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과 가난
관련규정: 회칙 11; 회헌 15,19,23
목표: 프란치스코의 가난정신을 이해하고 재속인으로서 이 가난 정신을 어떻게 실현해갈지를 배운다
시작기도
시작성가: 지침서 성가 45번
도입
지난 시간에 우리는 ‘순종’에 대한 공부를 했다. 오늘은 역시 복음삼덕 중의 하나인 ‘가난’에 대하여 공부하겠다.
사부님께서는 가난을 자기의 부인이라 소개하셨고, 가난을 사랑하신 이유는 주님이 가난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 시간에 말씀드리게 되는 ‘가난’은 복음적 가난과 마음의 가난을 성서에서, 사부님의 말씀에서, 우리 형제회의 전통적인 생활 안에서 설명하겠다.
1. 성서에서의 가난 이해
가난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성서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간략하게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 의미는 깊다. 성서는 사회상황을 묘사하고, 상대방에게 전달하기가 몹시 힘든 영성적 체험을 표현한다. 성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 개개인의 태도와 전체 백성의 자세를 규정하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한다.
구약성서에서 가난은 인간 품위에 불리한 창피스러운 처지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키고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는 가난을 지속적이고 고통스러운 악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는 가난을 보는 또다른 노선이 있다. 가난한 사람은 ‘야훼(Yahweh)의 보호를 받는 자’다. 가난은 ‘하느님을 맞아들일 자격이요, 하느님께 대한 자기개방이요,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겠다는 뜻이며, 하느님 대전의 겸손’이다. 그래서 그 의미가 훨씬 요청적이며 종교적이다.
2.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굿간에서 가난하게 때어나셨다(루가 2,7). 그리고 공생활을 하시면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꼭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분이십니다.”(필립 2,7-8). 그리고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고린 8,9).
가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새로운 차원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신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기가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24)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 사는 이웃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 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저름발이, 소경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루가 14,12-15).
또한 신약성서의 ‘여덟가지 참 행복’은 정신적 가난을 고양시킨 최상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행복한’ 가난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전제조건이다. 이것은 복음이 가르치는 ‘정신적 순박’과 의미상으로 동일하다. 우리와 나누시는 하는미의 친교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선물이다. 따라서 이 선물을 받자면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하고; 정신적으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이 가난은 세상 재물에 대한 초연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은 인간적 자세, 곧 이것은 하느님의 뜻 말고는 그 무엇에도 메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3.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에 대하여 이론적인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실질적인 생활양식으로써 증거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는 가난이란 실질적 생활로써 복음에서 발견한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의 가난한 생활이었다.
성인에게 있어서 가난의 동기는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람에서 출발한다. 즉 가난이란 완전히 사랑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가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의 결과인 것이다. 성인은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이러한 가난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하늘에 계신 지존하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위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화로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임하시기라고... 연약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신자 2, 4-5)
성인은 모든 창조물을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모든 좋은 것을 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종은 복됩니다. 실상 어떤 것이라도 자신을 위해 남겨 두는 사람은 자기 주 하느님의 돈을 자기 안에 묻어 두는 사람이 되며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권고 18). 그러므로 인간이 피조물을 남용하여 그것을 자기 것인냥 소유할 때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 의식은 하느님과의 대화의 길을 막는 동시에 다른 인간 공동체에 대하여도 나눔의 길을 막아 보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인에 의하면 ‘소유없이’라는 것은 오히려 물질적 재물을 포기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영적인 선까지 포함한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 외적 재물에 대한 포기는 오직 복음적인 가난이 요구하는 내적 마음 자세를 갖추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내적 가난이 없는 곳에 겸손도 없다. 또한 봉사도 사랑도 없다. 그래서 내적 가난의 결핍으로 공동체 생활은 손해를 입는다. 공동체 안에서 가난과 사랑의 관계는 이러한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가난은 사랑을 위하여 형제들이 마음을 열도록 준비시킨다. 그리고 사랑은 궁핍 중에 사는 가난한 형제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부유하게 채워준다(제2회칙 6장 참조)
가난에 대한 성인의 가르침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성인은 말하기를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고, 가난하셨고 집도 없으신 주님처럼 “이 세상을 순례자나 나그네 같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제2회칙 6장 참조)
4. 교회와 가난
성서 안에서 하느님께서 소외되고 가난한 모든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계신다는 신학적인 반성은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각성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조직되고 제도화된 교회로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랑과 헌신 안에서 함께 하는 믿음의 공동체로 변화 되어야 한다.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사랑 실천은 사회적 차원에서 새로운 구조를 창조해 내는 일에 협력하는 것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종의 신분을 취하시어 당신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셨고”(필립 2,6), 또한 “부요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었다”(2고린 8,9). 그러므로 교회도 그 사명을 완수하려면 이렇듯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를 당하시며 구세사업을 완수하셨듯이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 주기 위하여 교회도 같은 길을 걷도록 불린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인간의 나약성으로 고민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주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의 결핍을 덜어주기로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 봉사하기를 마음써야 한다”(교회헌장 8항)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가난의 정신은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의 마음으로 생활하고 자기 스스로 가난한 사람임을 자각하면서 물질면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쁨 가운데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회원들에게 회칙 11조는 가난 정신 실행의 길을 안내한다.
가난하셨던 주님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재물 사용에 있어 단순해야 하고 착한 관리자로 임하며 순례자와 나그네 같이 물질에서 이탈하는 정신으로 살도록 가르친다.
종합
재물은 사람에게 꼭 필요하면서도 문제를 가장 많이 일으킨다. 극빈자라도 마음이 교만하면 가난한 자가 아니다. 부자라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재물을 잘 사용할 준비가 있는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재물은 하느님의 것이며, 현제 재물과 이기적 마음에서 이탈해야 하며, 세상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여기는 이가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회칙 11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 대한 신뢰
2) 피조물을 좋게 봄
3) 주님과 성모님이 가난하게 사심
4) 가난하고 겸손한 생활
5) 물질적 욕구를 단순하게 함
6) 재물에 대한 착한 관리자
7) 이탈
8) 순례자나 나그네 같이
내적 가난이 없이는 겸손도 봉사도 사랑도 없다. 사부님께선 우리 자신이 내적 겸손을 갖춘 자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교만과 권위 의식과 세상일에 대한 근심 걱정, 인색한 이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이님이 분명하다. 가난하고 겸손한 생활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 무소유의 삶인 것이다.
실천 및 묵상
1. 진복팔단을 날마다 외우며 진정한 의미의 ‘마음의 가난한 자’인지 스스로 반성하자.
2. 자신에게 해가 될 이야기를 듣거나 어떤 것을 빼앗기면 발끈하여 흥분하는지 살펴보자.
3. 의무금 납부와 헌금 봉헌시 내 마음이 진심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뛰노는가?
과제물
1. 첼라노의 2-3생애 읽고 가난에 관련된 부분을 찾아 적어오기
마침기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참고 문헌
영성 113-154
완덕의 거울 17-51쪽
발자취 (1989겨울) 35-51쪽
대전기 22-23, 75-85쪽
요르겐센 265-270쪽
1첼 8-9,13,15,76,2첼 55-93번
슬기 76-85
50주년 366
공의회 문헌: 교회 7,8-52항
사목 67-72항
수도교령 13항
성서: 마태 5,3; 6,24; 8,20; 10,9-10.
마르코 110,21-27. 루가 8,13-14; 12,1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