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후기

Margaret K 2017. 12. 18. 21:35

후기


“하늘로 가는 모든 길은 하늘이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중년기로 다가가면서 프란치스코의 어떤 부분이 아직도 나에게 그렇게 매력적인지 다시 한번 표현하려고 한다. 여기서의 나의 초점은 내가 젊었을 때에 매력을 느낀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즉 하느님의 집을 수리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난 프란치스코, 대왕의 사신인 듯 세상의 거리를 걸으면서 말로보다도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프란치스코, 회개를 전하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다미에타에서 술탄의 진영에 담당하게 다다른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아니다.

젊은 프란치스코가 아직 나를 매혹시키기는 하지만 내 나이쯤의 프란치스코, 그의 꿈이 사라져 가는 것을, 형제들의 타협에 의해 그의 이상이 부식되는 것을, 건강이 무너지고 자매인 죽음이 아시시 아래 평원에 있는 그의 오막살이집에 접근해 오는 것을 보고 있는 프란치스코가 나를 더욱 깊이 매혹시킨다.


그의 얼굴에는 가면이 없지만,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땅, 물, 공기 그리고 불은 그의 깊은 주름살 속에, 수염이 묻은 땀 속에, 흐트러진 머리칼 속에, 눈의 핏줄 속에 흔적을 남겼다. 그의 얼굴은 원시인의 얼굴 같다. 자신의 영혼의 거울 속에서 또한 그 거울을 통하여 창조세계에 몰입했던 사람의 얼굴이다. 그리고 거울을 통하여 본 다음 그는 자신과 다른 모든 피조물 안의 반대되는 모습들을 화해시키는 것을 배운다.


그는 우주의 요소들을 자신의 형제와 자매로서 포옹하는 것을 배운다: 형제인 바람과 자매인 물, 형제인 불과 자매인 땅을, 그는 이 모든 것을 나병환자들을 통하여, 그가 거울 안에서 첫 번째로 알아본 사람들인 나환자들에게서 배운다.


40대 초엽의 이 프란치스코에게 가까이 나를 끌어당긴 것은 현실에 대해 그가 가졌던 전적인 성사적인 비전이다. 아마 그런 비전이 나 자신의 삶을 지금 구원하고 일상의 지루한 생활을, 우리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단조로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핵 시대가 그 어떤 다른 시기 속에서도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어떤 성사적 관점뿐이다.



이 성사적 비전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이 내 꿈속의 큰 바위 사탕산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큰 바위 사탕산을 만드는 것 같은, 노래에 나오는 농부의 태도이다. 그 방랑자는 나에게 큰 바위 사탕산이 단순히 목적지만이 아니라 그곳에 가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해준다.


오로지 성사적 비전만이 그곳에 도달하는 천국을 만들 수 있다. 그 비전은 모든 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본다. 즉, 하느님 현존의 징표로서 보는 것이다. 성사적인 것은 하느님께로 가는 것과 도달을 한데 통합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천국으로 가는 길속에 천국이 통합되지 않는 삶이라면, 우리의 매일매일 일상과 영적인 삶 사이에는 일종의 정신분열 같은 갈라짐이 발생한다.


만일 천국에 가기 위하여 항상 일을 하고 있다면, 나는 나의 마지막 종착점을 사랑스럽게 포옹한 만큼 거기에 가는 과정을 충분히 끌어안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에게 떠오르는 영상은 이른 아침의 조깅하는 사람이다. 단순히 몸을 단련하기 위하여서만 아침에 일어나 조깅하지만, 때때로 황홀한 리듬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우주와 함께 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의 운동은 삶과의 조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조화 위에 내가 하루 종일 건강에 좋지 않은 심리적 압박과 행동에 눌리게 된다면, 결국 신체적 단련은 내 삶과 격리된 한 부분이 되며 하루 종일 달리기의 자연적인 리듬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 조깅의 이미지를 좋아하는데, 몸과 너무나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몸에서 성사적인 영성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내 몸에 편안함을 느끼고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전체성을, 하느님과의 일치(영성의 의미이다)를 지향하는 것은 쉽사리 몸으로부터의 도피가 되고 육체와 영혼을 부자유스럽게 갈라놓는 것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인다움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 모습인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인간이 되셨고, 당신의 몸 안에서 몸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며, 무덤에서 살아나시어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으로 나타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제자들이 그들 삶의 신체적인 차원을 거부함으로써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을 보시면 실망하실 것이다. 나는 통합적인 인간이고, 내 영혼만큼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완전한 인간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몸은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사이다.


나는 모든 영성이 우리 각자 안에서 육체와 영혼을 한데 통합시키는 하느님 은총의 작업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육체와 영혼이 실제에서 그런 것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통합될 때에, 그리고 그러한 통합을 우리가 포옹하고 사랑할 때에, 우리는 제대로 가는 길에 들어선 셈이고 천국으로 가는 길은 거기에 도착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길이 된다.


하느님의 이 위대한 통합의 일은 우리의 편견, 우리 자신에 대한 집념 때문에 천천히 진행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는 것은 오랫동안 습득된 자기혐오가 우리의 바깥 모습, 즉 몸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마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을 내적인 자아의 바깥 모습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분리이다. 나는 나의 몸이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포옹하려면 나는 내 몸을 포옹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체와 영혼은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학교수가 한번은 학생들에게 구원에 관한 글을 쓰도록 요구했고, 그중 한 학생이 “완전한” 논문을 제출했다. 한 장의 앞과 뒤에 그는 거울 앞에 서 있는 똑같은 자신의 그림을 그렸다. 앞면 아래에 작힌 글은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였고, 뒷면 아래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적여 있었다. 이 6개의 단어, 간결한 이 논문이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다! 나는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바라보며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나는 당신이 보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다시 한번 보고 “나도 내가 보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전체적인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니길 바라지만, 난 그것이 악이라고 확신한다. 악은 갈라놓으며, 은총은 통합한다. 나는 악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 속에 태어났다. 악은 이미 세상에 있고 그래서 분열이 오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에, 육체와 영혼 사이에 갈라짐이 존재한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 분리, 분열을 치유하고, 한데 모으며, 일치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화해의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서서히 점차적으로 그분 안에 통합되도록 사랑의 손으로 일하시는 것을 보기보다는 분리를, 악을 보는 것이 더 쉽다. 내가 의미하는 것의 한 예는 아마도 치명적인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분명히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가는 악의 극적인 경우를 겪고 있다. 나는 몸에 일어나고 있는 그 현상을 보면서 내 몸을 증오하기 시작할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마지막 통합으로 보며 몸의 고통, 죽어감을 포옹할 수도 있다. 죽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방식은 결국 그들이 삶에 반응했던 방식들, 작은 죽음을 늘 포함하고 있었던 삶의 그런 순간들, 더 나아간 전체성, 더 나아간 사랑을 이루었던 작은 놓음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종교는 나의 온 영혼과 온 정신과 온 몸을 다해 한 전체적인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영혼, 정신, 그리고 몸은 “작은 삼위일체”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치이며 한 인격체이다. 내가 하나일 때에만 다른 이들을 적절하게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갈라져 있다면 다른 이들에 대한 나의 사랑도 갈라질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영혼을 사랑하고 내 몸을 미워한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포옹할 때 당신을 전혀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비실제적인 어떤 것, 당신 안에 있는 몸과 분리되어 있는 선한 영혼만을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지닌 “나쁜” 몸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 같은 당신의 영혼만을 사랑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 내가 당신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통합적인 전체로서의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거룩함이란 전체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다. 아무도 완전히 전체적일 수 없다. 다만 하느님과 함께 전체성을 향하여 애쓰는 것은 삶의 거대한 모험이다. 이러한 애씀은 당신의 삶을 올바른 것에  쓰는 것이다. 전체성은 당신이 자긴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할 방향이다. 그리고 전체성은 단순히 당신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하느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성취된다. 그렇다, 그것은 하느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죄를 무너뜨리시고 죽음을 이기셨다; 그분은 당신 안에 있는 분열을 치유하시고 계신다.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관찰은 영성에 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쓰여진 대부분 서적에 반영되고 있다. 그 어떤 책도 영적인 회개의 근본 요소, 즉 통회, 이탈, 기도, 보속, 자아 포기, 사랑의 실천등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강조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영성과 매우 다르다.


 극기는 내 자신을 벌하거나 기도 시간을 자아분석의 시간으로 만들거나 육체의 이기심을 극복하는데 있어 큰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극기는 이제 자아로부터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고 그것을 내려놓으며 내 삶에 있어 하느님이 그분의 일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으며 매일같이 나를 구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오늘날의 영성은 나와 타인을 사랑스럽게 포옹하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아 포옹에 포기가 항상 내포되어 있지만, 이러한 포기보다 포옹함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회심, 혹은 자아를 놓는 것은 진정한 극기를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구원을 완전하게 책임지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생각과 열정마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다스리고 싶어한다. 나는 승복하기보다 다스리고자 한다. 그런데 하느님이 일하시도록 하고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것 그리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은 도미니칸 Matthew Fox 신부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갖고 있는 “천국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성을 두려워한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닮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진실인가! 나 자신의 선함을 믿고, 선이 악보다 더 강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었으므로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신앙이 요구되는가! 삶은 살아 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을 받을 만큼 귀중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도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의 진실은 수년 전 불란서의 디죵에서 나에게 매우 극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한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머리를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이 필사적으로 문을 열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웨이터가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휠체어를 탄 한 젊은 청년이 밀고 들어왔다. 그는 다리가 불편했고 볼품이 없었으며, 그를 밀고 있었던 사람은 그와 똑같은 여건 속에 있는 한 젊은 여성이었다.


웨이터는 그들을 식당 한 가운데에 있는 식탁에 앉게 했다. 그들은 당황해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실상 그들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미소를 머금고 웃었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그들은 신혼여행 중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 모두는 그 어떤 개인도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모든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내 삶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아름답다.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나 자신도 의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런 일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각자에게 하신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영성 작가들은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상은 세계에 대해 엄청나게 발전된 긍정적 관점을 갖고 있다. 토마스 머튼의 경우에도 초기에서 후기로 감에 따라 저서에 그 변화가 현저하게 눈에 띈다. 첫 번째 책인 「칠층산 이야기」와 「죄책감이 있는 방관자의 추측」을 보면 두 책 사이에 놀랄만한 변화를 볼 수 있다.


「칠층산 이야기」의 분위기는 머튼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새로운 에덴동산 같은 게세마니 수도원으로 떠나고 있는 분위기이다. “저기 바깥”에 있는 세계는 나쁘고 “영적인 고독”속의 세계는 거룩하다. 이것은 다시 한번 잘못된 분리이다. 「죄책감이 있는 방관자의 추측」에서 더 나이가 들은 머튼은 초기의 균형이 잡히지 않은 관점을 인정한다. 이제 육체와 정신은 합쳐지고 있다. 더 나이가 들고 더 현명해진 머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루이스빌의 4번 가의 월넛가 모퉁이에 있는 쇼핑 구역 한가운데에서 나는 갑자기 내가 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그들이 나의 사람들이고 나는 그들의 사람이며, 비록 우리가 매우 낮선 사람들이지만 서로가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마치 혼자 떨어져서 꿈을 꾸고 있다가 깨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며, 특별한 세계의 가짜 자기 고립으로부터, 이탈과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세계로부터 깨어나는 것과 같았다. 따로 떨어져서 거룩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망상이었으며 꿈과 같은 것이었다 ....... 비록 “세상 바깥”에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다른 모든 사람처럼 똑같은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 세상은 폭탄의 세상이며, 인종 증오의 세계, 기술의 세계, 매스 미디어의 세계, 대기업, 혁명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다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다른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도 하느님께 속한다. 우리는 다만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 뿐이며, 이러한 의식에 대한 공언을 하게 된 것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언 때문에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거나 혹은 더 나은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생각은 너무나 불합리하다.“


머튼은 세상이 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나 편해져서 “크게 웃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고 쓴다.


결론으로, 나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돌아가고자 한다. 오상을 받기 전에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몸에 매우 엄격했다. 그는 굶었고 엄격한 속죄의 형벌을 가했으며 신체 지침의 극한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라 베르나 산에서 주님을 만나고 오상을 받은 다음에는 몸을 벌준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기 시작했다. 전에 나병환자를 포옹했던 것처럼 자신의 몸을 포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마침내 주님을 만지고 그분이 우리를 만지시도록 허용하게 되면, 우리는 전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면 프란치스코가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쓴 것처럼, “전에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에 영혼에 단맛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스럽고 거룩한 만짐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는 보잘것없는 벌레”라는 태도로부터 “나는 아름답고 선한 사람”이라는 태도로 옮겨간다. 그리고 자기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러한 새로운 태도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날에 천국에 가는 대신, 그곳으로 가는 과정 자체가 천국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회심 중에도 우리의 삶이 이미 축제가 된다.


확실히 우리 현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이 걱정하듯이 영성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영적인 회심과 성장이라는 전통적이고 거듭 시험되는 요소들을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만짐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깨달음으로써 나오는 기쁨과 축하 속에 융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지는 모든 것 속에서 또한 우리를 만지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는 것은 성사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며, 세계에 대한 성사적인 비전을 갖는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우리에게 주는 매력은 그가 바로 그러한 비전을 구체화했다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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