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를 살기

제3장 기도하기 위한 장소

Margaret K 2017. 12. 18. 21:08

육화를 살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 함께 기도하기

Frances Teresa OSC

김찬선 레오나르도 역


3장 기도하기 위한 장소

 

이제 우리는 실제적인 기도의 기교를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로부터 배울 수 있는지 보도록 하자그리고 우리가 물리적으로 일상사로부터 물러나 기기도하려고 할 때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보도록 하자무엇을 했을까?

 

프란치스코는 종종 후일 그렇게 불렀던-‘장소적인 구도로부터 시작하였는데이것은 단지 그의 생각 안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기도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였다우리는 분심에 매우 약하기에 기도를 위한 특별한 장소를 가지는 것은 도움이 된다고 말하곤 하였다프란치스코가 기도하기 위해 찾아가곤 했던 섬이나 바위나 산이나 동굴들은 그가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도움을 주었다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아름다움에 그의 눈길이 머물면 그는 바로 하느님의 그 아름다움으로 들어 올려지곤 했다그에게 피조물은 거울과 같았고그 거울 안에서 그는 그가 갈망하는 하느님의 반영을 보았으며그가 향해 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보았다동시에 그는 우리가 약하고 불완전하기에 기도하기 위한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느님께서 온 누리를 채우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이것이 단지 앎이 아니라 체험이 될 때까지 우리의 기도 생활 안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게 될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분심에 약하기에 그처럼 기도하기 위한 장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만일 우리가 문 밖 어딘가를 발견하거나 작고 소박한 한 구석을 실내에 마련하여 우리의 취향에 따라 촛불을 밝히고청초한 꽃을 놓고 기도를 위한 방석을 깔 수 있다면그리고 기도의 잠심을 가로막는 일상적인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그 때 이 장소는 우리에게 하나의 중심점(Focus)이 될 것이다.그래서 그곳으로 향하는 단순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이전에 이미 체험한 내적 고요에 다시 뿌리를 두게 될 것이다아직도 분심이 든다면 우리는 분심하게 하는 것을 기도 안으로 평화롭게 끌어들여야 한다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지완전한 성취가 아니기 때문이다실제로 어디든지 계시는 하느님께는 분심이란 없다그래서 우리는 모든 옆길로 빠지는 것을 본 방향으로 돌아가게 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고모든 떠도는 생각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창이 된다육화하신 그리스도의 이 분명한 메시지는 모든 인간 삶이란 살아있는 모든 이을 사랑하시는 분과 함께 대화하게 하는 꺼리라는 것이다.

 

기도를 위한 두 번째의 간단한 도움은 기도에 시간을 배정하는 것인데기도의 누적적인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많이 배정할 뿐 아니라 시간을 규칙적으로 내는 것이다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은 불가피하게 그 내용에 좌우된다아침에 하는 기도는 맞이할 그날 하루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 있을 것이고또는 밤에 하는 기도보다 훨씬 덜 침해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하루의 일을 마친 다음의 기도는 우리의 피곤함을 반영할 것이고우리가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 가져와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가 받은 상처피곤함감사하는 것들우리의 삶과 일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표지들우리가 걱정하는 것들도움이나 용서가 필요한 크고 작은 문제점들재난들인간 삶의 고뇌 등이 모든 것들은 기도를 위한 원료(Raw Material)이다프란치스코는 그의 새로운 수도회를 위해 무엇이 좋을지 또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것을 주님께 여쭈곤 하였다그러나 기도의 핵심은 역시 하느님께 대한 그의 경배였고 다른 것은 도입부(Prologue)일 뿐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다음의 두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기도로 나아가곤 하였다하느님은 누구시고나는 누구인가이 두 질문은 그로 하여금 자신과 하느님 실재 안에 위치하게 하였다이런 식으로 그는 그의 정신에 일상의 잔해들을 재거하고 다시 한 번 하느님께 자신을 집중시켰다자신의 질문에 대한 그의 많은 대답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영광스러운 목록처럼 우리에게 전해졌다그분은 거룩하시고전능하시고강하시고크시고선이시고사랑(Love)이시고애덕(Charity)이시고지혜이시고아름다움이시고평화이시고기쁨이시고정의이시고알맞음(Moderation: 또는 중용)이시고온갖 풍요이시고온화이시며휴식이시고희망이시고감미로움이시고생명이시다우리가 이를 천천히 기도로써 되풀이 한다면 프란치스코가 배운 그 흠숭의 기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프란치스코는 일상사 안에서 재빨리 하느님을 보았고일상사가 그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고 모든 시작이 가장 특별한 선물임을 빨리 알아보았다그는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 특별히 하느님을 찬미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는데그것은 눈 먼 우리 인간을 위해 하느님께서 빛을 주셨기 때문이었다프란치스코는 언니 햇님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하느님을 닮았기에 해와 빛을 사랑하였다모든 물리적인 빛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돌보시는지 프란치스코에게 드러냈으니 낮에는 언니 햇님으로 밤에는 언니 불로 우리의 여행길을 밝히도록 밤낮으로 충분한 빛을 주셨음을 찬미하였다몇 년 후 눈병 때문에 거의 장님이 되어 빛을 못 견뎌 할 때 그는 피조물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피조물의 찬가를 지었는데그중에도 언니 햇님을 기리기 위해서였으니.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지존하신 님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심이었다.

 

두 번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그는 지극히 불쌍한 벌레라고 대답하곤 했다이것은 지신의 필요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하신 모든 것에 대한 오랜 깨달음에 그의 마음을 열게 하였다프란치스코는 성서에 너무도 깊이 잠겨들어 성경의 말씀들이 거의 그의 모든 말이 되었다지극히 불쌍한 벌레라는 말도 하느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당신의 불쌍한 벌레야곱에게 동정심으로 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두려워 말라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아훼의 말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를 두원하는 이다.(이사야 41,14)

 

지극히 불쌍한 벌레라는 이 구절은 프란치스코 자신에 대한 병적인 자기바하와는 거리가 멀다그렇다기보다 무로부터의 그의 피조성과 많은 것을 지금 필요로 하는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신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요약한 일종의 속기(Shorthand)이다그것은 그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신 분에 대한 신뢰에 찬 확언이었다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마리아와 같은 체험을 하고 있음을 느꼈고그래서 그의 비천함을 여겨보시고 영예하심을 느꼈다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부적합함과 가난이 은총을 얻게 하는 수단바로 그것임을 알았다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더 가난한 존재로 이해한 것은 결코 잘못된 겸손이 아니었다동굴의 어두움 속에서 그는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그리고 자신이 진정 무엇과 같은지를 철저히 탐구하였고그래서 거기서 자신이 배운 것들을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자신의 뒤안길을 가는 이 여정이 오히려 은총과 기쁨의 길로 바뀌듯 그것은 자신의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감으로써 빛이 그의 전 존재를 휘감을 수 있게 한 것이었다자신에 대한 모든 탐구는 끝내고 하느님만을 찾을 때까지 이 고통스러운 여정을 통하여 그는 철저히 자신을 변화시켰고완전히 돌아섰다프란치스코 안에서 우리를 감명케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단순하면서도 부러운 이 하느님 안에서의 환희이다이 환희는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하였다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우신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행복이신 주님께서 사람을 존재케 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제동료 전기 우리는 프란치스코와 함께 있었다, Salvator Butler OFM 번역 19)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와 아주 비슷한 방법으로 기도에 접근하였고 분명 그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시성 조사에서 자매들은 글라라가 기도에서 돌아올 때에 대해 애기하는데 이는 그가 40~50명이 함께 산 성 다미아노의 좁은 수녀원 안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프란치스코처럼 자매들과 떨어져서 기도한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글라라의 기도 시간이 길어져 자매들과 한 동안 떨어져 있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그가 기도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나고언제나 온화하지만 이때는 보통 때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애기하곤 했다고 자매들은 애기해주고 있다.

 

기도를 하는 동안 글라라는 무엇을 한 것일까그가 우리에게 추천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그는 한 가지 근본적으로 길잡이가 될 만한 것즉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그리스도를 보았다글라라는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영원을 보았다.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라고 얘기한다이 영원의 거울을 들여다봄으로 우리는 어떻게 시간 안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보게 된다. ‘정배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바라고깊이 생각하고관상하십시오.’ 글라라는 이 그리스도를 닮음이 그저 법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구도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을 의미했고하느님의 그 깊이를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했다.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신적 실체의 형상 가운데 두십시오.

그대의 전 존재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십시오.(글아편 3,12~13)

 

육화 때문에즉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하느님과의 일치는 열매를 맺어야 할 뿐 아니라그리스도의 열매처럼 우리의 열매는 지금이 세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중심 사상 중의 하나였다그것은 다른 삶 안에서 희미하게 희망을 발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안에 그리고 인간의 마음 안에 비할 수 없이 귀한 보물을 숨겨 놓으셨다.(글라편 3,7) 보물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인간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참된 창의성은 이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것이다이것은 삶의 깊은 확신을 주는 글라라의 관점이었고 완전히 전형적인 글라라의 관점이었다그에게 있어서 우리의 영광과 과제는 뒤따를 모든 결과와 함께 현 시점에서 그리스도를 품는 것이다. ‘영화로우신 동정녀께서 육신적으로 그분을 품으셨듯이 그대도… 의심할 여지없이… 영적으로 그분을 품을 것입니다.’(글라편 3,24~25) ‘사도의 말을 빌린다면나는 그대를 하느님 자신의 협력자이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의 넘어지기 쉬운 지체들을 떠받치는 이로 여기고 있습니다.(글아편 3,8)’ 그리스도를 품고 서로를 떠받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과제이다그런데 글라라는 이것을 자기 편지의 수신인인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의 청혼자 그들의 교만이 하늘까지 이르고그들의 머리가 구름까지 닿은 이 세상의 많은 왕들과 여왕들(글아편 3,27~28)과 대조를 시키고 있다특히 자기 편지의 수신인인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의 청혼자였던 Frederik Barbarossa와 대조시킨다

 

일반적으로 얘기할 때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영성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그토록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용기를 주며 빛으로 가득하다그것은 일치로 이끄는 구원의 영성이다그들은 영광의 정상을 보았고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일치를 보았다그러나 이 하느님과의 일치는 우리가 그것을 받기에 합당해서가 아니라(앞서 얘기한 대로 하느님과의 일치는 우리의 올바른 행위의 상급이 아니다하나의 선물상상할 수 없는 사랑의 결과이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좋아하신다그들은 하느님의 좋으심에는 한계가 없음을 알았기에 그토록 대단히 긍정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었고 그것을 현실화시킬 줄 알았다그들은 한때 우리와 같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우리와 일치하시는 분으로 계시며 그 결과로 온 우주의 모습이 바뀐다는 것을 완전히 꿰뚫었다.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묘사로 글라라의 편지는 가득 채워져 있다해방자임금님고통을 당하시며 사랑하시는 분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가장 근본이 되는거울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거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떤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는지를 보고어떤 존재가 되도록 불리움 받았는지를 본다인간의 고통을 거부하지도 무시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거울을 오래 바라본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 예수의 수난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그의 수난에서 우리는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인간인우리 자신에 대해 보아온 것을 이제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본다이때야 우리는 그분 고통의 끝자락들을 만지기 시작할 것이고, Norwich Julian이 한 말즉 그분과 우리는 본성을 나누어 가지기에 그분이 고통 중에 계시면 우리도 고통 중에 있고우리가 고통 중에 있으면 그분도 고통 중에 있다는 말의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이 고통의 나눔은 개인의 능력에 의한 어떤 결정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우리 삶을 바꾼다그 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고통인 그리스도의 고통에 열리고 우리의 가치를 바꾸며 가치의 변화와 함께 우리도 바뀐다그리스도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즉 죄 많은 인간인 우리는 그분 자신이신 하느님이신 분을 만난다그분은 마치 우리가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기 위하여 신성이라는 그분의 맑은 유리를 우리의 불투명한 인간성으로 도금하신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누군가를 오랫동안 바라보면 그때 사랑이 우리 안에 생겨난다는 것을 글라라는 잘 알았다하느님도 분명 이 면에서 예외는 아니시다예수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보아온 것이 이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글라라가 우리에게 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영원에 오래 노출하라는 것이다그리스도는 길이시고 그 길을 프란치스코가 보여주었다고 글라라는 얘기한다우리는 이 길을 그리스도를 관상함으로써 걸어간다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그분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다글라라의 말에 의하며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화상 (Icon)또는 형상 (Image)이시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모든 기도의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이다영원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를 영광의 광채로 데려갈 것이다그때 햇빛을 받으면 태양의 그 엄청난 열의 작은 반사로도 우리를 땨뜻하게 하듯이 하느님 앞에 있으면 하느님의 그 크신 선의 작은 반사로도 우리를 선하게 한다우리의 존재가 하느님으로 흘러넘칠 때 그대와 모든 사물을 담으시는 그분을 담을 것이다.’(글라편 3,26)라고 글라라는 얘기한다.

 

세월이 가면서 글라라는 자기 자신과 남의 경험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은 그리스도 닮기의 첫 번째 단계임을 알게 되었다그 다음 단계는 그리스도를 바라봄의 결과로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같은 형태로 바뀌기 시작할 때 온다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고(Gaze), 깊이 생각하고(Cpmsoder), 관상할(Contemplate)(글라편 2,20)때 일어난다이 세 동사는 기도의 세 단계를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과 예수께 일어난 일과 예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닥친 충격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게 된다이것은 일종의 정보를 찾는 것이며 단순하게 무엇을 볼 뿐 아니라 공부와 영적 독서도 한다다른 데서 글라라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의 외적인 요소들에 예의주시하고 관찰하고 적어둘 것을 권한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성찰하고 반추하고 우리가 읽은 것에 대해 기도에 잠겨 숙고하는 것이다영적 독서가 음식이라면 이 단계는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해서 우리 자신의 것을 만드는 단계다글라라는 우리를 보는 것의 경험으로부터 숙고하고 공부하는 더 깊은 경험으로 이끌고 있다그래서 우리는 정보 제공적이고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우리의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성찰하고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에게 일어난 일들에 경의를 표하는 단계로 인도되고 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여러모로 생각하고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 깊이 들어오게 하고우리 자신이 깊이를 더 하게 해야 한다고 글라라는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관상하게 되는데관상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룬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 몰두해있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일은 하느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관상이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써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맡기는 것이다그것은 경탄과 경외와 놀라움과 민감함을 포함하고어리둥절함과 혼란도 의미하며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기도 하고아무 생각이나 상상도 없이어떤 말이나 결심도 없이심지어는 경우에 따라 아무런 느낌도 없이 거기에 그저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그것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고통스러운 감각을 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있음을 포함하고우리의 무성을 깨닫고 우리 공의 고통을 겪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그것은 무엇을 하려는’ 끊임없는 유혹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그러나 이 시간이란인간이 되는 법에 대한 배움의 연속이기에 이 시간의 어느 한 순간도 낭비 또는 상실이라고 할 수 없다. Thomas Traherne가 얘기하듯이태양이 빛나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기 마련이기에 우리의 꾸준한 바라봄으로부터 진실한 사랑은 솟아나올 것이다우리는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이 놀라운 진리를 잊고 지냈으며 오랫동안 우리의 본래적인 선성에 대한 신뢰심을 잃고 살아왔다.

 

이제 글라라는 바라봄깊이 생각함관상이라는 세 가지 표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우리를 한 걸음한 걸음 하느님 한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다우리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그것들의 의미 안으로즉 사랑 안으로 인도된다우리의 바라봄은 이제 거울의 한 가운데로 향할수록 점점 우리 자신으로부터 돌아서서 거기서 우화나 전설에서도 얘기될 수 없는 그 사랑, ‘Inefabilem Caritatem”(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보게 된다.(글아편 4,23) 우리는 또한 새로운 빛 안에서 우리의 과거도 보고 우리 삶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하기 시작한다그래서 글라라는 전 존재를 거울 안으로 던져 놓고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거울 안에 두라고 말하고그러면 하느님의 바로 그 모상(Image)으로 신비스럽게 변화되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 성화상이나 현현이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스도께서 마치 오늘날의 길가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과 같음을 암시할 때 글라라는 또한 이 모습을 선명하면서도아주 우연의 일치겠지만초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얘기하고 있다. “십자가 나무 위에 걸려있는 이 거울께서 지나가는 모든 행인들에게 깊이 생각해 보라고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길가는 나그네들이여나를 보시오내가 겪는 고생같은 고생이 어디 또 있겠소,’”(글라편 4,24~25) 그는 우리가 어떻게 이 거울의 다른 면들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삶의 다른 측면들을 볼 수 있는지를 -그리스도 몸소 우리의 길이시기에 마치 길의 다른 쪽을 보는 것처럼설명함으로써 이 비유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거울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그분이 처한 외적인 상황인 그분의 놀라운 겸손과 기막힌 가난’(글아편 4,20)을 본다그리고 우리는 이 거울 중간의 볼록한 면에서 당신 생애 중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업적들과 그것을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게 되고이 거울의 한 가운데서는 우리가 십자가라고 부르는 사랑과 고통의 신비를 마침내 보게 된다.

 

글라라는 이제 아름답게 짜여진 글을 쓰고 있는데거기서 그는 우리를 유의함에서부터 깊이 생각함을 통하여 관상으로 인도함으로써 십자가로부터 그리스도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한 다음 이제는 다시 깊이 생각함을 통하여 유의함으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한다. (글라편 4,22~25) 이 순환은 우리 삶에 있어서 기도가 떠도는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데누구도 높은 관상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모두 성서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읽고깊이 생각하고숙고해야 한다.

 

그런데 이 거울에는 다른 측면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이 아직도 있다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글라라는 이것을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삶에 적용한다그는 말한다. “이 거울을 보고 무엇을 단장해야 하는지를 보십시오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보십시오원형을 보며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모든 덕행의 의복으로 그대 안팎을 꾸미도록 그대 얼굴을 자주 비춰 보십시오.’”(글아편 4,15~16) 그래서 이제 그는 어떻게 명료화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그리스도같이 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점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그 모습을 매력적으로 전개하면서 그는 우리가 얼굴을 이 거울에 비추어 자세히 살피면 우리의 전 존재를 꽃으로 단장하듯 덕들로 단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이 덕들이란 비단 본질적인 것 뿐 아니라 장식적이고 기능적이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지존하신 임금님의 딸과 정배가 단장해야 하는 의복이면서도 최소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obligatory)을 넘어서는 약간의 특수한 가외적인 것(extra)이기도 하다그는 여기서 아마 궁전 안으로 인도되는 임금님 딸의 아름다움에 관한 시편을 마음에 두었을 것이고성 바오로가 가지고 있던 애덕에 관한 이미지즉 애덕이란 우리가 입고 있는 모든 겉꾸밈 위에 입어야 할 겉옷이라는 이미지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더 나아가서 또 다른 무엇이 이 거울에 비치고 보게 되는지를 얘기한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우리를 위해 드러난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볼 것이다그는 마치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 볼 때즉 영광의 전형(paradigm)과 영광의 역설(paradox)인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동시에 보듯이우리는 되어야 할 나를 보고 현재의 나를 봄을 얘기한다우리가 보통의 거울을 볼 때 우리는 세상과 과제를 직면하기에 앞서 무엇이 먼저 이뤄져야 하는지를 보기 위하여 거울을 본다우리는 정확하게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본다이 그리스도의 거울에서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다른 거울에서처럼 하느님의 업적을 보고은총으로 단장한 누군가를 본다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사랑받고구속되고아름다워진 사람을 보고 동시에 그 안에서 이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은 누군가를 본다우리 자신에 대해서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글라라는 신선함(refreshment)과 향기와 부드러운 빛과 앞선 글에서 그가 은총으로 돌렸던 바로 그것들로 단장되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그는 우리가 단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것만 얘기하지 않고 아름다움과 단장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구약의 에스텔처럼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는아름다움이란 진리의 정련임(Beauty is a test of truth)을 상기할 때단장과 아름다움이다.

 

기도와 관련하여 이 단장은 우리의 몸이 있는 거기에서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을 배우기를 무엇보다도 요구한다결국 모든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 현존 안에 있을 때 아름다움을 반사하는 것이다기도는 하느님 선의 선물이기에 그 선물을 받기 위한 첫 번째 요구 조건은 우리가 거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여기서의 거기 있음은 가장 넓은 의미의 있음이다우리는 내면적으로 너무도 갈라지고 나누어져 있기에 기도할 때 대부분의 우리의 노력은 이 현존을 위한 노력이다그러나 그 노력은 함께 나누는 노력이다아우구스티노가 얘기하듯 우리는 일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그러므로 기도란 우리의 현존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하느님은 언제나 거기 계시고 그래서 우리가 거기 있을 때 해가 빛을 비추듯 친교는 자연적을 이루어진다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분열에서 한 점으로 이끌리어 마침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그분께 말을 건넬 수 있게 되는 삶의 변화 요소이다.

 

요즘 현존의 기술에 대해서한 마음가짐에 대해서한 지향두기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오가고 글들이 쓰이고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도 이 면에서 상당히 숙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이것은 그들 매력의 한 비결이요 그들 단순성의 한 비결이다좀 더 현대적인 언어로 얘기하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관계적인 사람들이며하느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그 방식이 모든 관례의 전형이라고 글라라는 여긴 것 같다그가 권하는 대로 그리스도를 고요히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의 원형인 하느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그 결과로 우리의 모든 관계들은 그 잠재적인 힘을 더 깨닫도록 자유롭게 된다우리는 현재의 나로만 자신을 보는 경향이 있지만 하느님은 결코 미래에 되어질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신다. ‘구름이 얘기하듯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은 현재까지의 우리와 과거로부터 현재의 우리를 보지 않으시고 될 우리를 보신다모든 희망의 근거는 분명 하느님께서 우리의 미래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나누는 미래에 대해서 가지시는 이 믿음에 있고하느님께 기초를 둔 이 희망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그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한다.

 

이런 통찰로부터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하느님과 우리 관계의 세 가지 형태를 본다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방향전환(conversion), 우리가 변화되는 정개(xontrition),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되는 친교(communion)가 그것이다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이 세 가지를 순서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고 우리 안에 이 세 가지가 항상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그들은 기도에 대한 권고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그것은 어떻게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항상 그들의 주관심사였기 때문이다여기에 더해서 프란치스코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방식이 우리의 기도에 훨씬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의 기도를 끌 수도 있음을 항상 강조하였다방향전환과 정개와 친교는 지금 또는 어느 때에나 맞은 특별한 외적인 무엇(extra)이 아니라 일생의 프로그램이다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기(인준 회칙 10,9 참조)를 원한다고 말하곤 하였다우리의 과제는 할 수 있는 한 마음을 자신의 이익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여러 선택을 하고자기 기만의 무한한 여지도 있다우리는 기도가 하느님께 이르러 응답되기 위하여 기도하거나 경험을 가지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과 만나고 하느님께 언제나 쓰이기 위해서 기도한다다행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심은 그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에 의해 판단되지 않고그래서 실제에 대한 일시적인 우리 인식(하느님 부재)과 실재 그 자체(하느님 현존)를 혼돈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하느님의 현존의 실재와 마찬가지로 기도의 유효성은 기도하는 동안 무엇을 우리가 느꼈는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도 후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의해서 검증된다.

 

하느님을 찾음은 기쁨을 찾음과 같은 것이라는 입장을 프란치스코는 견지한다그러나 우리는 종종 기쁨이란 우리의 큰 용기를 요구하기에 비관주의적인 평화에 남는다는 것을 차라리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하느님의 종인 우리가 깨끗한 마음의 열매인 내외적 기쁨을 지니고자 노력한다면 그 때 악령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말하곤 하였다(세 동료 전기 72그는 인간 본성의 상승 지향적 경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이 기도에 얼마나 해로운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거듭우리의 허약한 실재를 정확히 반영하는 단순성과 겸손과 가난과의 접촉을 결코 끊지 말도록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일생에 걸쳐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설교한 바를 실천하려 대단히 노력을 하였고자신이 그리스도를 닮듯이 자신을 닮으라고 형제들에게 말하곤 하였다글자 그대로 그렇게 한 요한 형제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프란치스코가 재채기를 하면 그도 재채기를 하였고 프란치스코가 돌면 그도 돌았다시간이 지나서 프란치스코의 성스러움이 그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었지만 반면 그는 보다 성인다운 어두움을 프란치스코에게 기대하였다한 번은 프란치스코가 그의 노래에 루트 반주를 해주기를 청하였는데그 형제는 이웃들이 충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여 마땅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척하였다또 다른 얘기가 있는데 프란치스코가 포도주를 청하였는데 그 형제는 뻔뻔 스러운 듯이 가난의 정신과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차원에서 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였다프란치스코는 마지못해 점잖게 동의하였다그런데 물을 가져왔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위하여 가나의 기적을 다시 베푸셨다고 얘기는 전하고 있다프란치스코가 심하게 아픈 다른 어떤 때그는 피조물의 찬가를 밤낮으로 불러줄 형제를 청하였는데마침내 엘리아는 프란치스코가 그토록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주님 안에서 이렇듯 위로를 받고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보면서 성인을 향해 사랑하는 형제여당신이 당신 자신과 형제들을 위하여 그토록 행복한 당신을 보여주고 있음은 저에게는 크나큰 위로와 교훈이 됩니다그렇지만 살아있건 죽었건 성인으로 여기는 이 도시의 사람들은 당신이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밤낮으로 찬미가를 행복하게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는 의아해하며 이렇게 서로 얘기할 것입니다. ‘돌아가시게 되었는데도 이분은 어떻게 그토록 즐거울 수 있는가죽음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이에 프란치스코가 응답하였다.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는 나의 주님과 너무도 긴밀히 일치되고 하나 되어 그의 자비로 높으신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완덕이 거울 122)

 

프란치스코가 이런 기쁨에 도달한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남기신 본보기’(세동료전기 180)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였다고 자신의 입으로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다이것은 그의 모든 기도의 확고한 바탕이었다성과 속 사이의 구별이 없고이승과 저승 사이의 구별도 거의 없음을 그는 점차 보게 되었다하느님께서 전부이시기에 생명이 전부이다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그것을 다른 것으로 만들려고 우리가 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선물의 선한 본질은 손상이 없다우리가 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선물의 선한 본질은 손상이 없다우리는 인간성을 뒷면으로 지닌 맑은 유리인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바라봄으로써 이 선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육화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적인 연관성과 친교를 벗어난 인간의 삶이란 현재도 미래도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이제 어떤 것도 속 적인 것은 없다(Nothing now is profane). 이제 어떤 것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벗어난 것은 없다기도와 매일의 삶은 완전한 별개의 것이 아니고글라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씀이 참 빛이었다.’(요한 1,19)는 요한의 말이 구체화된 분과 같이 우리는 기도를 통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글라라와 프란치스코가 처음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때 요한 형제가 프란치스코를 닮듯이 그들은 위대한 단순성을 가지고 글자 그대로 닮아갔다다른 사람들은 요한 형제에 의해 분심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다 참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마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하라는 것이것은 글라라가 언제나 우리에게 충고하는 것이기도 하다당신의 사랑 때문에 당신 전부를 주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라고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얘기하고 있다여러분의 것 그 아무 것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말라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했다겉으로 보기에 이러한 자원의 비생산적인 낭비가 사랑의 핵심이고 되돌아오는 이익이 이무것도 없는 진정한 자기 증여이다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다대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는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