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를 살기

제 8장 육화의 육화

Margaret K 2017. 12. 18. 21:11

육화를 살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 함께 기도하기

Frances Teresa OSC

김찬선 레오나르도 역


 8장 육화의 육화

 

죽기 2년 전 프란치스코는 성령의 인도로 사막에 갔다거기서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과의 친밀 상태에 도달했고 아주 드문 방식으로 하느님을 맛보게 되었다진실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탈과 이별의 종말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주어지는 그 완전한 일치를 갈망했다우리는 하느님을 그와같이 사랑하지 못하고 심지어 갈망조차 하지 못하지만 그에 대해서 읽을 때 우리는 그 산의 정상을 흘낏 보고 그 광경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리라 추측한다비록 그것이 지속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도달하기를 원한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다고 느끼건 상관없이하느님께는 너무 무례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큰 갈망을 가지는 것은 옳다고 이야기하곤 했다그는 우리가 비록 하느님과 관련한 이러한 갈망의 대담성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음을 자주 우리가 더 나무랄 수도 있지만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이다.

 

그 사막에서 끝없는 갈망의 프란치스코는 그의 은둔소 작은 경당에 복음서를 가지고 들어가 제대 위에 놓았다그리고 그는 일찍이 시작한 바를 완수하기 이해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청하였다그런 다음 그는 일어서서 십자 성호를 긋고 복음서를 펼쳤다성인들과 가장 완덕에 이른 사람들은 같은 행동을 하였다고 첼라노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에서 우리는 그가 이런 절차에 대해 거의 확신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프란치스코는 그의 생애에서 이런 일을 여러 차례 하였고 신뢰심을 가지고 응답대로 행동을 하였지만 첼라노는 자기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프란치스코가 합당하고 전통적인 성인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갈망을 결코 많이 내보이지는 않았다프란치스코의 태도는 아주 단순한 것이어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라는 것이다하느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면 그는 그 때마다 성경을 펼쳤는데작은 결정을 해야 할 모든 순간이 아니라 그의 인생의 전환점 때에만 그리 한 것처럼 보인다그는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이다우리는 이에 대해 하느님의 충고를 청해야만 한다고 말하곤 했다.

 

첼라노의 그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기록을 통해서 프란치스코가 성경의 메시지에 얼마나 감동 받았는지를 여전히 들을 수 있다오랜 세월의 씨름은 이제 열매를 맺고 있어서 그는 마른 부싯깃처럼 불의 하느님 앞에 서 있고 말씀이신 분의 말씀들이 그 손 안에서 펼쳐진다그가 처음으로 읽은 것은 그가 환난을 당하리라는 것이었다거듭거듭 책을 펼쳤고 그 때마다 같은 기사가 나왔다이 약속 때문에 그는 흔들림이 거의 없었고사실 그는 행복감으로 노래를 불렀다다른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가 노래한 것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많이 그의 삶의 한 부분이 되셨는지 묵상함으로 행복할 때였다하느님은 동 떨어진 차원의 하느님이 아니고기도 안에서만 그리고 고차원적인 순간에만 누군가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보다는 사랑하고 느끼고 관계를 맺는 인간적인 모든 선물들 안에 두루 스며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것들의 한 부분으로 계신다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다른 존재들 인간과 짐승들에게 풍성히 나누어 주었다자기 초월의 은총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하는’ 은총다른 이의 사랑의 힘을 통해 자신들보다 더 위대해지는 은총이 바로 그것이다그는 자기의 믿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알았고두려움을 가지고 하느님께 다가가기도 하였지만 친밀감과 평온함과 매우 단순한 행복감을 가지고 다가가기도 하였다.

 

얼마 후 다시 기도할 때 그는 자기 위에 서 있는 한 사람한 눈에 이사야서의 세라핌이 생각나게 하는 한 사람을 보았다이사야서의 세라핌 천사는 둘은 얼굴을 가리고둘은 발을 가리며둘은 날아다니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이사6,2). 프란치스코의 환시에서 관심의 초점은 신비로운 신성의 상징 그 자체인 세라핌 천사의 날개가 아니라 세라핌과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를 오가는 듯한 환시 방식이다뻗은 손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발은 모아진 채 못 박혀 있었다고 전해진다따라서 이 환시는 분명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우선이지만 그분의 인간적인 상처들이 천사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흡수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시였다.

 

여기서 우리 어려움 중의 하나는 누구도 세라핌이 무엇과 같은지 아니 무엇인지조차도 참으로 모른다는 것이다이 명사는 그 어원이 불분명한 히브리말의 라틴어 형태이지만 민수기 21장의 불 뱀과 같이 독침의 의미를 지닌 불타오름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신비적인 사상들이 스며들어 이 말은 사랑으로 불탐과 더 연관성을 지닌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세라핌 천사는 하느님의 옥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러므로 가장 높고’ 가장 열렬한 영들로 여겨지고 있다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의 덤불에서 타는 불과 같이타지만 결코 다 살라버리지 않으면서상상이 안 가는 방식으로 타오르는 최고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프란치스코의 환시에서 두 손은 펼쳐져 십자가에 못박히고 두 발은 모아져 못박혀 있을 뿐 아니라 세라핌 천사의 두 날개는 머리 위로 펼쳐졌고두 날개는 날기 위한 것인 듯 펼쳐졌으며나머지 둘은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그러므로 이 환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하느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프란치스코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할 수 있기를 청했지만 동시에 수난 전체를 관통하여 그리스도를 몰아가고 동기를 주었던 그 사랑에 할 수 있는 한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청하기도 하였다이것은 글라라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응시하며 그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찾는 것즉 우리가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대에 의해서 들어가게 되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피안의 세계가 항상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느님께서 주신 응답이었다이때의 프란치스코에게 이 피안의 세계는 구속적인 사랑과 사랑의 고통에서 더 나아간 새로운 시도의 형태를 취한다.

 

이 환시는 프란치스코의 청원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고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전 신비를 아우르는 형식의 응답이었다이 환시는 고통과 구속은 서로 맞물리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며이론적으로는 윤곽을 제시하지만 실천적으로는 움츠리는 그 무엇을 보여주기도 하고하느님 안에서 온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도 끌 수 없는 그토록 큰 사랑 안에서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음을 보여준다이것은 우리의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거나 비록 자주 의미 있는 것처럼 느낄지라도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진정 고통 가운에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의 고통은 하느님의 큰 칭찬을 받고 존중되며 하느님 존재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권리가 되고 어떤 면에서 천상적 삶의 한 부분이 됨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그렇지만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기쁨이 하느님의 본질즉 하느님 존재 그 자체라는 것도 진실이며인간화하여 말하면 우리가 바로 그러하듯이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어떤 조절을 하신다는 것도 진실이다하느님 안에서 솟아나는 모든 기쁨은 하느님께서 멈추게 하셔야만 멈춘다그 고통과 기쁨은 함께 있을 수 있고프란치스코의 환시 안에서 이것이 드러나는데 그와 같은 것이 우리 각자에게도 있다이것을 다른 말로 반복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나누도록 초대받고 있다불타는 사랑과 고통의 엄연한 사실 외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세라핌 천사는 양극을 나타내고 있는데하나는 빛나고 신비로운 존재 안에 있는 신적인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못박힌 형상 안에 있는 인간적인 고통이다세라핌 천사는 위의 두 측면을 함께 지닌새 하늘과 새 땅의 선구자를 보여준다많은 사람의 맏이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고위대한 왕의 사신(herald of the Great King)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새로운 창조의 선구자( herald)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환시로부터 돌아왔을 때 프란치스코는 세라핌 천사가 그를 바라볼 때의 기쁨과 못들과 환시 중의 그 예리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꼈다그는 슬픔과 기쁨으로 가득 찬’ 그의 두 발로 일어섰다그가 본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씨름을 하는 동안 못 자국들이 방금 전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세라핌 천사에게서 본 것과 똑같이 그의 손과 발에서 드라나기 시작했다마침내 그의 손과 발은 관통한 것처럼 보였고못대가리는 그의 손바닥과 발들에 나타났으며 그 반대쪽에는 못의 뽀족한 끝부분이 구부러지고 살 위에 솟아 올라온 것이 보였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프란치스코 이후 그들의 몸에 그리스도의 상처인 오상을 받은 사람들은 여럿있지만 만일 프란치스코가 그 처음이라면 –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 그것은 모든 면에서 일상생활의 결과와 함께 그에게 큰 충격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상처들이 고통을 주는지 물었을 때 비오 신부는 농담으로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셨다고 대답하였다그 일이 있은 다음 프란치스코의 행동을 보면 우리는 극단적인 충격을 받은 사람의 모든 증상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감수하려고 애쓰는 한 사람을 보게 된다그는 상처를 가리고그것들이 야기할 문제들을 피하며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거부하고그에 대해 토론을 하도록 압박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모질게 답하곤 하였다한 번은 어느 형제가 그것이 무엇과 같은지 물었는데프란치스코는 그의 눈을 가리키며 이것이 눈과 같다면 그것은 그것과 같다고 말함으로써 그 형제가 자기 스스로 대답을 하게 만들었다한 동안 그는 심하게 의기소침한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처럼 보였는데그의 마음 안에서 불타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이 체험이 일상의 방식으로 기도하려는 일상의 그리스도교인에게 별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음에도 프란치스코의 오상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무엇인가가 참으로 있음은 그럴만한 여러 이유가 있다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는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에서 그분의 현현이 되고그리스도처럼 되라고 부르심 받은 것이며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초대받은 것이다기도생활을 더 깊이 그리고 더 많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임을 이해하는 한 편그때 은총은 그리스도의 생활방식을 훨씬 더 본받도록 우리를 꼼빡 못하게 인도하고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된다그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실주의를 가지고 이해하시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 당시에는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기도 생활을 뒤돌아보면 죽음과 부활의 우주적 형태들이 어떻게 우리의 작은 일들 안에서도 작용하고 있는지를 가끔 볼 수 있게 된다대단한 신비는 놀랍게도 일상의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낸다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말씀이셨듯이 우리도 같이 되라고 초대받고 있다이 사랑과 통교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이야기하라고 초대된육신 형태의 하느님 사랑이 되라고 초대받고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그러면 우리가 너희를 찾아갈 것이고 너희 안에 머물 것이다.”(요한 14,23)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맏이이시고장자이시며첫째이시다우리는 그 많은 사람이다프란치스코처럼 우리는 점차 육화의 육화가 된다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프란치스코는 다른 이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됨으로써 자신의 사도적 소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것이 단순한 요한이 프란치스코의 행동을 흉내 내어 프란치스코가 코를 문지르면 그도 문지르고프란치스코가 돌아서면 그도 돌아선 이유이다이것이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비추는 거울이 되라고 한 것이다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고백한 그 길(그리스도)을 따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야 할 이 책임을 가지고 있다우리는 성공해야 할 필요은 없고우리의 실패를 인정할 채비가 되어있음을 종종 바른 대답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도적 확신이다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며 정하신 때에 하느님께서 완성하신다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유사성이 대단하건 보잘것없건 간에 때가 되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오랫동안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오상을 심지어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마저 숨겼는데도 하느님의 섭리는 그 상황이 지속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상처들이 보여지고 현재적으로 이해되게 하셨다하느님께서는 작고도 구체적인 일들을 통하여 그토록 자주 그리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면서 당신의 업적을 드러내신다옆구리 뿐 아니라 손과 발에도 상처가 있음을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한동안 그 상처들을 숨기기 어렵게 만들었다걷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모두가 볼 수 있었고 손을 가리기 위해 옷소매를 내리곤 하였음을 모두가 볼 수 있었다씻게 될 때 그의 거북스러워함은 눈에 뜨는 것이어서 그는 드물게 그렇게 하였다!’고 전해진다옆구리 상처는 상대적으로 감추기 쉬웠지만 다른 상처들에서 처럼 계속 피가 흘러 나왔기에 세탁을 하는 형제들은 의야해 하였다그들이 직간접적으로 물었지만 프란치스코로부터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프란치스코의 침묵은 그로 하여금 며칠 뒤 매미를 놓아 보내게 했던 것과 같은 자기 인식에 일부 기인한다그는 자신이 무엇과 같은지를 알고 있었고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서 이루신 일들로 자신을 얼마나 잽싸게 칭찬할지를 알고 있었다그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업적을 저하시킬 수도 있는 안락함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그 이상의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었을까이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거나 덧붙일 수 있을까?

 

프란치스코는 1224 9월 레오 형제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며 자기 존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말들을 써내려 가는 것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당신은” 홀로 거룩하시오며,

기적을 하시는” 주 하느님이시나이다(시편 76,15)

 

당신은 힘세시고 위대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극히 높은 분이시며 전능한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거룩한 아버지시며 하늘과 땅의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삼위이시고 일체이시오며 신들의 주 하느님이시나이다.(참조시편 135,2)

당신은 선 자체이시며 모든 선이시며 지상 선이시나이다.

당신은 살아 계신 주님이시오며 참 하느님이시나이다.

 

당신은 사랑이시오며 자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오며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오며 아름다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온화이시오며 안식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평화이시오며 기쁨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오며 즐거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정의이시오며 절제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를 흡족하게 하는 온갖 보화이시나이다.

 

당신은 아름다움이시오며 온화이시나이다.

당신은 피난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보호자이시오며 방어자이시나이다.

당신은 힘이시오며 휴식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오며 우리의 믿음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사랑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온전한 감미로움이시오며,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나이다.

위대하시고 감탄하올 주님,

전능하신 하느님자비로운 구세주이시여!

 

이 찬미는 자신의 넘치는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의 말이요놀라움에 대한 지극한 단순성의 경지에 오른 사람의 말이다이 찬미는 우리의 기대들즉 자신의 관점을 시로 표현한 것이리라는 기대오상을 받아 지닌 자의 경험을 시로 표현한 것이리라는 기대세라핌 천사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보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거나 심지어는 그분과 이야기하는 내용일 것이라는 기대를 한데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그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에 대해서그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놀라움을 짧고도 반복적인 형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여기서 듣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었을 뿐 아니라 마치 그리스도께서 보시듯 하느님과 세상을 보면서 한 순간 십자가의 시선을 나누어 가진 것처럼 사고방식과 내적인 태도에서도 그리스도를 옷 입었던 것이다그리고 그 바뀐 통찰로부터 하느님께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은 거룩하시나이다당신은 삼위이시고 일체이시나이다당신은 지상선이시나이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시고 다른 모든 것도 아름답다하느님은 지혜이시고겸손이시며인내이시다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지혜로워지고겸손하게 되고인내하게 된다하느님은 생명이시고그래서 우리는 살아간다.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나그네와 순례자’(에페 2,19; 1베드 2,11; 레위 25,23)로서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고 성삼위의 마음 안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것 같다그리고 한 순간 우리도 사로잡혀 우리가 편하게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형언할 수 없는 바다의 한 끝에 서 있게 된다그의 말은 모든 것 안에 잠겨 있는 것으로부터 솟아나온 말이며같은 말을 거듭 반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도 풍요로운 것을 본 사람의 말이지만 다른 한 편 매번 다른 말이기도 하다이것은  Richard Rolle이 느낀 바그 불타는 사랑을 타는 사랑이요타는 사랑이여!”하고 반복한 것과 같은 것이고 파스칼이 불이여불이여불이여!”하고 반복하여 적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이제 프란치스코의 말들은 느릿느릿해지고 더듬거린다우리는 말씀이신 분의 말들을 듣고이 경우 프란치스코는 침묵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말씀 그 자체를 듣는 것이다.

 

그의 찬미가를 우리의 기도 안에 삽입하여 하루 내내 반복하여 사용하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보고 말한 것이 우리 안에서 확신되게 하고그의 말들이 그 대단한 열기를 우리 안에서 타오르게 한다반복적인 기도로 말들을 그런 말을 하게 한 태도를 형성하고 프란치스코 안에서 표현한 것을 우리 안에서 다시 표현하게 된다이 말들은 우리를 신비로 이끌기 시작하고 친밀감으로 말들을 더 파악하기 쉬워지기보다는 덜 쉬워지는 것처럼 보인다우리는 말이 의미하는 그 시초부터 무한에 이르기까지 인도되면서 말들이 의미하는 것이 우리에게 점점 더 확실해지기도 하고 점점 덜 확실해지기도 한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은 하느님은 신비이시고우리가 하느님께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진실이면서 동시에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러므로 가장 단순한 말이 최고이다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시고지혜이시며사랑이시고모든 선이시라고 하는 그 말을 참된 의미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다하느님에 대해 프란치스코가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음도 분명하지만 우리 누구보다도 더 분명하게 하느님의 놀라우심과 불가해함을 보았음 또한 분명하다더 많이 알수록 그는 아무 것도 모름을 더 많이 깨달았고더 많이 사랑할수록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더 마음 아파하였다그때까지 그는 하느님은 자신이 표현하는 말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최고의 말들을 취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그때부터 하느님께 대해 그가 우리와 진정으로 나누는 것은 자신의 육체 바로 그것이었다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빛나는 얼굴을 받아 시나이 산에서 돌아온 것처럼 프란치스코도 번쩍이는 육체를 가지고 라베르나에서 돌아왔다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모방은 거의 완벽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체험은 우리 모두가 불림 받은 것의 가시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육화의 육화가 되도록 불림 받았고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을 가능케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실 때 그리고 그에 대해 우리가 감사할 때 우리는 대체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다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지만 하느님과의 일치에 초대 받았다는 것에 놀라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에 깜짝 놀라게 된다우리의 문제는 그리스도가 계신데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 매우 모호함을 느낀다는 것이고, (구원 받았지만죄인이라는 개념과 (죄인이지만구원 받았다는 두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하느님께서 우리를 염려하신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렴풋이 느낀다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희망과 갈망을 가지고 계심을 서서히 깨닫는다무엇보다 가장 극적인 역전은 우리가 비록 신적인 것을 나누도록 초대 받았을지라도 우리 본래의 인간성 때문에 불림 받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하느님께서는 인간성을 하나의 실수잊혀져야 할 하나의 시도은총의 도움으로 이제는 제쳐놔도 되는 우리 발전의 한 단계로 여기신다는 어떤 생각도 없다그것이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 될 수 있지만 하느님은 그것보다는 우리의 모든 약점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되고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처럼 되건 상관없이 우리의 약점과 그와의 싸움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는 것임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가 되라고 부르신다있는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God who is in what is)은 결코 실제를 부정하지 않으시고우리 실제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죄 많은 인간 행위의 결과이다프란치스코의 오상은 구원의 의미란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약함에 맡겨졌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체험이 프란치스코에게는 무엇과 같았을지다른 분(the Other)과 같을 정도로 어떻게 자기 너머에 마음이 끌렸는지 우리는 놀라워 할 수도 있다이것은 사실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변하여’ 동굴에서 나왔을 때 이미 작은 형태로 일어났다그리고 자기를 내어줌과 자기를 넘겨줌은 분명 이때 그 정점에 도달하여 자신이 모방하는 그분의 완전한 자기 내어줌을 반향하고 있었다이를 반향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하나는 오상에 의해 그리고 오상을 통해 프란치스코는 질적으로는 아니지만 양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무엇을 경험했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은(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의 유일한 경험은 이것이지만 이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사랑의 성적인 일치 경험이다우리를 가장 하느님 같게 하는 행위가 바로 사랑과 창조임을 성찰할 때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세월이 가면서 서로 사랑하는 배우자들이 서로 닮아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이것은 프란치스코에게 일어난 일이 아주 기괴한 일이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우리는 이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보다는 인간관계 안에서 작용하는 것을 보는데 익숙해 있고몇 가지 이유로 우리의 원형이요 원천이신 분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계 형태들이 어떤 기능을 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인간성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같을 때에만 사랑 받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지 말아야 한다하느님은 참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우리 모든 인간 존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있는 곳에 계시는 것을 기뻐하신다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양들의 드나드는 문이요길이요여정을 밝히는 빛이요인도자요목자요시작이요 마침이라고 말씀하신 그 양들인 우리 안에 머무시지만 우리를 대신하시는 분은 아니다우리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랑을 받아 왔다.

 

사랑은 깨닫기도 어렵고 응답하기 어려운데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우리에게 확실치도 않고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도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훌륭한 행동만이 무한하신분께 대한 우리의 모든 응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많은 사람에게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인간적인 감정의 자리에 대한 문제이다이 문제는 우리가 그저 기도만 하는 그런 영성에서 하느님이 우리 삶의 현존과 갈망이 되시는 존재로 옮겨갈 때 더 첨예하게 된다우리 자신이 모호한 실체(ambiguous body)로 자신을 표현할 때 어떻게 실체가 없는 하느님(disembodied God), 더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대부분의 우리 관계 맺기는 남자 또는 여자로서 자기인식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하느님에 의해 직면하게 되거나 하느님을 직면할 때 이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성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그것은 우리 성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우리의 첫째가는 조건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 앞에 이와 같이 존재하는 것을 수줍어한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영원한 사랑의 영적인 기교를 새롭게 배워가는 남자 또는 여자로서가 아니라 위를 향하는 눈을 가진 고상한 자아로서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런 개념은 즉시 우리에게 문제를 제기한다우리의 물리적 현존을 그처럼 높지 않고신학도 이런 관점에서 항상 자유롭지 않다사실 엄격주의적 신학은 감정들이 문제가 아니라문제가 되는 것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즉 사랑으로 불타는 것이 신비가들에게는 항상 좋지만 신자들에게는 얼마간 위험하다는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감동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그 사랑이 육체 안에서 요동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육체가 바로 우리이고 우리를 담고 있는 우리의 껍질이 아니기 때문이다비록 프란치스코가 이런 말로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친 교훈은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 완전한 신뢰를 두라는 것이다그 신뢰는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대하고 사랑할지를 알고 계시며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조화를 이룰지 알고 계신다는 신뢰이다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겼을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고 프란치스코를 위해 역사를 하였다.’ 하느님이 없으면 큰 위험에 처하는 자신을 알고 있었기에 프란치스코는 후일 나는 아직도 아내와 자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고 말하여 형제들을 놀라게 했다우리 대부분은 너무 사랑하거나 부적절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짓기 보다는 충분히 사랑하지 않거나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 죄를 짓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이 사랑의 영역에서 죄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사랑함의 죄가 아니라 이기주의의 죄이다우리에게는 자기를 내어줌보다는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는 육체에 너무 집착하기도 하지만다른 한편 육체에 대한 크고도 타고난 두려움도 가지고 있다종교는 어떤 때 육체나 사회를 부정하는 식으로또는 둘 다 부정하는 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왔다그러나 종교가 사회의 관심을 공유하면서도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거기에 균형점이 있다종교는 인간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의 일치에 대한 타고난 갈망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끊임없이 구원과 초월로 이끌어야 한다이것이 하느님 안과 밖의 경계를 넘는 사랑의 본보기인데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구체화되어 있음을 본다종교의 예언적인 힘은 하느님께서 이미 계시지만 숨어계시는 그곳을 항상 가리키며 사회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한다이것이 그분이 여기에 있다.’고 숨어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세례자 요한이 했던 그 예언적 과제이다우리의 사회 안에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현존이며하느님의 드러냄인 하느님 현현(Theophany)을 기다리는 숨어있는 육화이다.

 

우리는 인간 삶의 모든 측면들을 활용하여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을 간다우리가 그리스도의 육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 프란치스코보다 이것을 더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 그때 우리는 육체적인 것을 열등한 것이나 미덥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 없다프란치스코의 오상이 주는 한 가지 분명한 전갈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그리스도의 그것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 다 잘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질서보다 무질서가 우리에게 더 본래적이라는 사실육체는 강력한 성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았고부활의 사람들이며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우리의 개인적인 과제는 방향전환과 슬픔과 사랑의 계속적인 과정을 통하여그리스도의 낙인으로 낙인이 짹히는구원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프란치스코의 손에 난 그리스도의 상흔은 우리 모두의 내면적 진실의 볼 수 있는 표지였다.

 

모든 프란치스칸 영성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그는 그리스도를 모방하였고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연약하지만 구속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우리는 프란치스코가 삶의 발전 과정 안에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아감이해에서 투신과 내어줌으로의 옮아감을 볼 수 있다같은 옮아감을 그의 질문에서도 볼 수있는데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에서 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로 옮아간다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음은 모든 것을 주고자 하는 그 갈망을 더 이상 안으로 억누를 수 없는 감미로운 사랑으로 바뀐다우리 자신을 되돌아 봐도 같은 옮아감을 우리 안에서 볼 수 있을 것이고 같은 은총이 역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오상으로 인해 프란치스코에게는 더 이상 그리고 어떤 분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그래서 그와 하느님이 같이 이야기를 나눌 때 그의 대답은 존재의 한 가운데로부터 솟아나온 자신의 완전한 표현이었다오랜 기간 동안 그가 기울인 노력은 우리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자기 안에 무한을 위한 공간을 열어놓았다마태오 복음 5장을 읽고 이것이 자신이 살고자 했던 삶이라고 외친 그날부터 프란치스코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실천하는 삶의 여정을 꾸준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