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3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7-28)
“Blessed is the womb that carried you
and the breasts at which you nursed.”
He replied, “Rather, blessed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serve it.”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가운데서 한 여인이 성모님을 예찬하였다. 같은 여자로서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순수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겸손하면서 복음적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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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불효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기의 죽음은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슬픔에 가슴이 미어져도 소문 없이 묻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치고 절망에 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자식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에는 앞이 캄캄한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순교자들 가운데에서도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순교라 하지만 어찌 인간적 감정마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도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셨습니다.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이 드셨겠지만, 어머니는 아드님과 함께하시면서 아드님의 죽음을 존중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성모님의 위대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답게 사셨던 성모님의 참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성모님을 예찬한 이 여인은 분명 어머니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벽을 열며
그저께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제가 한 달치 강론 원고 쓰느라 무척 정신없다는 것을 알려드렸지요. 그리고 그저께는 하루 종일 글이나 쓰겠다고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지까지 했는데 과연 며칠 분량의 글을 썼을까요? 딱 열흘치의 묵상 글을 썼습니다. 그 열흘치의 글을 쓰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정말로 힘든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면서 들은 생각은 ‘조금만 부지런했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을 텐데…….’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원망뿐이었습니다.
어제도 또 이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지금 이 묵상 글을 하나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하신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이 떠올려졌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정작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묵상 글 쓰는 것을 하나의 일로만 생각했으며, 그만큼 귀찮고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스스로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저께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열흘치의 묵상 글 쓰는 것도 힘들어 했는데, 어제는 반나절만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썼는데도 열흘 치 묵상 글을 다 쓰는 것은 물론 수험생에게 힘이 되어주는 글(현재 본당의 수험생들에게 매일 전달되는 글입니다)까지도 일주일 치나 썼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을 간직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나를 변화시킴은 물론 내 주위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랑을 머릿속에만 간직할 뿐 실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세상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들은 나와 연관된 세상을 사랑하는 데에만 온갖 정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에 대해서 다시금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랑은 특별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와 관심 안에서도 큰 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보면 어떨까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 사랑을 해보세요.
빠다킹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양승국신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주교이셨던 바실 흄 추기경님께서는 기도의 전문가로 손꼽히셨습니다. 기도하기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추기경님의 말씀은 큰 도움으로 다가옵니다. 추기경님께서 내린 기도에 대한 정의도 아주 명료합니다.
“기도란 나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기도의 길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기에,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도록 권유하셨습니다.
바라보기:
“저는 단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병석에 누워서는 기도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저는 장기 입원환자 또는 중환자들에게 십자가에 입 맞추는 것으로 충분한 기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훌륭한 기도입니다. 다른 기도는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귀 기울이기:
“성전에 들어섰을 때 멋진 성가대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성가를 음미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집중시킵니다.”
“때로는 말 대신 침묵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그저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가 그분의 팔 안에 혹은 그분 곁에 있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느끼기:
“어떤 이유로든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은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우리는 비참한 감정에 젖은 채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너무 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저 하느님의 현존 안에 그대로 머무십시오.”
쓰기:
“쓰는 것은 제게 매우 유용한 기도 방법입니다. 특히 과로하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또는 걱정거리가 있거나 머릿속이 잡념으로 가득할 때 그렇습니다. 그럴 때 저는 앉아서 기도 내용을 적어 봅니다. 하느님께 편지를 쓴다는 생각으로 그저 내 마음 속에 있는 잡념을 백지 위해 쏟아놓고 나면 어느새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러한 기도방법을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녀는 자기 방문에 ‘내 사랑은 하느님뿐’이라는 낙서를 써놓았습니다.”
기도하기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추기경님께서는 이런 소중한 권고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여러분들, 기도하기가 신물이 날 때가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기도하기가 싫증날 때, 또는 기도생활을 통해 아무런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거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때 기도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기도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소중한 권고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의 문턱으로 들어선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나요?
-안성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 행복이란 내 욕구가 충분히 채워졌을 때 느끼는 감정인데, 우리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욕구가 존재한다. 식욕·성욕을 비롯하여 재물욕·명예욕·권력욕 등`….
이 중에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가장 큰 욕구가 있으니, 바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 이는 모든 욕구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이 욕구는 물질적인 것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부자이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사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나를 무시하면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창조하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한테서만 가능하다. 이 욕구가 채워졌을 때, 곧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뵈올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가르쳐 주신다. 이제 더 이상 행복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것들을 갖추는 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찾는 데 자신을 투신하자. 사랑받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며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행복의 비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이차룡 신부-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군중 속에 어떤 여인이 예수님 말씀에 대한 뜨거운 감동과 감탄을 나타내려고 여성답게 그분 어머니를 칭찬하였습니다. 자식의 위대함은 어머니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아들을 낳고 기른 어머니는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예언(루가 1,42-45)과 마니피캇(루가 1,48)의 첫 성취였습니다. 교회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라고 표현된 이 여인의 호칭을 동정녀 마리아께 드립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칭찬을 인정하셨으나 초자연적 질서가 얼마나 자연적 질서보다 뛰어나는가를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그 완전한 전형이요 모델이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성모님은 정녕 복되신 분이십니다. 영광의 아들을 낳아 기르신 어머니이시기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이기에 복되신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는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수고보다 더 큰 수고는 없습니다. 성모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사촌 엘리사벳이 성모님에게 "당신은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되신 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온전한 믿음과 사랑을 가졌기에 어머니는 아들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을 함께 따라가며 고통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지만, 내 가족과 친구와 가까운 이웃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진리이신 말씀을 거부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찌 나 혼자만의 행복을 누리며 살 것입니까?
행복은 더불어 함께 함에 있습니다. 자식의 불행은 어머니의 아픔이요 자식의 행복은 어머니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방탕한 자식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밤낮으로 희생기도를 바친 어머니 모니카의 생애는 성모님의 생애와 다를 바 없으며 자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모습입니다. 성녀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는 모니카에게 암브로시오 성인이 "어머니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자식은 잘못된 법이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고향인 북아프리카에서 로마로 가면서 어머니를 따돌리려고 출항시간을 거짓말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도 모니카는 다른 배를 타고 아들을 쫓아갔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귀찮을 정도로 아들을 따라다녔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따돌리려고 자기만의 원을 그렸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더 큰사랑의 원으로 아들을 품었습니다.
오늘 내가 사랑의 원을 그려 품어야 자식은 누구입니까? 이 시대의 어머니들이여! 귀찮을 정도로 아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희생기도를 바치며 자식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면 많은 자녀와 젊은이들이 교회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네 신앙은 네가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무사안일한 마음으로는 자식이 예수님 안에서의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혼배미사나 관면혼배 또는 장례미사때에야 볼 수 있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성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단 10분이라도 기도하는 가정은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요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들은 구원의 진리를 내가 먼저 몸으로 살고 가족들과 친척, 직장 동료와 이웃사람들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성녀의 마지막 임종시 유언의 말씀입니다."아들아, 내게 있어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 것도 없다. 현세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 내가 이 세상에서 더 살고 싶은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주께서 과분하게 나에게 이런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향락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그리고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이재혁 신부 -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은 한 여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렇게 훌륭한 말씀을 해주시는 분을 낳은 여인은 참으로 행복한 분일 거라는 생각에 그 어머니를 칭찬합니다. 이 여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성모님은 천사 가브리엘에게서도 엘리사벳에게서도 은총이 가득한 분으로, 복된 분으로 칭송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성모님의 생애,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엄청 서글프고 안타까웠던 것이 성모님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것도 편안한 곳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낳으셨고, 산후 조리도 하기 전에 이집트로 피신을 해야만 했으며,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성전에서 다시 찾는 일도 겪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몸과 지혜가 날로 새로워지는 예수님을 보면서 대견스러워하시고 기뻐한 것도 잠시. 청년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이후로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예수님을 보면서 예리한 칼에 찔리는 아픔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자신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예수님, 비록 예수께서 메시아란 사실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엘리사벳을 통해서, 시므온을 통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인간적인 마리아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성모님은 눈물을 머금고 자기 자신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인간적인 시각을 접고 천사를 통해서 전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성모님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듣고 간직한 말씀의 실천을 위해서 지속적인 봉헌과 겸손한 자기 비움을 계속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성모님의 신앙은 날로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모님의 신앙은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이제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서 행복한 여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심으로서 참된 행복에 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참된 행복에 들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고 듣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바로 성모님처럼 매일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소화되고, 우리 정신 안에 각인되며, 우리 영혼 안에 살아 숨 쉬도록 해야 말씀을 실천할 힘이 생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인간적인 욕망이나, 현세적인 유혹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말입니다.
매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힘들다고 생각되는 모든 분들 오늘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성모님의 삶을 뒤따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참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됩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박성태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자녀입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부모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면 자녀 된 입장에서는 그 보다 더 큰 칭찬은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녀의 부모도 자녀를 키운 보람을 맛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의 부모님과 자녀들을 생각해 봅시다. 과?나는 부모님께 어떤 자녀일까? 또 내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일까?
모든 인간은 자연인 한 사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좁게는 가족, 넓게는 모든 인간과 깊이 연결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행위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칭찬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고, 비난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지만 결코 외로이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됩니다. 신앙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철저히 내버려진 고독한 존재가 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인간은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넓게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인간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매우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처럼 학연과 지연 등을 습관처럼 따지는 사회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첫째, 자기 스스로가 강한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강력한 결속력을 보이는 것은 뭐니 뭐니해도 가족 관계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가족이란 이름 앞에서는 강한 책임감과 소속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개인사에서는 의형제 혹은 의자매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사회에서는 각종 단체들이 자매결연의 관계를 맺습니다.
둘째, 상대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뢰감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불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존재하는 한 아무리 장엄하고 근사한 행사를 통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기본인 부부지간에서부터 모든 관계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입니다. 그래서 변함없는 신뢰감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는 계약서를 작성하여 서명하고 개인적으로는 손가락 걸며 굳게 약속 다짐을 합니다.
셋째, 자신의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소속감도 있고 신뢰심도 있지만 추진력이 부족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소홀히 한다면 이것은 마치 펑크난 타이어인 채로 자동차를 운전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상 함께 생각 해본 바와 같이 올바른 관계 형성과 유지를 위해 소속감, 신뢰감 그리고 맡은 바를 책임 있게 실천하는 것이 상대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길입니다. 이 길은 인간 관계에서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 나갈 때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을 때 참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마마보이
-김정대 신부(예수회)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은 가끔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식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을 누가 나무라랴?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강인함은 자식을 키우면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물론 다른 문화권 어머니들도 마찬가지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남성 중심적이다. 남아를 선호해서 무죄한 태아를 낙태하는 것이나, 결혼을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남편 쪽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한 여자는 자신의 신원을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닌 누구의 아내, 또는 누구의 엄마라는 종속된 인격체로 살아가게 된다. 문제는 이런 구조에서 아이에게 집착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물심양면으로 자식에게 투자를 한다. 그리고 그 자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다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한탄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단지 그 자식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의 배우자가 되는 사람한테도 영향을 준다. 그래서 새로 결성된 가정은 독립성을 잃고 엄청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자식에 대한 무질서한 집착 때문에 마마보이로 만들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건강한 아이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 최영균 신부 -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말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할 뿐 아니라 어떤 실행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많은 경우 말로 사람의 마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말하는 능력만 있고 듣는 능력이 없다면 어떨지 생각해봅시다.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댈 것입니다. 거기엔 말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물원의 동물이 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같아질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언어행위에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말을 잘 하지만 듣는 것에는 서툽니다. 잘 들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고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특히 진리를 행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진리에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명’이라는 말은 영어로 ‘Obedience’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ob’이라는 말과 ‘audire’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즉 ‘…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순명입니다. 진리에 순명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나에게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에 대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을 너무 많이 하면 그만큼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적어질 것입니다.
행복한 여인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강영구신부-
아침저녁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기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지요. 규칙적인 생활과 체온 관리가 감기를 예방하는 길입니다.
저는 지금 어머니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늘 어머니께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5남1녀를 낳아 젖을 먹이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시던 어머니는 이제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래도 환갑이 다 된 신부(神父) 아들 때문에 오늘도 로사리오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시집 장가 간 다른 자식들과 달리 신부(神父) 아들은 부뚜막에 앉혀 논 아이처럼 한 순간도 안심할 수 없으신 모양입니다. 사제(司祭)의 길을 가는 저는 불효막심(不孝莫甚)한 쌍놈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쳐다보면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만한 불효자(不孝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때문에 한 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임신하던 순간부터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비명횡사(非命橫死)할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불효 중의 불효는 부모 앞서 죽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입니다.
그래도 성모님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된 여인’(루가1,42)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모자지간(母子之間)이라는 혈연(血緣) 때문에 복된 여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정녕 복되십니다.”(루가1,45)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린 성모님은 성당 앞뜰의 뿌리 깊은 느티나무처럼 폭풍우 같은 시련과 유혹,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었습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킨’(루가 11,28) 복된 여인입니다.
당신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양승국신부-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한 특별한 수녀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겸손하시고, 온유하신지, 또 소리 없이 많은 일을 거뜬히 해내시는지 신자들로부터 ‘살아있는 성모님’으로 통합니다.
수녀님과 한번 인연을 맺은 신자들은 얼마나 수녀님께 매료되는지, 그리고 존경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수녀님을 한번 만난 많은 사람들은 앞 다투어 수녀님의 팬클럽에 가입합니다. 수녀님의 영성과 정신,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에.
그런 수녀님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인품도 인품이지만, 탁월한 친화력과 중재력이 비결이었습니다.
이 수녀님의 특기는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소지가 발생하면 아주 조용히, 지혜롭게, 소리 없이 개입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크게 하지 않습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빠져나가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습니다. 수녀님 자신이 본당 굳은 일은 거의 다 뒷전에서 도맡아하십니다. 그리고 뭔가 하나라도 잘 되면, 주임 신부님 덕분이라고, 작은 수녀님이 수고하셨다고, 신자여러분들이 잘 협조해주셨다고 칭찬하고 자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다.
물론 신자들을 향해 거짓말도 많이 하십니다.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님들께서 얼마나 신자 여러분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고, 자나 깨나 신자들의 영성생활 성장을 위해 노심초사하시고, 오직 신자 여러분들 영혼구원만을 위해 존재하신다고 약간의 ‘뻥’을 칩니다.
그리고 신부님에게도 거짓말을 종종 하십니다. 신자들이 끔찍이도 신부님 생각한다고. 이런 좋은 신자들 처음이라고.
그러니 가시는 본당마다 갈등이나 불화가 생겨날 이유가 없습니다. 평화롭습니다. 늘 화기애애합니다.
한 사람의 그런 희생과 중재, 헌신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녀님의 그런 모습에 감동한 신부님, 사목위원들, 단체장들도 수녀님을 따라서 겸손하게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행복의 비결은 헌신이고, 희생이고, 자기낮춤이고,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들으셨을 때 몹시 섭섭해 하셨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때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적어도 이 정도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저희 어머님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저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묵묵히 많은 수고를 해 오신 분입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매정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참으로 성모님께서 들으셨다면 섭섭해 하실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 말씀의 배경에는 보다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나는 이제 인류구원이란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혈육과 가정과 부모와 고향을 떠나갑니다. 우리 어머님, 생각하면 제대로 한번 챙겨드리지 못해 늘 안쓰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면, 제가 더 이상 나자렛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제 어머님을 떠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지상과제인 인류전체의 구원을 위해 미련 없이 더 큰 세상을 향해 떠나갑니다.”
이런 예수님의 출가 선언 앞에 성모님 역시 아쉽지만 예수님을 떠나보냅니다. 10달 동안이나 자신의 배속에 들어있었던 예수님, 낳고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다했기에 애착이 가지 않은 수 없는 예수님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미련 없이 떠나보냅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Fiat(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도 가끔은 기쁘게 “예!”라고 응답합니다.
“생맥주 한잔하러 가자”는 형제들의 초대 앞에 저는 만사를 제쳐두고 기쁘게 일어섭니다. 뿐만 아니라 “손맛 좀 보러가자”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설레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낚시도구 챙깁니다.
이런 Fiat은 진정한 Fiat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다하는 Fiat이니까요. 진정한 Fiat은 바로 성모님의 Fiat입니다. 고통스러운 길, 정말 가기 싫은 가시밭길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주님을 위한 길이기에 기꺼이 길 떠나는 Fiat이야말로 진정한 Fiat입니다.
다가오는 삶의 모든 국면들이나 사건들,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고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직면하는 자세가 진정한 Fiat의 자세입니다.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 억울하기 그지없는 사건들 앞에서도 나대지 않고 조용히 마음에 간직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자세야말로 참 Fiat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평생에 걸친 노력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이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 새로운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됩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안에 메시아가 끊임없이 살아 계시는 계약의 궤가 됩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유스티노교정) 서보효(라이문도) 신부님
우리가 살아가는 목표는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학생 때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지금은 좀 고생스럽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행복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좋은 대학교 들어가고, 또 열심히 공부한 덕에 좋은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직장에서도 고생스럽지만 열심히 일해야 돈을 많이 벌고 행복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고생하며 살아갑니다.
과연 이러한 노력의 결과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일까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처럼 이러한 행복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되는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며 외칩니다.
놀라운 말씀과 행동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 여인은 행복을 예수님의 어머니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복은 그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되지 않는 인간 욕망에서 나오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참다운 행복,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행복의 조건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쳐다보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세에서만이 아니라 현세에서 이미 참다운 행복을 누립니다.
천국의 맛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행복은 어떠한 협박과 박해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우리들의 순교 성인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행복한 사람입니까? 내 십자가가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있을 때,
아니 삶의 중심에 있을 때 그때야 비로써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행복하다(루가11,27-28)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을 보고 군중이 매우 놀라워하였다. 그 군중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같은 여인으로서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마 이 여인은 자식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아들을 생각할 때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인만이 생각할 수 있는 행복관이다. 사실 어머니들의 행복은 자식들이 잘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식이 좋은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 여인은 소박한 여인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여인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기 위해 쏟았던 정성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이 말한 행복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 행복은 여인이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얻어진 행복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행복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것을 정성껏 돌보고 가꾼 것에서 주어지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정성껏 가꾸고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이 육체의 모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라는 표현은 영적인 모성적인 표현이다. 다만 인간적인 모성이냐 영적인 모성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육체적인 모성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듯이 영적인 모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모성애는 행복의 근원이다. 다만 무엇을 배에 잉태하고 가슴에 안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기쁨에서 오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영적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은 제한적이고 또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도 있는 행복이다. 빼앗길 수 있는 행복이다. 불안한 행복이요 변할 수 있는 행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행복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요, 영원한 행복, 늘 함께 할 수 있는 행복, 변치 않는 행복이다. 아무튼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맛보는 행복 그 이상의 행복 즉 영적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여인이 생명을 배고 젖을 먹이듯이 그런 정성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모태에 배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이는 정성과 사랑을 쏟는 이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말할 때면 꼭 그 특징적 장점으로서 "합일의 정열"을 든다. 자식과 함께 있고 싶다, 함께 살고 싶다는 모성의 정열을 말한다. 자식과 운명을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그 합일의 정열이야말로 여성의 본능이며 위대함이기도 하다. 사실, 한자에서는 여성과 자식을 안데 합쳐서 "좋다"(好)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스칼은 합일의 정열만으로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식의 어리광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식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어머니가 자식의 인격 형성에 최대의 장애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성의 "분리의 정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지만, 모성애는 하나였던 것이 두 사람의 별개의 인간으로 나뉘는 사랑이다. 모성애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한 서글픈 사랑인 것이다. 사실 태아는 어느새 모태에서 미끄러져 나와 곧이어 젖이 떨어지고 마침내는 창세기의 결혼관에 나오듯이 "어버이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간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의 최종 단계를 다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를 멀리 놓아 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이나 지배욕을 버리고 그 대신에 이타심을, 주는 능력을 사랑하는 자의행복만을 바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시련을 돌파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교육이란,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업을 말한다.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끔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서 세상을 비관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독립시켜 준 그만큼 자식은 부모를 독립시켜 주는 셈이고 그것이야 말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보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식의 도약대로서 짓�히고, 자식의 비료로서 썩어갈 각오가 어머니 쪽에 있을 때에 비로소 자식은 주체성을 지닌 인격으로 커나가는 것이다.
가장 숭고한 모성애는 "합일의 정열"이 아니라 그야말로 "분리의 정열" 속에 있음을 마리아는 몸소 증거해 보이셨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말한 행복은 자식과의 일치 즉 자식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관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다. 인간적인 행복관은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을 언젠가는 빼앗기기 때문에 서글프고 허전하고 외로운 행복관이라면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은 이별이 없는 영원히 함께 사는 행복관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인 합일의 정열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관이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이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한 영적 가족공동체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일년 365일의 매일미사 복음 중에서 가장 짧은 복음으로 기억된다. 비록 단 두절의 복음이긴 하나 그 담고 있는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감격하여 외친 행복찬사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찬사로 엮어져 있다. 희랍어 원문(原文)을 보면 "복되도다! 당신을 품은 태와 당신이 먹고 자란 젖은!"(27절) 하고 여인이 외쳤다. 여기서 태와 젖은 어머니를 가리키는 비유법으로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아들이 잘되어 존경을 받으면 그를 낳아 기른 부모도 덩달아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제자가 잘되면 스승이, 부하가 잘되면 상관이,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덩달아 기뻐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며, 사람들은 당사자뿐 아니라 당연히 그들을 가르치고 키운 사람들까지 존경하고 부러워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계산법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다. 예수님은 진정 당신을 따르는 방법으로 모든 혈통과 인연과의 단절뿐 아니라 모든 물질적 소유와의 이별을 요구하셨고, 심지어는 자기자신마저 버릴 것을 요구하셨다.(마태 19,29; 마르 8,34) 그분은 세상에 칼을 내리쳐 가족끼리 서로 맞서게 하려 하셨다.(마태 10,34-35)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만나려고 했을 때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들인가?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마태 12,48-50; 마르 3,33-35; 루가 8,20-21)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적이고 물리적인 혈통에 근거를 둔 가족공동체의 벽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그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될 새로운 의미의 영적(靈的) 가족공동체를 선포하신 것이다.
오늘 복음이 함께 외치는 한 여인의 마리아에 대한 행복찬사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 찬사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실존(實存) 속에서 유효성을 가진다. 즉 여인이 외친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행복찬사가 예수님의 대응찬사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다. 여인이 감격하여 침묵을 깨고 예수의 어머니를 행복하다고 외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감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응찬사는 당신의 어머니를 외면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여인임을, 그래서 가장 행복한 여인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고 대답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실현되도록 사셨던 분이 아니신가?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비록 당신의 삶이 외롭고 힘들었을지언정 모든 여인 중에 복되시고, 모든 복된 사람들 중에 진복자(眞福者)가 되신 것이며, 영적 가족공동체의 어머니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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