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를 살기

2장 구덩이로부터의 벗어남

Margaret K 2017. 12. 18. 21:07

육화를 살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 함께 기도하기

Frances Teresa OSC

김찬선 레오나르도 역

2장 구덩이로부터의 벗어남

 

구덩이로부터 벗어났을 때 프란치스코는 모든 면에서 빛으로 나아갔으며 그 때 이후 많은 이들이 그의 특징으로 생각하게 된 봄날의 그 분위기를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아직 구덩이에 있을 때조차도 그때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어떤 신묘한 기쁨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으며 불붙은 구덩이에서 나왔다고 첼라노는 전하고 있다.(1 10) 이 체험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기쁨은 훨씬 극단적인 자기 껍질 벗기와 전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포함하는 일련의 다른 싸움에 돌입하도록 겪려하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제 그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길을 떠났으며 모든 공격은 그의 방향 감각을 뚜렷하게 하는데 일조할 뿐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 것은 아시시로 돌아가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우리가 새로운 방향 전환의 열정에 사로잡힐 때 우리 모두 그렇게 하는 그런 전형적인 방법으로 ?모든 이들에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사람들도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것으로 생각했다. 하느님을 따르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있다고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나 해야 할 바를 남들에게 말하기 즐겨하는 우리의 습성을 근절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영국의 초기 역사를 기술할 때 Milton이 느꼈던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이웃을 개혁하는 영광은 우리의 것이다.(Areopagitica 에서)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능동적이고도 열렬하고 활기있게 즉각 일어나, 주님을 위해 싸우고자 믿음의 방패를 두르고 신념의 무기로 무장한 채 아시시 읍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거룩한 불이 붙어 지금까지의 자신의 게으름과 비겁함을 심히 질책하기 시작했다. 그를 나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자 과거의 그와 비교해서 사정없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미쳐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고 외치면서 그에게 진흙을 던지거나 돌팔매질을 했다.(1 11)

 

이상함과 별남은 항상 놀라움을 준다. 우리는 깨끗하고 단정한, 죽을 때의 성인들을 가장 좋아한다. 반면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기괴한 행동으로 이끌 수도 있는 관습에서 해방되는 초창기의 과정을 좋아하지 않으며 변화를 겪고 있는 이들이 특징적으로 보이는 그 행동 변화에도 항상 온정적이지 않다. 거부당하고 돌팔매질 당하는 이 경험은-버지 않아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앞자리에 두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하고, 하늘나라의 보물이 묻혀 있고 숨겨져 있으며, 값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발견할 수 있는-북음을 받아들였을 때 첫 번째로 오는 결과가 무엇인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이것이 무엇을 수반하는지 어디로 자신을 이끌 것인지 프란치스코는 알지 못하였다.

 

그를 처음으로 이끈 곳은 주교관저였고,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준 모든 것, 그러나 이제는 가족에게 당혹감만을 안겨 주는 모든 것을 화가 나서 아들로부터 되돌려 받으려는 아버지와의 대면이었다. 이 대면은 이제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 준 그 유명한 사건이다. 이것은 과거와의 결정적인 결별이고 극단적인 단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다소 공격적이고 대결적이었는데 프란치스코가 좀 더 성숙해진 후였다면 아마 사뭇 다르게 대처하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한 아들은 프란치스코였기에 아버지의 마음은 프란치스코와의 이 마찰로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적어도 한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안젤로라는 이름의 그에 대해서는 만날 때마다 프란치스코를 조롱한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상황이 너무 나빠져 그 극에 다다랐을 때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는 볼 때마다 프란치스코를 저주하였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거지 하나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하면서 아버지가 저주할 때마다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에게 일어난 두 번째 일은 강도들과의 조우였다. 불란서 말로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떤 숲 속을 지나갈 때였다. 느닷없이 강도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네 놈이 누구냐고 그들이 사납게 물었을 때 하느님의 사람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위대하신 하느님의 사신이오.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를 두들겨 패고는 눈이 쌓인 구덩이에다 집어던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의 이 촌스러운 사신아. 거기 누워 있거라! 허나 그는 몸을 굴려 눈을 떨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자 구덩이에서 껑충 뛰어나와서 기쁨에 겨워 큰 소리로 만물의 창조자에 대한 찬미가로 숲 속을 채우기 시작하였다.(1 16)

 

재미있는 것은 몇 달 전만 해도 강도를 당할만한 값어치가 있었을 텐데 이제 막 가난뱅이가 된 그가 강탈을 당한 점이다. 그가 마치 젊은 개처럼 눈을 털고는 잽싸게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을 보면 그의 건강과 열정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근처 수도원에서 부엌데기로 일했지만 대접이 너무도 좋지 않아 떠나야만 할 정도였다. 그가 동시대인들로부터 받은 것은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든,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받는 대접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아무런 옷, 낡은 옷조차 얻어 입지 못하였고 멀건 국물로 연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프라치스코가 미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 뒤에 그 수도원 원장은 사과를 하였다.

 

아버지와 절교, 강도들의 공격, 수도원에서의 봉사와 거기서 받은 심한 대접과 같은 일들은 자유를 찾아가는 그의 여정 중에 들러야하는 역들과 같았고 초점과 같았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해야만 한다. 그는 까다롭고, 우아하며, 사치스럽고 매력적이며 재능이 많은 아시시 젊은이들의 두목이었다. 그는 아시시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랑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거의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인기가 좋았으며 야망대로 될 것이라고 모든 면에서 기대되는 야심만만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이 그의 아버지 앞에서는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아시시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며 돌을 던졌고, 강도들은 그를 우스게 삼아 내던졌으며, 한 때 지원자로 받아들였던 수도자들은 너무 가혹하게 대접하여 그에 대한 동정을 아무도 전혀 베풀지 않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프란치스코는 기쁨에 찬 한 사람으로 성숙해 갔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도취감 같은 것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심지어 주교 앞에서 베드로 베르나르도네와 만났을 때도 도취적 극단성을 가졌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기쁨은 깊어지고 원숙해지며 더 영적이고 감사에 찬 것으로서 전보다 덜 도취적인 것이 되었다. 처음의 그는 위대하신 왕의 사신이었고 하느님의 모든 영광은 그의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의 그는 자신의 주님을 섬기기 시작할 다른 나날을 주심에 감사하는 부당한 종이었다.

 

이 여정은 한 순간도 그 다채로움을 잃지 않았는데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실수 없이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느 것도 쓸모없는 것으로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깨달음은 사건을 하나하나 겪을 때마다 점점 더 명확해졌다. 길을 가고 있던 어느 날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매우 일그러지고 추한 여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그가 가고 있는 길을 계속 가면 그 끝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고상함을 사랑하는 젊은이였고 추하고 역겨운 것은 견디기 힘들고 쓰디쓴 것이었지만 그는 어떤 것이 그에게 닥치든, 심지어는 그 여인처럼 추하게 되더라도 그것에 개방적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였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과 직면하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치워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고 그의 너그러움은 영예를 받았다. 최악의 일이 십중팔구 일어날 것이고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이 그가 앞으로 겪어야 하고 도전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을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상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가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다를 때 그렇더라도 하느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항상 가능함도 알았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죽음조차도 생명으로 넘쳐난다. 바오로처럼 프란치스코 또한 힘을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진정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배워야 했다.

 

여정 중에 있는 우리는 이제부터 프란치스코처럼 점점 알려지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순간과 어떤 기도도 되지 않고 심지어 싫증이 나는 순간 사이를 오락가락할 것이다. 심지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인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제자리를 맴도는 형제들처럼 현기증이 일수도 있다. 우리는 역설의 땅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옛 가치들이 뒤집히고 새 가치들이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하여 방향을 잃을지라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방향 감각을 잃는다. 우리는 나뭇잎 끝에서 맴돌며 다른 잎을 찾는 애벌레처럼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이 방향 감각의 상실은 하느님의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야 오직 해결된다. 그 전까지 우리는 황야에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특별한 야생 동물들의 자비에 달려 있게 되는데 이 때 우리는 그리스도 또한 비슷한 경험을 하였고 그것이 결코 목적도 없고 결실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때가 바로 맴돌기를 끝내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황야에 남겨진 결과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방향 전환이다. 병이란 내적인 혼란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신체적인 병은 종종 방향 전환의 한 요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식으로 그리고 달라진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고 우리를 다그친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 우리가 더 이상 모를 정도로 우리의 내면은 혼란스러워 진다. 이것이 방향 상실의 가장 애타는 경험일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그저 극단적으로 견딜 수밖에 없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병들게 할 수 있다.

 

황야 체험의 다른 특징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엔 기도를 위한 여유, 정신적인 여유를 허용치 않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우리를 압도하는 혼란 때문에 기도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기도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황야에는 아니 계신 듯 보이는데 그것은 하느님은 황야이시고 우리는 놀랍고도 두려운 경험인 그 황야 안에서 길을 잃은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라움과 두려움은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어느 정도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 대신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모든 상황에 대한 슬픈 감정에 안주하려 한다. 사람들은 아주 자주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우리를 바꾸는 것이 기도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도 시작해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있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부터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또는 계속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교묘한 도피일수도 있다. 오늘 하느님과 만나지 않는 핑계를 만드는데 우리가 그토록 약다는 것도 우리 죄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고 시편 작가는 호소하고 있다(시편 95,7). 우리는 물론 그저 존재함만으로도 하느님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관계를 더욱 깊게 하라는 초대를 우리는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이고 기도 끝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은 우리가 다른 데 가지 않고 다른 것을 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가끔 느낀다. 우리가 거기 머물렀다면 우리가 정신과 마음, 특히 마음으로 거기 있으려고 참으로 무진 애를 쓰면서 몸으로도 거기 있어왔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말한다. 그러한 때에 기도의 시간을 줄이기보다 늘리기로 마음먹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30분 기도하기로 하고 10분 더 기도에 머무는 것은 실망한 채 20분 뒤에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슬기로운 것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지셨음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혼자 있었으며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몇 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 때가 훗날 뒤돌아보면 하느님께서 가장 적합한 여정을 우리에게 마련하신 때였음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같은 여정을 두 사람이 걷지 않고, 같은 단계를 같은 순서로 두 사람이 통과하게 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떤 단계들을 통과하여 앞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존재의 짐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치 않는 일종의 혹독한 고성소(Limbo)에 몇 년간 그저 머물러있다고 느낀다. 이것은 매우 힘든 황야 체험이 될 것이다. 그러한 때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 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창조적이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그 사랑 안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는 존재를 우리 대부분은 진정 필요로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또는 현재 우리가 해야 한다고 보는 모든 것을 우리가 한다면 그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평화롭게 있는 그대로의 그것들 안에서 안식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요, 우리가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일 것이다. 하느님의 선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빠져드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오래 지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황야에서의 모든 순간은 그분 사랑의 부드러운 손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 그것은 더 나아가기 전에 바뀌어야 할 것들이 있는 경우들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사슬을 만들어 차고 있음으로 해서 계속 감옥에 갇혀 있을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필요한데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질문들은 이 평가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내게 있어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단두대 위의 빛살과 같은 이 질문들은 정신을 한데 모으게 한다. 이 질문들은 삶에 있어 여러 부적합한 것들을 제거하고 삶의 골간을 볼 수 있게 한다. 싫든 좋든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것은 분명하기에 우리가 진정 가기 원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이 질문들은 발견케 한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한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때에 프란치스코에게 나아가야할 길을 보여 주셨는데, 단 맛을 위해 쓴 맛을 선택하라와 나를 알고자 한다면 너 자신을 경멸하라(2 9)와 같은 말을 통해서 그 길을 보여주셨다고 첼라노는 전하고 있다. 너 자신을 경멸하라(to despise yourself)는 말은 문자 그대로 얘기하면 낮추어 본다(to look down)는 뜻이고 더 깊은 의미로는 다른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 냉소적인 경멸의 뜻은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긴다는 것은 자신은 사랑으로 주어졌고 그래서 자신에 대한 염려는 하느님의 몫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손 타지 않은 하느님의 순수한 재료(Gods raw material)가 된다는 뜻이다. 손상된 처지에 있는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자신을 올바로 경멸하는 것은 우주의 중심에 우리 자신을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을 놓고 하느님과 경쟁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데, 그것은 우주의 중심임을 하느님께서 굳이 고집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저 우주의 중심이신 것이다. 하느님이라는 말과 중심이라는 말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여러 사람이 그 말의 주인공이라고 얘기되는 중세기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하느님이란 원주(둘레)가 어디에도 없고 중심은 어디에나 있는 구체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중심이 되거나 중심에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을 보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태양을 태양계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타원형의 대단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별들을 돌게 한 코페르니쿠스의 체험과 같은 것이다. 모든 고등 수학들이 별들의 선회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했던 그 노력은 이제 불필요하게 되었다. 아주 흔히 볼 수 있듯이 단순한 해결이 가장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진리의 시금석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는 자유로의 그의 여정이란 확장되어가는 자신의 지평선에 이르도록 자기 자신을 확장시키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자기 증여 안에서 그는 자신을 진보케 하는 교훈을 얻었고 그의 모험은 그것을 실행할 적절하고 특별한 기회를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나병 환자 보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그저 그들의 집을 볼 뿐인데도 2마일이나 안전하게 떨어져서 그것도 손으로 코를 막고 보곤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느 날 그에게 손을 내밀며 구걸하는 나환자와 실제로 마주쳤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돈도 주고 입맞춤도 하였다. 나중에 뒤돌아보니 나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단지 1회성의 승리에 그칠까 두려워 한 그는 다음 기회에 다시 같은 행위를 함으로써 그 승리를 굳건히 하였고, 이제는 아예 나환자 마을로 가서 거기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나환자들에게 돈도 주고 입맞춤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역겨웠던 것을 단맛으로 바꾸었고 그 나머지 것을 하도록 남자답게 자신을 준비시켰다.(1 17)

 

나환자와의 입맞춤 사건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연구가 그동안 프란치스칸 학계에서 있어왔는데 특히 나환자가 사라진 것과 관련해서 신심 깊은 독자들은 그가 곧 나환자를 가장한 그리스도라고 결론을 내렸다. 당신의 보잘것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그리스도 친히 천명하셨기에 이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가 입맞춤한 나환자는 그리스도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 나환자는 프란치스코 자신, 즉 경멸받는 자신이요, 자신의 곪고 썩어가는 부분이며, 아직 구속되지 못한 그의 모든 부분들이었다. 나환자는 자신의 알고 싶지 않고 숨겨두고 싶은 부분이요, 인정하고 싶지 않고 결코 다가가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그는 코를 막은 채 2마일가랼 떨어져 가곤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삶의 영적이고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아주 중요한 원천 하나를 다루고 있는데, 받아들임이야말로 변화를 위한 통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프란치스코가 그저 말이 아니라 입맞춤이라는 매우 상징적이고 사랑 넘치는 환영의 행위로 나환자를 받아들였을 때 나환자는 사라졌는데 추방된 자인 나환자가 환영받았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진 이상 나환자의 상태는 치유 받은 것이다. 그 사람이 여전히 아플 수도 있지만 그럴지라도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자기 수용의 이 행위는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이고 이 힘든 작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단순한 것과 쉬운 것을 구별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나병에 입맞춤하는 것은 세상에 가장 단순한 몸짓이지만 가장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나병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2마일의 간격을 두어야만 하는 삶을 항상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그러했듯이 문제를 피하는 것은 짧은 여정을 긴 여정이 되게하는 첩경이다.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하신 말씀은 단맛을 위해 쓴맛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가끔 그리 되기도 하지만-쓴맛이 단맛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가치가 감정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우리 것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가치를 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쓴맛이 단맛의 열쇠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협오감으로 인해 멈추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협오감이란 우리 안에서 아직 정화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테스트와 같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Doormat(문간에 놓여진 흙털개)가 되라는 권고가 아니라 우리의 반응이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뭔가를 말해주는 것이라는 하나의 귀뜀이다. 쓴맛은 하나의 자비로운 계시라 할 수 있는데 여전히 우리가 성이 나있고, 교만하며, 분한 마음과 복수심 등으로 우리가 차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상처를 주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나병을 밉맞춤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이라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가장 하느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의 역전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미지의 것에 우리 자신을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이런 충고로 가득하다. 생명을 얻으려면 너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너의 가족을 떠나 이웃을 찾아라. 아무런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나라.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코에게 충고하신다. 쓴맛을 선택하고 되어야 할 것을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라. 상황에 의해 강요나 속박을 당하지 말고 네가 싫어하고 네가 바꿀 수도 없는 상황 안에서도 자유를 발견하기 시작하라. 하느님처럼 사는 것은 마치 모든 기술이 실습에 의해 완전해지는 것처럼 습득된 기술이다. 좋아하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나환자촌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우리의 나병을 만나지 못할 것이며 실제 현실을 포옹함으로서만 발견할 수 있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그 특별한 깨달음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나병을 포함하여 있는 것들 안에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돌고 돈다. 우리가 나환자이고 나환자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선사한 그 입맞춤의 순간부터 프란치스코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시작하였고, 자유롭게 되었으며 회복된 창의성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말을 들은 그대로 그는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한 행위의 그 내적인 의미를 깊이 숙고한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자기 육신의 아버지의 수중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은 후 최초로 시작한 일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 드리는 일이었다. 그는 새 성당을 세우려 하지 않고 묵은 것을 손 봐 옛 상태로 수선하였다. 기초를 허물지 않고 그 위에다 지었다. 비록 그가 모르고 했겠지만 특권은 늘 그리스도께 유보했다.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이미 놓여졌기 때문이다.(1 16: 1고린도3,11 참조)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일을 그는 교회를 위하여 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으로부터 배워 일을 하는 그는 이미 있는 기초위에, 성한 것은 보존하고 손상된 것은 고치면서, 상부 구조를 복구하는데 조심을 다 하였다. 하느님께서 모든 행위를 위한 청사진을 주셨음을 그는 알아보았다. 그 안에 이미 놓여진 기초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심을 그는 깨달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육신으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모습대로, 영으로는 그분과 비슷하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심으로(권고 5,1)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성을 나누어가지심으로 그 기초를 첫 번째로 놓으셨다. 하느님의 집인 우리와 프란치스코가 수리한 산 다미아노와 다른 작은 교회들을 우리가 수리한다는 것과 우리가 구속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일정 기간 폐허 중에 있다가 후에 다시 세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포함되는 더 넓은 범위의 폐허와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개인적인 폐허 둘 다일 수 있다.

 

우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대로 변할 수 없는 우리 자신으로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같은 기초들 위에 있겠지만 (기초 상부의) 수리란 오직 첫 단계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산 다미아노와 같이 우리가 수리될 때에는 새로운 목적지와 미래가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부인들이 살게 될 것인데,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영예스럽고 거룩한 생활로써 당신의 거룩한 온 교회 안에서 영광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글 유언 4) 부분적으로 보수된 우리 집에 하느님을 모셔드림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 즉 하느님께서 경배를 받으시는 거룩한 처소가 된다. 경배는 우리가 집의 껍대기에 불과할 때, 아니 모든 집기와 가구들이 필요 없는 폐허일 때 시작될 수 있다. 경배는 그 자체로 우리의 돌들을 한데 묶어주고 우리를 완전(Whole)하게 한다. 경배는 우리에게 흠 없는 완전함(integrity), 즉 우리가 인도되고 있는 새로운 동정성(virginity), 새로운 창조의 표시인 완전함(perfection)과 전체성(wholeness)의 동정성을 선사한다. 이것은 우리가 성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무엇을 간직하거나 간직하지 않은 물리적인 상태는 더더욱 아니다.

 

다른 성사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로서의 우리 모습은 하나의 상징 일 뿐 아니라 상징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느님의 집(house of God)으로서의 우리 모습일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가장(home of God)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종종 십자가로부터 들은 대로 돌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을 때 프란치스코가 했던 것처럼 서툴게 시작을 한다. 그러나 돌로 교회를 짓기 시작함과 더불어 프란치스코는 새로운 전망의 삶을 향한 시험적인 첫 발걸음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프란치스코가 수리한 4개의 작은 교회들 중의 하나는 산 다미아노 성당인데, 나중에 글라라가 살게 된 곳이 이 성당이고, 나의 집이 쓰러져 가는 것을 너는 보지 못하느냐? 가서, 나를 위해 그 집을 고쳐라. 프란치스코, 나의 교회를 고쳐라는 명령, 미래에 그가 세울 수도회의 초석이 될 명령을 들은 곳도 이 성당이다.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도 하느님 봉사에 있어서 수련기를 거친다. 이 수련기동안 우리는 실수도 하고 잘못 이해도 하고, 한쪽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오락가락한다.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지만 아직 상처 입은 채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 그 역설을 경험한다. 기도란 우리가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배운다.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은 그것이 얼마나 간단하고 초보적이냐에 상관없이 우리가 그 만남에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개방만 한다면 분명 우리를 변화케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솔직함은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과 섞일 때 우리가 하는 것을 포옹하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프란치스코의 초기 형제 중 하나이고 아마도 세 동료 전기의 저자인 안젤로 형제는 이러한 체험들의 결과로 프란치스코는 다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변했다(세동료 12)고 우리에게 얘기해 주고 있다. 그는 심지어 겉보기에도 달라보였고, 비록 어떻게 그렇게 달라보일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동료들은 아주 분명히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들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그들 중 누구도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성소에 대체적인 윤곽을 그 때 이미 명확하게 분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도 지난 세월을 훗날 뒤돌아보면 지금은 분간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한 성장이 있어왔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지난 얘기를 성찰하거나 어깨너머로 뒤돌아 볼 때 우리에게 가끔 주어지는 신기한 은총도 있다. 하루하루의 우리의 삶이 비록 너무 번잡하고 소란스러우며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의 기도가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몇 년, 아니 몇 달만 지나서 뒤돌아봐도 하느님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이고 깊이 있고 통합적이며, 사랑 넘치고 고요한 일종의 기도로 충만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기도는 우리가 오랫동안 갈망한 것이었지만 우리에겐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슬픈 결론을 내렸던 그 기도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갈망을 불러일으키고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