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를 살기

제5장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통

Margaret K 2017. 12. 18. 21:09

육화를 살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 함께 기도하기

Frances Teresa OSC

김찬선 레오나르도 역





5장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통

 

우리의 삶이 제 아무리 많이 하느님 안에서 영위되고 제 아무리 많이 기쁨의 삶을 선택할지라도 여전히 슬픔이 우리를 찾아올 때가 있다슬픔 또는 고통이 우리 삶을 모질게 공격하여 질그릇인 우리가 불속에 던져져 금이 갈 정도로 불은 우리를 옥죈다다른 사람이 주가 되는 생활은 자기가 선택한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괴롭고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그런 회개와 자기수련을 주로 생각해 왔다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이런 것도 우리 영적인 삶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우리 삶과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부분이기도 하다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싸움은다시 말해서 우리를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장 성숙케 하는 것은 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데도 우리에게 갑자기 들어닥치는 것이며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우리가 느끼는 것이다단식과 같이 우리가 자유롭게 수행하는 싸움은 아주 수월한 것이다그것은 단식이 나의 통제 하에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언제고 중단할 수 있다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며 견디기도 힘들 뿐 아니라그것 때문에 너무 지쳐도 끝을 낼 수도 없는 그러한 고통과 고민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어떻게든지 살아야 하는생존만이 우리가 바라는 전부일 정도로 그토록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그런 마음의 큰 상처를 주는 상황(이러한 상황은 많은 사람에게 이런 저런 모습으로 다가온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그때 무엇이 기쁨이 되고 우리의 기도와 찬미와 감사하는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그것이 이런 상황에서도 가능할까고통과 상실과 마음의 큰 상처 중에도 감사를 드리려고 애쓰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어떤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인가?

 

거의 모두가 자기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은 분열의 시기를 거치는데 이 분열의 시기는 너무도 어려운 시기이기에 단지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기도 여정에서 아주 중요한 때이다우리는 병에 대해서상실에 대해서육체적인 지병에 대해서좌절 또는 이러저러한 비난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고이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다한다는 것이 이 경험의 근본적인 특징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고심지어는 다른 사람 마음대로 우리가 희생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우리는 가끔 병자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죽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대비하지 않고 그 일이 닥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볼 수도 있다그래서 그렇게 사무치지만 죽음을 위한 준비는 하나도 없고 죽음이 오면 벌거벗은 우리 자신을 내 보이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그것은 말 그대로 Angusia(옹색궁핍)이며그 안에서 우리는 제한을 받는 좁은 공간이다사실대로 얘기하면 나는 크나큰 곤경 중에 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병과 상실과 정신적 외상과 고통 또는 좌절 가운데서 우리는 다르게 살아간다전에 우리를 그렇게 바쁘게 했던 그 많은 일이 방치된 채 있지만 이제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시간이 흐르면서 이 많은 일이 우리 삶 안으로 녹아들 수도 있지만그것이 방치되고 문제가 되지 않던 시간이 있었기에 이 일이 이제는 결코 전과 같은 강도로 우리에게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그 많은 일이 상대적으로 되어버리는 혼란의 시기는 우리를 급격하게 변화시켜서 외양적으로는 같은 삶을 살지라도 내면적으로는 변화될 것이다열기가 지구의 바위들을 바꾸어놓듯이 절대적인 어떤 손길이 우리를 시들게 하고 변화케 하여 우리는 밑바탕에서부터 변화되는 것이다우리의 작은 삶 안에서 우주적인 것과 씨름하듯이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 존재 안에서 일하신다우리는 이전의 어떤 것보다도 깊은 차원에서 죽음과 부활이 힘겨루기 하는 골고타와 낙원이 되는 것이다죽음과 질병과 파괴는 우리 존재의 본질이요 우리가 씨름하는 우주적 혼란의 한 부분으로 드러난다이때 우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이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경험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욥과 같이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지만욥과 같이 우리가 한 것에 비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보면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오직 상벌 차원에서만 보는 영성은 옳지 않다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했지?’하고 묻지만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기에 대답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 비극이 우리의 탓 때문이라고 자신을 몰아가서는 안된다비극을 죄의 존재와 연결시킬 수도 있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만한 무엇을 내가 했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유일하고 솔직한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일 것이다우리는 당황함이나 분노나 치욕감이나 죄책감 가운데서 이 질문을 이런저런 형태로 하는 경향이 있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를 볼 때 그들이 일종의 영원한 즐거움 가운데 산 것처럼 오늘의 우리에게는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과 우리가 보는 것이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그들의 정신에 겨울이 닥쳤을 때 그들은 어떻게 자신을 다스렸는지?’를 묻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그통을 갈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인간의 이야기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그 때 그들의 영성이 무슨 의미가 있고그들의 평온과 기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혹독한 시련 중에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비싼 값을 치루고 얻은 그들의 기도와 기쁨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그런 경험을 알고 있었을까예를 들어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 글라라에게 일어난 상실감 같은 것 말이다그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33세 아니면 34세였는데 그녀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그녀는 이것을 극복하였을까후일 몸소 이때에 대해서 딱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남아 있는 이 시기의 편지가 없지만 다른 두 가지 정보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하나는 프란치스코의 초기 동료 중 하나인 레오 형제가 쓴 것이 거의 틀림이 없는 페루지아 전기이고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 사후 바로 쓰여진 첼라노의 제1생애인데만일 자신들의 기억과 달리 첼라노가 잘못 기술하였다면 그것을 같이 경험했던 글라라와 모든 초기 형제들이 살아 있었기에 고쳐주고 비판했을 것이다프란치스코의 죽음을 앞 둔 주간에 글라라도 병이 깊었다고 레오는 이야기한다.

 

프란치스코가 임종한 그 주간에 … 글라라 자매는 중병을 앓고 있었다프란치스코의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 다음으로 그녀의 유일한 아버지요영혼과 육신의 위로이며하느님의 은총 안에 살게 해준 첫째가는 존재인 프란치스코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글라라는 비통하게 울었고 자신을 어떻게 위로할 수 없었다한 형제를 통해서 프란치스코에게 알렸고….”(페루 109)

 

글라라가 한 형제를 통하여 프란치스코에게 알렸을’ 때 우리는 여기서 그들 사이에 아주 쉽게 오가는 공감 관계가 있었으며 상호 이해가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프란치스코를 사랑과 놀라움으로 바라본 것처럼 형제들은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관계를 큰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것 같다그녀의 슬픔은 그들을 애통케 했다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은 즉각적이고 따뜻한 정서적 공감을 주고받는다형제들은 두 사람 관계의 초월성과 정결함에 대해 의심치 않음은 물론 결코 경탄을 멈추지 않았다프란치스코의 죽음이 글라라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형제들은 잘 알고 있었으며프란치스코가 죽어갈 때 글라라가 심하게 아픈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글라라에게 프란치스코는 아브라함에게 이사악과 같은 것이었다삶을 바꾸는 하느님의 선물이요하느님 사랑의 표시이며하느님께 대한 응답의 핵심이었다대부분의 우리에게도 이사악 또는 프란치스코가 있는데그들 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다인간이란 어떤 식으로든 가치가 있다만일 가치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이사악은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분인 초월자를 우리에게 중재해 주는 인간적인 요소이다이런 이사악을 잃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큰 상실이어서 우리는 이 사건을 기준으로 다른 일을 가늠하고 계산할 것이다예를 들어 이것은 그때만큼 끔찍하지 않다.’라고 하거나 그것은 그 전에 일어났다고 할 것이다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에 대한 의의 상상력 풍부한 성찰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그토록 심하게 요구하신 일을 아브라함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결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이 경험으로 초토화된 아브라함은 다시는 결코 웃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고 있는데이사악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웃는 자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사악이 정말 산 위에서 죽었음을 얘기하는 것이다이러한 성찰과 경험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한가운데로 몰아넣는다아브라함처럼 우리도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치룬 대가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불가능한 무엇을 체험했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전과 달라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임을 의미하기에 그 일이 있고 난 후의 우리는 결코 전과 같을 수 없다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사악보다 더 많이 변화되었다그 산에서 이사악이 비록 변을 당하지 않았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어떤 의미에서 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죽음이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산 자가 더욱 죽음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글라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프란치스코를 통하여 너무도 많은 은총이 그녀에게 주어졌다프란치스코의 죽음과 자신의 병을 마주하고 있는 그녀는 그의 죽음 앞에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비통하게 울었고자신을 어떻게 위로할 수 없었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그녀는 울지 않았다성인들조차 상황을 자기 바람대로 만들 수 없으니 우리의 실패도 우리를 낙담케 해서는 안된다우리는 더 큰 무엇의 한 부분이고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 달리 나름대로 움직이는 길이 있다강한 정신을 지닌 그녀였지만 자신을 어떻게 위로할 수 없었다.’ 노력하였지만 실패한 것이다많은 세월이 지난 후 지난 날을 회상하며 우리 기둥이시고 하느님 다음으로 유일한 버팀이 되셨던 거룩하신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나를 두려워 떨게 한 그 연약함’(글 유언 11)에 대해서 그녀는 적고 있다그녀의 라틴어 문장은 그녀가 그토록 약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지만 약한 자신을 발견하였고 그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음을 내포하고 있다그녀 안의 약점이 그녀에게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그때까지는 인생이 그녀에게 던지는 어떤 도전도 이겨내는 강한 여인이었다사랑과 열정과 성공의 절정을 달리던 그녀가 이제 아마 처음으로 자신 안에서 그토록 나약할 수 있음을후일 아직도 두려움과 함께 기억할 정도로 그때 그렇게 나약할 수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분명 내가 두려워한 약함은 프란치스코의 상실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녀가 상실한그녀의 힘의 기둥인 프란치스코의 상실을 극복할 힘을 찾지 않을 가능성이었다그 없이 그녀가 그의 상실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글라라에게도 문제는 단지 위로가 아니라 의지할 곳이었다살아 있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보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위로 또는 의지가 되고 자신을 부정케 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녀는 둘만의 작별을 나눌 순간도세상을 바꾸는 그들의 실낱같은 관계를 함께 이어갈 기회도감사와 충고와 애정을 나눌 기회도 가지지 못하였다그녀에게는 아직도 다듬어져야 할 살아 있는 나무가 있었기에 다듬어지도록 시간의 선반 위에 홀로 남겨졌다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대답 없는 기도의 그 쓰디쓴 맛을 보았다아마 우리가 모르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모든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라는 것은 혼돈에 대한 처방임을아마 그녀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아니는 그러하마만큼 창조적이라는 것을(역자 주모든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라는 것은 청지창조 때 하느님께서 혼돈(chaos)으로부터 창조를 이루어내신 것과 같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것인데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과 같이 이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에하느님만 계시다면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의 요청에 대해서 아니라고 거부하셔도 그것은 그러하마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것이라는 얘기를 저자는 여기서 하는 것 같다그러니 글라라도 그렇고 우리도 응답이 없더라도 하느님의 침묵에 우리도 침묵으로 견뎌야 한다반대로 그녀는 깨닫지도 기억하지도 못하고 우리처럼 그저 견뎠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프란치스코가 죽었을 때 형제들은 그의 시신을 성 다미아노로 옮겨 글라라와 자매들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게 하였다이것이 그녀가 작별을 고할 유일한 기회였다그것은 또한 형제들처럼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오상을 놀라움 가운데 바라보는 또 다른 기회였다성 다미아노에 오기 전에 형제들은 손과 발의 한 가운데에 사실상 못으로 뜷린 구멍이 아니라 까만 쇠의 빛깔을 띠고 있는 살로써 꾸며진 못으로 해서 생긴 구멍을 볼 수 있었고또한 옆구리가 피로 붉게 되어 있는 것”(1 113)을 보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형제들은 처음 봄 이때 그들의 기쁨은 절정을 이루었다아씨시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노래와 악대의 연주와 함께 그들의 성인을 고향으로 옮기는 승리의 행렬을 하는 중에 성 다미아노에 멈추어 자매들이 관을 열어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순간 이야기의 모든 색조가 바뀌는데 영광과 노래와 기쁨과 축제적인 분위기와 악대는 슬픔 앞에서 침묵하게 된다몇 문장 만에 우리는 자기 지방의 성인을 가졌다는 승리의 현장에서 깊고도 참혹한 개인적인 상실의 현장으로 옮겨가는데첼라노는 그녀 앞에 펼쳐져 있는 꿈에도 그려본 적이 없는 공허의 모습을 보고 있는 글라라의 입에 일종의 애가를 올렸다. ‘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고 그녀는 울부짖었다.

 

이 애가를 듣는 동안 우리는 그녀를 보며 슬픔의 모든 단계를 관통한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어찌하라는 말씀입니까어찌 이다지도 비참하게 우리를 저버리셨나이까이다지도 외로운 우리를 누구에게 맡기셨단 말입니까?” 불가능한 일이그녀가 평소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 일어났다프란치스코보다 훨씬 어린 그녀였지만 그녀의 건강은 너무 나빠서 그녀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었으며그녀는 프란치스코를 다른 편에서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먼저 죽기를 원했었다.’ 지금은 현실로 그녀 앞에 있지만 다른 각본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그녀의 생각은 여기에서 멈추었을 수도 있다프란치스코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노여워하는 그녀의 과장된 말을 듣는다. “ 이 감옥에 갇힌 우리는 … 어찌하란 말입니까너무나도 끔찍스러운 죽음이여이 죽음이 우리를 죽입니다.” 글라라를 포함하여 이 일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지 않았다면 첼라노는 이 말을 조금 다듬었을 것이다. “이 감옥에 갇힌” 존재에 대해 말하게 함은 그녀를 거룩함의 본보기요 평화의 여왕으로 만들려는 그녀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오늘의 우리에게 그녀의 이러한 말은 그녀의 고통심지어 그녀의 공포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하고그녀를 한 인간으로 더욱 믿을 수 있게 하며그녀를 본보기로 삼을 수 있게 한다하느님과의 일치는 누구에게나심지어는 하느님의 어머니의 발자취”(글라라의 생애 서문)라고 후에 자매들로부터 불린 글라라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 발자취를 만들게 한 여정이었다그녀는 마리아와 자신 사이의 강한 유사성을 보았다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마음에 그분의 말씀을 간직하였으며그분이 돌아가신 뒤 상처 입으신 그분의 몸을 안으셨다그런가 하면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인도로 그리스도께 나아갔으며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경청하였고 수도회에 몰아닥친 모든 엄청난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그 가르침에 충실하였으며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가 죽은 후 프란치스코의 상처 입은 몸을 받아들였다심원한 방법으로 글라라는 마리아의 경험을 같이 나누었고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마리아의 삶과 느낌을 가장 가깝게 꿰뚫어볼 수 있게 하였다.

 

우리는 글라라의 한탄을 듣는다. “무정한 작별이여누가 우리를 위안해 줄 것입니까누가 우리를 굳세게 해줄 것입니까누가 우리를 위로해 줄 것입니까?” 우리는 또한 슬픔과 기쁨으로 갈린’ 그녀를 본다자신의 고통 너머로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 안에서 하신 놀라운 일을 보는가 하면 위안을 앗아가는 것도 보는 것이다자매들은 프란치스코의 손과 발에 입맞춤하면서 상처 입은 손과 발을 보았다.

 

마침내 우리는 체념의 시작을 본다프란치스코가 마침내 그곳을 떠나자 그토록 큰 슬픔을 위해서는 이제 다시 열리기 어려울 문이 그들에게 닫혔다평화의 천사들이 그토록 서럽게 울 때 울지 않을 자 거의 없을 것이다.”(1 117) 문이 닫히는 순간에 이르자 얘기가 거의 바뀌는 느낌이 있다약간 빙충맞은 형제들을 그러한 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닫힌 문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이 기뻤다마지막에는 누구도 우리를 위해 울어줄 수 없는 것이기에 글라라는 할 수 있는 만큼 혼자 극복하도록 남겨졌다슬픔은 고독한 순례인 것이다.

 

글라라는 자신을 알아주는 상대를 잃었고 그 상실감을 경험한다프란치스코는 글라라의 이야기를 알았고 글라라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알았으며유일할 정도로 그녀를 알았다그런데 이제 누구에게도 얘기할 사람이 없다는 느낌이 뒤따랐다. “우리의 모든 위로는 당신과 함께 떠나가 버렸습니다그와 같은 위로는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른 누구도 가까운 사람은 없고 오직 우리만 상실감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정신적 고통에 잠긴 채우리가 침묵하게 되고 소원해지는 것처럼 글라라도 어떻게 보면 극단적으로 침묵하게 되었다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땅은 불확실을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오 가장 끔찍한 죽음이여이 죽음이 나를 죽게 하고 있습니다.”고 결국 글라라는 말한다.

 

사별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던져놓기에 새로운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특별한 효과도 있다그것은 우리에게 없는 편이 오히려 좋을 듯하지만 우리가 회피할 수는 없는 곳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다른 세상에가장 끔찍한 죽음의 황량한 산기슭에 우리의 고향을 만들어야 한다마침내 죽음의 시간이 분명해질 때까지 우리는 살아온 대로 살아야 하고 해결의 주님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하느님은 있는 것 안에 계신다따라서 기도의 시간은 있는 것 안에 우리도 그대로 머무는 바로 그 순간이다우리는 다소 엉성한 기도를 이렇게 또는 저렇게 바칠 수 있지만 어쨌든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는 우리 처지의 진실성 안에서만 있다실제 안에 머무르려는 우리의 노력 안에 평화가 있고 치유가 있음을 우리는 천천히 알게 된다그리고 훨씬 후에야 기도는 결코 말라버릴 수 없는 것임이 우리의 놀라움 가운데 분명해 지게 될 것이다.

 

글라라가 상실과 적응의 시기에 한 것이 이것이 아닐까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는가비록 글라라가 상징적인 방식으로 얘기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기에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죽은 후 가난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도록 자원하여 우리 귀분인이신 지극히 거룩한 가난에 충실하기로 약속하고 또 약속했습니다.”(글유언11)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분명 평온한 회상이지만 그녀가 여기서 상실 가운데서도 반드시 살아야 할 삶을 선택하려고 노력하였으며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무소유로다시 말해 우리 귀부인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가난으로 열어젖혔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녀는 파괴적인 일을 거부하기보다는 받아들임으로써 파괴를 자비가 되게 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이기기 쉽지 않은 싸움이고 거듭거듭 싸움터로 자신을 내몰아야 하지만 다시 한번 자유인처럼 행동함으로써 달갑지 않은 일을 통해 하나의 길을 발견하였다즉 우리 밖에 파괴와 창조달갑지 않음과 친근함이 같이 있지만 우리 마음 안에도 똑같은 것이 있음을 그녀는 발견하였는데외적인 무엇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그 협력자가 있을 경우 우리를 파괴하고 상처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역자 주파괴나 상처나 달갑지 않은 일이란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경우 그러한 것이 되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 그런것이 되지 못함을 저자는 여기서 얘기하는 것 같다마음먹기에 따라 파괴가 창조가 되고 달갑지 않은 것이 기꺼운 것이 되지 않는가아무리 상처를 주어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상흔인 오상을 받을 때 프란치스코에게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다원천 자료는 그 상처가 실제의 상처이며 프란치스코가 내적인 완전성과 단순성에 도달했기에 오상을 받아 진정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아주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그러나 이 완전성에 이르는 길은 그의 꿈이 좌절됨으로써 있게 되었다형제회 내의 거센 소용돌이와 법석은 프란치스코를 거의 파괴하였지만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내적인 관점과 완전성으로 되돌아가려고 그리고 주님께서 살라고 하신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기에 그 모든 것을 뚫고 나갔고 그 과정에서 조화를 이루어 나갔다내적 완전성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해를 입힐 수 없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의해 때로는 아주 심하게 상처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때 다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항구하는 것이다우리가 폭행과 강탈을 당하고 사별을 하게 되고 집을 잃게 되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우리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이런 일은 세상에 죄가 있기에 일어난 일인데세상에 왜 죄가 있는지는 그리스도교 신앙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심지어는 죄까지도 서로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 바오로의 신앙에 힘입은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때에는 진실함만이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다우리의 가장 진실한 감정만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이다고통이 우리 안에서 야기한 감정을 우리가 솔직히 인정하기를 거부할 때 그 고통은 우리 안에서 계속될 것이다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을 때 단지 철학적인 선언을 하신 것이 아니라 미로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는 삶의 원칙을 제시하신 것이다.

 

글라라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데말년의 글을 통해 이런 일을 다루는 그녀의 방식은 그토록 참기 어려운 바로 그 체험에 자신을 기꺼이 여는 것이었음을 얘기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난 부인에게 우리 자신을 동여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