자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직자들을 적합지 못한 장소에다 성체를 모시거나 방치하고 불경하게 옮기며 합당치 않게 영하고 다른 이들에게 분별없이 영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그분의 이름과 거룩된 말씀까지도 발아래 짓밟힙니다.“


이외에도 프란치스코는 인준된 <제2회칙>에서 형제들에게 세상 어디서나 성체의 표지나 제구에 대한 존경심을 전하는 사자가 되라는 명령을 삽입하기를 원하였으나 봉사자들은 이러한 규정이 필요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창립자 프란치스코는 봉사자들에게 보내신 두 개의 편지에서 이 점을 강조한 후<유언>에서도 이것을 명기하였다:


“누구든지 이 지극히 거룩한 성사를 무엇보다도 공경하고 경배하며 귀중한 장소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과 말씀이 기록된 책을 부당한 곳에서 발견하면, 나는 그것을 주워 모으기를 원하고, 또한 다른 이들도 그것을 주워 모아 합당한 곳에 모시기를 부탁합니다.”


성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프란치스코는 이미 당시의 대학에서 사용했던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평범한 신자생활의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성사”라든지 “제단의 성사”라는 표현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거의 항상 교부들의 전동에 따라 “신비”혹은 “지극히 거룩한 신비들”이란 말을 사용한다.


우리가 이 신비들에 참여하는 길을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은 신자들이 성체에 참여하는 풍습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주 성체를 영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성인에게 있어, 영성체는 단지 각 사람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가지는 개인적인 만남뿐만 아니라 제단에서 기념되는 주님의 수난의 사업과 결실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인은 또한 성체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현존도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구속사업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에 입맞추면서 또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으로 모든 형제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과 영예를 나타내도록 하십시오. 그분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평화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또한 성인이 성체 안에서 공경하는 그리스도는 단지 지상생활에 나타나고 우리 기억의 대상이 되는 역사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자기에 있거나 없거나 합당한 사람을 당신의 은총으로 채워지시는”, 영원한 영광중에 계시면서 살아 계시고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성체의 빵을 유익하게 영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에 대해 성인은 매우 깊고 특이한 개념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다음에 논하게 되는, 주님의 영에 대한 성인의 사상과 성령께서 각 신자 안에 머무르신다는 성인의 역동적인 개념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모시는 것입니다. 이영의 한 몫은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하게 주님을 받아모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 탄생의 예고를 배경으로 하는 <제1권고>의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성령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 아버지의 말씀을 모시게 함으로써 육화의 신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제1권고>에 의하면 양쪽 신비, 즉 육화신비와 성체신비에서 하느님의 아들에 비하가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잇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주님의 몸을 모시기 위해 신자들에게도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이 요구된다면, 하물며 성체에 봉사하는 성직자들에게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된 형제들과 사제가 될 형제들과 지존하신 분의 사제가 되려는 뜻을 가진 형제들에게” 겸손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당부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의 참다운 제사”인 미사를 봉헌할 때 “어떤 지상적인 것을 위해서 하지 말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호감을 사려고도 하지 말고 깨끗하고 순수한 지향으로 오직 주님 한분만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여기서 사부님은 분명히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미사를 드리는 사제들의 관례를 생각하고 있다. 실을 소위 “개인 미사”가 생기게 된 원인은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당 혹은 제단의 설립자들이 세운 기금의 한몫이나 연금이나 봉헌물을 받는 의무로, 사제 한 사람이 하루에 미사를 여덟 대나 열 대 이상 드림으로써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미사를 드리는 악습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공의회들은 이것을 없애려고 강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이같은 지상적인 이익 때문에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를 단죄하면서 그를 “배반자 유다”라는 독한 표현으로 부른다. 이어서 제단의 봉사자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생활과 성체를 영하기 위한 겸손하고 비운 마음을 가지도록 강하게 권한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여! ··· 온 우주의 주인이신 분께서  ···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시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 그분이 여러분들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형제회의 초기에 형제들은 일정한 집이나 성당이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과 함께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은둔소에 사는 형제들은 보통 자기들을 위한 경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이 정주하는 수도원들이 많아짐에 따라 1224년에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제단을 세우고 ‘성무일도’를 바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프란치스코는 불가피한 이 사실을 반대 없이 받아들였지만, 이것 때문에 각 공동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즉, 각 성직 형제가 개인 미사를 드리게 되면, 제단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형제적 사랑의 가장 종요한 순간에 형제들간에 분열이 생길 수 있다는 문제였다. 라틴 교회에는 이미 오래 전에 합동 미사가 없어졌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사제들의 이해를 바라면서 성체 안에서의 형제들의 일치를 보존할 방법을 망설임 없이 택하였다.


“그래서 주 안에서 훈계하며 권고합니다: 형제들이 머무는 곳에서 거룩한 교회의 규범에 따라 하루에 미사 한 대만 드리도록 하십시오. 한곳에 여러 명의 사제가 있을 경우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리에 있거나 없거나 당신께 합당한 사람을 당신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사부님의 원의는 형제회 안에서 장기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얼마 안 가서, 한 성당 제대를 하나 이상 두는 관례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한 수도원에 사는 여러 사제들을 위해 미사 순서를 정한다는 것이 복잡한 문제로 여겨졌다.


클라라의 <회칙> 에는 미사에 대해 명시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미사는 매일 전례의 일부였기 때문에 특별히 규정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성녀 클라라가 얼마나 크나큰 존경심과 사랑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얼마나 큰 열성으로 성체에 대한 신심을 길렀는지 우리는 많은 증거를 통해 알고 있다. 그녀는 병중에 있을 때에 시간이 나는 대로 빈 시간에 순 아마포로 성체포를 정성스럽게 짜서, 그것들을 주교가 축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포장한 후에 작은 형제들 편으로 근처에 있는 가난한 본당으로 보내곤 했다.


자매들은 <시성식 증언> 속에서 클라라가 많은 눈물을 흘리며 몸이 떠는 가운데 성체를 모시려고 하였던 그녀의 감격스러운 마음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회칙>이 명한 대로 사제가 수녀원 봉쇄 안에 들어가서 “성한 자매들과 병든 자매들을 위해”(RegCi 3,15) 가족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1년에 일곱 번 미사를 봉헌하는 그 성체의 축제들이 성녀 클라라와 성 다미아노의 자매들에게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날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녀 클라라가 성체의 기적으로 사라센인들을 쫓아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 즉 성녀가 성체를 모신 성합을 손에들고 있는 그림을 우리는 자주 보지만, 그 괴로운 순간을 겪었던 자매 자신들의 증거에 의하면 그 사건은 훨씬 아름다웠었다. 성 다미아노의 수녀원을 침략해 온 사라센인들이 이미 봉쇄 안에 들어와 있었고, 자매들은 겁에 질려 모두 식당에 모였다. 이때 클라라는 성체가 모셔진 성합을 가져오게 한 후에 자매들과 함께 성체 앞에서 기도했다. 갑자기 클라라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확인해 주는 소리를 마음 안에 듣고서 자매들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했다. 이어서 식당 밖에 나가 보니, 그 무서운 손님들이 도망쳤음을 확인했다.


교계적 교회:

“나는 그분들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뵌다”


프란치스코가 “회개자”라는 신분을 공적으로 주장하면서 육신의 아버지 앞에서 아씨시 주교의 보호를 청하게 된 이유는 단지 “봉헌자”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특권을 누리려는 의도만이 아니었다. 첫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자 프란치스코는 구이도 주교로부터 직접 자기들의 카리스마의 진실성을 확인받으려고 했다. 이 사실을 프란치스코 자신이 직접 다음과 같은 말로 증언한다:


“회개생활을 시작하고 세속과 육신의 아버지를 떠날 때, 주께서는 아씨시의 주교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봉사생활을 하도록 인도하고 확인해 주셨다.”


얼마 후 교회에 대한 사람에 이끌리어, 첫 제자들로 형성된 공동체의 생활을 인준받기 위해 교황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로마교회에 가서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시작하신 일을 교황님에게 보고드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시작한 일을 교회의 뜻과 명에 따라 계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부님이 교횡 성하에게 아뢴 것은 단순히 법적인 인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는 무엇보다도 주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것처럼 교황 성하로부터 자기와 자기 제자들을 위해 복음을 살고 전하는 사명과 파견을 받기를 원했다.


최근의 연구 자료들이 <세동료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야기에 의하면,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 일행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였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환영해 주셨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갖춘이 교황은 여러 곳에 발생한 복음적인 운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교회의 선익을 고려하여 모든 운동을 환영하고 인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마침 하느님의 인도를 받아 스스로 로마 교회 권한 아래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겸손한 아씨시의 창립자를 만나자, 프란치스코를 하느님이 보내주신 사람으로 여기면서 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라떼라노의 대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한 꿈을 꾼 다음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교회를 재건하고 떠받칠 사람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은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교황의 인준을 받음으로써 프란치스코는 현재와 장래의 형제들의 대표로 사도좌의 권한에 매인다. 이로써 교계적 교회에 대한 순명이 결정적으로 못박히게 되었고, 이러한 순명은 프란치스코에게 복음에 대한 충실성과 선교에 대한 유효성과 나아가 수도회 자체의 내적 일치를 보장해 주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교회와 맺은 이 서약의 의미는 인준되지 않은 <제1회기> 시작에 잘 명시된다.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형제와 현제 및 미래의 그의 모든 형제들에게 이것을 승인하시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형제와 본 수도회의 머리가 되는 형제는 인노첸시오 교황 성하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순종과 존경을 약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형제들은 프란치스코 형제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작은 형제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과 함께 크게 기뻐하며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스뽈레또 계곡을 향하여 동료들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어머니이신 로마 교회에 기쁘게 순명하는 것이 프란치스코에게 항상 수운 일은 아니었다. 교회에 대한 재빠르고 신뢰깊은 순명을, 굽힐 줄 모르는 이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프란치스코는 겸손하고도 강한 믿음의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할 순간들이 있었고, 특히 형제회 내에 세력이 강한 소위 “신중한”형제들의 집단이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러했다. 이외에도 그가 동방에서 돌아올 때 형제회가 처해 있었던 위기의 때와, 1223년에 결정적 <회칙>이 힘들게 작성된 시기에도 마음 아픈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같은 괴로운 상황들이 “가톨릭적인 사람, 온전히 사도적인 - 사도좌에 충실한 - 사람”인 프란치스코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지 못했다.


<제2회칙>에 의하여 “형제회의 지도자요 보호자요 감사관이 될 거룩한 로마 추기경들 중에 한 사람을 교황 성하에게 청하는” 목적은 모든 형제들을 교회와 더 밀접히 일치시켜 그들이 거룩한 교회의 복속함으로써 신앙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거룩한 복음을 실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교황청에 대한 순종이 수도회 전체와 관계되는 일이긴 하지만, 형제들이 매일 생활과 사도직에서 가까이 만나는 문제는 주교들과의 관계이다. 사실 어떤 주교들은 자기 교구에서 새로 생긴 수도회의 형제들이 활동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회칙>에서, 주교가 금하는 교구 내에서 설교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리고 성인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힘이 있는 단순한 겸손으로 행동하였다. 한번은 이몰라에 도착하여 설교할 허락을 받으려고 주교를 찾아갔다. 주교의 대답은 “형제여! 내가 해도 됩니다.”라는 것이었다. 성인은 머리를 숙이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다시 주교에게 돌아왔다. 주교는 이번엔 “형제여, 무엇을 원합니까? 무슨 용무로 또 왔습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프란치스코는 겸손한 자세로 “주교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이쪽 문으로 쫓아내면 그 아들은 저쪽 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같은 겸손한 자세를 보고 주교는 생각을 바꿔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에게 설교할 허락을 주었다.


어떤 주교들의 반대나 변덕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부 형제들은 교황청으로부터 설교할 특전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살아 있는 동안 그러한 방법을 단호히 금하였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작은 자로서 살기를 서약한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님 몰래 특전을 얻은 일도 있었고, 복음의 새로운 사도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려는 교황청이 솔선수범해서 내어준 일도 있었다. 성인은 <유언>에서 이 그릇된 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순종으로 단호히 명합니다. 형제들이 어디에 있든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나 자기 몸의 피해를 피하기 위해서나 성당이나 다른 건물을 위해서 어떠한 증서도 로마 교황청에 감히 신청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환영받지 못하거든 하느님의 축복 속에 회개생활을 하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피하십시오.”


앞으로 탁발 수도회와 교회의 사목자들간에 생길 분쟁을 예지하듯이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신앙을 일깨우는 데 있어 자모이신 성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일반 성직자들을 돕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분들을 항상 사랑하며 그분들에게 존경과 영예를 드려야 합니다. 형제들이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름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품행과 표양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작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어느 형제가 형제들이 설교 때문에 어떤 주교들의 반대를 당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는데, 프란치스코가 그에게 말했다:


“작은 형제들인 여러분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내가 하느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회심시키지 못하게 하는군요. 나는 먼저 우리의 성스러운 겸손과 존경심으로 주교님을 개심시키고 싶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의 거룩한 생활과 그들에 대한 우리의 겸손한 경외심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오히려 여러분이 설교하여 사람들을 회심시켜 주도록 요청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여러분은 특전에 의하기보다는 여러분의 설교로 사람들을 훨씬 더 자 이끌어 들이게 될 것입니다. 특전이란 여러분의 자만심을 채우는 것뿐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죽고 몇 년 후(1231년 8월 21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작은 형제들에게 면속권을 부여하였다. 교회법상의 이 새로운 자치권은 - 봉건적 색조를 띤 이전의 특권과는 달리 - 탁발 수도회의 허용된 특권이라기보다 교황이 온 교회를 위해서 맡고 있는 사목적 직분의 표시오 요구였다. 면속은 또한 알렉산더 6세가 다음에 선언한 것과 같이 “수도자들이 중재자 없이 직접 교황청에 바쳐야 할 순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교계제도에는 사제들도 포함되어 있다. 당대에 추기경, 주교, 아빠스등 고위 성직자들은 세속화되어 있었고 봉건 귀족들과 손잡고 살았는가 하면, 수가 많은 하위 사제들 대부분은 학식이 부족하였고 그들의 생활도 모범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의 신앙심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로 발생한 운동의 개혁자들은 그들을 낮춰 봤다. 예를 들어 카타리파 사람들은 합당치 않은 사제들에게서 성체 받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 시련을 극복할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점을 형제들에게 단호히 주의시켰다: “로마 교회의 관습을 따라 올바르게 생활하는 성직자들에 대해 신뢰를 가지는 종은 복됩니다. 그리고 이분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비록 그분들이 죄인들이라 해도 주님 자신만이 이들을 판단하는 것을 자신에게 유보시키기에 아무도 이분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 사제들에 대한 큰 신뢰심을 주셨고 또한 지금도 주시기에, 만일 그분들이 나를 학대한다 해도 그분들이 받은 품 때문에 나는 그분들에게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 그리고 그분들과 또 다른 사제들을 마치 나의 주인인 듯이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분들 안에서 나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 뵙고 그분들이 나의 주인이므로 그분들 안에서 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


“그분들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뵙는다”는 이 한 가지 표현만 보더라도 프란치스코 성인이 교회의 신비를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신비란 그리스도 자신의 현존이며, 성인은 이 현존을 나그네인 교회의 표징 안에서 감명깊게 그리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시에나에서 남기신 <유언>에서 당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머니이신 거룩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다른 모든 성직자들에게 충성을 다하고 항상 순종하십시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생각에 교회는 교계를 이루는 각층 성직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교회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 백성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 먼저 이미 아버지의 집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성인들이 있고, 다음에 지상 교회에 사는 세례받은 신자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구원으로 부름받은 모든 세대의 인간들이 있다. <제1회칙>23장에서 성인은 교회론에 관하여 놀랄 만한 신학적 비전을 보여준다 23장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오 임금님”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성인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열렬한 기도이다.


23장 제1부에서는 아름다운 말로 구원의 역사가 묘사되고 있다: 창조사업, 하느님 계획, 인간의 타락, 사랑의 업적인 육화, 구원적 수난과 죽음, 그리스도의 영광과 뽑힌 자의 머리로서 그분의 마지막 승리 등이다.

제2부에서 성인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에 감사드리기에 합당치 못함을 고백한 다음, 성부의 마음에 드시고 모든 선을 내리게 해주신 당신 아들로 하여금 대신 성부께 감사를 드리도록 간청한다. 이어서 “알렐루야”를 노래한 다음에, 과거와 미래에 모든 복된 분들을 부르고 그리스도와 함창하며 하느님께 ra사드리도록 초대한다.


“또한 공번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받은 거룩한 교회 안에서 주  하느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과 다음과 같은 물을 받은 사람들 - 사제들, 부제들, 차주제들, 시종자들, 구마자들, 독경자들, 수문자들과 모든 성직자들 - 에게, 그리고 모든 남녀 수도자들에게, 모든 어린이들과 소년들, 가난한 자들과 빈궁한 자들, 왕들과 왕자들, 노동자들과 농부들, 종들과 주인들, 모든 여인들 - 동정녀들과 과부들, 부인네들 - 에게, 평신도들 - 남성들과 여성들, 모든 아이들과 청년들, 젊은이들과 늙은이들, 건강한 이들과 앓는 이들, 작은 사람들과 큰 사람들 - 에게, 세상 어디서나 현제에 있고 앞으로 있을 모든 나라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모든 국가와 모든 국민들에게 다른 방법으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기에, 우리 모두가 참된 신앙과 회개에 항구하기를 우리 모든 작은 형제들이 겸손되이 부탁하고 간청하나이다.”


프란치스코가 본 나그네인 교회는 여기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구체적이며 형제적인 비전이다. 매일 길에서나 시장에서 만나는 각 남자나 여자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구세주 그리스도의 표시이며 교회이다. 그리고 성인의 이러한 비전에서 지적할 만한 것은 높은 사람들이나 낮은 사람들을 같은 계층에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낮은 자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그것이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첫 자리에 어린이들, 가난하고 궁핍 중에 있는 사람들이 나오고, 다음에 주인들보다 앞서 종들, 높은 자보다 앞서 작은 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개가 필요한 나그네인 백성에게 봉사해야 할 작은 형제들이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비추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장면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머리에 잘 표현되어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 수도자들, 성직자들 및 평신도들과 온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남녀들에게 여러분의 종이며 아랫사람인 프란치스코 형제가 여러분에게 경의와 존경을 드리며 하늘의 참된 평화와 주 안에서 진실한 사람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편지>를 끝맺으면서 그들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여러분의 작은 종인 나 프란치스코 형제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발에 입을 맞추는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하며 간청합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들과 또 다른 말씀들을 겸손과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실천하고 지켜야 합니다.”



성녀 클라라와 그녀의 교회적 사명


알렉산델 4세는 <성녀 클라라의 시성식에 대한 칙서>에서 성녀를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클라라는 온 교회를 비추는 감탄할 밝은 불빛이고 주님의 집에 밝은 불빛을 발하는 등불이며 교회의 건물 전체를 성덕의 향기로 채우는 향료의 그릇이다: 클라라는 무성한 나뭇가지를 뻗어 교회의 밭에서 새로운 수도회를 통해 부드러운 결실을 맺은, 하늘로 향해 우뚝 서 있는 나무이다: 클라라는 이미 교회의 지역에 시내와 같이 널리 퍼진 영혼들을 굳세게 하고 풍요롭게 함으로써 수도회들의 온실을 싱싱하게 만든, 생수가 솟아나는 샘이다: 클라라는 그녀의 힘찬 불꽃에서 등불을 켜러고 수많은 동정녀들이 달려가는, 주님의 성전에 찬란하게 빛나는 성덕의 탁월한 등경이다: 클라라는 교회 밭에서 다양한 가난으로 장식된 겸손의 꽃밭을 가꿔 놓았다. ···”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이미 예고한 일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고 있을 때 성당 꼭대기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어로 외치곤 하였다: “와서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짓는 데 나를 도와 주십시오. 사실 이곳에서 부인들이 살게 될 것인데, 하늘에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생활로써 당신의 거룩한 온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클라라 자신도 자기 자매들뿐만 아니라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모형과 본보기와 거울이”되는 소명을 받았음을 잘 의식하고 있었다.


<클라라의 전기> 작가에 의하면, 성좌가 클라라의 시성을 결정한 것은 “특별한 자격으로 로마 교회의 신자이며 딸인” 그녀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발하고 있다. 클라라는 항상 교회의 딸이라는 정신으로 살았다. <유언>에서 수녀회를 성좌의 어머니다운 보살핌에 내맡기면서 교회에서 탄생한 가난한 자매들의 수녀회의기원을 다음과 같은 깊고 아름다운 말로 표현한다:


“나는 무릎을 꿇고 몸과 마음을 수그려 거룩한 어머니이신 로마 교회와 교황 성하와, 작은 형제회 및 우리를 위해 임명되는 추기경님께 현재와 앞으로 들어올 나의 모든 자매들을 내맡깁니다.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코의 말씀과 모범을 통해 당신의 거룩한 교회 안에서 주 아버지께서 이 작은 양떼를 낳으셨으니 ··· 가난 안에 항상 머물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회칙>에서 프란치스코와 같이 그리고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베드로의 성좌에 전적이고 신뢰하는 순명을 약속한다:


“그리스도의 부당한 여종이고 지극히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인 클라라는 인노첸시오 교황 성하와 교회법에 따라 선출되는 그의 후계자들과 로마 교회에서 순종과 존경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클라라도 수녀회를 위해 보호자 추기경을 가지기를 원한다. 이로써 절대적 가난과 복음의 약속에 대한 충실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RegCI 1,3: 12,12).


클라라에게도 어머니 성교회에 전적으로 복종한다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었고 단순한 일도 아니었다. 천 번째 힘든 순간은 성 프란치스코의 강요로 마지못해 성 베네딕도의 회칙에 따라 수녀원장의 직책과 명칭을 수락해야 할 순간이었고, 두 번째 힘든 순간은 프란치스코가 동방에 여행하던 동안 시토회 회원이 성 다미아노 수녀원의 시찰자로 임명되었을 때였다. 이때에 클라라는 교황께 용기있게 호소하여 자기가 온전히 신뢰하는 필립보 롱고 형제가 대신 임명되도록 은혜를 얻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재산을 가지고 소작료를 받을 필요성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자기를 설득시키려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뜻을 거절하는 일이었다. <전기>가 이것을 증명한다:


“성녀에 대해 아버지다운 사람을 보여주신 교황 성하 그레고리오 9세는 그녀에게 얼마 정도의 부동산 소유에 대해 양보하도록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설득시키려고 하였다. ··· 그러나 그녀는 꺾을 수 없는 신념으로 그것을 사양하여 어떤 이유로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교황이 그녀에게 ‘서원 때문에 그러신다면 내가 서원ㅇㄹ 풀어 드리겠습니다’하고 반문하자 클라라는 ‘교황성하, 이 세상의 어떤 것 때문에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대해 결코 관면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클라라는 승리하여 교황으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었다. 그리고 성녀는 부드러우면서도 완강하게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이어받은 성스러운 유산을 계속 주장하였고, 마침내 자기가 원했던 대로 완전히 복음적인 회칙을 자매들에게 남기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교황 성하의 권한”을 받아 이루어진 회칙이라도 보호자 추기경이 인준한 회칙으로 족하지 않았고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친히 인준한 회칙을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바로 죽기 전에 회칙의 원문이 동봉된 교황의 칙서를 받은 후에 이 문서에 몇 번이나 친구하면서 기쁨 가운데 자기 영혼을 하느님께 맡겼다.


위에 말한 것처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클라라에 대해 사랑과 함께 존경심을 가졌다. <클라라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레고리오는 성녀의 기도에 큰 믿음이 있었고 몇 번 그 기도의 효과를 체험했다. 그래서 그는 오스띠아의 주교로 있을 때나 그후 교황직에 올랐을 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클라라에게 편지를 써서 기도를 부탁드렸다”. 이 편지 중 두 개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은데, 하나는 우골리노 추기경으로 또 하나는 교황으로 있을 때이다.


아미 성 다미아노를 방문한 것을 기회로 1220년쯤에 쓰여진 <첫째 편지>는 겸손과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다. 1228년에 씌여진 <둘째 편지>는 관상생활을 다루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편지에서 교황은 그들이 받은 소명의 의미를 설명한 후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수많은 비통과 한없는 번민 가운데서 여러분은 나의 유일한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영에 따라 거닐고 삶으로써 가장 좋은 카리스마를 구하도록 노력할 것을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고하며 이 사도적 서한을 통해 명합니다. ··· 그리고 그리스도와 마음이 하나 되셨으니 여러분 기도중에 나를 항상 기억해 주시고 하느님께 손을 들어 높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나를 덕행으로 굳세게 해주시고 나에게 맡겨주신 봉사직을 합당하게 수행할 은총을 허락해 주시기를 끊임없이 청해 주십시오. 이것으로써 하느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천사들이 기뻐하며 나와 나의 통솔에 맡겨진 모든 이가 선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아같이 성 다미아노 수녀원은 시성식의 증언록이 증명하듯이 아씨시의 시민들에게 보호를 보장해 주는 기도의 장소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황과 온교회 성화를 빌며 전구기도를 바치도록 끊임없이 책임지는 곳이었다.


클라라는 이 사명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바울로 사도를 인용하면서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그 적절한 의미에서 바울로 사도의 말을 빌린다면, 나는 그대를 하느님 자신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의 넘어지기 쉬운 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로 여기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유언>에서 한 번 그리고 <축복문>에서 또 한 번 자매들에게 서약한 생활에 충실하도록 격려할 때 교회에 대한 책임을 명심하라고 상기시킨다. 우리가 불충실할 때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에게 손상을 입히는 것이고, 반면에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적인 응답은 지상 교회에 하느님의 축복을 가져다주며 천상 교회에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다(참조: TestCI 22; BenCI 8-10).


첼라노는 <클라라의 전기>에서 그녀가 죽기 전에 인노첸시오 4세의 방문을 받았을 때에 느꼈던 커다란 기쁨을 잘 묘사하고 있다. 교황이 수녀원에 도착하자 곧바로 클라라가 누워 있는 바에 들어가서 손을 친구하도록 내밀자 클라라는 손만이 아니라 발까지도 친구하려고 한다. 이어서 교황에게 모든 죄를 사해 달라고 사죄경을 청한다. 그 후에 모든 이가 자리를 떠난 후 눈을 하늘ㄹ 들어 손을 합장하고 위로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나의 사랑하는 딸들이여, 주님을 찬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오늘 하늘과 땅이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나는 오늘 성체 안에서 지극하신 분을 모셨고 또한 그분의 대리자를 뵙는 은혜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