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07. 10. 11. 01:40

  2007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루가 11,9-10)

 

 I tell you, ask and you will receive;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the one who seeks, fi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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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질기게 기다리는 친구를 외면할 수는 없다. 처음에는 귀찮게 여겨지더라도 오래 기다리면 결국 만나 줄 것이다. 친구 사이도 이럴진대, 주님 앞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그분께서 어찌 외면하실까? 부모에게는 자식이 사랑스럽기만 하여 허물이 넘쳐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겸손하고 조금만 더 인내한다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아무리 하찮은 기도라 여겨질지라도 주님께서는 모두 기억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잊어버리시거나 못 들은 체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다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해로운 것을 청한 것은 아닌지, 청해서는 안 될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닌지 가끔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이가 칭얼거리며 이야기해도 아빠는 아이의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아빠에게 응석을 부리며 얘기하는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육친의 부모님께 말씀드리듯, 우리가 그분께 신뢰와 애정으로 다가간다면 무슨 말을 드려도 사랑으로 전달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끈질기게 기다리면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 앞에서 왜 그렇게 기다리지 못할까요? 기도의 항구함, 이것이 우리가 늘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입니다.

 

 

 

새벽을 열며

 

 지난 8월 달에 원고 청탁을 하나 받았습니다. 12월에 나갈 잡지에 낼 글로 12월 한 달 동안의 묵상 글을 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 홍보실에 근무할 때, 원고청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짐한 것이 있거든요. 즉, 저는 누구에게든 원고청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요.

아무튼 저는 한 달 동안의 묵상 글을 쓰겠다고 약속을 했고, 더군다나 10월 20일까지만 써서 보내주면 된다고 하니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그마치 두 달이나 남았으니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시간을 두고서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이틀에 하나의 묵상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바쁜 일정들이 하나 둘씩 생기면서 그 결심을 지키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이유로 쓰지 않고 뒤로만 미루게 되더군요.

9월 20일. 원고 마감까지 딱 한 달 남았습니다. 이제 이틀에 하나의 묵상 글이 아니라, 하루에 하나의 묵상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에 하나. 그것도 A4용지 13줄 정도의 분량이니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결심도 또 지켜지지 않더군요. 왜 이렇게 새로운 일정들이 생기는지……. 더군다나 하루에 한 개의 묵상 글은 별로 부담되지 않기에 또 뒤로 미룹니다.

10월 5일. 이제 보름 남았습니다. 이제는 하루에 두 개의 묵상 글을 써야 합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10월 11일. 이제는 미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하루에 세 개의 묵상 글을 써야지만 원고마감을 간신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 하지 뭐.’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미루다보니, 이제는 써야 하는 묵상 글들이 점점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부담되는 원고청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는 저의 모습이 바로 부담되는 원고청탁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결코 뒤로 미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는 특별히 시간이 더 많이 있는 줄로 아는지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내일’이라는 시간. 그 시간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는 것인데, 오직 하느님만이 아는 시간인데도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올 시간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지금 당장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시간 날 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요? 혹시 계속해서 뒤로 미루다가 저처럼 별 것도 아닌 것을 큰 부담꺼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내가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하느님의 괴롭혀드리는 기도>


가끔씩 우리는 하느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의 머릿속을 아주 복잡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기도가 그렇습니까?


월드컵 8강 경기가 벌어지기 직전입니다. 우리나라와 이탈리아가 맞붙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승리를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철야기도까지 하면서 간절히 승리를 기원합니다.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에서는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습니다. 수많은 성당에서 승리 기원 미사가 봉헌됩니다.


이럴 때 하느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시겠습니까? 이런 스타일의 기도는 기도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괴롭혀드리는 일이며, 하느님을 기적의 요술방망이로 전락시키는 장난일 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즘 로또 복권을 많이들 사시지요. 로또 복권을 한 장 손에 든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이번 딱 한번만 신경 좀 써주세요. 큰 걸로 당첨되면 제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반을 뚝 잘라 하느님께 봉헌하겠습니다.”


그리고는 9일기도를 바친다, 철야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런 기도가 허락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라는 하늘에 내리치는 날벼락 맞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고교 내신 성적이 거의 바닥입니다. 수능도 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학생이 내놓으라는 유수대학, 그것도 제일 잘 나가는 학과에 응시했습니다. 그리고는 백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가 결코 드리지 말아야 할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심껏 기도바치지만 하느님께서 절대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기도, 허무맹랑한 기도, 우리를 위험과 악, 죽음으로 몰고 가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영혼의 유익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앞의 작은 이익, 우리의 끝도 없는 사리사욕, 이기적인 바람의 지속적인 충족을 위해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기도가 그럴듯해 보입니다. 이유가 타당합니다. 아주 내용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실 때 위험천만한 기도가 많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것은 무엇입니까?


눈앞의 작은 것이 아니라 보다 멀리 있는 큰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을 건너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보다 영원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영속적인 것, 말초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것, 결국 영혼의 구원, 공동선, 가난한 이들의 행복, 하느님 나라의 도래, 이런 것들이 우리 기도의 주 대상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지금 잘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결국 우리가 취할 자세는 기도의 결과가 어떠하든 항상 감사하는 일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 항상 하느님의 뜻이 내게,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보다 이타적인 기도, 보다 영성적인 기도, 보다 수준 높은 기도, 결국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탄력     

-이수철 신부-


 어느 손님이 수도원을 찾아 노수도자에게 “수도원에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수도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아주 예전에 공감하며 읽었던 일화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누군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포자기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더 큰 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고…. 바로 이게 우리 일상의 삶이요, ‘십자가의 길’이
뜻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적극적이고 항구한 좋은 기도의
자세를, 믿음의 자세를, 삶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한 번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부단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집요한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자세입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청할 때, 찾을 때, 문을 두드릴 때,
하느님은 우리 생각이 아닌 당신 생각대로 최고, 최선의 방법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어려워 마, 두려워 마!

-안성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우리는 대부분 저 사람은 내가 부탁하면 귀찮아하고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미리 단정해 버린다. 이렇게 나름대로 생각하고 나서는 아예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아주 어렵사리 부탁한 것을 상대방이 의외로 기쁘게 들어주는 것을 종종 체험하게 된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하느님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서 내가 먼저 해결하려고 하고, 다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
그분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면서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외롭고 힘들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언제든지 달려와 주는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늘 가까이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망각한다. 하느님은 나를 늘 첫자리에 두시는데, 정작 나는 그분을 맨 끝자리에 놓고 한참을 헤맨 뒤에야 찾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제발 아버지 하느님을 좀 귀찮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구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는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종용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늘 의식하면서 순간순간 그분께 도움을 청한다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시면서 우리가 청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부모를 어렵게 대하는 것을 바라겠는가? 우리 모두 그분을 너무 어렵게 대하지 않고 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박성태 신부-

 
동물들의 달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뜻밖의 경기결과가 나왔습니다. 우승자는 사자나 치타 표범도 아니었고 작은 개미였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이변을 취재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연습을 했기에 이런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개미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그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진 기자들은 고성능 최첨단 장비를 마련하여 개미의 대답을 듣기로 했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개미씨, 오늘 우승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과연, 개미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스피커를 타고 크게 들려온 개미의 대답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유머이긴하지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수능이나 취업을 위해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좋은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운동 선수들은 좋은 기록과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정치인들은 모든 국민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한 가정의 가장은 가족들의 생계부양을 위해, 주부들은 가족의 건강과 편리한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가만히 둘러보면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이유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먼 길에 지친 한 여행자가 기후 특성상 한낮의 더위를 피해 한밤중에 친구 집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피곤과 굶주림에 지친 여행자를 대접할 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의 천사를 대하듯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후하게 음식을 차려 대접을 하는 것을 그들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분의 빵이 하나도 없었던 주인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이었지만 염치불구하고 친구에게 빵을 빌리려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찾아간 친구 집은 벌써 문이 닫혀있었고 빵을 꾸어달라는 말에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귀찮게 굴지말게. 벌써 문들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하는 거절하는 대답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문을 계속 두드리며 빵을 꾸어달라고 하면 마침내는 귀찮아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청을 들어줄 것이며 원하던 빵을 얻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빵을 구하러간 친구가 건성으로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했다면 "귀찮게 굴지 말게...."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심지어는 배신감까지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길에 지치고 배고픈 친구를 진정으로 위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빵을 얻을 때까지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기도할 때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라도 해봐야지' 하는 얄팍한 기대 심리로는 온전한 기도를 바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마음이며 성령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까? 어떤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간절한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또한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친구는 없는지 부족하지만 나의 작은 손길을 아쉬워하는 이웃은 없는지 생각하고 살펴보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하시어 이 세상이 태초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되기를 바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자기라는 우상을 벗어나도록 선포하는 말라키
-
경규봉 신부-


말라키서는 대 예언서에서 소 예언서에 이르는 예언서 전체를 마감하는 예언서이다. 저자는 “말라키(나의 사자란 뜻)”라고 불리는데, 그는 기원전 480-460년경에 활동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유배에서 돌아왔고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지어졌으며, 경신례를 다시 거행한 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에즈라의 대개혁(기원전 440년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까이와 즈카르야 예언자가 성전을 재건하면서 불어넣었던 희망은 기대하던 대로 성취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실망에 빠져 신앙이 식어졌다. 그들은 전례를 등한시하고, 사람을 매수하며, 여러 가지 불충과 부정을 저지름으로써, 다시 과거의 죄와 잘못에 빠진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말라기 예언자는 사제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들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유배 이후 유다교가 결정적인 꼴을 갖추는 중요한 시기에,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생활의 개혁자요, 동시에 유다 공동체의 안내자로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적대시하고도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점을 지적해준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쓸데없으며,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고 회개하는 것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제 맘대로 살면서 못된 짓을 해야 성공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멀쩡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똑똑히 들으시며, 그러한 이들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당신 책에 적어두고 기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 백성이며 당신의 소중한 아들로 삼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에게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실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 행실에 따라 갚아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물질적으로도 풍족하고, 분쟁이나 다툼 없이 평화를 누리며, 질병이나 사고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러한 삶을 누려야만 하고, 악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해야 마땅하며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을 믿는 까닭이 어디에 있냐고 묻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이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거나,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 신심 깊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러나 바로 그처럼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죄라는 점을 말라기 예언자는 깨우쳐준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 속에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마음속에 있고, 하느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상 하느님을 자기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죄이며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님이시다. 사람은 다만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사는 것일 따름이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가 17,10)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착한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역시 하느님께서 모두 갚아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주이시며 선하신 아버지이심을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오늘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신앙이 참된 신앙이다.

오늘 자기라는 우상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섬기는 참다운 신앙을 갖도록 주님께 기도하자................◆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이정희 (한국 파트너십 연구소)-


 “예수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께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다면 그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기도는 많은 사랑을 담고 있는 기도이다. 영혼의 눈길이 더 많은 사랑으로 차 있을수록 또 영혼이 그의 하느님 앞에서 더 상냥하고 애정 깊게 머물수록 그만큼 더 좋은 기도가 된다.”(샤를 드 푸코)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다.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알 것 같은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푸코의 묵상이 이런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언제나 같이 있고 싶고, 그를 찾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자체가 좋고 기쁘고 힘이 난다. 어느 책에선가 기도는 사랑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도와 하느님 사랑은 순환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 모임에서 만난 자매는 아이의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구하지 못해 애태우다가 마지막 순간 꼭 그만큼의 돈을 마련하게 됐을 때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라는 말이 무엇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노라고 했다.

오늘 복음은 한 걸음 나아가 성령을 주신다고 한다. 가스파리노 신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목표는 언제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승낙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사랑의 풍요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을 긷는 사람이 없어도 샘물은 솟아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을 길어야 비로소 그 샘물은 ‘우리를 위한 것’이 된다.” 오늘 그 샘물이 나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기를. 그래서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도록 주님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상처와 용서

-최영균 신부-


사목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한숨을 잘 쉰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허무하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러냐고 물으면,
정말 어려울 때 찾아갈 친구가 없다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 외모가 못나서 자신이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한숨을 쉬는 일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세상이 젊은이들을 움츠리게 만드는 외적인 원인도 제공하지만, 사실
이런 한숨 속에 배어 있는 대책 없는 허무주의는 예부터 늘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주카페에 가서 점을 보기도 하고, 점쟁이가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거기에
기분이 좋아져 잠시나마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위안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점집에 가는 것이 이 모든 허무함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허무함에 위축되어 있는 우리들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운명론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 은총의
자유로운 개입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우리는 해방을 맛볼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자는 가능한 꿈도 이루지 못합니다. 지금의 모습에
한숨을 쉬기보다 꿈을 꾸고 그 꿈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우리를 살려줄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 의지, 청원, 인간적인 노력, 성령     

-이성우 -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아빠, 아버지이십니까?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이 있습니까? 내가 하느님과 아빠와 자녀의 관계에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에,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유익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주신다는 것에 대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으며, 또 지금 당장 주시지 않을 때는, 지금 주시지 않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빠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으며,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 전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하느님이시지만, 나의 노력이 있어야 주실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주를 진주로 알아보지 못하고, 보물을 보물처럼 사용하지 못합니다. 있는 힘을 다해 갈망하고 노력할 때, 하느님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실 때, 나는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찾으며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 가장 효과적으로 알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갖고 성령을 청하며 성령과 함께 인간적인 노력을 다할 때, 나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고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의 갈망

-김정대 신부(예수회·인천 `삶이 보이는 창` 운영)-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면 하느님을 만난다. 부제서품을 앞두고 나는 호주 사막 한가운데서 8일 피정을 했다. 멜버른에서 사막까지는 기차로 꼬박 29시간이 걸렸다. 아침 여명이 밝아오면서 드러나는 벌건 사막엔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사막이 주는 위압감에 눌렸고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원주민들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도 편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피정을 지도해 주실 수녀님께 멜버른을 떠나 이 사막에 오기까지의 여정과 내 마음의 움직임을 이야기하였더니 수녀님은 간단히 “두려움이군요. 피정 동안 이 사막의 환경에 자신을 열어보는 연습을 하세요”라고 하셨다.
피정 첫날, 나는 피곤해서 낮잠을 잤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찾아가듯 나는 소리나는 곳을 찾아갔다. 그 소리가 나는 곳은 마을회관이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혹시 나를 거부하면 어쩌나 싶어 망설이다 내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내 이야기를 들은 수녀님은 나에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수녀님은 위축되어 있는 나에게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세요. 그러면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주셨다.
내가 그 회관에 편안히 들어가는데는 약 4일이 걸렸다. 첫째 날은 문에서 1미터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날은 주변 의자에 앉아서 10여 분을 있었다. 그 다음날 갔더니 어린아이들이 먼저 와서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놀았다. 경계의 대상이었던 원주민들에게 환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강영구신부-

이렇게 기도해보시겠습니까?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원에 전급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요.”(참 삶의 길 중에서 ‘감사의 기도’)

감사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이미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진정으로 구하고 찾아야 할 것은 감사할 줄 아는 것이고
두드려야 할 문은 감사의 문입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모자라서 허덕이게 되는 이유는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르게 기도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고 소유하려고 덤빕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미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행복을 손에 쥐고도 불행해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환희와 기쁨마저도 고통으로, 성공도 실패로 느끼게 됩니다.

당신은 이미 은총과 축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매사에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시기 바랍니다.(一明)

마산교구

  

 

당신 자신을 주시는 하느님

-박상대신부-

 

  기도 중의 기도요, 가장 완벽한 기도이며,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일용할 양식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할 것을 허락하신다. 아니, 청할 것을 서둘러 권고하신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청원기도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첫째는 청원기도를 드리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도의 항구함과 인내와 끈기이다.(5-10절) 둘째는 청원기도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11-13절)

 

  우선 루가복음이 독자적으로 보도하는 예화가 바로 기도에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예화는 한밤중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은 다른 친구가 내놓을 빵이 없어서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 빵을 청하는 다소 극단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화의 결론은 사람이 우정만으로는 빵을 얻지 못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졸라대면 결국 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청원기도에는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찾는 사람에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그 청을 거절하지 않고 꼭 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니 청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청원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 예수께서는 일단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들어줄 줄 아는 이 악한 세대의 아버지들과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비교하는 대비논법(對比論法)을 통하여, 세상의 아버지들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암시하신다. 나아가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던,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며, 결국에는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란 바로 하느님을 자신을 가리킨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 자녀들이 생선을 청하면 생선을 주고, 달걀을 청하면 달걀을 주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보다 더 좋은 "하느님 당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사와 찬양으로만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깡그리 비운 두 손을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림으로써 그분을 경배할 수도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을,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겸손되이 청하는 것도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 청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청한 바로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 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기도를 바칠 수 있다면 어떨까? "당신께서 가난하셨는데 내가 어찌 부자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거짓 예언자를 높이고 참 예언자를 돌로 쳐죽인 자들의 후손들이 당신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내가 어찌 사람들 눈에 유명하고 권세 있는 자 되기를 애써 바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겠다는 희망을, 그 희망이 결국은 절망을 가져다 줄 뿐인데, 내가 어찌 그런 희망을 가슴속에 품어 기르겠습니까?" 


 

 청하여라(루가 11,5-13)

-유 광수신부-

 

내가 너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항구하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청하고 찾고 두드린다. 그러나 각자 다를 것이다. 내가 늘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재물, 권력, 명예, 쾌락????

 

우리는 매일 청하고 찾고 두드리지만 한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얻었다 싶으면 또 다른 것을 갖고 싶고, 찾았다 싶으면 무엇인가 부족해서 또 다른 것을 찾고, 두드려서 열린 것 같은데 열어보면 더 오리무중이다. 매일 매일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가야 하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인간은 매일 찾고 청하고 두드리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부족하고, 늘 허전하고, 늘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럼, 무엇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가? 무엇을 얻고 찾고 열리면 더 이상 청하지 않고, 찾지 않고 두드리지 않는가?

 

시편에 이런 노래가 있다.

 

" 주여, 잘난 체 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아니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131)

 

시편의 전반부를 보면 얼마나 잘난 척을 많이 했고, 콧대가 높았고, 자기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다녔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잘난 척 하는 마음도, 눈이 높지도,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내게 겨운 일들도 모두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제는 고스란히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인 듯 젖 떨어진 아기처럼 얌전하게 있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젊었을 때 안 해 본 것 없고, 안 가 본 데 없고, 안 나서 본 데가 없이 다 해 보고, 다 가 보고, 다 가져 보았지만 그런 것들로 마음이 편안해져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것에 행복이 없었다는 것이다. 늦게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것들로 바쁘게 살지 않고 "차라리 마음을 다스리고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처럼 지내겠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노가 "주여, 당신을 떠나서는 내 마음이 늘 불안했나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늘 불안하고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은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을 만났을 때만이 행복을 느끼고 평화로울 수 있다.

 

인간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은 어떤 일도 아니고, 어떤 사람도 아니고, 어떤 장소나 재물도 아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사랑이다. 즉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을 만났을 때만이 행복할 수 있고 더 이상 이것저것을 청하거나 찾거나 두드리지 않는다.

 

"너희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뱀도 전갈도 아니라 성령 즉 사랑이시다. 성령은 하느님이시오, 사랑이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때만이 채워질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즉 성령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성령은 우리 안에 올 수 없으면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지만 전혀 느낄 수 없고 활동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미 하느님은 내 안에 와 계시고 성령은 세례성사 때에 오셨다. 이마 와 계신 성령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다른 것을 청하고 구하고 얻으려고 밖에서 찾으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 행복한 사람이여  불신자들이 꾀하는 말을 그는 아니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망나니들 모임에 자리하지 않나니 차라리 그의낙은 야훼의 법에 있어 밤낮으로 주님의 법 묵상하도다."(시편 1)라고 노래한 것처럼 조용히 복음을 묵상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을 더 잘 묵상하려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서 밤낮으로 야훼의 법을 묵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으리라.  더 잘 묵상하기 위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러면 젖떨어진 아이처럼 어미 품에 안겨서 평화스럽고 행복함을 느끼고 맛 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