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20 로마로의 여정

Margaret K 2017. 12. 18. 21:28

20

로마로의 여정


나의 전 생애는 여행과 여행에 관한 꿈들로 채워져 왔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선명한 이미지는 어딘가로 데러다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현관 앞에 씩씩하게 서서 손에는 격자무늬의 판지로 된 여행 가방을 든 한 조그마한 소년의 모습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미지도 첫 번째 것과 같은데, 할머니의 집에 가려고 길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 타려고 하며 666번 도로를 따라 홀로 서 있는 한 작은 소년의  모습이다. 



마침내 14살이었을 때 나는 신시내티 행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뉴멕시코를 떠났다. 그 첫 번째 떠남을 포함해, 내모든 외부적이고 멀리 떠나는 여행들은 또한 영혼의 여정들이었다. 나는 길과 장소들을, 마음 바깥과 안의 풍경들을 모두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길 자체가  어느 곳에 도착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열렬한 것이 되었다. 아마도 정말로 중요했던 것은 항상 여정 자체였던 것 같다. 아마도 여정은 나를 프란치스코에게 붙들어 메게 한 끈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의 여정, 쉼이 없는 영혼에게, 프란치스코는 항상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설교를 하며 다닌 사람과 같았다. 그리고 좀더 깊고 상징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의 삶은 로마로의 순례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왕국의 허물어주는 벽들을 떠받치고 재건한다. 



주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형제들을 주신 후로, 그는 삶의 방식에 대해 교황의 승인을 얻으려고 교황 인노센시오 3세의 궁전이 있는 로마로 여행을 하였다. 그 당시는 바티칸 성전이 건설되기 전이었고 교황의 숙소가 거기에 인접해 있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복음을 가능한 글자 그대로 사는 것에 대한 허락과 승인을 요청하러 간 것은 성 요한 라테란 성정이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이 모인 교황청에 나타나기 바로 전에 교황은 라테란 대성전의 벽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벽들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한 작은 거지가 그것들을 붙잡고 자신의 어깨로 전 건물을 떠받쳤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거대한 알현강당에 들어 왔을 때, 인노첸시오 3세는 자기의 꿈속의 그 남자를 알아보았고 그의 삶의 방식들을 승인하였는데, 왜냐하면 교황은 프란치스코 안에서 복음적인 삶의 재건과 영적인 힘으로써의 교회의 재생을 위한 제4차 라테란공의회의 개혁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의 방식이 통과되었으며, 프란치스코는 정통 교회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고 형제들이 항상 로마 가톨릭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그의 회칙에 썼던 것이다. 



로마의 주교(교황)에 순종을 주장하는 프란치스코와 내 자신의 투쟁은 로마에 왔다갔다 하는 여름 내내 계속되었는데 그 도시는 나를 불쾌하게 하는 동시에 매혹시킨다. 그리고 이 모든 여행들 중에 나는 점차 교황 제도와 절충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베드로좌에 앉은 사람들이 그들이 내린 교의적, 윤리적, 정치적인 결정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깊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한 결정들은 교회의 전통과 성령에게서 나오지만, 또한 이러한 결정들은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해 결정하는 사람들의 배경과 인간성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기에 걸러서 나온다.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우리는 성격이나 인간성에 있어서 뚜렷하게 서로 다른 네 명의 위대한 교황들을 보아왔다: 자발적이고도 개방적인 소박한 농민 같은 요한 23세, 내성적이며 주의 깊은 법조인 같은 바오로 6세, 사람들이 좋아하는 언론가와 같은 요한바오로 1세,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동유럽 출신이며 철학자, 시인, 극작가인 요한바오로 2세, 이들 네 명의 교황들의 특징은 그들의 출생지인 베르가모, 밀라노, 베니스 그리고 크라코우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각각의 교황은 바로 그의 고국의 산물이다. 각 교황은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몇 가지 측면에선 교회와 세계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각각의 교황은 교회 안에서 논쟁의중심이 되어 왔으며, 그것의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의견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교권에 대한 내 자신의 태도는 애증이 계속 교차되는 그런 태도이다. 나의 신앙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에 뿌리박고 있지만, 내의 태도는 미국적이다. 내 조국의 민주주의적 뿌리들이 내 안에 너무 깊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인 면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있는가에 따라 대부분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나는 백성의 뜻을 믿으며 하느님이 교계 제도와 동등하게 백성 안에서 또 그들 사이에서 활동하신다고 느낀다. 교회에 대한 나의 태도는 비록 동시에 교계적인 교회에 나의 신앙을 둔다 하더라도 민주적이다. 교계에는 긴장이 있다. 내가 로마에 대하여 느끼는 애매모호한 감정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 나의 태도들은 미국적이면서, 나의 신앙은 로마 가톨릭적이다. 마치 요한 바오로 2세의 태도가 동 유럽적인데, 그의 신앙은 로마 가톨릭적인 것처럼 말이다. 



먼저 인간 존재로서 교황들을 보는 것은 내가 또한 교회를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내가 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적인 것을 가려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미국인으로 남아있으면서 여전히 "호노리오 교황 성하와 교회법에 따라 선출되는 그의 후계자들과 로마 교회에"(인준 회칙 1)대한 프란치스코의 순종과존경의 약속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는 교황이 백성의 뜻과 달리 말할 수 있으며 신적인영감에 의해서 하느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감에 그들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들은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하느님의 뜻은 백성들이 그들의 삶들을 어떻게 사는가에서 명백해진다. 보편적으로 믿어져서 실천된 것은 대체로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 의해서 선포된다. 그리고 미국식 태도와 로마 가톨릭식 신앙 사이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 점쳐보면 나에게 신앙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는데,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자기기만의 가능성과 나 자신 이외에 어떤 사람이 예언자의 역할을 하며 하느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들으라고 요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어떤 악을 공공연하게 승인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숨기며 자신들을 속이는 많은 국가들을 평생 동안 보아온 것에 의해서 강화된다. 



로마로의 길이 나에게 전혀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던 바는 교황이 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그 국적에 관해 관심을 두는 것이다. 주어진 교황의 국가주의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톨릭의 의미는 아니다. 교회를 가톨릭적으로 만드는 것은 한 신앙 한 분이신 주님, 한 세례이며 우리는 이 로마로의 순례를 문자 그대로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우리 자신의 고유한 모습 속에서 하는 것이고 우리를 형성시킨 특정한 태도들로부터 하는 것이며, 사고와 태도의 획일화가 아닌 신앙의 일치를 향하여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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