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소명

재1장 회개의 생활

Margaret K 2017. 12. 18. 21:39

재1장 회개의 생활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의 사명은, 교회 안에서 모든 카리스마적 운동의 사명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단순성에로 돌아가고 다른 이들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가져다주신 생명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크리스천 성소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 속에 삶을 기쁨과 자유와 사랑으로 채우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프란치스칸 삶의 의미와 중심이시다.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 여정


1. 프란치스코는 인간을 형제로 발견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유언>의 시작에 자신이 먼저 걸었던 소명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내가 죄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의 생활을 떠났을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성인은 이와 같이 특별한 은총을 받아 자신의 회개 과정의 체험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체험은 회개자의 전 생애를 비추고 인도하는 법이다. 성 바울로의 개종에서 그 체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그리스도다”라는 소리가 들리는 그것이었다. 이 체험은 바울로 사도로 하여금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하여 종합적이고 신학적인 비전을 이해하도록 만들었고, 딸서 그는 신비체의 지체인 신자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서슴치 않고 전하게 된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을 통해서, 특히 가난과 고통을 몸에 지니는 나병환자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기에 가난하게 탄생하시고 고통 중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형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전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타고난 연민과 크리스천 자비심에 이끌려 불쌍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도와주기를 좋아하였다. 첼라노에 의하면, 프란치스코가 상점에서 옷감 장사로 바쁘던 어느 날 거지 한 사람이 와서 “주님의 이름으로” 애긍을 청하자 프란치스코는 빈손으로 그를 돌려보냈는데, 나중에 자기 행동을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 거지의 청원을 거절했다는 것보다도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청원을 거절하였음에 가책을 느낀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출세하고 이름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기사생활을 꿈꾸면서, 기사 복장을 하고 브리에네의 구알티에로 백작의 기사들과 함께 아뿔리아의 전쟁터로 나가던 어느 날 기사 한 사람이 헌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성인은 즉시 자기의 새 복장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옷과 바꾸었다. 얼마 후에 꿈속에서 전추장비로 가득 찬 왕궁의 꿈을 꾸었고,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주인을 섬기는 것이 좋으냐, 종을 섬기는 것이 좋으냐?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 아씨시로 돌아가라.”


아씨시에 돌아온 후 변화가 일어났다: 쾌락생활에 싫증을 느끼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그들과 함께 식탁에 있을 때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는 동정과 애긍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성인은 애긍을 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행동이 별뜻이 없음을 깨달았다. 가문과 돈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생기는 이상, 애긍을 하는 것이 복음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주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내주고 가난을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인삭하게 되어 가난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고, 누더기 옷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애긍을 청할 때 당하는 부끄러움과 멸시가 무엇인가를 자기 몸에 체험하기를 원했다.


로마로 순례를 가던 어느 날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베드로 대 성당 문 앞에서 한 거지에게 자기의 옷을 주고 거지의 누더기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거지들 가운데 끼어 불어로 구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가난이 무엇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직접 체험하였다. 가난이란 천재와 낮은 자리, 사회적 신분의 박탈인 동시에 도덕적이며 신체적인 타락이라는 것을 체험하였다.


다음 단계로서 은총의 인도를 받아 프란치스코의 회개생활에서 결정적인 체험이 된 순간은 나병환자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시련이었다. 민감한 성격과 기질 때문에 나병환자의 부패된 모습을 보는 것조차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 “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이 어려운 시련을 이겨야만 했다.


어느날 아씨시의 벌판, 숲속에서 말을 타고 가던 프란치스코는 자기에게 손을 내미는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신속히 말에서 내려와 먼저 그의 손에 애긍의 돈을 내놓고 다음에 그의 손에 입맞추었다. 그후부터는 나병환자가 자기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나병환자촌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들과 함께 지내기를 좋아했다.


프란치스코의 개인적 추억을 가장 충실히 모은 <세 동료의 전기>는 지금까지 나병환자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았던 이유, 즉 그의 죄스러운 생활을 제사한 후, 그의 회개 과정과 관계되는 다음의 것을 덧붙인다. “나병환자들에 대한 그의 방문들은 그를 한층 더 선한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2.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형제로 발견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중세기의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인 나병환자를 통하여 프란치스코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이제부터 프란치스코는 “크리스천 형제들”안에서 그리스도를 반가이 맞이하려 나갔다. 그는 고통을 견디어 내신 주님의 생생한 모습을 몸에 지닌 나병환자들을 특별히 “크리스천 형제”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나병환자들에 대한 성인의 동정심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처지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성인이 <유언> 시작에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은 회개에로 인도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를 “나병환자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이때는 프란치스코의 마음이 완전히 변했다”고 첼라노의 토마스 전기 작가가 증언하고 있다. 먼저 가난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신 프란치스코는 이제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을 “형제”로 알아모실 수 있었다. 이 두 사건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다음에 세속을 떠나기 위해서 자기 아버지와의 결별이 있었다. 주교 앞에서 나체로 자신의 옷과 돈을 아버지께 돌려줌으로써 가족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나병환자들을 돌봐주고 성당을 수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여겼던 돈마저 모두 버리고 오직 하늘의 아버지께 신뢰를 두면서 새 삶의 모험에 자기 자신을 던졌다.


첼라노는 이때의 프란치스코를, 마음이 자유로우며 기쁨에 넘쳐 아씨시의 벌판을 돌아다니면서 불어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 후 일감을 구하려 분도회 수도원을 찾아가 거기서 얼마 동안 고생하였으며, 얼마 후에 굽비오에 사는 친구에게서 입을 못을 구했다. 그리고 다시 “나환자들에게 가서 하느님을 위해 성의를 다하여 시중들면서 함께 살았고, 온갖 썩은 곳을 씻어주며 상처와 고름도 깨끗이 닦아주었다.‘


나병환자들과 보냈던 기간은 프란치스코의 수련기였다. 그리고 그분의 첫 제자들의 수련기도 마찬가지였다. 궁핍한 자 가운데서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을 사부님은 먼저 체험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체험을 자기의 제자들도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을 나병환자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가 “성사”처럼 현존하신다는 이 시실은 사부님의 전 생애를 통하여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첼라노에 의하면, “그가 궁핍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든지, 또는 그것이 어떠한 빈곤이든지간에 프란치스코는 그 궁핍을 즉시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연결시켰다. 그래서 그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가난한 부인의 아들을 보았고”.. 어느 형제에게 “오, 형제여, 형제가 가난한 사람을 볼 때 거기에는 주님과 주님의 가난한 어머니의 모습이 형제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병든 사람에게서는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떠맡으신 병약한 모습을 생각하시오".


회개의 과정에서 형제인 가난한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가는 은총의 길은 성 프란치스코의 경우 외에도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이사 58,1-12 참조).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마태 25,31-46 참조).



3.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생활양식”으로 발견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의 셋째 과정은 고독과 기도를 통하여 정화가 이루어진 긴 기다림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고독함을 체험하면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였고 모든 이로부터 정신 나간 불쌍한 자로 여겨졌다. 정식으로 “회개자들”의 집단에 속하고 “회개자”의 옷을 입었지만, 어떤 사제나 어떤 수도원 지도를 받으면서 특별한 생활양식을 따랐던 당대의 회개자들의 집단에 입적하기를 원치 않았을 뿐더러 다른 누구의 조언을 청하거나 누구와 상의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이는 하느님 친히 자기를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세 동료의 전기>가 증언해 주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주님께 자기의 걸음을 인도하여 주실 것을 애원하였다. 그는 실은 아무에게도 자기의 비밀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고 자기의 걸음을 인도하기 시작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어떤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아씨시의 주교에게 조언을 청하긴 하였다.”


성인의 삶이 전적으로 전환된 이 기간은 약 2년 반이 걸렸고 내적인 고통이 매우 심한 시기였다.


“그는 자기가 체험한 충격의 결실을 보기까지는 안식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내적으로 큰 아픔과 당혹감을 겪었다. 서로 엇갈린 생각이 그 머리에 귀찮게 떠오르긴 하였다. 그 마음에는 신성한 불이 타올라 외적으로 그 열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과거에 큰 죄를 지었음을 몹시 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악행에 즐거움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장래의 악행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아직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회개자의 상태가 잘 묘사되고 있다. 회개자는 이때 자기 삼에 무엇이 끝장이 났고, 하느님이 지기 삶에서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으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으나, 아직도 갈 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즉,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밀려가면서 하느님의 작용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상태이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내맡긴 사실을 프란치스코 친히 형제회의 초기 역사를 기록하는 <유언>에서 확인한다


“그리고 주님이 몇몇 형제들을 나에게 주신 후 아무도 내가 해야 할 것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Test 14).


결정적으로 계시를 받기 전에도, 그의 준비의 과정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성 다미아노의 작은 성당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리자, 그 명을 기사다운 재빠른 행동으로 실행하려는 사건이 그렇다. 프란치스코는 즉시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옷 창고에서 가장 값진 천을 꺼내고 말에 실은 후에 폴리그노에서 옷과 말을 팔아버렸다. 그리고 아씨시에 돌아와서 성 다미아노 성당 담당 사제를 찾아가 성당을 수리할 돈을 갖다주었다. 그러나 그 사제는, 착한 신자로서 행동하는 프란치스코의 정성을 무시한 채 이상하게도 그 돈을 거절하였다.


젊은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거절을, 주님께서 자기의 인간적인 재산을 거절하시면서 재산이 아니라 자기의 봉헌을 원하신다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돈주머니를 창 안으로 던지면서 돈을 먼지인 양 저주하였다. 그는 실은 이 “돈 전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성당을 수리하는 데 사용되었으면”하고 바랐지만, 이제는 가난한 자의 참된 형제가 되려면 가난한 자와 같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의 업적은 돈이 아니라 자신의 봉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육적 아버지 손에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하고 얼마 동안 기쁨중에 가난을 살아가는 고생스러운 체험을 거친 후 아씨시에 돌아와서 자기 손으로 그리스도의 명을 실행하기에 착수했다. 그러기 위해 미장이의 기술을 배우고, 집집마다 건축 자료를 동냥하며 가난한 이들과 애긍 물을 나누면서 그들의 협조를 바라야만 했다. 이렇게 돈 없이도 성당을 하나뿐만 아니라 세 개까지 수리할 수 있었고, 새로운 계시를 받지 않았던들 계속 성당 수리에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실은 성당을 수리하면서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바친 봉사는 장래에 거룩한 어머니 교회 안에서 수행할 위대한 사명을 상징하는 훈련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후로는 돈이 프란치스코의 삶에 아무 의미가 없었고 나중에 회칙을 쓸 때 형제들의 생활과 활동의 수단에 있어 돈을 제외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에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세 번째로 수리한 뽀르찌웅꿀라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는 중 “파견”의 복음 말씀을 듣고 새로운 부르심을 받았다. 날짜는 아마 1208년 4월 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 아니면 같은 해 10월 18일, 성 루가 복음사가의 축일이었다.


이날 들은 복음은 루가 복음 10,1-9에 나오는 파견의 복음으로서, 주께서 제자들을 하늘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파견하시면서 양과 같이 양순하고, 돈이나 자루 없이 다니고,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주는 음식을 먹고, 병든 이들을 고쳐주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미사가 끝나자 사제에게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날은 프란치스코에게 긴긴 밤을 지낸 후에 빛나는 새 아침이 밝아오는 듯했다. 첼라노가 이것을 증언한다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이어서 그는 지체 없이 지금까지 회개생활의 공적인 표시로 입었던 회개자의 옷을 벗어버리고 띠로 매는 간단한 투니카를 입고 맨발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회두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복음적인 소명을 발견하고 나서 그 첫째 결실로,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관상의 비밀 중에 자기에게 밝혀주신 모든 신비를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긴급한 요청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만민이 꼭 알아야 할 “좋은 소식을” 발견하여 간직하고 있듯이 “큰 영광과 기쁨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또한 이제는 드디어 자기가 살아갈 삶과 타인들과 나누어야 할 삶을 발견하게 된다. 실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에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생활양식을 택할 마음으로”최초의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프란치스코는 예상도 못한 채 창설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 뜻의 새로운 표시에 놀라지 않았고, 자기를 찾아온 최초의 제자인 뀐따발레(Quintavale)의 베르나르도를 포옹하면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첼라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장한 사람이 와서 회두한 것을 몹시 기뻐하였으니, 이는 필요한 동료와 충실한 친구를 보내주심으로써 주께서 염려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격상 우정이 그립고 사교성이 뛰어난 그는 그렇게도 오랜 고독을 받아들여야 했으니, 동료와 친구를 만난 이때 얼마나 기뻤을까? 생애에 마지막에 <유언>을 쓰면서 이 순간을 회상해 본다: “주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한번도 영적인 우월감을 느끼는 지도자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에게 형제들을 자기 제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복음의 모험을 살아가는 동료들이었다. 단지 그는 처음부터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생황양식을 택하도록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를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베르나르도와 두 번쩨로 찾아온 까띠니(Cattani)의 베드로를 데리고 성 니꼴라오 성당을 찾아가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한 후, 프란치스코는 세 번이나 복음서를 폈다. 그때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요청되는 완전한 포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기사를 만났다.


“복음서를 매번 펼 때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오래 전부터 품었던 이상을 주께서 확인해 주신다는 것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세 번째 확인이 알려지자 그는 베르나르도와 베드로에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우리의 생활과 회칙이고, 이것이 우리와 합치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의 생활과 회칙입니다. 그러므로 가서 들은 것을 실행합시다.“



성녀클라라의 회개여정


파바로네(Favarone)와 클라라는 사회적, 가정적인 배경이 프란치스코와 다르지만, 하느님이 불러주신 회개 여정과 삶의 소명을 발견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어서는 성인이 먼저 걸으신 길과 비슷한 점이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클라라가 하느님의 계획에 응답하기 위해 이미 복음적인 길을 따라 가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이신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경험 많은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말씀에서 안전한 본보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회에는 클라라도 프란치스코와 똑같이 회두와 회개의 생활, 초창기에 겪었던 어려움과 망설임, 주님이 자매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 성인이 먼저 밟아 가신 생활양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녀는 또한 “하느님과 사부 프란치스코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가난과 겸손 안에서 따르는 서약을 강하게 선언한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유언>에서 자기 경험을 남겨주었다:

“지극히 복되신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교훈으로 내가 회개하도록 지극히 높으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비와 은총을 통해 황송하옵게도 나의 마음을 비추어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프란치스코께서 회개하시고 조금 지난 후, 사부님의 경탄할 만한 생활과 교훈을 통해 주님이 우리들에게 은총의 빛을 비추심에 따라, 내가 회개하고 조금 지난 후, 나는 주님이 나에게 주신 몇몇 자매들과 함께 자원하여 사부님께 순종을 약속했습니다.


같은 <유언>에서 클라라는 자신이 회개하기 전에 “세속의 헛됨 속에 있었다”고 말하지만 프란치스코처럼 “죄중에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맑은 마음을 지니고 과장된 말을 싫어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사실 그대로 큰 죄녀와 같이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녀에 대한 <시성 증언록>과 <전기>를 일어보면 클라라가 “세속의 헛됨 속에” 빠진 일마저도 없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오르똘라나(Ortolana)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어릴 때부터 크리스천 신앙과 신심 깊은 가족적인 환경 속에 자란 클라라는 “거룩한 사람의 자극을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세속의 것을 시든 꽃과 같이 멸시할 것으로 여겼다. 성령의 빛이 그녀를 비추어 무가치한 것들을 덧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인도하였다”.


클라라에게는 프란치스코와 달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느끼기에 방해가 되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집에 항상 푸짐했던 식탁에서 음식 일부를 챙겨 몰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술법을 썼다.


주교 앞에서 재산을 포기하는 젊은 프란치스코의 어리석은 행동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 아씨시에 있었다면, 이는 클라라뿐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 몇이 뽀르찌웅꿀라의 성모 마리아의 성당을 수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나이가 열세 살쯤 된 클라라는, 서로 비밀이 없는 구엘푸치오(Guelfuccio)의 보나에게 돈을 주면서 “고기를 사 먹을 수 있게” 그들에게 전하라고 부탁하였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프란치스코와 그와 함께 성당 수리에 협력하는 거지들이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아마 이때 처음으로 프란치스코가 파바로네의 딸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1210년에 클라라의 사촌이 되는 루피노가 형제회에 입회하고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의 집 옆에 있는 대성당에서 설교하게 될 때 서로 알게 되면서 상호 영적인 관심과 친근감이 한층 더 커졌다.


얼마 있다가, 1212년쯤에 프란치스코는 그녀를 “세속에서 때어낼”것을 결심하고 서로 비밀리에 만나기 시작했다. 이 비밀 만남에서 프란치스코는 “세속을 멸시하도록”클라라에게 권고하였다. 귀족 가문의 젊은 미혼녀가 부모의 허락 없이 남자를 만난다는 것과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만난다는 행동이 집안 어른들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비밀 만남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람은 클라라였던 것 같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서 즉시 그를 만나고 그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프란치스코의 원의도 적지 않았다.” <성녀 클라라의 시성식 조사 과정>의 증인으로 증언한 구엘푸치오의 보나가 이것을 증명하였다.


“증인이 되는 보나 자신이 성 프란치스코를 만나려고 간 클라라를 몇 번 동반하고, 친척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갔다고 증언하였다.


성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에게 무슨 말을 들려주었느냐는 질문에 보나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라고 늘 권고하였고, 필립보 형제도 똑같이 권고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 증인은 또한 그녀가 그들의 말을 만족스럽게 들었고 자기에게 들려준 유익한 것에 동의하였다고 증언하였다.“


프란치스코의 동료는 그의 최초의 제자인 필립보 롱고였다.


이러한 담화로 인해 날로 마음이 열렬해진 클라라는 "천상적 불에 불타 지상적 허영심을 결정적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고 이제부터는 어떤 세속적인 매혹도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세속의 호화로움이나 장식품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증을 느껴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세상의 매혹적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다.“


이와같이 프란치스코는 늘 형제들에게 가르친 바대로, “주님의 영을”받아들이고 그의 작용에 마음을 열기 위해 요구되는 헌신적인 마음을 클라라 안에서 발견하였다. 그녀는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을”가지고 있었다.


클라라의 집에서 혼례의 이야기가 있다는 소문이 프란치스코의 귀에 들어오자 그는 서둘 수밖에 없었고, 클라라를 위해 밤에 몰래 집에서 도망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클라라도 그의 사회적인 품위에 어울리지않는 이러한 “미친 짓에”망설임 없이 동의하였다.


마침내 클라라의 가출은 1212년 3월 18일-19일 밤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철야기도를 하면서 촛불을 손에 들고 뽀르찌웅꿀라에서 그녀를 환영하였다” 이 성당의 성모의 제대 앞에서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에게 순명을 약속하였고 그는 곧이어 세상의 포기와 하느님께 봉헌의 표시로 직접 클라라의 머리를 깎아버렸다.


“그리고 복되신 프란치스코께서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궁핍도 고생도 시련도 수치도 세속의 멸시도 그 어느 것도 피라지 않고 오히려 ··· 그 모든 것들을 더없는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셨을 때,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 대한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직접 혹은 당신의 수도회를 통해 애정 어린 보살핌과 특별한 관심을 항상 가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 주님과 지극히 복되신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의 뜻에 따라 성 다이아노 성당에 머물려고 그리로 갔습니다.“



회개를 살고 선포하다


리보또르또(Rivotorto)의 형제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위해 “아씨시의 회개자”라는 명칭을 택하였고 누가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어볼 때 자신들을 그렇게 소개했다. 얼마 후에 그들은 다른 회개자들의 집단과 구분 짓는 “작은 형제회”라는 더 복음적인 색조를 띠는 명칭으로 바꿨지만, 회개 조건이 그들의 복음적인 삶의 근본적인 양식으로 남았다.


프란치스코 자주 사용하는 “회개를 산다”는 표현은 성서적인 메타노이아(metanoia)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믿는 자에게 사람이 만나게 되는 삶의 모든 요건은 하느님의 구원적인 계획과 이에 대한 각자의 응답을 통해 조명된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의 시각에 의하면 사람들은 두 개의 부류에 속한다. 즉,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리고 “회개하는 이들”의 집단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들은 먼저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집단에 속했던 것이다. 이것과 동시에 회개 상태에 항구한다는 것도 하느님의 선물임을 성인은 잘 알고 있었다.


회개를 위한 소명은 작은 형제의 삶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고, 어떤 장소적인 상황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의 선택으로서 세상 어디서든지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든 하느님의 축복 속에 회개생활을 하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피하십시오.”


초기의 진실한 회개와 계속 새로워지며 유지되는 회개의 결심은 형제적 생활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실은 작은 형제에게 자기 안에서 계속적으로 노예적인 욕심과 교만과 소유 욕망을 발견하여 이것들을 죽이도록 자극해 주는 긴장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형제들을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프란치스코의 개인적인 고행주의와 창립자로서의 그의 교육 방법이 바로 여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자아와 자아의 경향, 즉 육과 주님의 영 사이의 상위점을 분명히 구분지었다.


회개의 자세란 자신의 한계성과 나약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것이라곤 악습과 죄악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가난한 자로 여기고 “하느님께 모든 좋은 것을 돌려드리며 영혼이나 육신의 온갖 괴로움과 고생을 인내로서 견디고”박해에 인내함을 전제로 한다(참조 RnB 17). 이렇게 함으로써 깨끗한 마음을 지니게 된 사람은 하느님을 관상하기에 준비되어 있고 내적 가난과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성”과 “참된 기쁨”을 이루게 된다. 


이런 삶은 증거와 메시지의 힘을 동반하면서 보는 사람에게 자극이 되고 회개 중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 프란치스코가 “세속을 떠났을 때”바로 이런 현상이 일러났고 그의 생활양식도 같은 효과를 냈다. <세 동료의 전기>는 그들의 삶이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킨 반응을 여러번 강조한다: 어떤 이들은 미친 사람으로, 어떤 이들은 수다쟁이나 바보로 여기고, 그리고 그들을 강도나 깡패로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가까이 보는 사람들은 먼저 놀라움에 빠지다가 다음은 그들을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프란치스칸 설교는 이와같이 단순히 회개를 전하는 운동으로 발생했다. 그들이 여덟 명이 되었을 때,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모든 형제들을 자기에게 불러 모아 그들에게 하늘나라와 세상의 질시에 대하여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과 육신을 굴복시키는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는 둘씩 네 무리로 나누고 난 다음 그들에게 말하였다: "자,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 둘씩 짝지어 세상 곳곳으로 떠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회개로 죄를 용서받도록 하십시오.“


창립자 프란치스코는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자기들의 <회칙>을 인준한 후 해주신 말씀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형제들이여, 하느님과 함께 떠나십시오. 주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설교하시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는 서로 갈릴 수 없는 두 개의 요소, 즉 평화와 회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것들은 구원적 이면이 되는 평화와 화해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가장 용감한 기사로서 도시와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간적 지혜에서 나오는 그럴듯한 말로써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지식과 힘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평화를 설교하였으며 죄를 없애기 위하여 구원과 회개를 가르쳤다.


회개자인 프란치스코는 그의 생활과 설교를 통해서 사회 모든 계층에서 비상한 깨우침을 일으켰다. 그리고 회개에로 초대하는 프란치스칸 요청에서 가장 생동적인 영향을 받은 집단 중에서 누구보다도, 당대에 널리 보급된 이단적인 평신도 운동들 때문에 사라지기 시작한, 회개자들의 집단들이었다. 역사가 증명하는바, 프란치스코는 이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정이나 일자리나 사회적인 위치를 떠나지 않고도 작은 형제들의 선택과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의 선택을 모범으로 삼아 복음적인 생활의 흐름을 타려고 하였다. 이렇게 회개는 사람에게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의 크리스천 투신에 있어 새로운 형태를 형성하여 프란치스칸 재속회가 탄생하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