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15 친밀함

Margaret K 2017. 12. 18. 21:26

15 

친밀함

 

이미지들이 내 마음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고하얀 화면 위에 프란치스코와 눈의 사람들이 있다그는 눈 한 움큼을 모으고 있으며 그것으로 7개의 눈 덩어리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그것들을 자기 앞에 놓고 자기 몸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다‘보라이 조금 큰 것은 너의 마누라다그리고 이것들 넷은 너의 두 아들이고 두 딸이다나머지 둘은 너에게 시중들어야 할 너의 종과 하녀이다서둘러서 이것들의 옷을 입혀라얼어 죽은 지경이니 말이다이것들을 보살피는 일이 그다지도 짐스럽다면 하느님 한 분만이라도 열성으로 섬겨라.’”

 

친밀함 때문에 고통을 느낄 때 눈 가족을 만들도록 그를 움직인 것은 단지 유머였을까그가 눈 피조물들에게 말하도록 움직인 열정을 발상시킨 것이 유머였을까그가 눈 피조물들에게 말하도록 움직인 열정을 발산시킨 것이 유머였을까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일까즉 그들은 그가 만질 수 있고 말을 것 수 있는 실제의 눈이었지만그의 환상 밖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깨달음인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실제로 산 위로 그와 함께 걸었던 이들로서그들의 눈은 그들 자신의 비전 꼭대기에 고정되었으며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따로따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그들은 한 가족으로서 같은 길을 걸었는데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형제들이고 자매들이었으며친밀함의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서로를 배우자로서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남성이건 여성이건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었기 때문이다프란치스코에게 다른 모든 배우자는 어떻게 환상이 마음 밖에서 녹아 버리는가를 알게 해주며 눈사람들을 만듦으로써 없애야만 하는 눈 속의 신기루였다.

 

이 이야기 속에는 뭔가 매우 매력적이고 진실한 것이 있지만성인들이 아니고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다프란치스코의 몸짓은 우리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즉 타협과 하느님보다 다른 것에 대한 사람 때문에 갈라져 있는 마음의 중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일곱 개의 눈사람 이야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길 원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서 인간적인 사랑들 가운데 하느님이 실제로 계심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는 갈등에 대하여 너무나 쉽고지나치게 빠른 해결책으로 보인다이러한 사랑들은 눈사람처럼 녹지 않으며그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면서 스스로의 손으로 만든 관계처럼 사람이 멀어질 수 없다.

 

종종 이러한 사랑들은 우리가 찾아가지도 않고창조하지도 않지만 우리에게 선물이나 도전으로 다가온다그리고 이런 사랑들은 우리를 점점 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선택들에 직면하도록 만드는데신적인 사랑이냐 인간적인 사랑이냐하느님이냐 인간이냐와 같은 선택들을 하도록 만든다그래서 우리는 주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갈라져 있고항상 울타리를 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랑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고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우리들로부터 하느님 또는 인간이 그들의 몫을 받을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타협하고 각자의 몫을 내놓으려고 한다.

 

마음 깊은 내면 어딘가에서 우리는 사랑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정이 아니라 온갖 혼란과 고통 가운데서 주는 것이며 받아들이는 것임을 안다결국은 이러한 내어줌과 받아들임즉 끝에 가서 완전한 헌신이 이뤄지지 않지만 그래도 상호성은 성공으로 끝나는 것이다모든 서약은 사실그것이 결혼서약이든 수도서약이든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타협된 것인데왜냐하면 어떤 것도 완전히 순수하거나 명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는 선과 악의 신비를 살며그 신비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주고받는지를 자신의 잣대와 견뎌낼 수 있는 애매함의 정도에 따라 배우게 된다.

 

다른 이들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환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것이 될 수 있다하느님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그 둘 중 하나를 제외하는 사랑을 한다면 누구도 섬길 수는 없다진실한 사랑은 둘 다 포함하며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은 예수님의 육화 속에서 하나이다예수님 안에서조차도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갈등하였다“아버지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 예수 안의 인간성은 신성에 승복하나그것은 투쟁 없이 된 것도 아니며신성을 붙잡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 없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나의 하느님나의 하느님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 15, 34)

 

일곱 눈사람 이야기는 항상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데왜냐하면 그 갈등들은 성인이 얼마나 올곧은 마음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고안되고 거의 의도적으로 발명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어떤 이가 프란치스코를 우리들 위에 높이려는 열망으로 잉 이야기에서 마음을 빼 버렸다하지만 하느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얼마나 다르며얼음장 같은 심심과 얼마나 다른가그 분은 눈과 같은 피조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호세아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 하신다“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이 나라가 야훼를 저버리고 음란을 피우고 있구나...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에게 마음이 팔려 건포도 과자 따위나 좋아하는 데도 이 야훼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사랑해 주어라.(호세 1,2; 3,1-2)

 

얼마나 이상야릇한 요구인가그러나 이런 분이 프란치스코가 그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한 하느님이시며그들 둘은 그에게

 

 

 

 

 

II

 

프란치스코가 친밀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발견하려고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나는 첼라노의 토마스가 쓴 「성 프란치스코의 제2생애」란 책에 있는 다음의 구절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았다프란치스코는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원수는 육이다." 그런 후에 그는 ""이 뜻하는 것을 정의한다.

 

"육은 죄를 반성하며 아파할 줄 모르고죄를 두려워하여 예방할 줄 모릅니다오직 하나 육이 꾀하는 것은 현재를 오용하는 일입니다더욱 나쁜 것은 육은 영에게 주어진 선물을자기 소유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일이며그 영광을 자기 영광으로 삼는 일입니다더욱 나쁜 것은 육은 영에게 주어진 선물을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일이며그 영광을 자기 영광으로 삼는 일입니다육은 사람들이 덕행들에게 주는 칭찬과밤샘이나 기도에주는 경탄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합니다육이 영에 남겨 놓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자기의 눈물의 대가까지도 영에게서 받아내려고 합니다."(2첼라노 134)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육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지 않으며또한 현재를 남용한다육은 가난의가장 큰 적인 거대한 소유자인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생각에 소유함은 중대한 죄이다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하느님에게 속한 자아를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인데 하느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이다프란치스코는 칭찬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말하곤 하였다: "만일 이러한 것들을 나에게 빌려주신 그분이 다시 이것들을 물러가려고 하면 나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육신과 영혼뿐입니다이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2첼라노 133)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공을 돌리거나 실제로 하느님의 선물을 우리의 것으로 할 때우리는 거룩한 가난을모독하는 착취자가 되는 것이다이렇게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가난과 관련되어 있다실제로 하느님에게나 다른 이에게 속한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한 만큼 육적으로 산다복음서의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가난에는 애정과 따뜻함이 있으나친밀함은 프란치스코에게 무소유를 통해서 주님을 소유하기 위하여 그가 포기했던 것을 사용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친밀함이란 여자나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너무나 다르며육체를 악으로 여기거나 더 심하게는 사악한 악마의 피조물로 여기는불안정한 두려움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프란치스코의 길은 순례의 길이며그가 소유한 유일한 집은 형제 공동체 자체이고그가 지닌 유일한 친밀함은 하느님의 포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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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말을 조금 곤혹스러운 말인데왜냐하면 우리는 그 말을 ""이란 말고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실제로 육의 의미는 전혀 그것이 아니다진정한 금욕 생활은 육신과 영혼 사이의 거룩한 싸움이 아니라 육과 영 사이의 전투인데성서적으로 표현하자면 육과 영은 육신과 영혼을 형성하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란 생명과 존재의근원에 일치하는 쪽으로 향하는 것이며, ""이란 이 근원으로부터 이탈하는 쪽으로 향하는 것으로육신과 영혼을 압도하여 그것들을 모두 속박하고 중심으로부터 멀어진 곳에 머물게 할 수 있는 즉각적인 만족에대한 무의식적인 요구다육의 지배는영혼과 육신의 진실한 생명력을 빼앗는다.

육과 육신()을 같다고 연관시키기 때문에우리는 우리의악한 성향들과 방향 상실들이 육신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자동적으로 생각하는데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성 프란치스코가 생각했던 길은 더욱 아니다방향을 상실하는 것은 죄의 근원이 되는데 그것은 육이 그렇게 하며육은 영혼과 육신 둘 다에 영향을 미친다프란치스코의 전체 고행 생활은 육보다 영의 사람이되려는 노력이며그것은 순전히 영이 되기 위하여 육신으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려는 노력이아니다육에 복종할 때 우리는육신과 영혼을 잃게 되며영에 복종할 때 그것 둘 다를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육은 육신이 아니고 영은 영혼이 아니며프란치스코의 삶에서 진짜 전투는 육과 영 사이의 전쟁이며육신과 영혼사이의 전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본다 해도여전히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삶에서 육신을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자신의 육신에 대한 폭력이 그에게 있었다그는 자신의 몸을 너무도 힘들게 했기 때문에 말년에 이르러서 몸에게 사죄하며 애정 가득하게 형제 당나귀(고집쟁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의 극단적인 고행과 금욕은 어떻게설명될 수 있는가그는 몸을 천성적으로 눈에 멀고 이기적인 것으로움켜쥐고 소유적인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표현으로자신의 만족에만 전념하는 어떤 것으로 보았는가그의 고행들은 본능을극복하는 의지육신을 극복하는 정신의 지배에 관한 구체적인 표현들인가아니면 그것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이 작용했는가?

 

나는 프란치스코의 고행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그리스도께 대한 프란치스코의 사랑은 너무도 근본적이므로그는 사랑 받으시는 자의 고통을 경험하고너무도 그리스도와 일치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가 고통당했던 것을 "마음속으로부터"알게 된다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온 영혼과 마음과 정신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전념하지만그의 변덕스러운 마음은 그 자체가 몸의 "이기적인요구를 계속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적어도"민감한사람에게는 균형 잡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그것은 하느님을 벌주시고 잔혹한 분으로 보이게하는데마치 그 분이 우리에게 모든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인간의 충동과욕구를 억압하고 부정하며 쓰러뜨리기를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그리고 어떤 면에서 프란치스코는 덜 가책적인 우리들에게는 비이성적으로 보인다그는 사랑에 있어 영웅이고그의 말과 행동은 사랑에 의해 마음이상처입고사랑 받으시는 자의 향기에취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다다른 사람들에게 그 영웅적인 연인은 약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점차 "사랑에 빠지는광기로부터 "사랑"의 온건함과 적당함으로 돌아가는 연인으로 보인다그러나 그런 일이 프란치스코에겐 일어나지 않는다그는 처음으로 사랑에빠진 것을 경험하고 있는 젊은 연인처럼 일생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졌다.

 

하느님께 대한 결단과 사랑이 너무도 중대하기 때문에 그는 인간적인 친밀함에 대한 깊은 갈망이나 하느님보다 다른 누군가와의 일치를 더 깊게 갈망하는 것이 자신의 몸을 통해서나타날 때마다 폭력적으로 반응한다그는 극복하려고 투쟁하면서 육에 응답을 하기 위해 몸을 벌한다그는 영혼과 육신을 영에 승복시키려 하는데그래서 투쟁의폭력성은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형제 당나귀(고집쟁이)에 대한 육체적인 벌에서 명백히나타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항상 그런 행동에대한 동기는 사랑기지 자기 협오는아니다그것은 신비주의자의 사랑이며그 사랑은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야고포네 다 또띠 시인에 의해서 나무도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사랑사랑이여내 마음은 심하게 부수어졌소,

사랑사랑이여나는 너무도 상처를 입었다오,

사랑사랑이여그대의 아름다움은 그대에게로 나를 끌러당기오.

사랑사랑이여나는 그대에게 온전히마음을 빼앗긴 다오.

사랑사랑이여나는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다오

사랑사랑이여내 정신은 그대와 하나가 된 다오,

사랑이여그대는 생명이며그대로부터 분리 될 수가 없다오.

사랑이여왜 그대는 그것을 그토록동경하게 하고껴안게 한단 말이오?

사랑사랑갈망하는 예수여나는 당신을 포옹하며 죽고 싶소,

사랑,사랑,예수여내 달콤한 배우자여:

사랑사랑이여나는 당신께 죽음을 청하리오.

사랑사랑너무도 즐거운 예수여당신은 내게 당신 자신을 주시며,

당신 안으로 나를 변하게 하신 다오.

나는 내가 기운을 잃게 될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사랑이여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요.

예수여나의 희망이시여사랑의 심연 속으로 나를 떨어뜨리소서.

 

 

 

IV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젊은이였을 때 그를 곤란하게 한 친밀함을 하느님께 서약한 생애를 통해서 이룬다이것은 내가 친밀함에 대한 내 자신의 투쟁 속에서 짐작해온 사실인데이 책을 쓰면서 더 선명해졌다프란치스카 나에게 준 삶의 길은 하느님과 사람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는 진정한 친밀함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사람이 약속한 서원을 넘어서 친밀함을 구하는 것은 서약한 삶 자체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며친밀함은 이미 우리가 지키기로한 약속에서 포함되어 있다여기에 중대한 신비가 있으나나는 가난과 정결과 순종의 바로 그 핵심에 우리가 삶의 다른 곳에서 그렇게나 애써 찾았던 일치가 있다고 믿는다.

 

복음적 생활은 사랑의 뿌리들을 정화시키고 가난을 단테의 베아뜨리체처럼 귀부인으로 변형시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한다순종은 우리를 깊게 피조물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그것들을 새롭게 보고 찬양하도록 변화시킨다:

 

"나는주님당신을 당신의 생명으로 고동치고 있는 모든 것 안에서모든 내 동료 피조물들 안에서 발견합니다당신은 한 조그마한 씨앗처럼 작은 것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며 광대함안에서는 광대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힘이 사물들과 놀고 있는 불가사의한 게임은세상 전체를 그러한 순종아래 움직이게 합니다죽은 것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뿌리들속에서 더듬으며 줄기와 나무 꼭대기에서 울창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결은 우리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와 어머니가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프란치스코와 눈사람에 관하여 고통스러운 문장들을 쓴 지가 거의 반년이 되는데지금 보면 여름에 쓴 말들은 지나치게 부풀려졌거나 군형이 안 잡힌 것처럼 보이며마치 내가 홀로 하느님께 속한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친밀함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 중심점을 주고 자리를 부여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실제로 생활 속에서도 글로 쓰는 경우처럼친밀함을 차자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추구를 빼앗을 수 있다문제는 하느님께서 "저기 바깥"이 아니라 안에 계시며인간으로 육화했다는 사실이다그래서 오래된 질문이 되돌아오고 하느님과의 친밀함이 다시 한번 인간의 얼굴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친밀함에 신학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육화 그 자체이나 성적인 것에 대한 현대의 관심 때문에 "친밀함"이란 말은 어떤 상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친밀함의 경험이 포함하거나 포함하고 있지 않은 기대감을 낳는다성적인 행위가 필연적으로 친밀함을 포함하지 않듯이친밀함도 성적인 행위를 내포할 필요가 없다친밀함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성 그 자체로서남성성과 여성성을 포함한다우리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남자 혹은 여자로서 사랑하는 것이지 성 없는 자동기계로 사랑하는 게 아니다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제약은 우리 자신처럼 그분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하느님의 계명과우리가 그 분과 다른 인간에게 한 약속이다상식과 우리 자신의 선한 마음이 보통 그 나머지를 채운다.

 

우리 현대인들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 안으로 깊게 내려가는데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중세인들은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하여 피조물의 거울이나 창조주의 거울인 그들 스스로를 들여다본다그들은 피조물 안에서 자신들을 반영하고 자신들 안에서 하느님을 반영한다그들의 세계는 플라토닉하고하늘의 이상적인 형상을 반영한다프란치스코가 만든 눈사람들은 그가 주님께 했던 약속들을 볼 때그의 환상들이 지닌 광기를 보여주는 거울들이다.

 

그러나 아마도 눈 부인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거절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한 요인은 다른 여인인 매혹적인 가난 부인에대한 사랑이다그의 무의식의 심연에서 나온 이 여인은 지금까지 그가 상상도 못했던 삶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그녀는 시야에 보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언제나 앞서나간다그녀는 소유 될 수가 없는데왜냐하면 그녀는 무소유의 인격형이기 때문이다그녀는 길이요 종점이며 완성이고 동시에 상실이다그리고 프란치스코 안의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그녀의 첫 번째 연인들의 발걸음으로 날인된길에 의해서 하느님 안으로 그를 부른다:

 

"나는 한때 나의 하느님의 낙원에 있었습니다그곳 사람은 나체로 걸어 다녔습니다사실 나도 그 곳에서 벌거벗은 남자 안에서 남자와 함께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현란한 낙원을 휘젓고 다녔으며 나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의심할 수도 없었으며 두렵지도 않았습니다그 사람은 지존하신 분으로부터 옳고 착하고 지혜롭게 만들어졌었고가장 쾌적하고 가장 아름다운 곳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나는 그 남자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나는 너무나도 즐거웠고내내 그의 앞에서 뛰놀았습니다사연인즉 그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께만 속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거룩한 교제 25)

그런데 악이 그 낙원에 들어왔으며 우리는 순결함을 잃었고 가난 부인은 지상위로 도망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울며불며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그 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그 밖의 선조들이 부자가 될 약속을 받게 되었고 나는 발을 붙이고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는 안식처를 물색했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수소문하여 나를 찾아 나서신 지존하신 분께서 성부의 품을 떠나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까지 나는 어디고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거룩한 교제 30)

 

형제들 자신들이 왜 그들이 그녀를 사랑하고 일생동안 그녀를 구하는지 그녀에게 설명하는 것처럼가난 부인의 진정한 배우자가 되시는 분은 예수 자신이시다:

 

"지존하신 성부의 아드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움에 이토록 매혹되어이 세상에서는 당신하고만 하나 되셨고 당신만 신뢰할 수 있는 여인으로 전적으로 맞아들이셨습니다가장 믿음직한 내조자요가장 부드러운 연인인 당신은 잠시도 그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더구나 그분이 누구에게서나 멸시를 받고 있는 것을 볼 때그럴수록 당신은 신의를 지키며 더욱 그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당신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그분은 그렇게까지도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그분이 하늘나라로 떠나가실 때뽑힌 이들에게 날인할 도장을 당신에게 맡기셨습니다그 결과 하늘나라를 원하는 사람은 당신에게 와서 하늘나라를 애원해야 하고천국에 들어가려해도 당신을 통해야만 되었습니다그 까닭은 당신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거룩한 교제 19-21)

 

가난 부인이 형제들에게 주는 응답은 프란치스코의 독신 생활에 대한 근거가 되며 왜 그가 심지어 아내와 자녀들까지 소유함이라고 여겼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그분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소유라고 부를 만한 아무 것도아무 사람도 없이 걸어가는 것을 뜻했다.

 

"지존하신 분께서 일을 마치시고 당신을 보내신 성부께 돌아가시려고 할 즈음에 신심 있는 뽑힌 자들에게 나에 관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마태 10,9) '여행하는데 아무 것도 자니지 말 것이니자루나 전대나지팡이나 신발은 물론 여벌 내의도가지고 다니지 말라.'(참조 마태 10,10; 마르 6,8, 루가 9,30 '누가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누가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5,40-41) '재물을 땅에다 쌓아 두지 말아라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마태 6,19)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마태 6, 31)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34)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33)'(거룩한 교제 31)

 

성서에서 발췌한 이 구절들은 가난 부인과 계약을 "k은 형제들의 말씀들이 되었으며그리고 글자 그대로 그것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정의와 진리의 태양 앞에서 녹아 없어지는 단순한 눈의 모습이 된다.

 

 

 

V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인간성의 충만함은 예수의 자기 비우심으로 표현되는데그럼으로써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는 비움의 역설이 인간이신 하느님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져지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그 중심을 두는데그분의 인간성은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분의 탄생과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죽음으로 가장 명백해진다이 두 가지 사건은 프란치스코 영성의중심에 있다.

 

사실 우리가 성탄구유나 고통당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십자고상을 갖게 된 것은 우리를 위해서 탄생하고 돌아가신 하느님께 대한 프란치스코의 강렬한 사랑에서 유래한다예술가들이 그리스도로서의 아기를 형상화시키는 대신 진짜 아기를 양육하는 인간 마리아를 보고 그리기 시작했던 것은 프란치스코 때문이다그리고 프란치스코 자신이 거룩한 오상인 그리스도의 상처로 각인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프란치스코의 삶이 친밀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하지만 그 친밀함은 스스로를 비우시는 예수께 대한 모방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한 친밀함이었다프란치스코는 인간적인 친밀함에 매달리는 것을 거절하였으므로 더욱더하느님과 친밀해질 수 있었다마치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친밀해지기 위해서 그분의 신성에 매달리는 것을 거절하셨던 것과 같다프란치스코는 예수에게 탄생이 죽음이고 죽음이 탄생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그 역설은 우리가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겉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모든 것 이면에서 동기를 주는 진리가 되었다.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적인 신비를 더욱더 깊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죽음인 동시에 생명인 것처럼탄생이 생명인 동시에 죽음이라는 역설을 구체화한 때문이었다그가 발자취를 따라서 걸었던 예수처럼프란치스코는 모순의 한 표지이며자신을 비우시는 하느님의 심오한 역설의 빛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그의 삶 안에 있다.

 

자기를 비우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프란치스코의 전적인 사랑의 대상이다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사랑하는데하지만 이 하느님은 또한 인간적이시기 때문에그분을 사랑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인간적인 것의 의미하는 모든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나의 하느님 그리고 나의 전부'라고 기도 할 때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고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신"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아니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8)

 

예수 그리스도는 프란치스코에게 너무나 실제적이었고 그분께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나 인격적이었기에 다른 누군가와의 친밀함은 그 사랑에 대한 배신이 된다그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은 인간성을 거부한 것이 아니며그가 사랑한 하느님께서 신적일 뿐 아니라 인간적이시므로 다른 인간존재를 친밀하게 사랑하는 것은 가난과 순결과 그리고 순종의 서약에 대한 불충실이요 위배가 된다프란치스코는 이 세가지 서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여인들을 향한 프란치스코의 태도는 요셉을 향한 마리아의 태도와 유사하다마리아는 요셉과 성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다그것은 성적인 친밀함에 어떤 본래적인 악이 있거나 하느님의 어머니답지 않은 무엇이 있어서라기보다 마리아가 이미 성령과 결혼하였고 그 성령의 의해서 예수를 임신하고 있기 때문이다프란치스코도 그렇다예수와 그의 관계는 형제 그리고 어머니 그리고 정배처럼 친밀하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아버지를 하늘에 모시게 되는 것은얼마나 영광된 일인지위로되시고 아름다우시고 감탄할 만하신 정배를 배우자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아버지의 마음에드시고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시고 달콤하시고 사랑할만하시고 또한 무엇보다도 바랄만한 그러한 형제와 아들을 모시는 것이 오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일인지."(2 신자54-56)

 

프란치스코의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발췌한 친밀함에 대한 구절들의 언어는 그 강렬함에 있어 거의 비틀거릴 지경이다하느님께선 연인이시고 형제이시고 그리고 아들이시다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분과 사랑을 하며우리는 그분처럼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며심지어 우리는그 분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도록 모시고 온다프란치스코의 말들은 자궁과 같은 생식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는데하느님과 그의 관계에는 어떤 상실이나 비생산이 전혀 없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함께 하는 나의 여정은 그곳으로 이끌려간다나의 버질인 그는 마찬가지로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으며나 자신의 옆구리 속으로 나를 이끌어 자궁을 만들고 그곳에서 나는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 있는 뽀족탑처럼 "바깥 저쪽어딘가에 계시다고 생각했던 하느님에게 연인이며형제이고어머니가 된다하느님은 자궁이시며 오직 그분 안에만 온전한 친밀함즉 인간적이고 신적인 친밀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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