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17 악

Margaret K 2017. 12. 18. 21:27

17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혼란들 속에 얽혀져 살고 있다: 사랑 받으려는 우리의 요구에 의해서 스스로가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김이나,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성취하려는 우리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책임감의 충만함이나 남을 기쁘게 하려는 욕구 등에 얽혀서 살고 있다. 한 가지 필요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늘 우리의 욕구들인데, 이 한 가지를 통하여 욕구들은 만족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단순화는 우리 자신을 제거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집중하고 영혼이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에게 너무도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흐트러지는 것이 없었으며 그 자신의 욕구들은 하느님께의 전념 속에서 잊혀졌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피조물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는 그것을 창조주와 관련시켰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빚어진 모든 작품 안에서 즐거워 하였고 유쾌한 사물들의 배후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이성과 원인을 보았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들이 그에게는 선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만드신 분은 가장 좋으신 분입니다'라고 그에게 외쳤다. 그분의 발자국이 서려 있는 사물들을 통하여 그는 어디서나 사랑이신 그분을 따라갔다. 그는 홀로 모든 사물에서 사다리를 만들어 그 사다리를 밟고 옥좌로 올라갔다."(2 첼라노 165) 



그러나 여기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단순한 응답 그 이상이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발자취를 보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에 집중하고,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보여지고 따라서 관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이 아니다. 하느님께로 그가 전적인 집중을 하도록 만드는 어떤 다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의 가장 중대한 혼란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악과 우리가 아직껏 대면하지 않았던 자아에서 오는데, 그것을 우리는 억압하고 부정하려고 한다. 악의 실재를 용인할 수 없는 종교적인 사람은 보통 자비로 모든 것의 비위를 맞추고, 가난한 이들, 모든 사람들, 자연, 창조물 등 일반적인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악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한다. 



"가난한 이들"이나 '악'과 같은 일반적인 것을 그려보는 것은 힘들며 따라서 그것을 느끼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없고, 그릴 수 없는 것을 나는 대면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진실한 기도의 순간들 속에서는 이 가난한 여인의 구체적인 모습, 내 속에 있는 이 악한 경향, 길거리에 누워있는 살해당한 자의 신문사진은 일반적인 것을 추구하는 나의 독선적인 경향으로부터 나를 "흐트러지게"하고 나를 괴롭히기 위하여 표면에 나타난다. 



프란치스코는 구체적인 세상 속에서 살며, 진짜 나환자들과 범죄자들, 수치스러운 사제들과 몹시 굶주린 늑대들을 맞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악과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맞아들이며 심지어 자아의 어두운 면과 그가 만나는 악의 구체적인 실례와도 대화를 계속한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중심적인 통찰력에 잡히는 악을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말해주는 두 개의 유명한 이야기들이 있다. 악은 그가 아시시 주변에 있는 동굴들 속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회심의 초기시기에 왔다. 그는 소름끼치는 곱사등을 가진 여자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고 만일 그가 겸손과 고행의 길을 계속 간다면 그녀처럼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것은 커다란 공포이다: 가장 불쾌하고 나를 가장 겁나게 하는 것으로 내가 변할 것이라는 것, 그러한 광기가 신체적인 기형은 어쨌든 전염이 되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피해야 할 것이라는 것 그래서 추하거나 구역질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장벽이나 금기 혹은 추방에 의해서 배척되고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 때 깊은 심연으로부터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프란치스코야, 네가 육적으로 좋아했던 것을 이제는 영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네가 나를 알기를 원한다면 달콤한 것 대신에 쓴 것을 택하여 너 자신을 경멸하여라."(2첼라노 9) 



이 말씀들은 프란치스코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데, 왜냐하면 영성 생활에 있어서 대부분의 초보자들처럼 그도 하느님이 쓴 분이며, 그 분은 아름다운 것보다는 불쾌하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환자를 포옹하는 사건에서처럼(이어 즉시 곱추 여인의 영상이 따라온다) 그가 그렇게 행하자, 쓴 것은 그를 위한 영혼의 달콤함으로 변했으며, 그는 하느님을 알아본다. 



모든 것은, 악 조차도 거룩한 사랑의 포옹에 의해서 선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을 통하여, 매력적인 것과 불쾌한 것에 관한 관습적인 인식을 극복하려는 대담한 발걸음을 떼기 전까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에 있어서 이러한 시각의중심성을 보완하고 예증해 주는 두 개의 이야기들은 완전한 기쁨의 이야기와 다이에타의 매춘부의 이야기들이다. 레오 형제는 몹시 놀라 '사부님, 그렇다면 참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십시오."하고 물으니, 성 프란치스코는 대답하기를 "우리가 비에 젖고, 추위에 얼고, 진창에 빠져 형편없이 되고, 배고파 기진맥진하여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에 도착해 수도원 문을 두드릴 때, 문지기가 화를 내며 '당신들은 누구요?' 하고 묻고, 그 때 '당신들의 형제 두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면, 문지기가 말하기를 '거짓말 마라. 너희들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속이고 가난한 사람이 구걸한 것을 빼앗아 먹는 두 명의 악당이지? 썩 물러가거라!' 그리고는 문도 열어주지 않고, 추위와 굶주림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바깥 쏟아지는 빗속에 우리를 밤중까지 내버려 둘 때 그런 욕설, 인정 없는 무자비한 대우, 매정한 거절도 우리가 인내로서 달게 받고 그 사람과 맞서서 싸우거나 불평하지 않고 겸손히 애덕으로 '문지기가 말한 것은 정말이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도록 하느님께서 시킨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레오 형제여! 그것이 바로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해 놓으시오. 그리고 우리가 나쁜 불랑배나 되듯이 욕설을 퍼붓고 뺨을 때려 내쫓으며 '여기서 썩 물러가지 못해? 이 더러운 도둑놈들아! 병원(그 근처에 있던 나병환자 병원을 말함)에나 찾아가! 여기서는 먹여주지도 재워주지도 않는다!'하고 말하게 될 때, 우리가 만약 애덕의 숭고한 정신에서 인내와 기쁨으로 이 모든 것을 달게 참아 받아 낸다면, 레오 형제여! 그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해 놓으시오. 그리고 우리가 굶주림과 추위와 어둠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다시 문을 두드리고 울부짖으며, 제발 문 좀 열어 달라고 애원할 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 파렴치족들, 혼 좀 나봐라'하고 고함치며 옹이가 가득 배인 몽둥이를 들고 나와 수도복의 모자를 잡아 쥐고는 우리를 땅에 내동댕이쳐, 눈 속에 굴리며 몽둥이의 옹이로 사정없이 매질한다고 할 때, 그래도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달게 참아 받고 복되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생각하고 즐거워한다면 레오 형제여!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해 놓으시오."(잔꽃송이 8장)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인습적인 가치들을 뒤집고 핵전쟁의 시대에 남은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는 생존을 위한 계획, 보복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 확실히 그것은 시도해보지 않은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다. 오직 두려움만이, 완벽한 기쁨은 실상 우리가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복되신 그리스도의 수난을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기쁨과인내심으로 악과 욕설과 폭행을 견디어내는 것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너무도 기쁨이 적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즉 우리는 다른 이가,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그 자신의 고통을 견디기를 원하며, 고통을 견디는 것 보다 고통을 주는 것이 더 안전하고,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특권을 가지는 것에, 먼저 공격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미에타의 매춘부 이야기는 프란치스코가 에집트에서 십자군에 있을 때 일어난다. 그는 막 술탄의 궁전에서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과 모슬렘인들 사이의 싸움의 종결을 가져 오기위해 노력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그는 홀로 길을 걷고 있는데, 그 때 그 길 앞쪽의 모퉁이에서 허름한 여관을 발견한다. 그는 피곤하고 목이 말랐으며, 그 여관은 아마도 밤이 오기 전에 그가 갈 수 있는 마지막 여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삐그덕 거리는 문으로 걸어가서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식탁엔 거칠어 보이는 남자들이 있었으며, 그리고 관능적인 여자들이 정념에 휩싸인 아름다운 나방들처럼 그들 주위를 거닐고 있다. 



그는 어색해하며 한 식탁으로 걸어가서 앉는다. 수바시오 산 위의 번갯불처럼 신속하게, 그리고 뜻밖에도 한 사랑스러운 젊은 여자가 옆에 앉아서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여관의 뒤쪽에 있는 작은 문을 가르킨다. 프란치스코는 그 여자, 실제로는 소녀이다-스무살이 안되어 보인다-에게 점젆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조그마한 손을 잡는다. 그러면서 일어서서 그녀가 그를 뒷방으로 데려가도록 허락한다. 



방은 어둡지만 깨끗하고 벽난로에선 따뜻하게 불이 지펴지는 소리가 난다. 그들은 방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소녀의 이상하리만치 순진한 눈 속을 꼼짝 않고 바라본다. 그녀는 호기심 많은 어린애 같은 기대 속에서 거의 온순해진다. 프란치스코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선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녀 앞에서 옷을 벗는데, 어이없어 하는 그 소녀를 그대로 바라본다. 그는 불타는 벽난로 옆에 눕는다. 그는 뻘겋게 달아오른 돌에 등이 닿자 겁내는 소녀를 볼 수 있다. 



그는 그곳에 전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그녀에게 옷을 벗고 그 옆에 누우라고 손짓한다. 소녀는 두려워한다. 그녀는 그가 확실히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도망가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그곳에 떨며 서 있고, 그들의 눈은 여전히 서로를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러나 불에 의해서 어떤 상처도 입지 않은 프란치스코가 일어나서 소녀가 놀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옷을 입는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 그녀의 이마에 순결하게 입맞춤을 한다. 



어리고, 지친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소녀가 그의 발에 엎드려 키스한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울기 시작한다. 그는 그녀를일으켜서 불 앞에 있는 작은 의자로 데려와 앉게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녀의 발앞 바닥에 앉아서 예수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매춘부 다미에타의 이야기는 에로스와 아가페 사랑, 성적인 욕망과 애정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통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그를 태우지 않은 불은 그 자신의 욕망인데, 이 욕망은 그를 유혹하는 여인에 대한 그의 비이기적인 사랑에 의해 변형되었다. 그는 충격 받은 경건한위선자처럼 그녀를 피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녀 앞에서 벌거벗기까지 하는 이 종류의 사랑에 그녀를 초대하며, 그녀가 자신의 오용되고 남용된 몸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뜻으로 그렇게 벗도록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이해한다. 그녀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선다. 



 우리는 우리가 존중하면서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구원하시도록 허락하는 것 안에서만 아름다운 것을 얻고 발견한다. 우리가 거부하는 것을 우리는 잃고 추함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중대한 죄는 우리가 배척하는 그것이고 우리가 행하지 않는 그것이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 42-44) 이것이 우리가 무심했던 것이며, 우리가 행하는데 실패한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중대한 혼란이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열중의 잣대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웃들을 포옹하고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용기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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