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를 살기

제 6장 주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들

Margaret K 2017. 12. 18. 21:09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 함께 기도하기

Frances Teresa OSC

김찬선 레오나르도 역

 

 6장 주님의 형제자매어머니들

 

프란치스코는 레오 형제에게 사랑 가득한 편지를 썼는데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레오 형제그대의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를 드리며 평화를 빕니다나의 아들내가 그대에게 어머니와도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우리가 길에서 함께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이 편지에 간단하게 요약하며 권고합니다이후에도 만일 권고를 받으려는 이유로 나에게 올 필요가 있다면 나는 이렇게 권고하겠습니다.

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또 그분의 발자취와 가난을 따르는 데 있어서 그대가 보기에 어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주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그리고 나도 거기에 뜻을 같이 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그래도 만약 그대의 영혼에 어떤 다른 위로가 필요하여 오고 싶으면 레오나에게 오시오.(레오 형제에게 보낸 편지)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너무도 사랑했기에 항상 동료 형제자매들을 격려하였으며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도록 하였다. “그래도 만약 그대의 영혼에 평화와 위로가 필요하여 오고 싶으면 레오 형제나에게 오시오.” 글라라도 1235년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같은 격려의 편지를 썼는데그때 그녀는 다소 침체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최초의 편집본에는 훌륭한 생활양식 안에서 굳건한 항구심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2 아녜스이 편지에서 글라라는 아녜스가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잘 시작하였으니 그 시작한 것을 끝까지 잘 견지하라고 얘기한다안팎의 어떤 것도즉 자신의 회칙을 지키게 하려는 교황의 시도도내면의 낙담과 불안도 그녀를 단념케 할 수 없었다그녀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충실히 밟음의 결실인 오롯한 마음과 투쟁에 대해서 아녜스에게 얘기하고 있다글라라는 임금님의 따님인 아녜스에게 그대가 지상 왕국의 화려함을 멸시하고 왕의 결혼 제의를 거들떠보지도 않음으로해서’ 천상적 화려함과 결혼에 초대받고 있다고 얘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충실히 밟아’ 성부의 사랑을 얻었으며 그 결과로 일시적인 영광을 멀리하였다고 얘기하고 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행복하다.”(루카 11,28)는 말씀의 메아리를 우리는 여기서 듣게 된다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더 낫다는 것이다가장 바람직한 것은 말씀을 간직하며 주님의 어머니도 되는 것인데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우리 모두 서로 안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들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음을 깊이 통찰하고 있다우리는 서로 다른 이들의 삶에 말씀이 살아 있게 하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글라라는 ‘(우리의 사랑으로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광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물질적 가난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항상 논란거리로 남아 있을 터이지만 프란치스칸들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 충분히 논쟁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리스도의 온전한 자기증여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그리스도의 자기 증여와 참으로 합치한 분은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였다고 보았으며 자신들도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자기증여로 하느님께 응답을 드리고 그리고 그 결화로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하였다.

 

프란치스코에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을 사는 성소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사셨던 창조적인 내적 자유에 동참하라는 초대였다그리스도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셨다갈등이 생겨도 휘둘리지 않으셨다그분이 물질적 소유에 결코 얽매인다거나 갇히지 않으셨다는 것그것들로 당신을 지탱하지 않으셨음은 분명하다프란치스코는 설교자로 세상을 두루 다니는 외적인 삶을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시작하였지만 하느님께 대한 그의 사랑이 커져가면서 모든 것을 내어줌과 영적으로 풍성해지는 것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는 깊어져 갔다그는 점점 더 열성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신 그리스도를 닮아갔다그는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이번에는 자기의 것을 내어주었다그는 자신이 필요한 이상으로 무엇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과 가장 비슷하게 되는 방법이 주고 나누는 것이라는 점은 알았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주시고 나누시는 것이기 때문이다하느님을 위해 모든 인간에게 복종하라는 베드로의 가르침을 프란치스코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1베드 2,13) 이런 이유로 그와 그의 형제들은 종들이요 일꾼으로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였다이런 일들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영이 내렸다는 이사야의 말씀을 그는 믿었으며(참조이사 11,2) 주님께서 당신의 형제자매어머니로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기를 갈망하였다(참조마태 12,50).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의 첫 부분에서 그는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함의 복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그리고 이어서 우리의 과제는 창조와 구속이라는 하느님의 두 가지 역사하심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준비임을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 위에 주님의 영이 내린다고 그는 얘기한다(1신자 1~10).

 

그런 다음 그는 어떻게 하느님의 창조와 구속 사업에 우리도 참여해야 하는지 얘기한다성서에 몰두한 그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우리의 모범임을 깨달았다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 마리아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의 모범이었다그들은 그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성모 마리아가 가나의 잔치에서 한마디로 말한 것처럼 제자로서 어찌해야 할지를 마리아에게서 배웠다그들은 가난의 가치를 그리스도에게서처럼 마리아에게서도 배웠다글라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의 이름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결코 가지기를 원치 마십시오.”(글회칙 8,6)라고 자매들에게 얘기했다그들은 마리아를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으로 보았고 마리아의 협력을 통해 하느님은 세상에 당신의 유일한 계시를 주실 수 있으셨다고 보았다그러나 그들은 마태오 12장의 말씀을 깊이 숙고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직을 넘어서는 것 즉 다르기는 하지만 진정 마리아처럼 모두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우리는 그녀가 한 것 – 하느님의 뜻 - 을 행함으로써 이를 한다프란치스코는 동정녀께서 교회를 만드셨다(the Virgin made church).”(동정인사)고 마리아에 대해서 매우 충격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이 말은 13세기의 말이라기보다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말처럼 들린다이 표현을 통해 프란치스코는 교회가 살아야 할 소명을 마리아가 완전하게 살았음을 얘기하고자 한 것이었다마리아는 머물 곳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가는 사람이라는 뜻의 Harbinger(앞선 사람), 교회의 Harbinger가 되었다그것은 마리아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되어야 할 바즉 완전하게 말씀(그리스도)을 지닌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교회는 기쁜 소식(Good News)을 지니기 위해 세워졌는데 마리아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그 소식이라는 말씀의 어머니셨다.

 

역사적으로 그 어머니 됨은 한 번밖에 일어날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세상에 잉태케 함은 계속될 필요가 있다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여머니였지만 다른 많은 이들의 첫 번째즉 원형이었다우리 모두에게도 전해진개방하고 수용하라는 하느님 초대에 응답함으로써 마리아는 우리가 영적으로 출산해야 할 그분을 육체적으로 출산하였다개방적이고 수용적이었기에 마리아는 자신의 존재 안에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그분의 의복이 되었다. “하느님의 궁전이시여기뻐하소서하느님의 집이시여기뻐하소서하느님의 의복이시여기뻐하소서.”하고 그는 노래한다.(위의 글마리아는 자신의 육체 안에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화해의 메시지를 옷으로 입었고그리스도께 몸(body)을 드렸다놀라운 것은 여기서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정녀들 중에 영화로우신 동정녀께서 육신적으로 그분을 품으셨듯이 그대도 성모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대의 정결하고 순결한 몸 안에서 영적으로 그분을 항상 품을 수 있습니다.”(3 아녜스 24-25)

 

살기 쉽지 않은 이 단순한 통찰이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 가장 중요한 이상이 되었는데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들이 되는 것이것이 우리의 소명이요 이상인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1신자 10; 2신자 53)라고 프란치스코는 이야기한다그리고 그는 여기서 마태오 복음을 다시 언급한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가운데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다른 이에게 모범이 되라는 부르심을 글라라가 진실하게 받아들인 점과 다른 자매들도 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녀의 확신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주님 친히 우리를 다른 이들에게 모형과 본보기와 거울로 삼으셨습니다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세속에 사는 이들에게 거울과 본보기가 되도록 우리 생활양식으로 불러주신 우리 자매들에게도 우리를 모형과 본보기와 거울로 삼으셨습니다그러므로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와 거울이 될 만한 것을 우리 자매들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 바로볼 수 있는 이와 같이 크나 큰 생활로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으니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더욱 더 궅세게 용기를 얻을 큰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위에 말한 생활양식에 따라 산다면 다른 이들에게 고귀한 표양을 남겨 주게 될 것이며매우 작은 수고로 영원한 행복의 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글유언 6)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성소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무르익었을 때 그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어머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마리아를 그느르신 분이 성령이시듯이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그들은 이해하였다이에 대한 성찰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는 그들의 이해가 시작되었다그들은 자주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에 대해서 얘기했다그들은 성령을 삼위일체 안에서(여기서 성령은 사랑의 끈이시다)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과 모든 삶과 모든 피조물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열매를 맺고 이룩하시는 성령으로 인식하였다사랑의 이 역동성은 하도 강력하여 인격성(Personhood)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취하였는데이것은 주님의 어머니가 되시도록 마리아를 그느르신 성령이라 불리는 위격이었다성령과 마리아의 일치는 너무도 완벽하여 하느님의 형상(icon)’인 그리스도께서 인간 역사 안에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시게 하였다이 같은 성령께서 어느 모로 보나 실제적으로 그리고 새로운 일치로 그리스도께 우리를 일치시키며 우리를 그느르신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칭하곤 하셨기어 프란치스코는 신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그는 어떻게 자신을 정배로 생각했는가그는 믿는 영혼이 성령에 의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정배들입니다.”(1신자 8) 정배가 되는 것은 사랑하시고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의 끈에 의해 일치되는 것이다여기서 모범은 다시 마리아이다마리아처럼 우리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중재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의해 표현된 창조적인 신성 안에서 우리의 열매를 발견한다프란치스코는 글라라에게 편지를 쓸 때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두었다. “여러분은 …. 성령의 정배들이 되셨습니다.”(생활양식1) 이 말은 글라라와 그녀의 공동체가 아마 틀림없이 우주에서 가장 힘이 센 이 초월적이고 창조적인 사랑에 온전히 바쳐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기술하듯 성 삼위 내의 관계는 항상 한 가지 방식으로 풀어낼 수 없기에 그는 이것은 성부께 속하고저것은 신랑이신 성자께 속하며그것은 성령께 속한다고 보지 않았다하느님의 모든 일은 전체성으로부터 솟아나는 일치의 역사이며 창조된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으신 하느님의 비유이며 계시임을 프란치스코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을 바로 그때의 역동성(Eynamic of thd Moment)에 따라 성부성자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한다비록 그가 하느님께 대해여 (He)’라는 대명사를 일관되게 쓰고 있지만 그의 생각이 현대적 의미의 일방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하느님께 대한 그의 개념은 인간의 말로 하느님을 언설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시도하는것 가운데 배어나온다.

 

당신은 선이시며아름다움이시며평화이시오며안식처이시며정의이시며힘이시오며희망이시오며생명이시며모든 선이시며힘세시고거룩하시고위대하시고살아계시고진실하시며온유하시고절제이시나이다….(하느님의 찬미)

 

자비로우시고 양순하시며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진실하시며… 모든 용서와 모든 은총과 모든 영광의 샘이시며…. 시작도 마침도 없이 변할 수도 볼 수 없고표현할 수도 이루 다 말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시며… 지극히 높으시고감미로우시고사랑하옵고좋아할만하고무엇보다도 온전히 세세 영원히 바랄만한 분이시다.(비인준회칙 23,9-11)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그들과 – 그리고 우리가 – 하느님 그분 안에서의 이 삶에 휩쓸리게 되었음을 알았다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복음의 말씀이 그들이 말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단순히 받아들였다이런 까닭에 그들은 형제자매들에게 생활양식은 거룩한 복음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제시하였다복음이 전부이고 더 이상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그들의 단순한 복음실천은 글라라로 하여금 하느님과 강렬하고도 거의 신비적인 일치를 하게 하였고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라 베르나 산에 올라 우리가 오상이라고 일컫는 그리스도와의 육체적인 동화를 하게 하였다그들은 자주 어떻게 하늘에 계신 지존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 위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전하였고그리고 그 말씀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연약한 우리 인간과 똑 같은 육신을 취하셨으며그분은 부요하셨지만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는지”(2신자 4-5)에 대해서 묵상하였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읽고 묵상했을 때 앞으로의 그들의 여정은 상당히 명료한 것처럼 보였다프란치스코가 가난의 생활과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름에 대해서 얘기할 때 우리는 이것이 일부 뽑힌 이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프란치스코가 본 것인지아니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인지 의아해 하게 된다이 질문에 대한 대답 중의 하나는 프란치스코가 이것을 형제들을 위한 회칙과 글라라와 자매들을 위한 회칙에서만 얘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도 얘기했다는 사실이다편지를 요청한 이들에게 지침을 주기 위해 쓰인 이 편지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이미 깨달아 알게 된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서 먼저 꿈틀대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응답으로 프란치스코는 가난 서원을 보았다는 것이다그는 가난 서원을 소수의 뽑힌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고 그의 많은 부자 친구들은 자기들이 집 또는 토지를 가진 것이 잘못이라고 프란치스코가 말한 적이 결코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추종자 중 몇몇은 그렇게 말했어도프란치스코는 재산의 소유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 함정에 결코 빠진 적이 없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반복하였다. “녜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그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 19, 21) 그러나 모두가 이처럼 극단적으로 불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도 그는 받아들였다해야 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모두가 읽어야 할 복음이 거기에 있었다그의 임무는 사신이 되는 것인데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요사람들에게 방향 전환과 기도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는 것을 누가 알리?’ 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했음직하다.

 

사실 누가 알까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모두 발견하였다우주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로부터 기적적으로 창조되었다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아무것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을 위한 공간 만큼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가지고 있는 우리의 무성(Nothingness)을 그들은 보았다우리의 문제는 이것을 매우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기에 우리는 우리 삶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하고 실제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발견하였을 때그것은 그의 가치 체계가 전도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일들을 왜곡시키고 있음을 아주 일찍 깨달아 알게 되었다처음부터 그의 죄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 되게 하였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신 모든 선을 자기의 것으로 자랑하게”(권고 2,3)하였다하느님의 충고에 따라 단 맛을 위해 격겨운 것을 택했을 때 그는 하느님과 더욱더 같아지기 위해 더 정확한 가치 체계 안으로 진입하였다.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도 잘못된 가치들과 싸워야 한다사물을 자기의 소유로 하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소유라는 안전장치를 가지기를 원하기에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우리는 미래가 확실하기를 원한다이는 우리가 겁이 많고 소심하고 궁핍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이 궁핍을 가난으로 바꾸는 데 동의할 때 구원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고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자아를 우리의 것으로 선택함으로써 변모하게 된다처음 우리의 지혜를 잃었을’(교제때 우리는 우리의 참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글라라가 가난에 대한 찬미를 노래할 때 그것은 잃었던 가난을 되찾은 것이었다.

 

복된 가난이여,

가난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영원한 부를 주나니!

 

오 거룩한 가난이여,

가난을 소유하고 열망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시고

의심할 여지없이 영원한 영광과 복된 생명을 허락하시리니!

 

오 경건한 가난이여,

하늘과 땅을 다스리셨고 또 다스리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지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를 품으시기에 합당하였으니(1 아녜스 15-17)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 가난은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었다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어머니처럼 되기 위해 가난을 선택하였고 사물의 올바른 질서를 되찾아주기 위해 가난을 선택하였다하느님은 지극히 높으시고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고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가난하고 작은 자들이었는데,(권고1) 그 둘이 똑같이 중요하다. “우리는 모든 선의 샘이신 지존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모든 좋은 것을 돌려드리고모든 좋은 것이 그분의 것임을 깨달으며모든 선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립시다.”(비인준회칙 17,17)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쥐고 계시는 그분을 쥐게될 것입니다우리는 함께 하는 행동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취하는 데 우리의 전 삶을 소비해서는 안되고 이제 하느님과 사랑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시작해야 한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존재해야 하는지를 배운다마리아는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으니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천사에게 말하였다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 지금 그리스도의 형제들자매들어머니들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우리의 사랑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낳아준다정중함과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섬길때 우리는 마리아처럼 참으로 그분을 모시게 된다이 놀라운 기적은 우리 마음의 확신에 의해 일어나지 않고 우리 마음의 사랑에 의해 일어난다그런데 사랑이란 우리에 의해 조절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은 항상 위험을 지니기에 사랑에 의한 기적은 우리에게 쉽지 않다그래서 우리는 대안을 찾는데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려하기보다는 진실에 대해서 더 쉽게 생각한다우리의 인내는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데 사실 문제는 많은 경우 그들이 사랑받기에 부적합하기 보다는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변화에 열려 있으면서 하느님 현존 안에서 침묵 가운데 기다리면 이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우리의 방형전환을 위한 싸움터를 선택할 수 없다하느님은 고집스럽게 현실 안에서 역사하시는데 비해 많은 경우 우리는 이것을 본능적으로 회피한다그러나 구속방향전환정개친교는 우리가 어떤 주어진 때가 오면 오직 그때 거기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외향적인 프란치스코에게 이 방향전환의 싸움터가 안에 있었고 동시에 외적인 변화들도 일어났다는 것은 재미있다반면에 더 내향적이었던 글라라는 방향전환의 고통이 집을 떠나 산 다미아노에서의 삶으로 옮겨가는 외적인 것에 있었다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성찰을 하게 한다그것은 우리의 방향전환이란 우리 자신도 잘 모르는 우리 자신의 측면들과 반드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끊임없이 우리를 존재의 충만으로 인도한다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은 죽음을 통하여 생명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이것은 프란치스코가 구덩이에서 했던 것처럼 죽음의 영역을 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밤에 집을 몰래 빠져나올 때 그리고 성난 삼촌과 사촌의 무리가 강제로 글라라를 데레가기 위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왔을 때 글라라가 한 것처럼 아니면 훨씬 뒤에 프란치스코가 죽고 형제들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도록 그를 운구할 때처럼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죽음으로부터 평온과 온화함열정과 부드러움동정심과 무엇보다도 다른 이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능력이 생겨난다이런 것은 주님의 영의 열매이며 그분의 거룩한 활동의 열매인데같은 나무는 우리를 위해서도 같은 열매를 맺는다무지의 구름이 얘기하듯 우리 모두의 삶은 갈망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우리는 공연히 간섭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그것은 하느님 역사이시기 때문이다갈망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물으면서 마리아처럼 기다리는 것이다그것은 새로운 영적 기교와 씨름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처분을 평화로이 받아들이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길 정도로 우리의 전망이나 가치관이 바뀔 채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융은 전에 사진을 결코 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그들이 처음에는 흑백의 직사각형 안에 자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어했음을 얘기하고 있다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기교였고 배워야만 했던 기교였다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그와 같다우리는 하느님을 배워야 하는데이것은 오직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과 사귀는 시간을 보냄으로써 할 수 있다이것이 하느님을 거듭거듭 그러나 매번 다르게 배워가는 방향전환과 정개의 의미이다그런가 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마치 당신을 잘 알고 있는 듯이 대하신다이 두 가지를 하나의 상호적이고 순환적인 통교로 알아보기 보다는 두 개의 동떨어진 것들로 알아보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혼란을 겪는다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우리의 말을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과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우리와는 꽤나 다른 기준을 가지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신다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자신 안에서 솟아오르는 샘과 중얼거리는 소리를 느꼈다초원 한 가운데 작은 물줄기를 가진 우물과 같이 부드러우면서 끊임없이 그리고 귀에 거슬리지 않게 그에게 외치는 소리를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상관없이 끊임없이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하게 우리를 좋아하시는 이런 하느님을 기본적으로 두려워한다고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느님의 부드러우심과 하느님께 대한 이해는 우리를 당황케 하고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우리 내부의 것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우리가 판단하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판단하시는 분으로 보고우리가 파괴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도 파괴적인 열정을 지니신 분으로 보며우리가 요구가 많고 전체주의적이기에 하느님도 요구가 많고 전체주의적인 분으로 보지만 주님은 회오리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고 고요 가운데 뒤따르는 작은 소리로 계신다회오리바람은 우리가 빈번히 드나드는 곳(Stamping Ground)이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는데 그 까닭은 그것을 상상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충만함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하느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부정적이고 비존재적임을 드러내기에 우리에게는 생명의 충만함이 위험스러운 것처럼 보이고 상상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을 두려워하듯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우리의 보편적인 불확실성은 우리의 어떤 죄스러운 깨달음에 의해 더 심해지는데 그것은 생명의 충만이 우리가 원하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은 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깨달음이다기쁘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은그래서 모든 것은 오직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모든 안위를 하느님께 두는 것은 진정 위험을 살아가는 길이다그것은 또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가난해짐이 의미했던 바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시는 선을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다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신 방식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일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말씀하셨고그분의 어머니는 그가 얘기하는 대로 하라.’(요한 2,5)고 말씀하셨다실제의 우리를 드러낼 열매를 보면 우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그리스도는 또한 말씀하셨다프란치스코가 얘기한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라는 뜻도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게 되어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추방당하게 된다는 뜻이다우리의 참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고우리는 우리를 몰아가는 집착과 강박에 의해 계속 추방당한 상태에 있게 된다이 집착은 중독과 같아서 우리 안에서 그 힘을 계속 유지하는데그것은 비록 우리가 그것을 협오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우리의 가장 심각한 병은 그것이 병일지라도 길들여진 것을 전반적으로 선호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얘기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모든 강박적인 집착은 일종의 사시 현상인 기울어진 시각을 갖게 하며이는 참으로부터 우리의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 함으로 우리의 감정에 상처를 입힌다우리가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치료가 필요하지만 진실은 우리 안에서 회복된다이것은 마치 오그라든 근육과 같아서 똑바로 펴야하는 이 과정은 종종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가장 고통스럽다.

 

치유가 필요한 집착의 영적인 결과도 있다집착으로 인해 우리가 보통 받게 되는 영적인 피해는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의 교묘한 유혹이다우리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기 때문에 탐욕적이고 관능적이며 이기적인 삶을 선택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선택에 담겨 있는 요소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의지가 상처를 입으면서도 집착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집착을 포기한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집착은 심적인 힘을 오직 그 자체에 쏟으며 자신의 유지에 거의 온 힘을 쏟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에 집착 그 자체를 놓고 본다면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우리가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시도를 미약하게 하면 이 힘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더 힘을 쏟을 것이다죽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목숨을 얻기 위해 잃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이다우리 삶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매달리는 것을 우리는 버려야 하고 그리하면 하느님 안에서 사는 참된 생명을 우리는 구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글라라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도마뱀이 그러하듯 몸을 덥히기 위해 햇빛에 우리 자신을 내어좋아야 한다. 우리는 천천히 우리의 되어가는 모든 아름다운 인간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기에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희망과 긍정과 격려를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의 인간성이 곧 우리의 애물단지라는 사고방식에 떨어지게 되지만, 그리스도를 응시하면 우리의 문제점은 우리의 인간성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인간적이지 못한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살아 있는 백성, 하느님의 영광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나 그들의 마음에 영광을 선사하면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기뻐 즐거워하고 넘치는 기쁨과 영적인 즐거움으로 충만하십시오.”(1 아녜스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