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33 프란치스코: 개인 성찰

Margaret K 2017. 12. 18. 21:34

33 

프란치스코: 개인 성찰


오늘 아침은 먼 지평선에 가는 구름이 보일 뿐 하늘이 청색이다. 나의 방 창문 밑의 나무들은 이른 봄의 찬란한 새파란 색옷을 입었다. 나는 홀로 있고는 하지만 홀로 있음을 느끼지 않는다. 이는 내가 종이와 볼펜, 책상과 창문은 통해 보이는 모든 것, 그리고 이 순간에 내 옆에 있지 않는 모든 사람과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내 삶에 있어 프란치스코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찰할 때마다 나는 모든 것과 친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나에게 준 삶의 방식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선물은, 비록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많은 실수들에도 불고하고, 모든 것과의 상호 연결됨의 체험이고, 외로움과 절망 껍질의 부서짐과 고립된 자아를 둘러싸며 담고 있는 희망이다.


우리는 외로움의 시대에, 편집과 아집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는 고립된 개인들로 이루어지는 국가들이 방어할 수 없는 방어기재를 갖고 있으며 인간적인 친밀함을 마술의 힘으로 증식시키는 시대이다. 나는 이런 세계의 한 부분이고 끊임없이 폭탄과 일대일의 친밀한 사랑이 나를 안전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아주 잠시라도 내가 그 유혹에 질 때면, 프란치스코가 말했던 어떤 것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혹은 가가 살았던 장면이 내 마음속에 아주 흐릿하게 깜박거린다. 그러면 내가 소년이었을 때 그가 주었던 비전, 계속 진실이라고 증명되는 그 비전이 다시 생각난다.


그 비전은 이렇게 단순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은 근본적으로 고립된 것이며 그것은 외로움으로 끝난다.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만이 나를 거룩하게 전체적으로 만들 수 있으며, 우주 안의 어떤 것에 소유적으로 매달리려 하지 않고 우주에 속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진실을 이성적으로 아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나는 프란치스코가 했던 것처럼 그것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나 자신과 사람들 사이에, 나 자신과 내가 경험한 것 사이에 계속적인 대화를 의미한다. 참다운 친교, 일치는 대화를 내포하며 그것이 프란치스코가 새들과 다른 피조물들에게 말하고 귀 기울이는 것에서 내가 보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보고 있다. 대화로 이끄는 친교 속에서 비로소 영적인 삶의 거대한 역설들이 실제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가난은 부유함이 되고, 고통은 기쁨이 되며 회한은 달콤함으로, 십자가 죽음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로 변화되는 것이다.


즐거움과 슬픔의 표현이 없을 때 자아는 갇혀있게 되고 구원을 얻어 주실 수 있는 존재, 즉 다른 존재(하느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한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을 때마다 나는 수많은 회의, 협상, 조약들이 이루어지고 깨지는 것을 보지만 참 대화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 편(그리고 “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대화를 거부한다는 뜻이다)도 자신의 진짜 두려움을 표현하지 않으며, 실제로 사람들과 땅을 갈라놓고 격리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모험을 하지 않고, 가난, 고통, 십자가 죽음의 두려움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약해 말하자면 무력함, 의존성, 통치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협상에 있어 책상의 거리를 넓히고 있으며 손을 맞잡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우리에게 주었던 비전은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가난함이라는 진실이었다. 그분 앞에서 우리 모두는 무력하고 의존적이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피조물이고 그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어머니이시다. 실제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피조물성을 포옹하고 경험에 의해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의 기본적인 친교에 대해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 대신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잘하려고 하며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고 우리 자신의 “전능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통제하며 국가들까지 통치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프란치스코를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누구인지, 또한 다른 모든 사람도 누군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발견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사람도 누군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발견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인간적 대화는 모든 참다운 말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근본을 둔다. 프란치스코는 그 진실을 다미에타에 있는 술탄의 진영으로 대담하게 걸어 들어갈 때 믿었다. 그는 만일 그가 진실한 대화에 들어가고 진실을 말한다면, 술탄이 프란치스코의 말속에서나 자신의 말속에서도 있는 같은 하느님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형제임을 인정할 것이라고 알았다.


프란치스코는 올바른 인간으로 보여지는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서 그들의 참다운 자아를, 두려움 때문에 부정하고 있었던 자아를 발견하였다. 프란치스코가 끌어안았던 가난과 고통은 인간의 마음이 구체화시키는 가난과 고통이다. 그는 가장 자기 확신적이고 자존적인 인간존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었다.


프란치스코가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자부심이 환상이며 망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서로간의 상호 의존성을 받아들이고, 또한 어떤 종류의 의존성이든 인정하기 못하게 하는 우리 안의 깊은 두려움을 직면하고 표현하고 나면, 참다운 대화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자유로운 대화는 우리가 그렇게나 잃을까봐 두려워했던 독립을 우리에게 준다.


프란치스코가 생각하는 인간해방의 모형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구약의 하느님은 창조세계로부터 눈부시게 고립되어 있는 유일신으로 존재하지만 예수를 통하여 말씀이 영원으로부터 우리에게 드러나시면서 우리는 우리 인간적 사랑의 모형인 세 인격체의 삼위일체를 알게 된다. 둘이 아니라 셋 사이에서 의사소통은 친교가 된다. 그리고 자주 대화에서 잊혀지는 제3의 인격체는 하느님 자신이시다. 내가 지배하고 싶은 나의 욕구를 놓는 것을 거부할 때에, 나에게 주어지는 힘이 무력함에 남지 않고 표출하기를 거부할 때에 부정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매우 유약하고 심지어 “신심 지향적”이며 이론화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럴까?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어둠과 두려움을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자주 투사하지 않는가? 그리고 어떤 어두운 것을 심지어 우리 자신에까지 인정하기가 두려워 다른 이들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거부하게 되는데, 그들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 우리가 직면하는데 실패한 어떤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가 있지 않은가?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모욕하고 무가치함과 비열함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나는 그가 단순히 자신의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자신의 악의 잠재성을 인정할 뿐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서 보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다. 창조물들과 하는 그의 대화는 자신과 하는 대화의 연장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대화할 만큼,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간에, 전체적이건 조각이건 간에, 용감하기 때문에 주변의 불완전한 창조세계와의 대화를 무릅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제3의 인격체 하느님 안에서의 대화이기 때문에 프란치스코가 자신과 자연과 하는 대화 그 한가운데에서 심오한 화해가 일어난다.


프란치스코가 나에게 남겨준 이러한 모범으로부터 나는 안과 밖의 화해 과정으로서 삶 전체를 보게 되었다. 그 화해는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할 때에 시작된다. 그 전에 나는 어떤 것이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내 밖의 우주로부터 어떤 악한 것이 빨려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것은 또한 우리 마음속에도 있으며 적어도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만큼 우리는 바깥 세계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는 어떤 자연적인 신비의 신비가 그 이상이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인 자연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하는 영혼의 신비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엄청난 의미를 준다. 만일 우리 주변의 세계가 개인으로서, 민족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반영이라면, 세계의 평화와 온 피조물과의 화해는 개인적인 평화와 내적인 화해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암흑 속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해야 하고 포옹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악에 대한 잠재성을 직면하고 그것과 화해하는 여정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중심에 있는 빛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 마음속의 어둠을 통과하는 무서운 여행을 하도록 요청하고 계신다.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에 우리는 주변의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아주 오래된 부르심으로, 그분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마음의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프란치스코가 했던 응답이며, 진정한 응답을 통해 평화를 심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최고의 모델이 되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소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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