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34 안으로 가는 여정

Margaret K 2017. 12. 18. 21:35

34

안으로 가는 여정


프란치스코가 옷을 벗어버리고 가난의 서원을 했다하여 누가 그를 가엾은 사람으로 여길 수 있을까?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빵 대신 돌을 청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 속에서 삶으로써 그는 기적을 성취하는 힘을 얻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에 주는 기쁨을 솟아오르게 했으며 그리고 문학사상 가장 탁월하고 단순하며 가장 우아한 감사의 노래인 “태양의 찬가”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냥 지나가게 하고 그냥 존재하게 놓아두는 것!... 존재하는 것은 참다운 의미에서 타오르는 것이며, 어떤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통하여 가능할 것이다.

-헨리 밀러-


모든 여정 중에 가장 어려운 길은 안으로 가는 여정이다. 그것은 우리를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밑바탕을 무시하는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여정이다. 이 여정은 헨리 밀러의 말대로 참다운 의미에서 타오르는 것이며, 안에 있는 타오르는 불 때문에 우리 바깥에 있는 모든 여분의 것들을 태워버리는 여정이다.


참으로 내적인 사람은 우주의 중심에서 타오르며 서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이 불을 견디지 않는다면 우리가 보존하려고 애쓰는 모든 것은 모든 존재의 중심에서 산산조각 나게 하는, 거부당한 수많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불에 의해 소모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가 타버리기를 거절하고 서로를 위해 고통 받기를 거절한다면, 우리의 집단적인 죄책감은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서 마침내 실제로는 우리 마음 안에 있고 그 불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는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서로를 파괴하는 것을 끝날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불이나 안에서 타오르는 불만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선택이 이처럼 선명해 보인 적은 없다. 언제나 인류 역사와 사건을 볼 때 그것은 늘 그래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언제나 탈출할 자리를 찾아왔던 바로 그 지구를 파괴시킬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악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대한 불을 피하기 위하여 안으로 향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2천년기의 시작에 마음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 여정은 불타오르고 또한 태워버리는 여정이며,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우리가 하도록 초대했던 여정이며 프란치스코 성인이 1천년기의 시작에서 아직도 유효하다고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던 여정이다. 그리고 이제 핵폭탄은 결정적이며 타협하지 않는 전령이 되어 우리 모두가 안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선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우리의 여정이 가져올 극단적인 것들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안으로부터의 불에서 물질이 주는 안전으로 도망가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물질을 파괴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킨다. 물질 자체는 그것의 핵심에 증오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화해만이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불을 담고 있다. 밀 씨를 자라게 하는 똑같은 불에서 폭탄이 나온다. 밀은 유기적이며 사랑처럼 공손하다; 폭탄은 기계적이며 신속하고 미움처럼 완고하다. 밀은 우리가 그것을 놓을 때 그리고 존재하도록 허용할 때 자라난다. 우리가 강요할 때에 밀은 점차적으로 폭발한다.


모든 것을 지나가게 두고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늘 마음속에 연기 없는 타오름, 답답함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타오름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타오르는 것이며 그 타오름은 적극적이며 동시에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보기 위하여 안으로의 여정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잠재적인 불을 태워버리기 위하여 폭탄으로 가득 찬 바깥의 불로써 우리 자신을 내적인 불에서 격리시키려고 하게 될 것이다.


안으로의 여정은 우리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할 유일한 여정이다. 왜냐하면 그 여정의 중심에는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폭탄이 있기 때문이다. 그 폭탄은 우리 안에서 똑딱똑딱 소리를 내고 있으며 마음으로 가는 개인적 공동체적 여정에 의해서만 누그러질 수 있다. 바로 그 핵심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랑의 불과 증오의 불 사이에 선택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만 우리는 참으로 두려움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가는 여정에서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중심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불길 속으로 함께 가져가는 두려움을 태워 버리는 불 속으로 두려움에 차서 간다.


그리고 우리가 빵 대신에 돌을 청할 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복구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가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는 대신 버팀목을 대고 유지시키며 보수하기 시작할 때에 모든 것은 시작된다. 에덴동산에서 지금까지 유혹은 관대하게 주시는 빵을 통하여 창조주를 기념하는 대신 우리가 가질 수 없는 빵을 청하는 것이다.


안으로의 여정은 아메리카 가톨릭 주교회의의 표현에 있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를 새로운 자각으로 읽도록 해 준다: 핵전쟁이라는 위험에 처한 도덕적 문제는 죄악이 전 지구 차원에 퍼져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모든 죄악의 행동은 창조물과 창조주에 대적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위협하는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적인 잠재력이 엄청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일을 파괴할 수 있다.”


두 가지 불은 이것이다: 즉 창조주와 창조물이다.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역할을 강탈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파괴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적으로 우리가 통제하기 때문에 결코 통제할 수 없는 파괴적인 불로 보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불은 우리 안에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주의 주권을 차지할 때에 그분을 추방해 버렸던 그 안에 계신다.


하느님은 물질이 에너지로 변화될 때에 드러나시지 않고 프란치스코가 보았듯이 “물질이 영으로 변하는 성변화” 속에서만, 인간 마음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과정인 성변화 속에서만 드러나실 것이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음식으로 변하는 제단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돌들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살아있는 이 성전은 마음을 변화시켜서 소유하는 불길보다 존재하는 불길을, 거칠게 갈기갈기 찢기는 분자의 소리보다 감사의 찬가 소리를 더 좋아하는 마음이 되도록 한다. 그래서 폭탄이 아니라 태양이 우주를 다스리는 주권의 불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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