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를 살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 함께 기도하기
Frances Teresa OSC
김찬선 레오나르도 역
1부 방향전환(회개)
1장 방향전환의 시작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네거리에 왔을 때 프란치스코는 눈을 감고 다른 형제는 제 자리에서 맴돌았다. 프란치스코가 ‘그만’하고 외칠 때, 그것이 어느 방향이건 그 형제가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형제들은 세상의 회개를 선포하러 떠났다. 이 이야기는 방향전환 체험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전환은 우선 네거리로 감을 의미하고, 이 네거리에서 우리는 마구잡이 돌기(random spin)를 통해 방향전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돌기를 마침내 멈추었을 때 우리가 어떤 쪽으로 향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디건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나머지 전 생애는 급격히 변하게 되는 마구잡이 돌기가 이 네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종 은총에 대한 우리의 협력은 우리의 방향이 분명해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우리를 맡겨드린다는 뜻으로 이 돌기에 우리를 맡기는 것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Conversion(방향전환)이라는 말 자체가 어원적으로 ‘무엇이 됨(becoming)’이라는 뜻을 지닌 인도-유럽어로부터 이탈리아-라틴어를 통하여 온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잉태되고 새로이 시작되는 과정에 대한 말이다. 그것은 또한 가치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그래서 방향 전환이란- 두 개념이 합쳐진- 우리의 참된 가치를 실현 시키는 과정임을 얘기하고 있다. 엄밀히 얘기해서 우리는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에로 방향 전환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둘 다 이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의 지도 하에 방향 전환을 하고 길을 떠나는 방향전환, 그들 존재의 극변에까지 이르는 긴 여정 끝에 마침내 그들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는 방향전환을 하였다. 이런 방향전환의 결과로 그들은 죄악을 척결하고 질서를 회복하며 하느님께 응답하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삶에 자신을 열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만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은 그들이 그들 전부를 단순히 그리고 온전히 맡기고 방향이 분명해질 때까지 하느님 앞에서 계속 돌았기 때문이었다. 이 면에서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본보기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 모든 타고난 위대함을 가지고도 용기를 얻는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길을 우리는 그들 안에서 발견한다. 그 길에서 우리는 눈이 멀고 무지하여 뱅뱅 돌다 발부리가 걸려 넘어질 뻔 하는데 우리는 외양적으로 마구잡이로 도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나중에 가서야 깨닫는다. 그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어려우면서도 단순하다. 방향전환이라는 문으로 확실히 이끄는 하나의 길은 없다. 방향전환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우리 자신을 찾는 이 마구잡이 돌기와 같다.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인 토마스의 첼라노는 하나의 얘기를 들려주는데, 방향전환을 시작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구덩이에 한달 내내 숨어 지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정도로 두려움과 무기력함 가운데서 한 달을 숨어 지냈다. 그 친구가 음식을 갖다 주어 그는 먹을 수 있었으며, 필요한 모든 것은 몰래 그에게 전달되었다.(1첼 10). 프란치스코의 삶은 항상 아주 극적이었고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둘 다 있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의 내면 드라마는 항상 아주 실제적이었지만 가끔, 특별히 초기에는, 외적인 드라마가 내적 실제를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글라라 경우는 프란치스코와 다른 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에게 외적인 드라마란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가 극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행한 것들을 우리 중 상당수는 내적으로 그러나 덜 극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렇게 또렷이 얘기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이 한 달을 구덩이에 숨어 지내지만 이 기간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며, 이전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은 아직 찾지 못한 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중의 상당수는 두려움과 불확실성, 염려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등으로 자신이 마비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고, 이것들이 참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가치들을 우리가 살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런 시기가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 같은 도량의 존재들이고, 종국에 가서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개념에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 중의 소수만이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진면목을 재발견하고 본래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대로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소명, 우리 그리스도교인의 소명 안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그리스도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주신 우리 인간의 소명이다.
이 일, 하느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코자 하시는 이 일은 지극히 엉뚱한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것을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발견하였다. 우리 또한 영예를 마치 나의 것인 양 권리 주장을 할 수는 결코 없으며,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일으켜 주시는 것이고, 영광이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예와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권리 주장은 영광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방향전환에의 부르심인 것이다. 그럼에도 잘못되어 있는 우리는 영광에는 제법 채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봉사에는 덜 채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사랑과 봉사가 어떻게 영광과 상호 작용을 하고, 사랑과 봉사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게 될지를 세상과는 다른 하느님 가치의 학교에서 배울 것이다. “저는 누구이오며, 당신은 누구시옵니까?”라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점점 더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 삶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돌기의 그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다시 정련되고 우리를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참된 위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몇몇 수도자나 관상 수도자의 과제가 아니라 인간 모두가 가야할 길이다. 하느님의 “문제(problem)”는 그분은 힘이나 교활한 꾐에 의해 우리가 그분께 돌아서기를 바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찾는 것은 친구와 연인이지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서기를 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할 채비가 되어 있음을 느끼지만 그 기술이 부족하다. 영적 유도 기술이 뛰어난 하느님은 싫든 좋든 우리가 도는 일에 우리를 내맡기고, 도는 것 안에서 우리를 사랑에 내맡기도록 우리의 약점을 유익하게 이용하여 우리의 균형을 허무신다. 시간이 감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끌어 오셨으며, 어떻게 우리의 삶을 나누시고 모양 지으셨으며, 어떻게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에 응답하셨는지를 점점 더 깨닫게 된다.
동굴에 있을 때 프란치스코는 자제심을 잃는 첫 번째 경험을 하였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가 항상 그 응답에 자유로운 것이 아님을 보게 되듯이 그 때는 프란치스코 또한 그러한 점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프란치스코처럼 자유로이 응답 할 수 있도록 우리 또한 수련 또는 단련을 받거나 어떤 양성을 받을 필요가 있다. 내면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와 회개를 하게 하는 첫째가는 동기이다. 그것은 성장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요 평화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은총이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응답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은 행동할 수 있는 은총이다. 우리의 몫은 그것이 비록 가장 작고 상징적인 방식일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도 우리요 하는 것도 우리지만 우리가 그렇게 함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 현존하시는 표시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얘기하는 대로 “그러므로 우리는 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도록 우리 안에서 작용하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동하도록 우리 안에서 작용하신다.”
프란치스코는 동굴 체험 전에 온 종일 먼 곳을 배회하고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참을성 많은 친구와 끝없는 영적인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우리는 성숙한 프란치스코와는 너무도 다른, 균형을 잃고, 어리벙벙하며,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분명하고 단순하게 얘기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본다. 그는 익숙한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한 번 정신에 박힌 것을 뿌리째 뽑아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참조: 1첼 4) 그래서 첼라노가 얘기 하듯이 “들떠 있었고 성급했던” 그는 다시 옛 방식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밤 프란치스코는 그의 유한한 야망을 어떻게 영원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지 암시하는 꿈을 꾸었고, 이 때부터 방향전환의 전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옷을 팔며 자기가 가장 아름다운 색시와 결혼할 것이라고 자랑케 했던 그 으스대기를 거의 멈추었지만 그는 한 동안 방향전환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것도 아니었으며 양자의 불리한 점들도 알았고 어는 것도 유리한 점이 없음도 알았다.
훨씬 뒤에 그는 이러한 양면성의 좋고 나쁨에 대해 성찰케 되었는데 우리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종 우리가 취하는 시도로 우리 자신을 구출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깊이 문제에 빠져드는 그런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느님의 구원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거의 틀림없이 우리가 추구하는 그 자유와는 정반대되는 것을 얻게 될 터인데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구하려 하지만 그런 구원 계획이 산산이 깨어짐에 의해 우리의 내면적 모순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영광의 참 모습을 우리가 충분히 성찰치 않음이 우리를 이 양면성에로 몰아가는 힘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한다. 우리는 영광을 추구하고 그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내려주신 그 영광에 비교할 때 우리 자신의 영광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주 하느님이 육을 따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을 따라 당신 자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그분께서 그대를 얼마나 영광스러운 상태에 두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참조: 창 1,26)(권고 5,1)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에게 이 모든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것이었다. 한동안 그는 동굴에 몸을 숨긴 채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고 더디 오는 것처럼만 보이는 그 구원을 빨리 주시기를 무서워 떨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그의 노력이 충분치 않았고 자기 힘으로 하려고 했던 것들이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음을 이제 깨달았다. 그는 모든 것(모두 아버지의 옷)을 팔았고 상 다미아노 성당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돈을 주려 하였다. (곧 그의 형제가 될) 산 다미아노의 사제는 슬기롭게도 그 돈을 건드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옷을 팔아버리는 것이 상업적 야망으로부터 자기 아버지도 자유롭게 하는 것이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런 것이었다면 프란치스코는 실망했을 것이다.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는 전과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의 관계는 더 나빠졌고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의 갈등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그들의 가치관이 정반대였을지라도 많은 면에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기 때문이리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가 프란치스코의 인생에 박아준 것은 아마 “네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그것을 위해 전력을 다 하라!” 이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추구하는 목표가 달랐을지라도 그 두 사람이 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숨어 지내던 프란치스코의 시기는 삶과는 거의 동떨어진, 말 그대로 어머니인 대지의 태 안으로 돌아감이었다. 동굴의 어둠과 갇힘 안에서 서서히 어떤 깊고 내면적인 과정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은 처음에는 두려움의 도주였지만 더욱더 깊어진다. 우리 인생이란 가끔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라는 상징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세기 1장에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그 크고 크심(the massive fact of Good)과 우리 본래의 혼돈, 우리 본래의 혼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던 창세기 1장의 화판으로 돌아감과 같다. 우리의 여러 요소들이 국솥으로 돌아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과도기의 상태이다. 우리의 본질은 혼돈이고 원시적 혼돈은 가공하지 않은 재료(raw material)이며, 우리 자신은 모양을 갖추지 않은 공백(formless void)이지만 그 비워있음(emptiness: 공허)과 뒤죽박죽(confusion)으로부터 하느님은 우주의 아름다움과 복잡한 것들을 창조하신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무한한 힘(infinite potency of God)과 우리의 마비된 잠재력(our own paralyzed potentiality)이라는 두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기다리는 고통도 있고 평화도 있다. 우리는 존재의 충만을 갈망하지만 벌거벗은 존재,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처럼 보이고 심지어 그것이 하느님의 –겉보기에는 우연한-선물처럼 보인다. 우리에게는 더 적은 것을 감수하고 우리의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은 채 잠재되어 있어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경향이 항상 위험성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수동적이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아주 쉽사리 마음을 빼앗기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성장하고 우리의 자리를 잡으려면 거기서 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향한 줄달음이 도피적인 표류를 멈추게 할 그 불가피한 순간이 프란치스코에게도 왔다. 동굴이 그 할 일을 다 하였을 때 하느님의 그 무한한 기쁨이 그의 혼돈 안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모든 것이 모습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토굴의 어둠 속에 있었지만 그 때까지 한번도 체험하지 못한 어떤 신묘한 기쁨으로 충만하여 그는 불붙은 채 토굴에서 나와 박해자인 아버지의 저주에 자신의 모습을 활짝 드러냈다.”(1첼 10)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수필 어디에서 자란 하나의 통합체(synthesis), 제한적 요소인 유한성과 확장적 요소인 무한성이 함께 있는 통합체임을 얘기한다. 확장적 요소인 하느님의 그 창조적인 목소리가 우리 안에 있는 그 잠재적 위대함을 일깨우며 우리 존재의 경계를 밀어낸다. 다른 한편 안정적이고 안락한 것을 선호하여 유한한 것에 머무르려는 우리의 경향은 제한적 요소가 되어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자아는 이 두 요소가 응집되어 있는 것이다. 한창일 때의 우리는 한계를 초월하고, 우리의 맴돌기는 나선형이 되어, 프란치스코처럼 우리 중의 상당수가 빠지게 되는 우유부단의 진자운동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친다. 우리의 나선비행은 우주처럼 계속 확장될 수 있고 우리의 한계는 극소수만이 거기에 도달하기에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성장 가능성은 거의 무한하다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위험을 무릅쓴 추측을 하였다.
이 모든 잠재적 가능성은 토굴로부터 벗어난 프란치스코 앞에 놓여졌다. 그러나 그가 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직 아니고, 그른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마쳤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아들의 이름이 사람들의 외침 가운데서 들리자 그의 아버지는 길거리로 달려 나가 그를 집으로 질질 끌고 가서는 정신을 차리도록 가두어 두었다. 그런 후 베드로는 마치 그 모든 에피소드를 일소에 부치듯이, 아니면 프란치스코를 방에 가두고 가버림으로써 프란치소코에게 일어난 모든 문제들이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듯이 사업을 위한 여행을 떠나버렸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도 자기 가문의 상속자요 자기 아버지의 모든 역사의 상속자였으며, 그러기에 그는 자기 집과 배경의 그 대물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을 느꼈다. 우리는 그가 자기 자아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음을 본다. 프란치스코가 베드로의 여러 가지 태도들과 비슷하지 않았다면 자기 아버지와의 갈등이 그토록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 사이의 많은 다툼은 힘이 곧 정의이며 돈이 곧 힘이라는 아버지의 그 폭력적인 주장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하여튼 아버지의 생각과 다르게 실제로 일어난 것은 어머니 피카(Pica) 부인이 프란치스코를 풀어주어 그가 원하는 길을 가게 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분명 아직 어떤 혼란 중에 있었지만 어머니 피카 부인의 역할은 명확했다. 육신의 어머니였던 그녀가 이제는 영적인 어머니가 되어 그 길이 어디로 향하건 자신의 길을 가도록 그를 일깨우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프랑스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고, 그의 생애 내내 기쁨과 고양의 순간에는 프란치스코가 프랑스어로 말하고 노래한 것도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변모해 가는 여러 수난에 여성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직관이나 비합리적 창조성이나 상상력(앞으로의 길을 보여주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과 같이 그의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열어 개발할 수 있게 하였다. 같은 직관으로 그는 한 차례 이상 글라라의 조언을 구하였고, 자유를 가다려야 할 바로 이 시작의 시점에서도 어머니로부터 같은 힘이 작용하였다. 이런 성장의 원칙들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안에 있는 비합리적 요소들이 종종 바로 우리의 앞길을 가리키고 돌고래처럼 우리를 태워 자유에로 인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 창조적인 차원과 상상력의 차원을 찾아낼 필요가 있고 특히 삶이 고착되어 있거나 기도가 무미 건조한 상태일 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에게는 우리 본래의 시각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직관적 자아에 의한 보다 단순한 접근이 필요하다. 프란치스코가 그러했듯이 한번 새로운 빛으로 보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시각으로 돌아갈 수는 없도록 이미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옷자락을 한번이라도 봤다면 하느님은 중독적이기에 하느님의 얼굴을 또 보기 원할 것이다. 한번이라도 하느님의 손길을 접했고 한번이라도 그 넓은 지평을 흘끗 봤다면 프란치스코가 수행했던 바로 그 해체와 재창조에로의 그 불가항력적인 길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우리는 맴돌다가 새로운 방향을 잡게 되는데 그 길은 그리스도이시다.
이 과정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에게는 기도가 대림이요, 기다림이요, 겨울일 수 있다. 유대인들처럼 메시아가 언젠가 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동방 박사들처럼 그분을 만나기 위한 여행을 우리가 하고 있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성모 마리아처럼 그분이 우리에게 오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촛불을 켜고 성화상이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시간이나 재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러한 기도의 몸짓을 계속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겨울이 끝나고 우리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라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방향전환이라고 칭한 이 과정을 누구도 서두를 수는 없다. 그들에게 생각과 마음의 온전한 내어드림은 일생에 걸친 과업이었다. 그들이 ‘나의 방향전환의 시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곤 했지만 “나의 뱡향전환 후에”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하신 것을 경의로 돌아보곤 하였고, 그들의 주된 관심은 항상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였다. ‘나의 방향전환 시초에 아무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지 않았지만, 주님 친히 나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했다. 프란치스코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은 그와 같은 은총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올 수 있음과 이 은총과 도움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믿게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본보기였다고 첼라노는 얘기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손이 그에게 내리시어 지존하신 분의 오른손이 하나의 변화를 엮어냈으니, 그것은 그를 통하여 죄인들이 은총으로 회복되었다는 약속을 하사하시기 위함이었고, 그가 하느님께 대한 모든 회개의 모범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1첼 2) 우리가 “은총으로 회복되었다”는 약속을 하사하시기 위함이었다”에서 ‘은총으로 회복되었다’가 현재완료형 시제임을 주목하면 은총이란 선행을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선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은총임을 얘기하고 있다. 은총은 이미 거저 주어진 선물이고,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 화해한 것이다(부활 찬송).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프란치스코의 모범이 하나의 보장이 되었던 사람,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첫 번째 가고 가장 뛰어난 인물은 물론 글라라였다. 세속의 견지에서 보면 아시시의 세력가와 귀족 가문 출신인 글라라가 프란치스코보다 훨씬 좋은 것을 가졋음은 분명하다. 글라라가 어렸을 때 그녀의 가문은 부유하고 거대한 가문이었지만 보호막을 철저히 치고 있던 귀족들로부터 세력을 빼앗으려던 아시시의 떠오르는 상인 계층과 전쟁에 휘말렸다. 그래서 글라라가 매우 어렸을 때 온 가족이 50여Km 떨어진 페루지아로 피난을 갔다. 이 반전으로부터 그들은 일어나 아시시 내에서의 그들의 재산과 권력을 다시 얻었다. 그녀가 17살이었을 무렵(1211/2) “하늘의 지존하신 아버지께서 지극히 복되신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회개생활을 하도록 당신의 은총을 통하여 황송하옵게도 나의 마음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부님이 회개하시고 조금 지난 후 나는 나의 자매들과 함께 그분에게 자원하여 순종을 약속했습니다.”(글회6,1)라고 글라라는 말하고 있다. 그녀에게 프란치스코와 같은 토굴 체험은 없었던 듯하다. 그들의 체험은 서로의 체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기보다는 보완하는 체험이었으며 서로 유사한 체험이었다. 글라라는 극단적이고 극적인 면에서는 어느 모로 보나 토굴에 갇혔던 프란치스코의 몇 달과 같지만 그러나 꽤 다른 그녀만의 상징적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녀는 어느날 밤 거의 사용치 않는 문을 통하여 집을 빠져 나왔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가족들이 놀란 것으로 보아 그 문은 평소 단단히 봉쇄되어 있던 문이었지만 이 문을 통하여 들키지 않고 빠져 나온 것처럼 보인다. 몇몇 학자들은 좁은 통로 끝에 있는 이 문(지금도 옛 움부리아 집들에서 발견되는)은 전쟁 때에 그 진가를 발휘하여 몇 명으로 많은 수의 공격자들을 쉽게 막을 수 있게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문이 오직 죽은 이들을 위한 문이라고 주장한다. 둘 중의 어느 이론을 분명하게 뒷받침하는 당대의 어떤 자료도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글라라의 전기 작가들에게 상상을 불러일으킨 것은 시체를 위한 문이었을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글라라의 야반도주는 분명 일종의 죽음이었다. 가족에 대한 죽음이요, 특권적 삶에 대한 죽음이요, 결혼(적어도 시성 과정에서 청혼을 하였지만 거절을 당한 사람과의 결혼)에 대한 죽음이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안전에 대한 죽음이었다. 대신 그리스도께 두었던 믿음과 같은 믿음을 프란치스코에게 두었기에 그녀는 모든 소유물과 결혼 지참금을 다 팔아 그 수입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 주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어떻게 이것을 했을까 놀랄 것이다. 글라라는 이 때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받아들인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프란치스코가 수리한 세 경당 중의 하나로서 매년 물고기 몇 바구니를 베네딕도 수도원에 주고 빌린 것이다. 이노첸시오 3세는 비록 프란치스코의 굳은 이상에 놀랐지만 누군가 복음을 글자 그대로 살 수 없다고 감히 말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상을 말로 승인을 하였다.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글라라를 받아들인 프란치스코는 바로 얼마 전(1210)에 성지의 권리를 부여받은 Bastia에 있는 성 바오로 분도 수녀원으로 글라라를 데리고 갔다. 원천 자료들은 명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지만 글라라가 거기서 산 것은 미래의 수녀가 아니라 하녀로서였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그녀의 사회적 계층의 망신이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녀가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회에 들어갔다는 것이 곧 망신이라는 뜻 외에 다른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그녀의 성난 가족이 쳐들어 왔을 때 그녀를 돕기 위하여 성 바오로 수녀원의 수녀들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점이다. 성지의 특전을 가지고 이를 막지 않은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에게 이 체험은 우리의 이상을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찬미로 그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을 살기 시작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줌 먼지에 불과한 인생에 대한 열정”을 얻으려는 애씀이며 동시에 그것은 또한 일종의 죽어감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반대를 먹고 씩씩하게 자라나고, 삶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길을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능력이 필요한데 글라라도 십중팔구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설혹 그렇더라도 가족과 대립하고 처음으로 가난과 불안정을 경험하는 그녀에게 이 기간은 혹독한 어둠과 아픔의 시기였음에 틀림이 없다. 몇 년 후 비슷한 기도의 여정으 걷고 있는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쓴 편지에서 글라라는 “그대는 기뻐 즐거워하고 넘치는 기쁨과 영적인 즐거움으로 충만하십시오”(글라편1,21)라고 충고한다.
이것은 분명 우리에 대한 그녀의 조언이다. 오늘날 우리가 행복하기는 쉽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행복하기는 훨씯 더 쉽지 않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들이 행복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행복은 땅으로부터 사라질 것이다. 기쁨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 생명의 메아리라고 수녀원장Marmion은 얘기하곤 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생명의 체험이 없다면 왜 우리가 기도하겠는가? 오래 전부터 하느님을 의식적으로 찾기 시작하였던 우리는 이제 내적인 불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이고 그리고 이것이 무엇이건 이것보다는 일들이 잘될 것이라는 확신으로도 마음이 움직인다. 내적 불만이 치밀어 오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좋으심에 희망을 두며 하느님 앞에 앉아 기다리게 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에서 마음의 산란을 느끼고 지루함을 느낀다면 바로 그것이 내적인 불안정(inner restlessness)인데, 우리의 가난을 여지없이 거듭거듭 들추어낸 이 불안정이야말로 하느님과의 대화를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과 이 마땅치 않음에 머물 때에야 구속 사업은 우리 안에서 시작될 수 있다. 구속의 실현(reality of redemption)은 항상 우리의 것이다. 용감하게 우리 자신의 진실(지루해하고 산란해하며 산만한 자신)과 마주할 때 만일 우리가 그것을 기다린다면 우리가 구속되리라는 다른 한편의 진실도 드러나 올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기다림이란 결코 없다. 비록 시편 작가보다 경외감은 떨어지고 엉뚱함은 더 할지라도 우리도 시편 작가처럼 천년도 하느님께는 한 토막 밤과 같음을 생각한다. 천 년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는 시간을 잘 보내기를 갈망하지만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고 계신다.
이 불능의 상태가 우리에게는 너무도 큰 아픔이기에 우리의 삶을 조절하기 위한 방법들, 기술들, 이러저러한 경험 법칙들을 우리는 찾는다. 사실 어떤 기술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고, 호흡법이나 주의나 생각을 한 데 모으기 위한 단순한 체조 같은 것들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친구와 같은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 통교를 위해 몸부림치는 벌거벗은 우리만 덩그러니 하느님 앞에 남겨질 그 순간이 조만간 반드시 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깊은 갈망의 고통도 또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하고 자기를 위해 축복을 빌어줄 때까지는 못가게 했던 것처럼 이것과 씨름을 해야 한다. 이 기도할 수 없음은 우리의 모든 가치가 뒤집히고 우리의 삶이 크게 혼란을 겪게 될 새로운 세상의 문턱이기에 지루함(권태)도 좋은 것이고, 어떤 씨름도 어떤 진리도 모두 좋은 것인 것처럼 이 몸부림도 놓은 것이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이 단계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은 왕의 명령이 아니라 초대이다. 우리가 초대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은 잘 모르지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거부는 수반하는 모든 고통과 함께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내포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죽음으로써 살고,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는 이 새로운 길에 더 익숙해질 때까지는 비록 무자비한 자비의 하느님이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죽음을 적게 해주실 지라도 고통은 어땠든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예’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예’는 우리가 통제권을 손에서 놓는 순간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내면이 우리 자신의 어둠 안으로 뛰어들도록 우리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복음의 말씀의 초대를 받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침묵 가운데 진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무엇이건 진리가 뜻하는 바를 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 여정에 있어서 이 단계는 개인적인 두 세계의 합류점에 있는 것이다. 하나는 보통 우리 스스로가 택해서 진지하고도 충분히 기도했던 그런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곳에 기도가 있는 그런 세계이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얻는 곳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아무런 생명을 살거나 지니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즉시 또는 쉽게 여기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이미 우리가 한 선택이 이제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고 있다. 이 기도는 우리 삶 안으로의 육화라는 뿌리내림이며, 이 기도 안에서 우리는 조용하고 동조적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효과적으로 활동하신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변함이 없는 우리와의 통교 자세를 가지시고 부득불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늘 모두를 위해 계시며, 우리의 개인적인 방향전환의 과정은 성삼위 안에 계시듯 우리 안에 충만히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들음에서 막 시작되는 것이다.
보다 깊어진 이 기도는 우리의 모든 맴돌기의 끝을 알리고(새로운)여정의 시작을 알린다. 그것은 무엇에 우리가 갇혀 있건 우리를 개방케 하며 장애물과 편견에 대한 점진적인 제거의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점증하는 이해와 함께 “저의 하느님, 저의 전부시여’라는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우리가 할 수 있는 곳으로의 여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곧 야곱의 사다리인 그 하늘과 땅 사이의 대화에로 초대되는 것이다. 성녀 글라라는 성 바오로의 말(2고 8,9)에 화답하며 “얼마나 위대하고 칭송받을 만한 교환인가!”라고 얘기하고 있다.(글라편 1,30)
우리가 하듯이 프란치스코도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기 오래 전에 만트라(역자 주: 힌두교의 주문과 같은 기도)와 같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밤새 기도하며 그를 초대한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를 그토록 놀라게 했던 그는 ‘하느님은 나의 전부이시다”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또한 “하느님이 나의 전부였으면”는 그의 바람과 지향을 언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하느님과 그와의 일치는 라베르나의 그 이상한 세라핌 환시에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 환시로 인해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잠겨 들었는지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상처를 담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누가 프란치스코이고 누가 그리스도인지 이제는 더 이상 확실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래의 얘기이다. 이 방향전환 시초의 그는 질문으로 가득하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당신은 누구시오며, 지극히 비천한 벌레인 저는 누구이옵니까?” 프란치스코가 그러했듯이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이것 저것 다른 답들을 우리는 생각해낸다.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비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응시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그 응시 아래 조용히 앉아서 우리 자신을 느끼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구체화되지 않는 갈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배운는 것이다. ‘미지의 구름(cloud of Unknowing)’의 저자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 시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이제 너의 모든 삶은 갈망 가운데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마음을 들어올려 하느님께 의미를 두라고, 즉 우리의 주의를 하느님께 모으고 모든 행동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얘기한다. “너는 관찰하지 말고, 이전 그 모든 것들을 모른다해도 그것에 만족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그저 바라보고 관상하라”고 얘기한다. 이 현명한 저자가 이 책을 “무지의 구름(cloud of Notknowing)”이라 하지 않고 “미지의 구름(cloud of Unknowing)”라고 한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속속들이 알려는 기질 (Habits of being in the know)은 좀처럼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지만 우리는 이런 기질을 깨어야만 한다. 자신의 것이건 남의 것이건 생산성과 결과에 의해 과정을 평가하는 습관(역자 주: Habit을 앞에서는 기질로 여기서는 습관으로 번역하였음)은 바뀌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가치들이 작용을 하는 그런 곳으로 인도되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우리 날들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과 우리 삶의 가장 생산적인 순간들이라는 것이 저자가 “Atoms”라고 부르는 그런 아주 짧은 순간들일 것이다. 여기서 그가 의미하는 Atom은 나뉠 수 없고 거의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아주 작은 시간의 조각이다. 이런 Atom의 순간에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해내실 것이고 “지상에 사는 모든 이들은 훌륭한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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