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24 큰 바위 사탕산

Margaret K 2017. 12. 18. 21:30

24

큰 바위 사탕산


오월의 한 여름 날,

한 시골 소년이 산책을 나와

사탕 수수밭의 그늘진 좁다란 길을 내려오며,

그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있네


내가 소년이었고 주위에 아무도 없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곤 하였다. 우리는 종종 666번 도로를 따라 낚시자리를 찾아 달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같은 노래를 불러주시곤 하였다. 이 노랫소리는 마치 낚시 여행 자체가그의 영혼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늙은 방랑자 노래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것 같았다. 낚시질은 그 노래를 현실화시켜 주었고, 우리는 주말이면 큰 바위 사탕산으로 여행을 하곤 하였다. 



낚시는 나에게 결코 그런 느낌을 주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노래는 그런 느낌을 불러오게 하였다. 노래 자체가노래 속에서 실제가 되었으며, 나는 그 모든 것이 나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던 것으로 상상하곤 하였으며 지평선에 꼼짝 않고 보이는 '잠자는 우테산(아메리카 원주민의 산)이 정말로 그 노래 속의 산이라고 상상하곤 하였다. 우리는 그 산기슭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동쪽으로 벗어나곤 하였고, 그러면 큰 바위 사탕산은 녹아내리고 노래는 멈추어 지곤 하였다.

수 년 후 아시시로 여행하며 그 도시를 향하여 우뚝 솟아 있는 수바시오 산을 바라보며 서 있었을 때, 그 노래가 잊혀진 기억처럼 내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서 되돌아왔다. 그 곳은 프란치스코가 처음으로 악령들과 씨름을 하고 새들에게 설교를 하며, 또 그의 기도를 방해하던 시끄러운 개울물 소리를 잠재우기도 하던 그 동굴들이 있는 산으로, 내가 막 오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수바시오 산기슭에서 아버지의 노래가 나의 마음에 떠올랐으며, 신시내티의 한 언덕에서 맞아들였던 삶의 방식도 내가 꿈꾸었던 삶이 실현된 것이었다. 




내내 방황할 때, 그는 노래를 불렀다.

젖과 꿀의 땅의 노래를,

그곳에서는 부랑자가 몇 날이라도 지낼 수 있고,

돈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II


초기의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들 안에,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안에는 동화나라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 책은 가장 널리 읽혀지는 책이다. 작은 꽃들에서 큰 바위 사탕산의 땅은 실제가 되는데,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땅에 주문을 거는 마법사이기 때문도 아니며, 초창기 이야기들이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들이 채워질 수 있는 한 세계를 창조하는 단순한 환상들이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에덴으로 돌아가고, 잃어버린 순결함의 회복에 관한 구체적인 표현들인데, 사람들은 거기에서 그들의 추락을 모질게 대한 창조세계와 다시 한번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무소유의 길이다. 첫 번째 추락과 함께 사유가 왔는데, 그것은 모여드는 것들에 집착하고 사람을 의존적이고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욕심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가난 속에서 우리가 너무도 밀착되어 붙잡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놓는다. 그의 전 생애는 무소유의 힘든 과정으로 짜여져 있는데, 그것은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긴 여정으로, 그곳에서는 "마귀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였다.(루가 10,17)"내가 너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루가 10,19) 그리고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라고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단순히 동화가 아니다. 참으로 그것들은 모든 동화들이 말하는 인간의 깊은 마음속갈망들로 충만함과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들이 실현되는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상의 세계와는 달리, 우리의 깊은 갈망들은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되길 바라거나 요정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불신을 유보하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는다. 성 프란치스코의 세상은 격리에서 화해로 이르는 회심에 의해서 변혁되는 참 세상이다. 



회심은 유아기 시절로부터 최종적으로 대면하기 위하여 돌아서서 우리가 부정하고 우리 자신에게서 달아나려고 했던 것과 화해를 하는 그 시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시기를 되돌아보는 긴 여정의 시작이다. 프란치스코 영성의도전은 영혼의 모든 "적들이" 예수에 의해서 구속되고, 성령께서 이미 죽은 뼈들에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영혼의원초적이고 근본적인어두움 속으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여기서 빛을 내실 수 있다. 



그것은 매우 개인적인 여정인데, 그러나 초기 프란치스칸 형제들의 삶이 보여주듯, 그것은 똑같은 진지함으로 개인적인 여정을 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 안에서만 갈 수 있는 여정이다. 그리고 같은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친교가 회개를 자기 중심적인 마음의 사건으로, 나와 내가 안에서 듣는 목소리 사이의 폐쇄적인 대화로 여기지 않도록 해준다. 회개는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또한 다른 이들과의 친교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 




아 농부와 그의 아들, 그들은 달리고 있었네.

건초 밭으로 그들은 뛰어 오르고 있었네.

방랑자가 아들에게 말하길, "왜 너는

큰 바위 사탕산으로 가지 않느냐?"� 




III


회개가 그토록 어렵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렇게나 두렵게 하고 항상 마음을 돌이키기를 바라는 도전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렇게도 잘 나가고 있고 미래를 위한 계획들로 가득 차 있기에 우리 앞에는 풍요로운 수확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거의 도달했다고 생각할 바로 그때에, 무엇인가가 변화 한다 들판이 썩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들판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갈망을 저버리고 실망시킬 수 있고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모두 추슬러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문제가 시작되는 때는 바로 그때부터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길을 위해 기존의 길을 포기하고 싶은 우리의 갈망은 습관과 집착, 특히 마음의 집착으로 덮여져 있어 마비되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참으로 어려운문제가 나타난다. 즉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는 일인가? 같은 길을 가던 동료들, 내 친구였던 사람들 없이 내가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나와 함께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외로움이 오랫동안 나를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젖과 꿀의 땅"이라는 약속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담배 밭 위에 윙윙거리는 벌들,

소다수의 샘,

청색 새들이 노래하는 중 레몬에이드수가 솟아 나오네

사탕산의 큰 바위에서 




그때 프란치스코 같은 사람이 나타나함께 가고, 이제 우리 둘이 가는 여정은 더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그렇지만 아직도 나의 삶에 그렇게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너를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너 없이 내가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우리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와함께 가져가는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길은 화해의 길이다. 



프란치스코가 주교 앞에서 아버지를 포기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또한 어머니도 포기하고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고통스럽게 창조 세계와의 불화,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갈라짐, 사람들 사이의 갈라짐, 그리고 인간의 마음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더 깊은 틈을 경험했다. 앞에 말한 것처럼, 프란치스코와 부모사이에 어떤 화해가 일어났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부모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의 전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일어난 화해에 대한 응답의 삶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모든 것을 하느님과 화해시켰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부모는 아버지이며 어머니이신 하느님 안에서 같은 자녀로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아버지들과 아들들, 어머니들과 딸들이 그 안에서 그들의 잃어버린 부모자녀 관계를 발견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신다. 



그가 하느님을 포옹하는 순간부터, 프란치스코는 그 전에 분리되었다고 생각한, 부모님까지 포함한모든 것과 화해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들 사이의 화해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비록 화해의 말과 행위가 없다 하더라도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있는 진실, 신비를 알고 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우리를 갈라지게 했던 적대감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시고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시고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가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습니다."(에페 2,14.16) 



우리가 인간의 차원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이미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오로지 "때가 차면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에페 1,10)"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계획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프란치스코의 마음 속 가시 같은 아픔은 그가 부모님과 화해하지 못했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의 부모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통 하늘의 아버지와 어머니이신 하느님과 화해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어떤 상황 밑에 있으리라고 알고 있는 진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 한 가운데에서 깊은 아픔이 될 때가 자주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가 신들이 아니라 인간들이며, 불완전하고 죄 많으며,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없는 존재라는 현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처럼 화해의 길은 불완전과 실패를 허용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삶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없는 그것이 이미 감추어진 심연 속에서 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 같은 더 깊은 화해에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해야 하며 한편으로 이미 실제의 핵심 속에 있는 것이 표면으로 부상되고,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이미 되어있는, "신령한 하느님의 집(에페 2,22)이 되기를 기도하고 바라며 계속 일해 가는 것이다. 




다음날에 그들은 출발하여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세어갔네,

그러나 사탕산의 큰 바위에 있는

레몬에이드수의 샒으로 도달하지 못했네.





IV

세 번이나 프란치스코는 마음속에 영광의 꿈을 간직하고 전쟁에 나갔고, 세 번이나 그의 계획들은 하느님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아시시를 떠나 전쟁에 합류할 때마다 그는 삶을 진지하게 대하며 어떤 특별한 사람이 되고 남자다움의 한계를 자신에게 시험해보곤 했다. 결국 그것은 자신보다 더 큰 명분에, 자아의 좁은 벽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어떤 명분에 매달림으로써 의미를 찾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느님은 그의 계획을 헛되게 만들어 그를 아시시로, 자신에게로 돌려보내신다. 



겁쟁이처럼 전쟁터에서 혼자 돌아온다는 깊은 모멸감으로부터 프란치스코는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훈들 중의 한 가지를 배웠다. 그것은 우리 삶의 초월적이고도 깊은 의미가 미래에 있을 어떤 말과 방패를 가진 군대간의 전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전투에 있다는 사실이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현재는 미래의 어떤 목표에 의해 변화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승리가 아니며, 지금 여기서 그의 삶을 하느님께 승복시킴으로써 그리고 가장 단순한 몸짓 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가 그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허락함으로써 변화되는 것이다.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아시시로 돌아옴으로써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주는 의미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허물어진 성 다미아노 성당의 돌을 하나하나 다시 쌓는 단순한 행동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시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기초가 되는 건물(에페 2,20)"의 살아있는 돌이 된다. 그리고 "온 건물은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된다."(에페 2,21) 



큰 바위 사탕산의 정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저기 바깥의" 어느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난 마술의 세계에서 정점을 찾지만, 실상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세계에 그 정점이 있는 것이다. 큰 바위 사탕산은 우리의 현재 경험 안에 있으나 오로지 성인들과 시인들만이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회개와 마음의 변화들이 오래 가지 못한다. 회개는 지금 현재 이곳의 모든 고통과 혼란을 벗어난 다른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지금 나의 삶에 관한 것이다. 회개는 하느님이 모든 혼란과 고통을 변화시키시도록, 갈들을 없앰으로써가 아니라 가장 혼란스럽고 왜곡된 현재의 중심에 숨겨져 있는 신비를 내가 보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심으로써 나의 삶을 단순하게 해주시길 허용하는 은총의 순간이며 은총의 움직임이다. 



하느님께 나의 삶을 참으로 내어 맡겼을 때, 모든 것, 심지어 불합리한 것마저도 그분의 현존의신비로 가득 차게 되며 나는 인간 조건 속에 내재 해 있는 고통과 갈등으로부터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한다. 그러면 내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우물 속의 생명수가 솟아오른다.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은, 계획은 하느님 것이며 우리는 다만 귀를 기울이고 돌을 모아 하나씩 하나씩 쌓아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비록 자주 우리가 안팎의 혼란과 갈등을 겪는다 해도, 우리는 현재에 그 계획이 드러나는 건축가를 위해 일하며, 계속 일해감에 따라 마지막에야 그 계획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 오늘날의 프란치스코다운 삶  (0) 2017.12.18
25 사회 정의 대화  (0) 2017.12.18
23 산의 다른 쪽  (0) 2017.12.18
22 성 프란치스코의 길  (0) 2017.12.18
21 사막의 여인  (0) 2017.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