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32 형제인 태양의 찬가

Margaret K 2017. 12. 18. 21:34

32

형제인 태양의 찬가


I


1226년 봄에 프란치스코는 생애 마지막 시, 형제인 태양의 찬가를 지었다. “지었다”는 말은 아마도 이 자발적인 사랑과 찬미의 용솟음을 표현하기엔 너무 떠벌리는 느낌을 준다. 이 사랑과 찬미의 외침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의 삶에 끼친 심오하고도 무의식적인 통합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친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 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 민순 신부 역)


삶의 모든 위기의 순간마다 프란치스코는 그가 어렸을 때 듣고 경탄했던 음유시인들처럼 노래를 쏟아놓았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형제인 태양의 찬가는 잘 짜여진 시라기보다 노래에 더 가깝다: 그것은 중세기의 위대한 음유 시인들 중의 한 시인이 부르는 백조의 노래이다.

프란치스코 자신의 삶처럼, 이 찬가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만든 어떤 예술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찬미와 존경의 눈으로 다fms 존재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는 찬가이다. 그리고 이 다른 존재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 속에 드러나신다. 이 찬가는 주변의 모든 것과 자신 안의 깊숙한 모든 것에 열려 있는 한 영혼을 요약한 것이다. 처음 말들-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부터 찬가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위로 바깥으로 마구 흔들어 놓고, 이렇게 현대인들에게 높은 가치를 지니는 자아의식을 높이 놓는다. 찬가는 피조물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것은 오로지 두 가지만 참으로 중요하다는 진리를 살았던 한 영혼의 이야기이다. 즉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이라는 진리이다.


형제인 태양의 찬가는 프란치스코의 삶의 비밀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자아를 떠나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우리 자아의 심연들을 통합한다. 하느님은 “사물의 깊은 심연” 속에 거하시며, 우리가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세계를 사랑하는 것을 그분이 보실 때에 우리는 그분을 발견하게 된다.


프란치스코의 삶은 어떻게 한 사람이 하느님을 발견했는가의 이야기이며 그의 삶의 마지막 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전부였던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하느님이 모든 것일 때, 그의 주위의 모든 것이 보다 중요하고 보다 성스러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 창조세계는 자주 가짜 영성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무시되거나 격하되지 않고 오히려 더 격상된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창조물의 의미와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바로 창조주를 무시하는 것이 되었고, 따라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한 존경과 기쁨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기쁨은 보통으로 생각하듯이, 예를 들어 새들을 무척 사랑하신 그 사랑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프란치스코가 그의 이 위대한 이 찬가를 노래했던 상황에서 우리는 숲 속에서 뛰어다니고 동물들에게 말하고 작은 새를 어깨 위에 놓고 다니는 행복한 ‘낭만주의자“의 모습을 영원히 쫓아 버려야 한다. 반대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말씀들, 즉 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6,24)는 말씀을 정말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람이었다.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을 위하여 썼듯이,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양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발자취가 프란치스코를 이끌어 간 곳은 그가 노래한 형제인 태양의 찬가의 장면에 극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방금 라 베르나에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오상들을 받았다. 그는 아마도 폐병으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었고 트라코마 때문에 눈에서 피가 나고 어떤 빛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햇빛이나 밤의 촛불도 견딜 수가 없어서, 그가 사랑하는 성 다미아노 성당 옆의 헛간에서 오십일 동안 밤낮을 암흑 속에 살았다. 들쥐가 그의 약해진 몸 위로 왔다 갔다 하고 몸에 난 그리스도의 상처에서는 때때로 출혈이 일어나곤 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가난하고 순례하는 거렁뱅이들이 아니라 점점 더 수도승들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그의 이상이 배신당하는 것에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그는 약해진 상황 속에서 하느님이 그를 버렸으며, 자신의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잃어버린 영혼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엄청난 암흑으로부터 프란치스코의 영혼은 이 위대한 찬가를 터뜨린다. 여기에는 달콤한 신심도 없고 무지개에 대한 황홀경의 대답도 없다. 다만 프란치스코 자신이 그의 부서짐 속에서 희미하게 느낄 수 있는 것, 믿음과 희망, 사랑의 시를 경축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시에 나오는 말들과 너무 다른 상황 속에서 그렇게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밖에 없다. 그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만이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프란치스코는 위의 구절은 그가 죽기 바로 전에 덧붙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죽음을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는가를 보여주는데, 죽음의 순간에 그런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가 없다. 그는 말로 그 받아들임을 표현하기 훨씬 전에 자매인 죽음을 포옹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포옹하면서 생명 세계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던 것은 22살 때였다. 그리고 그 경험 뒤에 일 년 동안 죽음과 씨름하며 앓았다. 그전에 그는 페루지아 전투에서 2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일 년 동안 그는 그의 동료 죄수들을 즐겁게 하면서 이런 감옥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가 없이 꼬여있고 냉소적인 한 동료 죄수의 편을 들었다고 죄수들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프란치스코는 전 세계가 나를 기념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명예를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그는 그 당시에 거의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급하고 열정적인 젊은 프란치스코가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나 아시시로 돌아갔을 때 그는 그를 일 년 동안이나 침대에 가둘 심각한 병에 걸렸다.


그리고 지금 죽기 2년 전에 그는 다시 죽음과 씨름하고 있으며 다시 한 번 죽음을 포옹하며 하느님 안의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난다. 지난 2년 동안에 하느님과의 더 깊은 일치와 더 나아간 평화가 있었고, 프란치스코는 그가 창설한 회에 대하여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러한 그의 낙관주의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평화에서 온다. 그는 찬가를 노래하기 얼마 전에 나타난 환시를 통하여 그가 낙원에서 예수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축복을 받을 것을 확신한다. 전 생애동안 프란치스코가 지녀왔던 우주적 낙관주의는 그의 영혼이 지니고 있는 개인적 평화에서 오고 있다. 안이 다 괜찮으면 바깥도 다 괜찮은 법이다. 우리의 기본적인 관계들이 안전하면 우리 주변의 세계도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중요한 관계가 위협을 받으면 세계도 불안전하다. 정서적 죽음이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깥의 죽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II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죽음에게조차 찬미하도록 재촉했다. 그리고 죽음을 맞으러 기쁘게 가면서 함께 머물자고 초대했다. 그는 “어서 오세요. 나의 자매인 죽음이여”라고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프란치스코가 이 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신앙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하였다. 내가 성인이고 하느님이 나에게 성인들에게처럼 계시를 내리셔서 그분과 천국에서 영원히 살 간절한 소망을 가지기에 죽음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안다면, 이것은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고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쁠까 하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나의 죽음에 대해 근심하고 있었던 어느 날 “어서 오십시오. 자매 죽음이여”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나의 것으로 하자 모두 변하였다.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오셨기 때문에 그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마치 그것이 생명인 것처럼 포옹하였다. 그러자 하느님이 그에게 오신 것이다. 우리 삶의 광적인 행위들은 자주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쓸데없는 노력에 불과하며, 죽음을 다루어 보겠다는 노력에 그친다. 죽음에 예하고 대답하는 것은 삶을 포옹하는 것이다. 생명을 고대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살아있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자매로서 죽음을 포옹하는 것은 그녀가 우리에게 올 때에 환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금 내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프란치스코는 우리와 같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성인들이 자주 그런 것처럼, 우리 자신의 죽음을 인간적으로 현실적으로 다루는 것을 방해하는데 프란치스코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는 “환영합니다, 하느님”, 혹은 “환영합니다. 영원이여”라고 말하지 않고 “어서 오십시오, 자매인 죽음이요”라는 놀라운 말을 할 수 있기 전에 우리처럼 죽음과 투쟁했어야 했다. 자신의 부활로 이끄는 마음과 정신의 순교와 같은 고통을 먼저 겪지 않는다면 이런 말들을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분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권고6)


경험의 대체물은 없으며, 거룩함을 대리하는 것도 없다. 프란치스코의 삶을 볼 때에 성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기꺼이 행동하기 전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먼저 나타나시기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 성인은 그가 아직도 지상에 살고 있을 동안에 부활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부활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성인이 적극적으로 생명을 주는 죽음을 포옹하고 함께 머물도록 죽음을 초대함으로써 죽음의 두려움을 이미 통과했기 때문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너무나 예리하게 다음과 같이 썼듯이:


모든 떠나감을 앞서갈,

마치 떠나감이 이미 당신 뒤에 있는 것처럼,

방금 지나가 버린 겨울처럼.

이런 겨울들 중에는

끝나지 않는 겨울 하나가 있어

이 겨울을 겪어 냄으로써만

당신의 마음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III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한 저술에서 부활이 십자가에 이르는 내면의 길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의 의미가 우리의 고통 한 가운데에서 부활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부활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고통을 겪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통과 아픔 바로 한 가운데에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성인들은 그들의 고통 속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고통은 그들을 그리스도께 일치시키고 이어 그분의 십자가로 이끌며, 이 십자가는 늘 그분의 부활에 참여한다. 우리의 고통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구속되며, 그분 자신의 고통과 죽음은 그것들 안에 이미 부활의 씨앗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고통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모든 사람은 그러한 승복 속에서 항상 평화가 있으며, 이 평화는 우리가 꽃을 피울 것임을 알고 있는 씨앗처럼 마음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하느님께 완전히 승복하기 전까지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왜 하느님이 이런 일을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지 의심한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느껴진다. 그런 쓰라림이 지나가도록 놓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우리의 고통 속에서 시작되고 있는 부활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일단 승복하고 실제로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게 되면, 우리의 고통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영혼의 부활은 주님이 우리에게 놓으라고 청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간에 놓는 것이므로 죽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가 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고통이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고통이 끝나기를 바란다. 우리는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올바르고 선하게 다시 바로 잡아 주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과 혼동과 아픔을 끌어안으라고 청하시는지 모른다. 그렇게 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다시 비추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할 삶은 기대했던 것과 매우 다른 삶일지 모른다. 이 새로운 삶은 고통과 혼동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일어서는 삶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땅에 박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고 승복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극도의 고통과 아픔 한 가운데에서 형제인 태양의 찬가 같은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는 그의 고통을 놓아버리고 하느님께 드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비참함이 그 안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환시 속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일어서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에, 십자가 위의 예수와 가장 닮게 되었을 때 그는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는 누워 있던 고통의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형제인 태양의 찬가를, 모든 프란치스칸 마음 안에 부활 노래였으며 지금도 그러한 노래인, 태양의 찬가를 노래했다.



IV


때때로 형제인 태양의 찬가를 읽고 있을 때 나는 프란치스코가 그 시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그가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을 때 그 피조물 안에서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낮이라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름답고 빛나는 빛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면서 태양 안에 있다. 찬가 안의 모든 요소들을 그는 얼마나 깊게 묵상했는가? 그리하여 그는 너무나 친밀하게 그들 안에 머물 수 있으며 그들 존재의 내면으로부터만 그들에 대해 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찬가가 너무나 심오하게 나를 감동시키므로 나는 그것들 안에서 빛나며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것들이라고 선포하는 프란치스코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고서는 달과 별들을 바라볼 수가 없다. 오로지 그만이 달과 별들 안에서 또한 그것들은 그 안에서 “맑고 절묘하며 어여쁜 것”이 되었다.


 그는 언니 바람과 공기 안에서 “개이거나 폭풍치는 사시사철의 날씨들”로부터 나를 정감있게 바라보고 있다. 이런 날씨들은 또한 하느님의 기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바람 속에서 하느님이 모든 날씨들을 통하여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기르신다는, 진실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프란치스코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혹한 폭풍이 하느님께서 그분의 창조물을 키우는 것이라고 깨닫기 위하여 우리는 날씨 속에서 얼마나 깊게 내려가야 하는가?


그리고 누나인 물속에서 나는 프란치스코가 그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지느러미를 저으며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흘낏 본다. 이제 물은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것”이 된다. 어느 여름날에 나는 때때로 프란치스코가 깊은 물속에서 한 연못의 표면으로 장난스럽게 쳐 올라오는 것을 본다. 그는 깊은 물속에서 자신의 여성적인 측면과 만났던 자리를 찾느라고 휘젓는다. 그 깊은 수심 속에서 자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즐기며 마음대로 수영을 할 만큼 그는 편안하게 자라난다. 때때로 프란치스코는 물속에서 우리에게 말하기 위하여 표면에 떠오른다.


언니 불 안에서 나는 프란치스코의 눈뿐만이 아니라 그의 전체 몸이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밤을 밝혀주는 불길이 우리를 태우지 않으며, 우리가 어떻게든 그 불 속에 들어가고 그 안으로부터 불 속에 있니 않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온 존재를 불길이 비출 것이라고 노래하는 프란치스코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프란치스코의 영이 “다양한 열매와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의 모양으로 누나요 어머니인 땅을 밀어내며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찬미하며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그는 땅으로부터 떠오르는 것 같은 모양으로 땅의 내적인 움직임이 되어간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시이다. 아니 더 좋게 말하자면 그의 시는 변화된 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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