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28 친교의길

Margaret K 2017. 12. 18. 21:32

28

친교의길


여럿이 대화를 나누면서 때대로 논쟁거리가 되지만 기분 좋게 들리는 문장들 중의 하나는 “성인들의 통공”이다.  이 말은 인간존재로서 우리들의 상호 의존과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함께 나누는 공통 삶에 의하여 참다운 친교로 변화되는 그 실재를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성인들의 모습은 여전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모든 불완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의 친교도 우리를 일치시키는 거룩한 생명을 담고 있는 바로 그 인간성 때문에 계속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 인간들의 관계는 죄나 오해 혹은 상처 때문에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우리 관계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고, 때때로 우리가 맺고 있는 오직 한 사람의 관계가 불안정이나 외로움을 가져올 때에 우리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분리되는 것까지 느낀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관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인간적 사랑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하느님의 사랑도 따라서 의심하게 된다. 그러면 “성인들의 통공‘은 기분 좋은 말에서 본래의 어떤 핵심적인 실재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관계로부터 물러서게 되고 자존적이 되려고 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상처에 따르는 고통을 겪기보다 아무도 필요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들의 통공’은 첫째로 우리가 상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고상한 구절이다. 인간의 실제에 관한 경건한 서술 뒤에 숨을 대 우리는 현실이 “거룩함” 표현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충격을 받는다. “성인들을 통공”은 사실 그리스도 안에 세례 받은 인간존재로서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서로 깊게 일치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남는다.


내가 의미하는 바를 잘 설명해 주는 16세기 베니스의 일화가 있다. 화가인 베로네즈는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왜 “세속적”인 장면들을 포함시켰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교황청에 출구하였다. 그는 왜 낙오자들, 통행인들, 긁는 사람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일그러진 사람들, 코피 흘리는 사람들, 그리고 기타 “선성 모독적‘인 인물들을 거룩한 그림에 넣었는가? 베로네즈는 이 질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일화는 믿는 이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 중에 환멸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천진난만함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매우 인간적인 실제에 어떤 경건한 굴레를 씌운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모든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천진난만하지 않았다. 회개의 시작부터, 아마도 그 이전부터 그는 위선에 넘어가지 않는 지각 있고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와 형제들이 보통 사람들이며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평범한 사람들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성실함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경건하고 우아한 말들이나 혹은 학문이나 좋은 옷, 비싼 것들로써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들보다 더 이상 높이려고 해서는 안된다. 초기 형제들은 우리에게서 신심이나 재물 혹은 권력의 겉장식이 벗겨졌을 땡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시 말하자면 가난하였고, 우리의 슬픔과 즐거움을 표현하려고 애쓰고 형제자매로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발앙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초기 형제들의 인간성 자체가 그들을 사랑스러운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걸인들의 옷을 입었고 모든 사람들과 섞였으며 고상한 말들을 늘어놓지 않고 단순하고도 짧게 말했다. 프란치스코가 1223년의 회칙에서 썼듯이 형제들은 “설교할 때 그들의 말은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감화를 줄 수 있도록 선별된 말이어야 하고 순수한 말이어야 합니다... 악습과 덕행, 벌과 영광을 선포하며, 이 세상에서 주님이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셨으니 간결한 말로 하십시오.”(인준 회칙 9) 악습과 덕행 사이에 항상 균형을 잡아야하며 우리에게는 늘 양쪽이 다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인간성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인간성에 대해서도 결코 순진하게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도 그의 형제들도 죄를 지었으나 그리스도의 용서를 체험하였고, 우리 같은 인간존재들을 통하여 그 용서가 느껴질 수 있음을 알았다.


어느 관구장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 대한 그의 심오한 인간적 사랑을,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도 분명히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죄가 어떠하든, 어떤 형제가 죄를 짓고 나서 그대의 얼굴을 보고 자비를 구했는데도 그 자비를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형제가 이 세상에 절대로 없도록 할 때, 나는 그대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 하느님의 종이며 그대의 종인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알고 있겠습니다. 그 형제가 자비를 구하지 않았어도 그대는 그가 자비를 원하는지를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후에도 그가 그대의 눈앞에서 수천 번 죄를 짓더라도,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여 그를 주님께 이끌도록 하시고 이런 죄지은 형제를 항상 불쌍히 여기십시오.”(어느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9~12)


내 가면 뒤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솔직하게 인간적으로 사랑할 때에 나는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것이다.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의미가 더 이상 인간적이지 못하고 불완전 할 수 없고 죄를 지를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구절은 경건한 거짓말이 된다. 내가 “성인들의 통공”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가장 깊은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어야 하며, 내가 손을 합친 채, “성인”처럼 보이면서 돌아 다녀야 하는 그런 피상적인 행위를 서술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인들의 외적 행동은 자주 경건한 모습이 아니다. 실상 우리가 더 성인 되어 갈수록, 우리는 더 인간적으로 변해간다. 인간존재로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다른 존재와의 친교를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을 배웠다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일치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의 길은 바로 하느님과의 일치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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