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27 대화의 길

Margaret K 2017. 12. 18. 21:32

27

대화의 길


프란치스코의 길은 대화의 길이다.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삶에 관한 초기 자료에서 보여지는 삶의 양식은 그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둘씩 짝지어 길 위에서 보냈고, 일 년에 한두 번 아시시로 돌아오는데 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작은 언덕에 모여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이 모임을 「돗자리 총회」라고 불렸다. 이 만남의 때에 또한 형제들은 길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하고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였고, 마침내 다시 가난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설교하고 증언하러 길을 떠날 파견을 받기 위해 프란치스코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서 축복을 받곤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두루 다닐 때, 형제들은 말로써 논쟁을 벌이거나 다툼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이와 반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면서 온유하고 화목하며 겸양하고 양순하고 겸허해야 합니다.”(인준 회칙 3)라고 권고하였고 “어디에 있든지 또 어느 곳에서 만나든지 형제들은 영적으로 사랑을 갖고 서로 대하며 불평 없이 서로 존경해야 하며, 그리고 형제들은 겉으로 슬퍼 보이거나 음울한 위선자들같이 보이지 말 것을 명심할 것이며, 오히려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필립 4,4,) 명랑하며 분에 맞게 쾌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비인준 회칙 7)라고 당부하곤 하였다.


형제들에게 주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은 항상 명료했고 초점이 분명했다. 즉 형제들은 말과 사는 방식으로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호 지지와 증언 속에 짝을 지어 파견됨으로써 그런 이상은 그들 앞에 늘 있을 것이었다. 그들의 설교가 다른 이들에게 성실한가를 측정하는 기준은 형제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여 있었다.


공동체로서 증언하는 것은 매우 진지하고 평등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가 고립되고 혼자라는 망상을 떨쳐버리고 우리의 증언에 삼위일체적인 모습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둘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이 표현하는 상호적인 사랑은 성령이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는 물론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성향을 끊임없이 돌아서게 하는 하느님께만 응답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은 실상 하느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인간적 사랑은 끊임없는 대화를 요구하고, 대화는 바로 삼위일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참다운 대화가 지독하게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솔직한 대화는 점차적으로 우리가 숨기고 있는 환상들을 드러내고, 또한 성실한 대화는 진정한 사랑과 결단을 요구하므로, 관계로부터 오는 고통, 성인들의 통공과 하나가 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다른 안전한 장치나 기도 혹은 하느님이라는 작은 틀 속에 감추는 우리의 애정을 고립시키려는 우리의 성향을 이 정직한 대화가 또한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소위 영적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지니는 위험들 중의 하나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애정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이다. 인간적이 되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는 어떤 “영적”삶으로 피해 들어가는데, 그것에서 나는 애정의 차원에 대해 느낄 필요가 없고 관여할 필요도 엇다. 나는 모든 것을 영적인 것을 만들려고 하고, 그럼으로써 구원이 일어나고 있는 엉망진창의 복잡한 세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신음하고 애쓰고 있는 세계를 피한다. 애정으로부터의 고립은 나로 하여금 이 세상 속에 속하지 않게 하고 이 세상으로부터 살지도 않게 만든다. 그런데 아버지께 하는 그리스도의 기도는 이렇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요한 17,15)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한 17,18)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분은 비록 세상에는 낯선 존재였지만 실상 그 안에 계셨고, 당신 자신을 인간이 되도록, 우리와 관계 맺도록 허용 하셨다. 비단 우리 중의 성인들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 절름발이와 부서진 이들 그리고 죽은 이들, 심지어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과도 관계를 맺으셨다. 그분은 군종을 먹이시고, 친구인 라자로 때문에 우셨고 당신에게 다가서는 사람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함께 하셨기에 지치셨다. 참다운 종교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영성을 만들어 낸다. 그분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당시의 종교 속으로 피해 들어간 분이 절대로 아니시다.


종교가 제도화 될 때마다. 그 종교는 믿는 이들이 서로를 참다운 상호 대화 속에서 형제자매로 포용하지 않는 한, 그런 사람들의 애정과 호의를 고립시키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프란치스코 형제들과 자매들의 상호 사랑과 호의는 우리들 사이에 하느님 나라의 강력한 징표가 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종교에 신뢰를 두도록 해 주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성령이 참다운 대화가 있은 곳에서만 가능한 그런 사랑을 드러내셨기 때문이었다. 하느님 자신은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의 참다운 대화 속에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대화 속에서 당신 자신을 복된 삼위일체로 들어내시고 만져지실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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