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제2과 그리스도 중심

Margaret K 2017. 12. 18. 20:46
 

양성교제 

양성교제 제2과 그리스도 중심


관련규정: 회칙 5: 회헌 9,10



회칙 제5조

그러므로 회원은 형제들 가운데서, 성서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전례 행위 안에서,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을 내 육신의 눈으로 결코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성 프란치스코의 믿음이 회원의 성체성사 생활에 대한 영감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목표 ;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가정의 주인이시고 최고의 가치임을 받아들이게 한다.


시작기도 

시작성가


도입


앞 과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의 기본 원리인 복음적인 삶을 보았다. 이러한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이제는 복음의 주인공 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알아보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보내주셨다.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지니고 생활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분은 하느님의 참 아드님으로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분이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Messiah)로서 모든 이를 부활시킬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우리는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형제들 가운데서 성서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전례적 행위 안에서 우리 생활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만나도록 힘써야 하겠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프란치스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무엇을 그분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또한 어떻게 그분을 만나 뵐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 보도록하자.



전개


1.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1) 예수


예수(Jesus)는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이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며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위해 당신 구원의 역사를 재구성하신다.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당신의 아들 안에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이 이름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느님의 이름이다(사도 2,21).



2) 그리스도


그리스도(Chirst)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메시아(Messiah)'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유래한다. 천사는 예수니므이 탄생을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메시아의 탄생이라고 알려 주었다(루가 2,11). 이러한 예수님의 영원한 메시아로서의 성별은 지상생활에서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으실 때 드러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스비다.“(사도 2,36)라고 증언한다.


3) 하느님의 외아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천사들과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자녀와 그들의 왕들을 부르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하느님과 당신의 피조물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표형해 주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세례와 변모 때에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타난다(마태 3,17: 17,5). 또한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되아들’이라고 하시며, 이 이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신다(요한 3,16-18).



4) 주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그 대신에 퀴리오스(Kyrios, 주님)라고 불렀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신성까지도 일컫는 일상적인 이름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베푸신 기적들은 당신의 신성한 주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치유된 사람들에 의한 ‘주님’고백은 예수님의 신성한 신비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하며(마태 8,2),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경배의 표현이 된다(요한 20,28). 교회의 초창기 신앙고백은 이 ‘주님’칭호로써 권능과 영예와 영광을 하느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지니셨다는 사실을 확언한다.



5)갱생의 신비


말씀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킴으로써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다. 즉,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거룩함의 표양이 되기 위해,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게 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교회는 ‘강생’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성자의 강생이라는 독특하고도 유일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분적으로 하느님이고, 부분적으로 인간이시라거나 하느님과 인간의 혼합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분은 참된 하느님으로 머물러 계시면서 참된 인간이 되셨다. “두 본성의 혼동이나 교환이나 분리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신 외아들 주 그리스도이시다‘(칼체돈 신경).



2. 교회의 가르침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절정인 성체의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신도들은 신적 희생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신을 또한 함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제사 봉헌에 있어서나 성체배령에 있어서나 모든 신도들이 각기 고유한 방법으로 전례행위 중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성찬 때에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신도들은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 성사로써 하느님 백성의 일치가 적절히 표시도고 기묘히 이루어지는 것이다(교회헌장 11).

또한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도적 활동의 목표는 모든 이가 신앙과 성세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한데 모이고, 교회 가운데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고, 또한 주의 만찬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례헌장 10).


이렇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몸을 먹도록 주셔서 우리를 힘있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게 하셨다. 주님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당신의 몸인 교회가 되고, 우리가 십자가상의 당신 죽음을 피 흐름없이 대신하는 미사의 희생을 주님과 함께 봉헌하는데 참여할 때마다 우리의 일치는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여기에 우리의 크리스찬 생활의 활력과 모든 신적 행위의 핵심이 들어있는 것이다.



3. 프란치스코의 가르침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복음생활을 살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다름아닌 전선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느님이셨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단순히 하느님은 존재하시며 만물의 근원이시라는 추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성인은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성인은 자기 존재의 핵심 또는 중심을 하느님으로 가득 채웠다는 것이다.

성인에 있어서 하느님 체험의 중심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드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빛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를 뵈올 수 없으며,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이시므로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하느님을 뵈올 수 없고,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이 영이신 만큼 아버지와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다(권고 1)는 것이 프란치스코의 체험이다. 즉 성인은 영적으로서 삼위일체를 활동하시는 하느님으로 보고, 생명의 창조주로,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로, 성화의 작업을 이룩하시며 사랑의 일치로 초대하시는 분으로 각각의 위를 믿고 공경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체험은 성인에게 있어 인간 예수 안에서 즉 복음의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되었다. 모든 점에서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은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유일한 절대자이고 프란치스코 자신은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절대적 최상 주권과 그분에 대한 변함없는 탐구는 프란치스코의 존재 방식이었으며 행동방식이었다. 그는 하느님이며 절대자이신 주님 안에서 하느님을 열망하고자 하엿다. 프란치스코가 만나고 체험했으며 선포하고 노래한 분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이었다.

사랑하올 아버지로서의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하느님 체험 안에서 프란치스코 자신이 복음적 이상을 완전하게 살 수 있었듯이, 프란치스칸인 우리 또한 이러한 하느님 체험의 기반 없이는 프란치스칸 이상을 올바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게 드러난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발견한다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나자렛(Nazareth)의 예수와 그분의 복음은 그의 삶의 규범이었으며 그의 인생의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성인역시 인간의 나약함과 유혹들에 번민 하였고 그럴 때마다 항상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 최상 성, 모든 선, 유일 선으로 고백하면서 주님께로 나아갔다. 이와같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기본적 선책으로 하느님과의 계속적인 관계와 동조 안에서 최상적 가치를,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동저 안에서 행위와 본받음의 최상적 규범을 맛보았다.

또한 하느님께 대한 탐구와 그분과의 만남이 복음적 계획의 특수하고도 기본적인 성격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인은 바로 이러한 계획을 변함없이 살아가기를 원했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를 남겨주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칸 삶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말하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거대한 신적 계시이며 인생과 사랑 그리고 행동과 죽음의 최상 규범인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상생활과 사변이 하느님께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했지만, 그것은 복음을 통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최고가는 대안이었고 충만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는 계시되며 특별한 방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가 본받기를 원한 위대한 표본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근본적인 것들과 세밀한 것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은 성인에게 있어 최상적 규범이었고 삶의 결정적인 계획이었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가장 완전하신 현현이며,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복음의 그리스도란 다름아닌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다. 성인은 복음에서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발견하였으며, 바로 그분이 우리 구원의 실재요, 우리와 교회가 걸어야 할 길임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라는 신비는 성인이 살고자 했던 가난의 신학적 기초이고 우선적인 동기이다. 성인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그분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발견한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 육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1권고 16-19). “그분은 부요하셨지만(2고린 8,9)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난을 택하셨습니다”(2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1,5).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성부께로 가는 우리의 유일한 ‘길’이고, 말과 모범으로써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성인은 강생육화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드러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따름으로써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영광과 부활의 은혜를 세상 만민에게 보여주고 함께 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토마스 첼라노는 성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와 관련된 것에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수고나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언제나 십자가를 졌다... 또한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 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 그는 앉아서 음식을 먹을 때에도 예수님에 관해서 듣고 말하고 생각하느라고 음식을 잊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모르겠다.... 실고 그는 길을 걸으면서도 수없이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노래할 때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모든 자연을 예수님을 찬미하는 데에 초대하였다. 그는 항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놀랄만한 사랑으로 지니고 간직하였기에, 남달리 가장 영광스럽게 예수님의 표지를 받은 것이다. 형언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영광 중에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그는 황홀경에서 관상하였다”(1첼라노 115).


성인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육화하신 말씀, 즉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성서와 미사성제에서였다. 성인은 거룩한 성서 말씀 안에서 육화하신 말씀을 만났다. 그래서 성인은 누구보다도 성서말씀을 자주 읽고 묵상함은 물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는 자기 눈앞에 언제나 어른거리는 듯 그리스도의 수난을 큰 소리로 외치고 슬퍼하며 울음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기억하느라 길거리를 한숨으로 채웠고, 어떤 위로도 마다하였다”(2첼라노 11). 그래서 말씀에 대한 최대한의 옐ㄹ 표하고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형제들도 그렇게 하기를 자주 권고하였다.

또한 성인께서는 당신이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큰 사랑을 깨달으셨다.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제사에 매혹되었으며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을 결고 볼 수 없다 말씀하신다(유언 10). 그래서 성인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 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형제 편지, 26-27)라고 외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말씀과 피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2신자 340.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되는 미사 성제, 곧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인은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심을 굳게 믿었기에 성체께 대한 신심이 지극하였다. 성인이 거듭 성직자와 신학자들, 즉 말씀의 봉사자들을 존경하고, 성체와 성물, 성서말씀에 지극한 공경과 예를 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성인이 그리스도를 향해 불태운 열정적인 사랑을 묘사할 수는 없다. 성인은 타오르는 숯불과 같이 거룩한 사랑의 불에 완전히 매료된 것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생각이 언제나 그분의 심중 깊숙이 유향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성인은 사랑의 불길로 당신이 그분으로 완전히 변모되길 열망했다. 성인이 그리스도를 너무도 열렬히 사랑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성인의 사랑에 너무도 다정하게 화답하셨으므로 성인이 한번은 동료들에게 인정했던 것처럼 당신은 구세주를 끊임없이  당신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성인은 지님으로 우리 주님의 몸인 성체에 대한 사랑으로 불탔으며, 주님의 낮추시는 사랑, 사랑이 그득한 자기 비하를 생각할 때면 경이에 차서 넋을 잃었다. 성인은 자주 또 너무도 경건하게성체를 받아 모셨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이러한 신심을 촉구하셨다(대전기 9,1-2).



종합


회칙 제5조는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형제들 가운데서 성서와 교회 안에 그리고 전례적 행위 안에서 생활하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만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 중심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전례 안에서 주님과 가까워지며 주님 중심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빛과 소금으로 이웃에 표출되어야 하며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계신다. 그 고통을 나누어 지고, 덜어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회개의 생활을 매일 계속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프란치스칸들을 항상 깨어 있는 삶으로 이웃에게 평화와 선을 전해주고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활함으로써 미리 천국을 앞당겨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실천 및 과제


1. 예수님을 닮기 위해 어떤 점을 고쳐야 할 것인지를 성인의 삶에 비추어 성찰하고 편지지 1매 분량으로 적어오기

2. 요한복음 읽기


마침기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기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5-8).

태양의 노래, 자유기도(2명정도).


참고 문헌

미래건설 35-54쪽

공의회 문헌: 교회 42항, 전례 47-48항

F. 글: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2(119-127쪽)

사상 99-120쪽

휴머니즘 167-173쪽

월보: 91.5-7월호 내 주여, 내 전부시여(상, 중, 하)

89,8월호 회칙 강독2

86,1-4월호 프란치스칸 영성 4,5,6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토마스 첼라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보나벤투라)



관련규정: 회칙 5: 회헌 9,10



회칙 제5조

그러므로 회원은 형제들 가운데서, 성서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전례 행위 안에서,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을 내 육신의 눈으로 결코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성 프란치스코의 믿음이 회원의 성체성사 생활에 대한 영감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목표 ;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가정의 주인이시고 최고의 가치임을 받아들이게 한다.


시작기도 

시작성가


도입


앞 과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의 기본 원리인 복음적인 삶을 보았다. 이러한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이제는 복음의 주인공 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알아보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보내주셨다.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지니고 생활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분은 하느님의 참 아드님으로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분이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Messiah)로서 모든 이를 부활시킬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우리는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형제들 가운데서 성서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전례적 행위 안에서 우리 생활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만나도록 힘써야 하겠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프란치스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무엇을 그분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또한 어떻게 그분을 만나 뵐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 보도록하자.



전개


1.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1) 예수


예수(Jesus)는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이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며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위해 당신 구원의 역사를 재구성하신다.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당신의 아들 안에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이 이름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느님의 이름이다(사도 2,21).



2) 그리스도


그리스도(Chirst)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메시아(Messiah)'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유래한다. 천사는 예수니므이 탄생을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메시아의 탄생이라고 알려 주었다(루가 2,11). 이러한 예수님의 영원한 메시아로서의 성별은 지상생활에서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으실 때 드러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스비다.“(사도 2,36)라고 증언한다.


3) 하느님의 외아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천사들과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자녀와 그들의 왕들을 부르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하느님과 당신의 피조물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표형해 주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세례와 변모 때에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타난다(마태 3,17: 17,5). 또한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되아들’이라고 하시며, 이 이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신다(요한 3,16-18).



4) 주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그 대신에 퀴리오스(Kyrios, 주님)라고 불렀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신성까지도 일컫는 일상적인 이름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베푸신 기적들은 당신의 신성한 주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치유된 사람들에 의한 ‘주님’고백은 예수님의 신성한 신비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하며(마태 8,2),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경배의 표현이 된다(요한 20,28). 교회의 초창기 신앙고백은 이 ‘주님’칭호로써 권능과 영예와 영광을 하느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지니셨다는 사실을 확언한다.



5)갱생의 신비


말씀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킴으로써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다. 즉,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거룩함의 표양이 되기 위해,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게 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교회는 ‘강생’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성자의 강생이라는 독특하고도 유일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분적으로 하느님이고, 부분적으로 인간이시라거나 하느님과 인간의 혼합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분은 참된 하느님으로 머물러 계시면서 참된 인간이 되셨다. “두 본성의 혼동이나 교환이나 분리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신 외아들 주 그리스도이시다‘(칼체돈 신경).



2. 교회의 가르침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절정인 성체의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신도들은 신적 희생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신을 또한 함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제사 봉헌에 있어서나 성체배령에 있어서나 모든 신도들이 각기 고유한 방법으로 전례행위 중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성찬 때에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신도들은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 성사로써 하느님 백성의 일치가 적절히 표시도고 기묘히 이루어지는 것이다(교회헌장 11).

또한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도적 활동의 목표는 모든 이가 신앙과 성세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한데 모이고, 교회 가운데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고, 또한 주의 만찬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례헌장 10).


이렇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몸을 먹도록 주셔서 우리를 힘있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게 하셨다. 주님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당신의 몸인 교회가 되고, 우리가 십자가상의 당신 죽음을 피 흐름없이 대신하는 미사의 희생을 주님과 함께 봉헌하는데 참여할 때마다 우리의 일치는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여기에 우리의 크리스찬 생활의 활력과 모든 신적 행위의 핵심이 들어있는 것이다.



3. 프란치스코의 가르침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복음생활을 살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다름아닌 전선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느님이셨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단순히 하느님은 존재하시며 만물의 근원이시라는 추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성인은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성인은 자기 존재의 핵심 또는 중심을 하느님으로 가득 채웠다는 것이다.

성인에 있어서 하느님 체험의 중심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드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빛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를 뵈올 수 없으며,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이시므로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하느님을 뵈올 수 없고,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이 영이신 만큼 아버지와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다(권고 1)는 것이 프란치스코의 체험이다. 즉 성인은 영적으로서 삼위일체를 활동하시는 하느님으로 보고, 생명의 창조주로,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로, 성화의 작업을 이룩하시며 사랑의 일치로 초대하시는 분으로 각각의 위를 믿고 공경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체험은 성인에게 있어 인간 예수 안에서 즉 복음의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되었다. 모든 점에서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은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유일한 절대자이고 프란치스코 자신은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절대적 최상 주권과 그분에 대한 변함없는 탐구는 프란치스코의 존재 방식이었으며 행동방식이었다. 그는 하느님이며 절대자이신 주님 안에서 하느님을 열망하고자 하엿다. 프란치스코가 만나고 체험했으며 선포하고 노래한 분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이었다.

사랑하올 아버지로서의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하느님 체험 안에서 프란치스코 자신이 복음적 이상을 완전하게 살 수 있었듯이, 프란치스칸인 우리 또한 이러한 하느님 체험의 기반 없이는 프란치스칸 이상을 올바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게 드러난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발견한다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나자렛(Nazareth)의 예수와 그분의 복음은 그의 삶의 규범이었으며 그의 인생의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성인역시 인간의 나약함과 유혹들에 번민 하였고 그럴 때마다 항상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 최상 성, 모든 선, 유일 선으로 고백하면서 주님께로 나아갔다. 이와같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기본적 선책으로 하느님과의 계속적인 관계와 동조 안에서 최상적 가치를,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동저 안에서 행위와 본받음의 최상적 규범을 맛보았다.

또한 하느님께 대한 탐구와 그분과의 만남이 복음적 계획의 특수하고도 기본적인 성격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인은 바로 이러한 계획을 변함없이 살아가기를 원했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를 남겨주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칸 삶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말하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거대한 신적 계시이며 인생과 사랑 그리고 행동과 죽음의 최상 규범인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상생활과 사변이 하느님께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했지만, 그것은 복음을 통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최고가는 대안이었고 충만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는 계시되며 특별한 방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가 본받기를 원한 위대한 표본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근본적인 것들과 세밀한 것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은 성인에게 있어 최상적 규범이었고 삶의 결정적인 계획이었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가장 완전하신 현현이며,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복음의 그리스도란 다름아닌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다. 성인은 복음에서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발견하였으며, 바로 그분이 우리 구원의 실재요, 우리와 교회가 걸어야 할 길임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라는 신비는 성인이 살고자 했던 가난의 신학적 기초이고 우선적인 동기이다. 성인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그분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발견한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 육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1권고 16-19). “그분은 부요하셨지만(2고린 8,9)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난을 택하셨습니다”(2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1,5).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성부께로 가는 우리의 유일한 ‘길’이고, 말과 모범으로써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성인은 강생육화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드러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따름으로써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영광과 부활의 은혜를 세상 만민에게 보여주고 함께 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토마스 첼라노는 성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와 관련된 것에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수고나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언제나 십자가를 졌다... 또한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 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 그는 앉아서 음식을 먹을 때에도 예수님에 관해서 듣고 말하고 생각하느라고 음식을 잊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모르겠다.... 실고 그는 길을 걸으면서도 수없이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노래할 때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모든 자연을 예수님을 찬미하는 데에 초대하였다. 그는 항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놀랄만한 사랑으로 지니고 간직하였기에, 남달리 가장 영광스럽게 예수님의 표지를 받은 것이다. 형언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영광 중에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그는 황홀경에서 관상하였다”(1첼라노 115).


성인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육화하신 말씀, 즉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성서와 미사성제에서였다. 성인은 거룩한 성서 말씀 안에서 육화하신 말씀을 만났다. 그래서 성인은 누구보다도 성서말씀을 자주 읽고 묵상함은 물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는 자기 눈앞에 언제나 어른거리는 듯 그리스도의 수난을 큰 소리로 외치고 슬퍼하며 울음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기억하느라 길거리를 한숨으로 채웠고, 어떤 위로도 마다하였다”(2첼라노 11). 그래서 말씀에 대한 최대한의 옐ㄹ 표하고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형제들도 그렇게 하기를 자주 권고하였다.

또한 성인께서는 당신이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큰 사랑을 깨달으셨다.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제사에 매혹되었으며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을 결고 볼 수 없다 말씀하신다(유언 10). 그래서 성인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 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형제 편지, 26-27)라고 외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말씀과 피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2신자 340.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되는 미사 성제, 곧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인은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심을 굳게 믿었기에 성체께 대한 신심이 지극하였다. 성인이 거듭 성직자와 신학자들, 즉 말씀의 봉사자들을 존경하고, 성체와 성물, 성서말씀에 지극한 공경과 예를 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성인이 그리스도를 향해 불태운 열정적인 사랑을 묘사할 수는 없다. 성인은 타오르는 숯불과 같이 거룩한 사랑의 불에 완전히 매료된 것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생각이 언제나 그분의 심중 깊숙이 유향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성인은 사랑의 불길로 당신이 그분으로 완전히 변모되길 열망했다. 성인이 그리스도를 너무도 열렬히 사랑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성인의 사랑에 너무도 다정하게 화답하셨으므로 성인이 한번은 동료들에게 인정했던 것처럼 당신은 구세주를 끊임없이  당신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성인은 지님으로 우리 주님의 몸인 성체에 대한 사랑으로 불탔으며, 주님의 낮추시는 사랑, 사랑이 그득한 자기 비하를 생각할 때면 경이에 차서 넋을 잃었다. 성인은 자주 또 너무도 경건하게성체를 받아 모셨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이러한 신심을 촉구하셨다(대전기 9,1-2).



종합


회칙 제5조는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형제들 가운데서 성서와 교회 안에 그리고 전례적 행위 안에서 생활하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만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 중심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전례 안에서 주님과 가까워지며 주님 중심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빛과 소금으로 이웃에 표출되어야 하며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계신다. 그 고통을 나누어 지고, 덜어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회개의 생활을 매일 계속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프란치스칸들을 항상 깨어 있는 삶으로 이웃에게 평화와 선을 전해주고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활함으로써 미리 천국을 앞당겨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실천 및 과제


1. 예수님을 닮기 위해 어떤 점을 고쳐야 할 것인지를 성인의 삶에 비추어 성찰하고 편지지 1매 분량으로 적어오기

2. 요한복음 읽기


마침기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기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5-8).

태양의 노래, 자유기도(2명정도).


참고 문헌

미래건설 35-54쪽

공의회 문헌: 교회 42항, 전례 47-48항

F. 글: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2(119-127쪽)

사상 99-120쪽

휴머니즘 167-173쪽

월보: 91.5-7월호 내 주여, 내 전부시여(상, 중, 하)

89,8월호 회칙 강독2

86,1-4월호 프란치스칸 영성 4,5,6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토마스 첼라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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