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를 살기

제4장 우리가 선택한 회개

Margaret K 2017. 12. 18. 21:08

육화를 살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 함께 기도하기

Frances Teresa OSC

김찬선 레오나르도 역




4장 우리가 선택한 회개

 

이장에서 나는 회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현대에는 피학적 습관이 우리 가운데 좀 더 깨친 사람이라면 더 이상 견지하지 않는 태도이고 공의회와 함께 쇠락한 것이긴 하지만많은 사람들에게 회개란 다소간에 피학적인 습관처럼 보일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역사의 어느 시기예를 들어 중세 때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과는 애증의 관계로만 고착되었고당시 유행했던 많은 극단적인 회개 형태들은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맞다.

 

글라라 시대에 여자 수도생활의 새로운 형태들이 생겨났다많은 수도생활 형태들은 극단적인 단식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이 단식에 대해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글라라에 대한 얘기도 전해오는데그가 젊었을 때 너무 혹독하게 단식을 하여 건강이 위태로울 정도였다고 한다오늘의 우리는 당대 여성들 중에 얼마 정도는 거식증(Anorexia) 환자가 아니었을까 질문하게 되고비록 그것이 오늘의 거식증보다는 그들 시대의 문화적 억측과 확신에 뿌리를 둔 것일지라도 그들은 아마 거룩한 거식증 환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혼동보다 더한 성(Sexuality)에 대한 혼동 역시 글라라 시대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거나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른다그 까닭은 글라라의 편지를 읽다보면 그가 자신의 성과 육체적 자아와 자신의 인간성을 철저히 탐구하고 마침내 자신의 성과 육체적 자아와 자신의 인간성과 화해를 이룬 여성이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글라라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글라라가 어떤 상에 대해 영적 안내자요 자신의 귀한 경험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그러나 그녀가 얘기하는 핵심에 도달하기 전에 풀어야 할 작은 여러움이 있다그것은 그가 사용하고 있는 “Spousal”이라는 말인데오늘날에는 우스갯소리 외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는 말이라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의심의 여지없이 글라라는 적적한 표현을 했겠지만 말 너머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대체적으로 ‘Spouse(신부)라는 말보다 ‘Beloved(사랑하는 이)’나 심지어 ‘Darling(귀여운 이)’이라는 말로 Spouse라는 라틴어를 번역한다면 그 뜻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Darling이여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로 번역하거나 ‘그분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랐으니 당신은 합당하게도 그분의 Beloved(사랑을 받으시는 이)입니다.’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이 때 우리가 갈망하고 알기 원하는 것우리의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즉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글라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성별간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자신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신부나 Darling으로 보는 것은 글라라와 같은 여성에게는 좋을지 모르나 남자들은 어쩌란 말인가그래서 하느님은 남성과 여성을 초월하는 분이신데 각 대명사는 타자처럼 오해된다그러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하느님의 어떤 측면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습관이다어떤 때 하느님이 성별 모형들(paradigms)의 원천일 때조차도 하느님은 성을 초월하신다이 모형들은 가장 중요한 원형(archetypes), 원형 중의 원형이라기보다는 우리와의 관계에서이다그러나 우리가 만일 하느님을 협소하게 남성으로 본다면 오직 여성만이 그분과의 일치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또한 우리의 정해진 성별(Our Sexual Orientation)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좌우할 것이다사랑은 우리의 상과 동떨어질 수 없기에 성별이 어느 정도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좌우할 수도 있다그러나 남성과 여성을 지닌 인간이 하느님을 각기 다르게 상대하는 것이 가능할지라도다시 말해서 같은 식으로 관계를 맺고 기도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다르게 상대하신다는 어떤 확고한 증거가 있는가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상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성을 포함한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고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이것은 모든 차원에서 그 자체로 이루어지기에 우리의 거룩함은 결국 영적인 발전과 함께 심리적정서적 성숙까지도 포함할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정신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됨은 시초부터 우리의 것이고오래된 목표가 아니라 애초부터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배우는 것즉 사랑이 무엇이고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이다우리의 내적인 경계가 계속 확장되는 것도 하느님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이다신비가들의 말은 가끔 당황스러울 정도로 선정적인데그것은 그들의 내적인 경계가 우리보다 확장되었기 때문이며한편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이고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언어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기도는 성적인 수행(Sexual Fulfillment)에 있어서 약간 정도를 벗어난 어떤 비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는 너무도 다른 우리의 가장 깊은 관계 능력들이 재조정될 정도의 그런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다성적인 표현이 관계들을 대신할 수도 가로막을 수도 있는 반면많은 사람에게 성별(Sexuality)이란 비록 고통스럽지만 관계를 위해 애쓰도록 거듭거듭 그들을 되돌리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기도를 통하여 성별과 관계는 모두 초점을 다시 잡고 덜 휘둘리게 된다이는 배고픔을 채우고도 남으시는 오직 그분만으로 우리의 필요가 다 채워지기 때문이다회개하고 정개하려는 시도에 우리가 맛볼 어떤 기쁨의 원칙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프로이드적인 깨달음에서 회개는 역시 예외가 아니다회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건전한 열망(sane ambition)은 아니다하느님과의 일치가 그 노력의 목표이어야 하는데자기 수련 과정을 계속해나가기 앞서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회개와 관련한 또 다른 문제점은 신학이 발전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어떤 틀 안에서 우리 자신을 회개자로 자리 매김해야 하는데 아직 그 틀의문의 여지없는 확정된 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우리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죄인’이라는 그럴싸한 딱지에 마음이 불편하고그리스도의 수난과 일치하여 무언가를 봉헌할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봉헌을 완수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교만되이 보일까봐 마음이 불편하다다른 한편 모든 것은 다 좋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생각도 우리를 편치 않게 한다이때 우리 대부분은 앞을 향해 나아가면서 받게 될 재교육이 필요하다이것은 분명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들도 처음에는 자신들에 대해 매우 자책적이었기에 둘 다 균형과 중용과 동정심과 좋은 의미의 자애를 배워야 했다.

 

모든 기술의 이면에는 많은 훈련이 있다이 훈련이 실제적인 기술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초심자에게는 가치가 있고 심지어는 본질적인 것이다이런 훈련의 더 중요한 성과는 훈련에 충실하는 지루한 자기 수련(self-discipline)을 통하여 달성한 수행법의 연마(Honing of Commitment)이다이것은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배워야 했던 것이었다그들이 처음 드러나지 않게 갈고 닦은 훈련은 전통적인 것들로서 단식잠을 줄이는 것자기 부정그리고 불편함을 견딤과 같은 것들이었다그들의 기술은 점차 숙달되어서 가장 편안하고 사랑하는 상태에서 영위되는 인간 삶이 되었다그런 다음 그들이 보이지 않게 갈고 닦은 훈련은 기쁨온유함인내부드러움과 같은 것에 대한 항구한 충실성이었다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았던 생애 초기에 글라라는 자매들이 크게 걱정할 정도로 철야기도와 단식을 하였다그래서 자매들은 그렇게 무모하고 완강하지 말 것을 글라라에게 애소하였다글라라가 병을 얻음으로써 결국 자매들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글라라는 프란치스코와 주교의 명령으로 매일 음식을 먹어야 했다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냐는 물음에 시성 조사의 증인은 글라라와 함께 살았기에 안다고 간결하게 대답하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는데 우리가 회개를 시작할 때 누구의 회개인지에 대한 시각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몸뚱이가 불평할 빌미를 주지 말라고 형제들에게 충고까지 했지만(2 129) 단식에 있어서 극단적이기는 프란치스코도 글라라 못지않았다말과 행동이 다른 점은 오직 이것뿐이었다는 전기 작가의 말대로 말년의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거친 대접을 받았음에도 그토록 충실히 자신을 뒷받침한 육신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였다.

 

첼라노는 중요한 점을 또 전해주고 있는데그것은 아주 무모한 회개와 금욕의 삶을 살았던 초기 형제들이 항심을 바탕 삼고 그 항심의 기초 위에 사랑의 조직체를 세웠다는 것이다(1첼라노 38 참조). 이 초기 형제들은 좋은 지향과 잘못된 처신이 함께 섞여 있다는 면에서극단과 극단을 오갔다는 면에서 우리와 너무도 같았다‘더러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과식이나 과음에 의해 절도를 잃게 될 경우에는 … 여러 날을 단식하여 쓰라린 고통을 스스로에게 가했다.(1 40).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둘 다 잘했을 것이다단식하고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겉꾸민 자기 책벌의 수단으로 단식하고 회개가 잘못 사용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완의 때를 아는 것이다어느 날 배고픔의 고통 때문에 죽겠다고 외치는 소리에 프란치스코의 형제들이 잠을 깨었다프란치스코는 그 형제만 먹게 하지 않고 모두 일어나서 같이 먹게 하였다그런 다음 그는 지나친 단식은 지나친 음식만큼 나쁘다고모든 희생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적당해야 한다고 형제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이 형제들이 영성 생활에 아주 신참이었으며 그래서 지나친 회개의 과오를 범했다고 챌라노는 첨언한다(2 22,페루1).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글라라도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불가능하고 무분별한 금욕을 중단하라고 비슷한 충고를 하였다‘그대가 지켜온 단식은 무분별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내가 알고 있는데 이 엄격함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삼가시고오히려 그대의 생활을 통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그대의 영적인 예배를 드리며그대의 희생 제물을 지혜의 소금으로 늘 간을 낮추십시오,(3아녜스 40-41).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둘 다 언급한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것은 희생 제물에 대한 레위기의 가르침과 일치하는데(레위 2,13), 그들은 이 말을 평형감각을 얘기하는 것으로 그리고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방지케 하는 하나의 비판적인 감각을 얘기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인간 본성은 우리가 무엇을 하건 익살스러운 측면이 있고그것을 평화롭게 즐기는 지혜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너무 심각하게 영성에 접근하는 것을 해학으로 여겨 간을 맞출 줄 안다.

 

아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회개가 부족한 회개보다 덜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실제 그들의 삶에서는 더 많은 자기 수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며어떻게 착수할지 몰라 당황하곤 한다지나친 방종의 습관을 균형추의 흔들림(Pendulum Swing)없이 깬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이런 방법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우리 어리석음의 극치들은 하느님께 대한 배고픔의 경계도 될 수 있기에단식하는데불평 없이 추위나 더위나 불편함을 견디는데잠을 줄이는데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일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데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조만간 상식이 통하게 되면 우리는 단식과 철야에 뒤따르는 나쁜 경향과 동반하는 교묘한 자부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Hubert Van Zeller가 전해주는 얘기가 있다그는 어떤 사람이 고복을 입고 Reading역에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자신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그 후 가능한 빨리 그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우리도 이 사람처럼 한편(고복을 입어야 하는 불명료한 이유)을 피하면서 다른 한편의 약함(독선)에 떨어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또한 회개를 향한 우리의 투신은 자기혐오 또는 인간성에 대한 혐오에 일부 뿌리를 두고 있음도 깨닫게 된다대부분의 우리는 이런 저런 심리적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기도 생활에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이 장애들이 겉으로 드러난다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걱정거리가 아니라 좋은 표시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기도가 치유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켜 안으로 스며드는 표시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였기에 더 신경과민이 된 것이 아니고꾸준히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전에 감추어졌던 부정적인 것들이 겉으로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기에 신경과민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우리가 마치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에서 하느님께로 보내져야 할 것들이 항상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프란치스코의 경우 오상을 받은 후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그는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지 않고 여전히 다시 시작하기를 윈했다고 첼라노는 전하고 있다(1 103 참조). 심지어 그는 죽는 순간에도 ‘지금까지 우리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지금부터 주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라고 얘기한다.

 

회개와 관련하여 참작해야 할 주의사항은 켈트 기질대로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극단주의에 빠지는 것이고일종의 청교도적인 삶 부정(life-denying)의 경향이다만일 그것을 즐긴다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해로울 것임에 틀림없다그 뿐 아니라 지나친 단식과 너무 부족한 잠은 우리의 화학적 균형 감각과 판단력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Yg-Drasil 나무에 9일 동안 걸려 있는 Odin이라는 신처럼 소식(小食)과 적은 잠으로 세상의 수수깨끼를 알게 될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다이러한 불균형과 착오는 대부분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많이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 되어야 한다는 글라라의 그 훌륭한 충고를 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올바른 회개에 대한 식별력은 점차적으로 생기는 것이기에 회개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이 식별력을 키울 수는 없는 것이다우리의 몸무게가 내성이 생긴 내적 장애의 한 증상이고치유하는 한 방법으로 식사조절을 하는 것이라면 회개 실천의 한 부분일 수 있지만 그럴지라도 식사조절이 회개와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회개를 시작한다는 것은 은총과 하느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우리의 모든 동기들이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며 성숙한 회개는 대부분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비롯된다나중에 우리가 부끄러워하게 될 것은 자기중심적인 것들이고 그것들은 두 가지 단순한 질문에 의해 부끄러움을 당할 수도 있다질문 중 하나는 ‘우리는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는가?’이고다른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나 그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가?’이다우리는 회개를 아직 회개하지 않은 친구들이나 친척들 가운데서 영광(또는 비난)을 받기 위해 하지 않는다그들이 우리가 하는 한낮의 단식과 한밤중의 기도를 다 알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우리 평가의 기준이 되는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시작한 이 단식과 기도를 판단 받는 것을 우리는 아직 꺼려한다이 꺼려함을 우리는 성찰할 필요가 있다방임적인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맡아 너무 적게 건사하는 경향이 있는데이럴경우 좋은 지도자는 현실적인 균형점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우리의 육신은 놋쇠로 되어 있지도 않고우리의 힘은 바위와 같지도 않으며오히려 연약하고 육신의 모든 허약함의 지배를 받습니다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매여주님 안에서 부탁하고 간청합니다그대가 지켜온 단식은 무분별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내가 알고 있는데 이 엄격함과 극단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삼가십시오,(3아녜스 38-39)라고 글라라는 얘기하면서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어떤 면에서 안내자 역할을 한다이것은 투신의 의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하지만 경험은 아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적절한 충고였다좋은 지도자는 지혜의 부족을 지적해 낼 수 있고너무 지나친 회개이든 너무 못 미치는 회개이든 우리의 동기들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회개의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동기는 우리가 수련이 덜 되고 속임수에 의존하고 완덕을 닦는데 안이하다면 기도하기 어렵다는 인식과 함께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중요성이 점점 자라나는 것이다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와 안이함은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만일 우리가 둘 다 유지하려고 한다면예를 들어 기도와 사업에서 부정직함이 병존하는 것을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참으로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대개는 이 어려움을 직접 확인하지만 자신을 속이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 죄의 경향성을 견제하는 균형추를  함께 점검해 줄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사람은 지도 제작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홍보 수단이 되어야 한다왜냐하면 길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도이시고 성령께서 우리의 안내자이시기 때문이다지도자는 우리의 이야기를 큰 윤곽 안에서 이해해야 하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를 정통성에 기초하여 들어야 한다지도자는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너무 좋아해서는 안 되고우리가 마음을 열고 얘기할 수 있도록 꾸밈없는 감정 이입을 충분히 해야 한다지도자는 적어도 우리 스스로 만드는 어려움과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구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회개와 단식과 절약의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측면은 우리보다 덜 가진 사람들과의 무조건적인 연대이다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것이 자기를 매우 부끄럽게 한다고 프란치스코가 말한 적이 있다(2 84). 틀림없이 아무 것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기로 서약한 그이기에이것은 어느 정도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단식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본 모습대로 회복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일에 협력자로 투신하는 것이다우리는 이 과정에서 그것이 정의에 맞는다면 비록 작고 단순한 균형의 회복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절약하고 나누기만 한다면 아직도 모든 사람을 위한 충분한 식량이 있다우리의 단식은 세계 인구의 절반이 겪는 영양실조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지상의 모든 것은 다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는 다른 사람이 충분히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도 자기들이 필요 이상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기보다 적게 가진 누군가를 만날 때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던 것이다불의한 오늘날에 비추어 이러한 태도가 우리에게 주는 전갈이 무엇인지는 일일이 다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회개의 수련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전반적인 개념에 초점을 두고 올바른 방향을 향하게 한다이 수련은 우리가 원하는 곳에 우리의 시선을 두게 한다만일 일시적인 우리의 생각을 따른다면 우리는 항구함을 잃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잘 알고 있었듯이 우리는 본래 충실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항구함은 은총과 은총에 대한 갈망이 함께 오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것을 원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우리가 회개를 시작할 때 경험하게 되는 몸부림의 원인은 이렇다변화나 불안정은 너무도 강하게 우리를 물고 늘어지므로 자유로운 우리를 갑자기 바꾸는 것은 죽음과 거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어떤 측면에서 이것은 작업을 계속하는 동안 하느님의 안정성과 항구함을 점차 나누게 될 것이기에 점점 쉬워질 것이다모든 종교적 고행에는 자기 수련이라는 옷 벗는 과정이 있고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고하느님과 이웃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는데 자유로워 지고자 한다초기 형제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함을그리고 사랑의 열망에서 비롯된 자기희생은 자신을 내어주는 이 기술을 배우는 한 방법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청사진이시다글라라와 마찬가지로 형제들은 ‘단죄 받으시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바라볼수록 그들의 가치와 사고방식이 더 많이 변화되었음을 발견하였다불균형을 시정할 때 우리는 반대의 것을 함으로써 시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그것은 서로 다른 일들이 서로를 상쇄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불균형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리시고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들이 사실은 서로 보완적임을 보여주심으로써 불균형을 시정하신다하느님의 초월적인 시각은 늘 통합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사실은 서로를 필요로 함을그리고 마치 구체처럼 전체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임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죄와 같이 우리가 싫어하거나 다루지 못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 안에 실제로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죄와 고통을 극단인 죽음과 함께 모두 다른 모습으로 바꾸셨고아직도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신다‘그분이 세상에서는 하찮게 보이려 하셨고 궁핍하고 가난해지려 하신 것은 극도로 가난하고 곤궁하며 천상양식에 한없이 굶주림을 느끼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소유함으로써 그분 안에서 풍요롭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아녜스 19-20)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회개를 은총과의 구체화된 협력으로 보면서 모든 이에게 회개할 것을 권했던 것이다이로써 우리는 자신을 강하게 하여 단 한 번의 유혹에도 무너지지 않게 된다다른 한편 이를 통하여 은총의 필요성과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도 깨닫게 된다우리는 종종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으려는 경향이 있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경향이 있다하느님의 뜻대신 자신의 뜻을 소유하자마자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대신 자신의 뜻을 소유하자마자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선들을 자신의 것으로 자랑하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하고 있다그의 눈으로 보면 바로 이것이 원죄이다우리는 은총의 불안정을 살아가기 힘겨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내 안전하게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선물보다는 우리의 것인 구원을 원한다이를 잘 아는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오사람이여주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대의 육신을또한 당신 자신과 비슷하게 그대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그분이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권고 5,1)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이런 통찰에 영감을 받은 프란치스칸 사상가들은 심지어 구원을 위한 필요가 없을지라도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의 중심(focus)이시기에 여전히 사람이 되셨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저 영예로운 프란치스칸적 예수회원인 Chardin Teilhard가 분명하게 얘기하였듯이 그리스도는 창조의 영광스러운 종합이요정점이다육화는 본래 하느님께서 뜻하신 것은 아니지만잘못된 일들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인간이 우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그리고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하느님께서 우리 중의 하나가 되셨음을 보았다말씀이 육을 취해 오심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벗어난 인간 삶이란 이제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어떤 것도 불경하지 않고 어떤 것도 세속적이거나 무신론적이지 않다그러나 겉으로 보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삶의 가장 변두리일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시고 숨어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거룩함과 악함 사이의 나누어진 칸막이는 없고 단지 하느님의 구속적이고 창조적인 현존만이 반죽 속의 누룩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늘 계신다.

 

프란치스코에게 이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삶을 바꾸는 깨달음이었고다른 삶을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그가 처음한 것은 단순하게 지금까지의 행동과 반대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다스리지 않으면 육체가 얼마나 폭군이 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고아씨시의 인기인으로서 돈이 사람을 권력과 탐욕의 곤경에 빠트림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돈을 사용하는 어떤 행위도 거부하였다나중에 그가 한 회개 행위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형태를 띠었는데자신의 짐을 지면서도 쾌활함을 유지케 하는 기꺼운 자세 같은 것이었다프란치스코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그는 2년 동안 어떤 문제와 씨름을 하였는데어느날 복음을 듣게 되었다.

 

“네가 만일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산이 옮겨져라 말할지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응답하였다무엇이 이 산일까이 산이란 “너의 유혹”이라는 대답이 들렸다성 프란치스코는 말하였다“그러므로 주님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그러자 그는 즉시 유혹을 받은 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자유스러워졌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놀라워 할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그의 주 관심사는 내외적으로 영적 기쁨을 유지하는 것임을 동료들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이런 식으로 마귀들은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기쁨이 유혹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방어임을 그는 얘기한 것이다기쁨이란 우연히 주어지거나 진정한 회개에 수반하는 의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 사항으로 여겼다어느 날 한 형제가 우울한 모습을 보였을 때 프란치스코는 어떤 슬픔도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지 않도록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만 두라고 엄히 타일렀다그는 또 얘기하였다내가 기분이 나빠 있을 때 나의 형제가 기쁨으로 충만한 것을 볼 수 있다면 그 유쾌함 때문에 나는 유혹과 나쁜 기분을 뒤에 남겨두고 내적인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프란치스코의 많은 충고는 이처럼 실제적이고 매우 단순하다그는 극적인 것이 아닌 일사상에 대해서 얘기하였다우리의 실상 과제를 완수하는 것우리보다 약한 사람들을 부축하는 것은총에 협력하는 것우리 곁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습관적인 유혹을 물리치는 것슬픔과 비탄과 우울함에 압도되지 않고 주님이 기쁨의 원천임을 언제나 인정하는 것 등이다.

 

우리는 진리를 통하여 복음의 진수를 손에 넣을 수 있을 뿐이고이 보물을 쥐고 있을 손과 팔은 영의 가난이고 내적인 자유임을 글라라는 아녜스에게 얘기한다그리고 계속해서 하느님은 무에서 모든 것을 만드셨고 모든 이의 마음에 이 보물을 숨겨 놓으셨음을 얘기한다하느님과 비교하여 우리가 진실로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할 때비로소 우리는 그가 얘기하는 ‘인간의 마음을 허망하게 하는 허무’(3아녜스6)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그는 마치 무(Nothingness)와 허무(Emptiness)를 깊이 숙고하며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허무는 우리가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이지만 우리를 더욱더 환영(Illusion)으로 인도하는 것이고무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손 타지 않은 활동거리(Raw material of Gods work in us)가 된다.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글라라도 에덴의 이야기를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해석하고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우리의 가치를 바꾸는 방식을 알아보았다우리는 말씀이신 분이 왜 그토록 이해하기 어려운지 의아해하고일들이 뒤바뀌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그래서 우리는 무구함(Innocence)을 이르러야 할 어떤 경지라기 보다는 한 때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무엇으로 여긴다우리는 무구함을 무엇보다도 성적인 개념으로 정의하고 동정성(Virginity), 그것도 단지 육체적 동정성과 같은 깨끗함(Purity)으로 본다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반대라는 것을 알게되며정결(Chasity), 깨끗함동정성 등은 초대받았지만 아직 우리가 이르지 못한 완전함(Intergrity)과 통합(Wholeness)에 대한 말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정결을 낳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고깨끗함을 낳는 것은 자기를 줌(Self-Giving)이며완전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자신을 버림이다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우리는 또한 사랑과 독신에 관한 여성의 생각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무구함과 에덴의 동산은 우리 여정의 목적지인데 글라라는 우리가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깨끗해지고

그분을 맞이할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1아녜스 8)

 

글라라는 무엇이든 대체로 경험을 한 후 이해하였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통합되는 경험을 통하여 하느님은 통합으로 이르는 길임을 경험적으로 배운다하느님 현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깊고도 신비적인 의미로 동정성이신 하느님의 그 하나이심으로 이끌린다성탄 전례에서 성 히폴리토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기에 이제 우리는 신성을 나누어 갖고 신화되었다고 선언하고더 나아가서 신성에 대한 그의 문자 그대로의 이해에 관하여 아무런 의심도 남기지 않고 얘기하고 있다(물론 그는 우리와 하느님을 어떤 식으로든 혼동하지 않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히폴리토는 그리스도께서 인간 본성을 취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신적 본성을 나누어 갖게 하셨다는 미사 중의 기도문과 같은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최초의 잃어버린 동성성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갈라짐이고완전한 창조의 파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누구보다도 가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살아가게 된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회개의 시작을 동일하게 얘기했다그는 언젠가 형제들에게 재능을 발휘하여 이 기도와 회개의 삶을 하나의 형상으로 그려 보였다그는 이 삶을 우리의 이웃에게 동정심을 보이는 삶이요비난을 받을 때와 칭찬을 받을 때 자신을 다르게 생각지 않는 삶으로 묘사하고 있다이 삶은 우리가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평가하는 삶이며우리가 꾸짖음을 대꾸나 변명 없이 받아들이는 삶이고윗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아랫사람에게도 겸손한 삶이며성할 때와 같이 병들었을 때도 사랑하고앞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없을 때도 사랑하는 삶이다우리는 모든 것이 잘 될 때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없고 ‘자기의 뜻을 받들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할 때 그가 보여주는 그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그 이상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권고 13,2)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하곤 하였고‘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권고 19,2)라고도 얘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