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일

Margaret K 2007. 10. 12. 10:31

   2007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일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루가 17,18)


Has none but this foreigner

returned to give thanks to God?"


 

 

  

 예수님 시대의 나병 환자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그러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 운명이 바뀌었다. 얼마나 놀랍고 기뻤을까? 너무나 들뜬 나머지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 아마도 그는 나병이 나은 것 이상으로 더 큰 은총을 받고 돌아갔을 것이다

 

☆☆☆

 

 나병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참으로 무서운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그러한 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는 예수님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들은 고쳐 주십사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홉 사람은 너무 들뜬 나머지 감사를 잊어버렸을까요? 아무튼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보통 인간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의 사람입니까? 돌아와 감사를 드린 그 한 사람에 속합니까? 아니면, 너무 좋아서 들뜬 나머지 그냥 가 버린 아홉 사람에 속합니까?
치유의 은총을 베풀?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러 온 이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또 다른 은총을 받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나병이 나은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가 바뀌는 은총을 받았을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탓’은 나에게”

-배광하 신부-


 에덴 동산에서

제 탓 아닌 남의 탓

여자인 하와가 만들어졌을 때, 남자인 아담은 잠에서 깨어나 환호성을 외칩니다. 이제껏 짝이 없었던 아담에게 자신의 동반자가 생긴 것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 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게 됩니다. 하와는 그 열매가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유혹을 받고 열매를 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남자인 아담에게 줍니다.

아담도 그 열매를 먹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먹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분명 아담에게 왜, 열매를 먹었느냐고 추궁하십니다.

그쯤 되면 사내대장부가 풀숲에서 나와 자신이 따먹었다고,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고백했어야 합니다. 여자인 하와의 탄생을 그토록 기뻐하였던 아담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대답은,“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였습니다. 달리 번역하면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가 될 것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고자질(?)은 분명 남자가 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묵상해 보면, 결국 인간의 원죄란 늘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고 모든 탓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에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안에서 자신의 탓을 뉘우치며 ‘제 탓이요’를 고백합니다. 말로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탓을 고백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늘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늘 불평불만의 삶이며, 남을 원망하거나 하느님께 항변하며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나를 위하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할 때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원망의 삶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시며 끝까지 인내와 성실의 믿음 생활을 하라고 격려합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티모 2, 11~12).


너무합니다

우리는 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받게 된 첫 번째 유혹은 에덴 동산에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모든 과일나무 열매를 다 먹어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악마가 노린 것은 그 한 그루 나무였습니다. 우리는 자주 모든 것을 다 받았는데 하나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섭섭해하며 너무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자녀들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부모님들, 자식의 미래를 위하여 당신의 생애를 송두리째 희생하셨는데, 자식들은 부모의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자신들의 욕망을 위하여 내어 놓으라 합니다.

부모님들께서 조상에 물려받은 이것만은 안 된다 하시면, 그 마지막 하나를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고 해를 끼치는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감사의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악마의 유혹도 인간의 이 같은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반하여 악은 거꾸로 된 질문을 여자에게 던집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 1).

이때 여자의 마음속에는 이미 악의 유혹이 들어갔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도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를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 하느님께서 너무하신다는 배은망덕의 마음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이들에게서 감사의 마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더 가지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이내 서운함과 섭섭함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작은 것을 잃어도 분노를 표출합니다. 내가 남에 대하여, 가족에 대하여 너무 한다는 마음이 들 때, 악은 이미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이 작은 것을 얻었을 때 기뻐하며 감사를 드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중 치유를 받고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은 그야말로 유다인들에게는 천대와 멸시를 받던 인생 밑바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렸고 그것이 그를 구원으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유다교의 율법은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까이에 오는 것을 금합니다.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열 사람도 멀찍이 서서 예수님에게 외칩니다.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실을 확인하고 공민권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사제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불행들 앞에서 인간은 늘 하느님 혹은 하늘이 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병은 인류역사 안에 천형(天刑), 곧 하늘이 내려준 벌이라고 일컬어진 대표적 질병이었습니다. 한하운(韓何雲) 시인은 20세기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함경남도 공무원으로도 재직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나병에 감염된 사실을 안후에 남긴 시의 몇 구절입니다. 그것이 어떤 비극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다, 혹은 나병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들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 특히 유다인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이나 나병을 낫게 하셨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하느님이 죄에 대한 벌로서 사람들에게 병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을 주거나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벌주고 저주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배은망덕하였고, 돌아온 한 사람만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교훈은 이솝의 우화들 안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윤리를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치유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당 전례에서 신자들이 성가를 부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 행위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체를 흠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베푸심을 받은 열 사람이지만,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것을 배우려 나선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하느님의 베푸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고 감사드리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감사할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의 의식주를 비롯하여 우리와 가까운 분들, 모두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쓰라리고 고통스런 순간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나병환자들과 같이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고 참담한 심경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돈이 없어서, 계획했던 일이 실패해서, 좌절과 실망을 안고 실의에 차서 배회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없으면, 그런 고통과 좌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만 확대해서 보는 시력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도, 우리를 미워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확대해서 봅니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은혜로움을 외면하고, 멀리 있는 냉혹함만 알아보고 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바쁩니다. 대책도 세워야 하고, 계획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된 열 명의 나환자 중 아홉 명도 자기들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바삐 가야 했습니다. 원하던 바를 차지하고, 누리기 위해 바삐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치유되었으니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을 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베푸심을 큰소리로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 안에는 초기 교회가 생각하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며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살리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예수님을 만나 그 절망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병과 소외와 절망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에게 와서 엎드려서 그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소외시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섬기고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서 새롭게 살아서 구원으로 나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

 -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조그마한 상점을 운영하는 마리아 자매님은 10여 전에 외환위기 때 삶의 절망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잘 되던 상점이 경제 사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단히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자매님은 삶에 대한 회의가 들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성당에 나가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우울함과 절망감으로 서너 달을 힘들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먹고 입고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한 것은 누구의 덕인가 하고 생각하니 주님의 은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고 합니다.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하고 살펴보니 옆에 묵묵히 함께 있는 남편 요셉이 있어 감사하고, 두 딸이 성장해 있어 감사하며, 주일에 가족이 함께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는 것에 감사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 온 모든 것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7,11-19)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길을 가시다가 어떤 마을 입구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회복된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인만이 가던 길을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그냥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사람을 교만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게 해 주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코린 15,10).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은 매일의 삶에서 오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물에도 기쁨을 느끼게 해 줍니다. 감사히 받기만 하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1티모 4,4).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불만스러운 마음이 줄어들고 대신에 만족감이 찾아옵니다. 세상은 아마도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감사의 마음은 사랑이 넘치도록 만들어 주고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결해 주며 서로의 협력을 증가시켜 줍니다.

   가까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저축해 두면 어려울 때 든든한 도움이 됩니다. 마치 만일을 대비하여 보험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이라는 시간에 감사하면,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 앞에 망설여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은 사람과 관계를 계산적으로 사귀지 않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여유로움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1테살 5,16-18) 살아가야겠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에 속한 나 자신.

-박상대신부-


철저한 분업과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현대사회의 종합경제 안에서 상품의 교환과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단연 ‘돈’이라고 부르는 화폐이다. 돈은 유통경제와 시장경제의 매개적 수단이며, 돈은 그 자체로도 증대(增大)된다. 누구나 상품을 구입한 대가로 그 가격만큼 정확히 돈을 지불해야 한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더라도 ‘의술(醫術)을 구매한 대가’를 돈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삶의 거의 대부분은 돈과 함께 전개된다. 현대인은 돈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명백한 이론이나 정확한 계산으로 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여기에 속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공짜, 또는 선물이다. 선물은 이론이나 계산의 선을 무너뜨린다. 합리적인 이론이나 계산에는 ‘감사’라는 단어가 그리 걸맞지 않지만, 선물에는 참으로 어울리는 말이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인간관계에서,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기에 감사는 하나의 덕(德)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와 전혀 다른 믿음을 가지거나, 하느님을 우리와 다르게 배운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덕을 발견한다. 그들의 덕이 우리들의 것보다 크게 발견되거나 느껴진다면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라는 백인대장의 말을 듣고 감탄하신 예수께서 따라오는 군중들에게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은 적이 있다.(루가 7,2-10)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가진 큰 믿음에 대한 예수의 감탄은 복음의 단지 몇 군데서 발견될 뿐이지만,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나안 여자의 믿음(마태 15,21-28)이나 시로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마르 7,24-30)이 그랬고, 루가복음사가 고유의 편집에 속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25-37)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치유된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서 감사를 드리기 위해 예수께 돌아온 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17,11-19)이 그렇다. 오늘 복음은 단연 그 진수(眞髓)를 이룬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을 받자,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가 당시대 이방인이었던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어느 과부만을 구제한 일(1열왕 17,7-16)과, 엘리사가 수많은 나병환자들 중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었다(2열왕 5,1-14)는 이야기를 통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의 구원활동이 이방인들을 향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고향 사람들의 화를 불러 일으켜 벼랑 끝에서 객사할 뻔한 위기를 모면하셨다.(루가 4,16-30) 아무튼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연민의 정과 그들 믿음에 대한 감탄은 자신의 지상적 사명과 아버지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담은 것으로서, 복음선포 가운데 아주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배척했고, 초대교회 또한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에 다분히 어려움을 안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위에 열거한 대목들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가 내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보다 위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서 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어느 누가 되었든 간에 하느님 앞에 자신의 참된 믿음을 발원(發願)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분명 감사할 줄 아는 자이다. 감사할 줄 하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처지가 좋건 나쁘건 언제나 감사할 줄 하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19절)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그 진수를 보자.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마을 안에 살지 못하고 어귀에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였다. 레위기 13장은 사람에게 생긴 문둥병이 그 자체뿐 아니라 환자까지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진지에서 격리시켜 살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부정을 선언하는 보건소 소장은 바로 사제들이다. 사제들은 이들의 병이 전염될 위험 때문이 아니라 경신적 의미에서 ‘부정 탄다’는 이유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동료와 가족으로부터의 격리요, 사회로부터의 추방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이란 죽음에 부쳐진 실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가닥의 희망이 있었으니, 바로 기적을 베푼다는 예수와의 만남이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께 나아가 멀찍이 서서나마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절규한다. 이 절규에는 표현되지 않은 ‘감사’가 들어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잠재적일 뿐이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14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율법의 규정을 따른 것이었지만, 그 말씀 안에 이미 기적의 힘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열 사람의 믿음이 약하거나 없었다면, 자기들이 나을 때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거기서 사생결단을 낼 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은 깨끗해진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 받는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러 돌아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이 가진 천진난만하면서도 감동을 자아내는 믿음에 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그길로 계속 달려가 사제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임으로써 ‘부정에서 정함’을 인정받고, 제단에 희생제물을 올린 다음, 그동안의 격리와 추방으로부터 당한 불이익을 만회하는 데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명만은 정신이 있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7-19절)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분명히 열 사람이 다 처음에 믿음을 가졌었는데, 막판에 와서 왜 한 명만이 믿음을 가졌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바라고 계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것은 9명의 믿음과 1명 사마리아 사람이 가진 믿음의 구별이다. 이는 곧 감사의 구별이기도 하다. 9명의 믿음은 필요와 욕구(欲求)의 질서에서 기인된 것이며,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원의(願意)의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육체의 치유만으로 기뻐하는 반쪽의 믿음이요, 후자는 ‘무상’으로 주어진 치유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의 믿음이다. 즉, 후자의 경우가 제대로 된 감사인 셈이다. 9명의 믿음은 필요의 성취에 머물러 버린 그 다음 단계가 없는 믿음이며, 예수께로 돌아온 자의 믿음은 하느님을 자기 삶의 진정한 파트너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요 감사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집중시킬 때 얻어지는 창조적인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하여 사물과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대부분 기적을 행하실 때 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앉은뱅이를 향하여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때에 그가 일어났고, 장님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때에 그는 다시 보게 되었다. 돌아온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해 주신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본질적인 치유의 힘이 너 자신 안에 있다”고 하시는 말씀과도 같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분명 이런 힘이 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힘이 하느님의 현존임을 망각하고 순전히 자기 것으로 여기는 데 있다. 즉 무상으로 와 계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스스로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실제로 서 있고, 살아 있고, 참 삶을 살고 있는 이곳뿐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세상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매일 일어나는 평범한 기적의 외적인 모습에 맴돌지 않고, 그 기적의 내적인 원동력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거기에 하느님은 자신의 신적 현존의 거처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결국 예수님께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병도, 불치의 병도 아니요,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도, 천재지변도 아니다. 문제는 늘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바로 나 자신이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자”

-홍금표 신부- 

고마움을 느끼는 감사라는 말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초월적 존재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은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보아도 은총(charis)과 감사(eucharistia)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거저 베푸는 선물인 은총과 감사가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름 아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인간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와 주관 아래 있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가지 덕목이 필요하겠습니다만 이 감사의 덕만큼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덕목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감사의 생활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변덕스러움이 은총의 풍요로움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욕심과 변덕의 본능을 넘어섬, 그리고 이미 받은 것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감사의 생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로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 그들을 치유해주는데 그중 아홉은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이방인 한 사람만이 치유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치유 그 자체보다는 치유 받은 이들의 대조적인 처신이 핵심이고, 또 거기에 더해지는 예수님의 말씀,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말씀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한명에게서는 교훈을, 다른 아홉에게는 뭔가 모르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 오늘 복음을 읽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보면 이 복음은 이러한 표면적인 교훈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습니다. 사실 치유받은 아홉이 감사를 드리지 않은 것을 배은망덕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고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면서 아쉬움을 느낄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 나병이 가지고 있었던 환경과 치유과정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나병은 문둥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나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불결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어 가족과 인간 공동체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사제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그들을 먼저 사제에게 가도록 요구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들은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이 낫게 되는데 한명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아홉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돌아온 한명이나 돌아간 아홉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 기쁨의 크기도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명과 달리 다른 아홉에게는 이미 받은 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고, 또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는 해야 할 중요한 또 다른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사제의 확인을 통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일,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상봉, 자신들 앞에 펼쳐질 핑크빛 미래를 준비하는 일들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어려울 때는 주님을 찾지만 정작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일에 얽매여 주님을 잊고 사는 바쁜 오늘의 우리 모습이기에 우리는 여기서도 많은 교훈과 함께 삶의 지침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감사를 드리지 않은 이 아홉의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기적적인 치유보다 더 감사해야할 일은 치유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즉, 치유가 「정말 감사해야할 일」이라면 치유 받지 않아도 되는 건강한 몸만도 「정말 정말 감사해야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물론 저의 입장이겠습니다만 「정말 정말 감사해야할 너무나 많은 일(은총)」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정말 감사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아홉에게는 진한 아쉬움을 가지면서도 자신은 정작 감사의 생활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평과 불만 속에서 또 다른 감사의 조건과 상황을 찾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사실입니다.

겨울에 봄을 찾고 봄이 오면 여름을, 여름이 오면 가을을 찾는 마음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현재의 아름다움을 누리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계절의 장점에 집착하는 병적인 인간의 욕심이 이러한 변덕스러움의 원인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재혁 신부 -


예수님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나병환자 열 사람이 크게 소리칩니다. 자신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실 분은 바로 예수님뿐임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자신들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께 있는 힘껏 자비를 청합니다. 그들의 안타까움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의 애원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 모두의 병을 깨끗이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이방인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9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도 치유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끊임없이 용서와 치유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우리 중의 아홉은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치유해주시는 분이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이만큼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자비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들처럼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우리도 끊임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지 못했으면 이제부터라도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제 1 독서의 나아만과 복음의 이방인 나병환자처럼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시다. 이처럼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삶이 주님께로 완전히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치유되고 나서 다시금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우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너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이로다.??(복음 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