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10월 12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07. 10. 12. 04:35

   2007년 10월 12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가 11,20)


If it is by the finger of God that I drive out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이스라엘은 바알 우상에 빠짐으로써 예언자의 혹독한 질책을 듣고 또 들었다. 그러므로 베엘제불 운운하는 것은 하나의 저주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악령을 쫓아내는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악령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

 

☆☆☆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고, 군중은 놀라워합니다. 벙어리가 말을 하는 기적을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베엘제불’은 구약의 우상인 ‘바알’을 가리킵니다. 왜 그들은 이렇게 극단적인 말을 내뱉은 것일까요?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 벙어리는 하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으니, 그것은 하늘을 역행한 잘못으로 더 큰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우쳐 주시고자 벙어리를 고쳐 말을 하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 비난의 폭력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약령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움직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굳게 믿고 받아들이면, 성령께서 늘 함께하십니다. 악령이 아무리 강하게 무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해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면, 어찌 그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새벽을 열며

 아마도 성지에 있었을 때, 저는 제 평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나무를 심었던 것 같습니다. 성지에서 3년간 있으면서 천 그루 이상을 심었으니, 제가 언제 이렇게 많이 나무를 심어 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제가 나무를 심어본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주로 사무적인 일만 했으니 땅 파고 나무를 심는 것을 어떻게 잘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성지에서 처음으로 나무를 심을 때였을 것입니다. 저는 심지 않고 놔두어도 일주일을 살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는 벚나무를 구해서 심기 시작했지요. 처음이고 하니 정말로 온 정성을 다해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몇 그루 심지도 않았는데 날이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워낙 초보이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지요.

아무튼 저는 시간이 없다보니 이제 꾀가 나기 시작합니다. 대충 나무뿌리만 땅 속에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만 땅을 파고 대충 심은 뒤에 물도 주지 않고서 일을 마무리 했지요. 그런데 몇 달 뒤, 처음에 심은 나무들은 뿌리를 내려서 잘 자라는 반면, 나중에 대충 심은 나무는 점점 힘을 잃더니만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대충 심었던 그 나무 자리에는 죽은 나무를 뽑고 또 다른 나무를 심을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대충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시간을 더 낭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삶. 정성을 다하다보니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 시간이 아까워서 우리들은 많은 편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편법이란 그 순간에만 만족스러워 보이지만 결코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처럼 편법을 쓰지 않으십니다. 오직 한 가지 원칙. 즉, 사랑의 원칙에만 맞춰 우리들 곁에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워낙 편법을 많이 쓰다 보니 주님의 사랑의 원칙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방하면서,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깎아내리기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이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은 깎아 내리고, 눈에 보이는 그럴싸한 행동으로 자신의 위선과 거짓을 감추는 편법을 쓰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편법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들의 비판이 그 당시에는 옳은 것처럼 보여서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결과까지 낳았지만, 결국은 그들의 비판과 그들의 행동이 모두 틀린 것으로 판명된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 힘들고 귀찮다고 남몰래 편법이나 사용하는 그러한 행동은 이제 그만해야 할 것입니다. 대신 주님처럼 한 가지 원칙, 즉 사랑의 원칙에 맞추어 온 정성을 다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길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 편법은 필요 없습니다. 편법을 쓰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으로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양승국신부-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교회>


강을 건너가다가 죽은 물고기 떼를 보았습니다. 생명이 다한 물고기들, 크기는 엄청 컸지만, 죽고 나니 재미가 없었습니다. 색깔도 희멀거니, 냄새도 비릿하니, 정말 보기조차 싫었습니다. 그저 둥둥 물살에 실려 떠내려갈 뿐입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물고기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 마리 낚아 올리면 파닥거리는 그 모습에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멋지게 뻗은 지느러미며, 고운 빛깔이며, 잘 빠진 몸통이며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임을 새삼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그 녀석들은 물결을 거슬러 다닐 줄 압니다. 꽤 높은 수중보 앞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점프를 해서, 위로 솟구칩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그저 시류에, 대세에, 사회풍조의 물결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는 본질상 살아있는 물고기의 속성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올라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현세에 대한 건전한 비판기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 각자는 살아 숨 쉬는 공동체의 핵심세포로써 꾸준한 자기 성찰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부조리한 현실에 당당히 맞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살아있는 교회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요소는 ‘성령의 현존’입니다. 생명의 지속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숨’ ‘호흡’이듯, 교회가 살아있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 교회 공동체는 그저 하나의 단체일 뿐입니다. 돈 모아서 놀고  먹고 헤어지는 계모임과도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아무리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는다할지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결국 머지않아 소멸될 것이 확실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 교회는 낡은 건물일 따름입니다. 음산하고 흉흉한 폐가로 전락할 것입니다. 죽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활발히 움직이실 때, 우리 교회의 주인이 되실 때, 교회 안에는 하느님 나라가 서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복음말씀들은 건전한 영성으로 발전하고, 그 영성은 신자들의 삶을 활짝 꽃피우는 강력한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 ‘더러운 영’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과 당당히 대적하시며, 모조리 섬멸하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생각만 하기도 싫은 ‘마귀’, ‘사탄’, ‘악령’, ‘더러운 영’, ‘베엘제불’... 오늘날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성령의 부재 상태가 마귀의 지배 상태가 아닐까요? 성령의 결핍 상태가 악령의 공간이 아닐까요?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실 때, 성령께서 머무실 공간이 더 이상 없게 될 때, 그 자리는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비릿한 냄새만 진동합니다. 성령께서 떠나간 그 자리는 순식간에 마귀나 사탄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일치나 형제애, 나눔이나 기쁨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사탄이나 악령의 활동의 표시인 미움, 증오, 분열, 전쟁이 찾아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기도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기도입니다. 성령께 우리 삶을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성령님, 나를 비춰주십시오. 나를 지켜주십시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일으켜주십시오. 나를 진정 살아있게 하십시오!”


 

 

공동체 일치의 원리      

-이수철 신부-

  

비단 나라만이 아니라 개인이나 가정, 교회 공동체도 안에서 서로 갈라지면
망합니다. 역사를 봐도 안으로부터 분열되어 망했지 힘이 약해서 망한 나라나
공동체는 없습니다. 안에서부터 무너지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약해도 확고한 중심이 있어 일치단결하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분열책동보다 공동체에 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규칙서에서 수도승들에게 분열을 조장하는 불평을 하지
말 것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불평 역시 공동체에 전염되어 공동체의 일치를
점차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사실 공동체의 일치는 성격이나 취향이 같아서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이 같을 때,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 때 가능합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미사 참여와 성무일도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전례시간, 공동체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일치를
굳건히 하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공동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할 때
어김없이 스며드는 것이 불평입니다. 우리 마음도, 공동체도, 안에서부터
갈라지지 않도록 늘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문을 열어, 마음의 문을!

-안성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신다. 이미 그들 마음의 문이 닫혀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께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를 통해 오이를 먹지 못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소녀는 오이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오이를 먹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그런데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오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릴 수 있었다. 오이에서 나는 향기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며 오이를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드디어 오이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며 마음먹기에 따라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단 이런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선입견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 자신을 그만큼 한계 짓고 다른 것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우리가 선입견으로 인해 스스로를 가두고 한계 지음으로써 잃어버리는 은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행하신다 하더라도 내 마음의 문이 닫혀 있다면 곁에서 나에게 속삭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가두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지평을 한층 넓혀 주시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해야겠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아내고 있다.
-이재혁 신부 -


삼구(三仇)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영혼의 세 가지 원수가 되는 육신, 세속, 마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육신과 세속은 그 자체가 아니라 육신의 속성으로 일어나는 욕망을 말하고, 세속은 세속의 허망함이 우리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본래 육신과 세속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영혼과 인간에 필요한 아름다운 피조물이지만, 그 속성으로 인해 악에 물들거나 그릇됨에 빠지기 때문에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반면 마귀, 즉 악마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육신과 세속을 그릇됨으로 인도하는 사탄이며 영혼 구원의 원수가 됩니다.

이 삼구는 17세기에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설명하는 세 가지 원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마테오리치가 저술한 “기인십편(畸人十篇)”에서는 ‘이 세 가지 원수가 동맹하여 인간을 해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지금하고 있는 일만 끝나면’, ‘나중에 좀 여유로워지면’. 많이들 들어보셨지요. 바로 지금 쉬고 있는 분들,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육신과 세속에 발목이 잡혀 있는 분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게 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마귀를 �아내시는 것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우리들에게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더러운 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거기서 나오며 물 없는 광야에서 쉼터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 잡고 살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마귀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 다시금 열심히 신앙생활 한 번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진 영혼으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빨리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듭니다.

자! 이제 답을 한 번 찾아봅시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아내고 있다.”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아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나의 힘이나, 나의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능력만이 마귀를 �아내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깨끗해진 나의 영혼, 주님께로 나아가려고 다시금 결심한 나의 마음. 이제 그 마음 안에는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가득 찬 곳에는 결코 마귀가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위기가 지나갔다고 안심하거나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삼구와의 싸움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매 순간 세상을 포기하고,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며, 마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설령 넘어진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다시금 일어서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는 삶의 자세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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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규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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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메뚜기 재앙’이 종종 일어난다. 메뚜기 떼가 하늘을 까맣게 덮을 정도로 큰 무리를 지어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지상에 있는 식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 없애 버리는 것이다(출애 10,1-20 참조). 기근으로 황폐한 이스라엘 땅에 유례없는 메뚜기 재앙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식물마저 모조리 메뚜기 떼의 먹이가 되어 버렸다. 땅에서 거두는 수확에만 의존해 살던 그 옛날에, 이러한 사태는 사람은 물론 짐승들에게조차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재앙의 때에, 요엘 예언자가 탄원 기도를 올리며 참회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다. “요엘”이라는 이름은 신앙 고백을 담고 있다. “요”는 ‘야훼’의 준말이고, “엘”은 ‘하느님’을 뜻하며, 요엘은 ‘주님은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을 지닌다. 예언자 요엘이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400년 전후로서, 이때는 정치적 안정 속에 예루살렘 성전이 유일한 성소로 확고하게 자리하였고, 제사가 어려움 없이 바쳐지고 있던 때였다.

요엘 시대에 일어난 메뚜기 재앙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재난이었다.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갉아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썰어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가 탕쳐 먹었다.”(1,4)는 말처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껍질까지도 다 갉아먹었다. 이러한 재앙 속에서 가축들도 먹을 것이 없어 타 버린 들판에서 울부짖다 죽어 갔고(1,18-20), 하느님께 바칠 제물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1,8-9.13). 이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제사를 드리는 기쁨이 없어져 버렸다(1,12.16). 사는 즐거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죽어 버린 자연과 함께 삶의 끝이며 세상의 종말과 같은 상황이다. 그리하여 온 백성이 절망에 사로잡혀있을 때, 예언자 요엘은 단식과 회개를 촉구한다.

예언자는 사태의 심각함과 절박함을 강조하며 특히 사제들에게 슬퍼하며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온 백성이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표시로 단식을 행하고, 성회를 소집하라고 촉구한다. 진심으로 뉘우쳐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우는 회개를 함으로써,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탄원의 기도를 바치라고 촉구한다.

하느님의 백성을 멸망의 문턱까지 몰고 간 메뚜기의 재앙은 한 번으로 끝나버린 재앙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건인 “주님의 날”을 가리킨다(1,15). 이 날은 유다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심판의 종말이 임하는 종말의 날이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 날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는 날이다. 그래서 단순히 끝 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하다. 예언자는 바로 그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고 선포한다.

요엘은 주님의 날이 단순히 미래의 어느 날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요엘이 선포한 주님의 날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날을 맞이하는 참다운 자세는 곧 회개이다. 참다운 회개는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신명 6,5)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고,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 지상에서부터 살면서,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살기 위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그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을 향하고, 마음과 정성, 힘을 다 쏟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예언자 요엘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
 

 

하느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

-이정희 (한국 파트너십 연구소)-


"무슨 말을 해도 난 죽지 않을 거야. 인당수엔 절대로 빠질 수 없어. 공양미 삼백 석에 날 팔 수는 없어. 우리 아빤 영영 눈을 못 뜨겠지만. 차라리 점자책을 사다 드릴 거야. 몸 안 파는 내 모습을 비난하겠지. 곁에서 읽는 법을 가르쳐 드릴래. 우리 아빨 불쌍하게 생각하겠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 난 단지 나일 뿐이야. (중략) 끝까지 물고늘어져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물고늘어져 세상이 뭐라 해도 끝까지 물고늘어져 아무 쓸모 없이 살지라도 인당수는 내게 없어.”

여성 그룹 마고가 부른 ‘인당수’라는 노래 가사다. 지난 세월 딸들은 아들이 아니라고 차별을 받았고, 희생을 강요당했다. 군사독재와 절대적 빈곤의 시기에 공장 노동자로 열악한 근로 조건 속에서 가족을 위해 일했다. 노래 가사처럼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아들이 잘되어야 집안이 다 잘된다고 믿었다.

지금 여성들은 교육 기회도 많아졌고, 하는 일도 다양해졌다. 여성도 능력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여성에게 운신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다. 여자의 일, 남자의 일이 구분되어 있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승진은 없다.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관행이고, 때로는 결혼한 것을 회사에 비밀로 하기도 한다. 중소기업이 아니다. 대기업도 그렇다. 임신하면 그만두라고 눈치를 준다. 그래도 버티면 해고를 당한다.
여자라고, 비정규직이라고, 직책이 다르다고, 나이가 많다고, 나이가 어리다고 차별거리가 된다. ‘차이를 인정하면 차별 없는 세상이 됩니다’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공익광고를 보면서 마음이 찡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나도 그들을 이방인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차별받던 마음이 대물림을 하고 있다.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어거지를 쓰는 군중처럼 나는 또 어떤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고 하시는 말씀에 힘을 얻는다. 나도 그분처럼 세상의 마귀들을 쫓아내고 싶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

-최영균 신부-

너무 긴장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해야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론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벙어리 귀신은 바로 우리 내면 안의 두려움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시험이 두려워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소위 커닝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내 시험지 밑에 있어야 할
답안지가 없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짝과 함께 부정행위자로 찍혀 선생님께 불려
갔습니다. 영점 처리하겠다는 선생님의 위협(?)에 저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한다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엄한 아버지께
호되게 야단맞을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집에 와서 저는 불안에
떨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전화 벨소리만 나도 혹시 학교에서 온 전화가 아닐까
화들짝 놀랐지요. 저는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께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는 진실을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귀신은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인간의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벙어리는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 내 안의 두려움과
싸워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요, 이 신앙이 치유의 해방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 표징, 예수님을 알아봄     

-이성우-


천 년 전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알아보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마귀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며 시험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지금 원하고 있는 것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고 그것으로 인해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기를 아니면 그들이 원하는 표징을 보여주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있기에, 그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오해하고 모함까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하느님은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꼭 들어주셔야만 하느님이 되실 수 있습니까? 그때에야 나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나에게 해로운 것일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럴 때 하느님은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셔야만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십니까?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 매여 있고 눈이 멀어 있을 때, 나는 예수님이 내 앞에 계셔도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귀신으로 알아보고 모함을 하고 예수님을 쫓아버리기도 합니다.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놓치게 되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매여 있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면 좋겠습니다.


 

-대구대교구 서보효(라이문도) 신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항상 여러 부류의 무리가 있습니다.
자기와 잘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기들의 세력을 구축해나갑니다.
그래서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편 가르기는 인간 사회에서 많은 분열을 조성시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편, 남의 편으로 편을 갈라서 지내고 있지요.
자기편, 즉 자기하고 친한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인정해 주지만,
남의 편, 즉 자기하고 친하지 않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나쁜 말과 행동을 하면
꼽지 않는 시선으로 보는 게 대부분입니다.
가끔 자기하고 친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에 대한 칭찬보다 다른 쪽으로 핑계를 대면서 욕을 합니다.
예를 들면, 친하지 않는 사람이 하루 종일 봉사활동을 했다면,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한 것이거나,
아님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야"라는 식의 수많은 이유를 대면서 그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런 모습 많이 보셨죠? 자기 눈에 벗어난 사람은 잘 해봐야 본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보고,
감탄하며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냈다고 예수를 공격합니다.
어떻게 마귀 두목이 자신의 부하를 쫓아내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선입견으로 사람을 대하다보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삐뚤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입견은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해버릴 수도 있고, 결국 죽음으로까지 내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선입견과 달리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선입견으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잘한 것이 있으면, 칭찬할 수 있어야 되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충고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선입견으로 이미 판단해 놓고 평가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그대로 본받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본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자기편, 남의 편, 가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하루가 됩시다.

 
하느님의 손가락과 우리의 손가락

-김정대 신부(예수회·인천 `삶이 보이는 창` 운영)-


 어렸을 때 배앓이를 하면 어머니는 나를 뉘어놓고 가락에 맞춰 ‘엄마 손은 약손’을 반복하며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러면 배앓이가 없어지곤 했다. 지금도 가끔 배가 아플 때 배를 쓰다듬곤 한다.
언젠가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타지에서 약 한 달을 지냈는데, 어느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 갑자기 허리 근육이 잘못되어 그 자리에서 폭 쓰러졌다. 간신히 침대로 기어가 한참 쉰 다음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물리치료사는 정성을 다해 허리 마사지를 해주었다. 다음날 허리는 한결 나아졌다. 사람의 손은 이렇게 대단하다.
나는 집이나 상점 축복식을 할 때 주로 오늘 복음을 읽는다. 특별히 손으로 무엇을 하는 가게를 축복할 때 이 말씀은 주인에게 큰 위로를 준다. 그런데 사람 손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상점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이는 손으로 사람을 안내도 하고, 어떤 이는 손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한다. 음식 맛은 손맛이라고들 한다. 또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도 있는데, 음식을 만드는 손은 분명 하느님의 축복이다. 모든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상도덕을 지킨다면 이는 분명히 하느님이 당신의 손으로 마귀를 쫓아내듯 우리도 손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손으로 올바른 일을 하게 된다면 이것 역시 하느님의 위대함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가 맞닿아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양승국신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몇몇 아이로부터 가끔씩 연락이 옵니다. 편지로, 전화로, 메일로. 이제 좀 정신 차릴 나이도 되었는데, 잘 지내야 될 텐데, 걱정하고 있으면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겸열필’ 도장이 찍힌 편지가 구치소나 교도소, 소년원으로부터 날아옵니다.


편지 내용을 읽어보면 ‘눈물로 쓴 편지’ 저리가라입니다. 편지 내용만 보면 이제 사람 다 된 것 같습니다. 완전히 개과천선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나오면 그 금강석 같던 다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즉시 또 다른 비행의 연속입니다.


악습과 결별하지 못하는 아이들, 그로 인해 너무도 오랜 세월 방황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하느님께서 바라보실 때 저 역시 별반 다를 바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앞섭니다.


발목을 붙드는 갖은 종류의 속박에 꼼짝 못하고 있는 부자연스런 제 영혼을 자주 확인합니다. 그토록 자주 다짐을 하고 또 다짐하지만 어느새 똑같은 악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은 악령과 맞서 싸우시는 존재라기보다는 언제나 악령 위에 머무시는 존재, 악령들을 지배하시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분 앞에 악령들은 순식간에 힘을 잃고 맙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그 아무리 ‘센’ 악령들이라 할지라도 겁나지 않습니다.


오늘 제게 있어 악령을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나를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여러 형태의 속박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잡념들, 내 영적생활을 파괴시키는 악습들...


아직은 많이 부족하기에, 언제나 나약하기에 악령의 간계에 혼란을 거듭하는 우리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시공으로 훨훨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 다양한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악령들의 세력이 아무리 활개를 친다할지라도, 그로 인해 세상살이가 너무 힘겹다할지라도, 그래도 하느님의 능력은 그 모든 것들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나라가 ‘현재진행형’이기에 갖은 악이 판을 치고, 이해하지 못할 현상들이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뒤흔든다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나라가 반드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을 굳게 믿기 바랍니다.


그날 우리는 그 오랜 악의 억압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가 갈구해왔던 자유를 구가하게 될 것입니다. 꿈처럼 요원했던 참 행복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여러분은 마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다면 마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 마귀는 여러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마귀는 유혹자로써 뱀의 모습입니다. 또 신약 성경에서 명성과 재력과 권력으로 예수님을 유혹했던 마귀는 거의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게 나타나서 예수님을 괴롭혔지요. 요한 묵시록에서는 마귀가 용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지니는 마귀의 공통된 특징이 사람을 악으로 빠뜨린다는 것입니다. 악으로 유혹하여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이 마귀인데 반해서 천사는 어떤 경우에서도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줍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천사의 존재와 마귀의 존재를 늘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체험을 하고 계십니다. 벙어리를 고쳐 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천사의 반응과 악마의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생을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채 힘겹게 살아온 벙어리를 고쳐 주시고 마침내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일을 경탄하고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천사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오히려 나쁜 점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귀의 모습이지요. 좋은 일에서도 나쁜 점을 찾아내어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틀림없는 마귀의 행위입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11,15)

군중들은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악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그들에게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11,20)

그렇습니다. 천사와 마귀는 드러나는 행동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모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천사와 마귀의 존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라면 그 어디에서나 발견됩니다. 심지어는 성당 안에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입만 열면 남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고 단점을 찾아내어 소문을 퍼뜨리는가 하면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상처받게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지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웃을 비방하는 그런 사람들은 마귀의 존재입니다.

그에 비해서 어렵고 힘든 사람, 지치고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격려하며 더 잘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날개 없는 천사?‘라고 부르지요. 복음적인 공동체, 마귀가 없는 공동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늘 나라는 먼 미래, 죽은 후에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곳이 하늘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게 수고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며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공동체, 이것이 바로 하늘 나라의 공동체입니다. 반면에 신자들끼리 편이 나뉘어 다투고 비방하는 글이 오가며 남의 잘못을 들춰내어 퍼뜨리는 안타까운 성당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는 복음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마귀가 날뛰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천사와 마귀가 갈등하는 이런 모습은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도 볼 수 있는 일들이었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번 강조하여 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인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4,29-32)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의 작은 말 한마디가 힘이 되고 격려가 되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가 치명적인 상처가 되어 하던 일도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참으로 복음적인 공동체는 서로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힘은 비판하고 지적하며 몰아세우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찾아내어 칭찬하고 격려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바꾼 칭찬 한 마디>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칭찬 한 마디가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유명한 테너 가수인 한 분은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음악시간에 ??크레센토?‘라는 음악 부호를 보고 점점 세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다가와 뺨을 때리며 화를 내셨다는 겁니다.

?’너 나를 놀리는 거냐? 너는 음악에 소질이 없으니 음악가가 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이 때부터 이 분은 노래를 못하는 아이로 낙인이 찍혔고 노래를 부를 일이 있으면 두려움에 떨며 피하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어느 선생님이 반 아이들 모두에게 노래를 시켜보셨다는 겁니다. 이 분이 마지못해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선생님이 극찬을 해 주신 것입니다.

?’너는 기가 막히게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으니 꼭 성악가가 되어야 한다.?“

선생님의 이 한 마디가 평생의 힘이 되었던 이 분은 지금 성공한 음악가가 되어 아주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칭찬 한 마디의 힘이 이렇게 큰 것입니다. 반면에 아픈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죽이지요.

또 그 책에는 우리가 잘 아는 연기인 최불암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노인 연기를 훌륭하게 하고 있는 그에게도 못 잊을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선배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노역은 너 이상 할 사람이 없구나.?“

이 말 한 마디에 그는 파고다 공원의 노인들을 찾고 또 여기저기 노인들을 방문하며 노역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훌륭한 연기자로 자리매김 하게 된 뒤에는 그런 칭찬 한 마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누군가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 그만 연기를 집어치워라. 젊은 놈이 맨날 노인 흉내만 내고 있으니‥?“

아마도 그의 훌륭한 노인 연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선을 찾아내어 격려해 주는 것이 천사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좋은 일, 칭찬할 일이 많은데도 굳이 나쁜 것, 잘못한 일을 찾아내어 들춰내고 가슴에 못 박는 말을 하는 것은 마귀의 모습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벙어리를 치유해 주시고도 마귀 두목이라는 악평을 들었습니다. 천사와 마귀의 존재는 드러나는 일의 결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감싸주시기를 바랍니다. 칭찬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내가 누구를 칭찬하면 그 칭찬은 몇 배가 되어 내게로 돌아오지요. 정말 좋은 공동체, 복음적인 공동체는 격려하고 감싸며 칭찬하는 공동체입니다.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그 때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복음과 강론말씀대로 착하게 살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천사에 가깝습니다. 오늘 하루도 천사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자유에 의한 선과 악의 선택

-박상대신부-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두고 매번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장)고 하셨는데, 왜 악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악에 대한 의문과 질문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어린아이나 의인(義人)이 당하는 불행을 직면할 때 더욱 고조(高潮)된다. 유사이래 사람들은 세상의 선과 악의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아왔다. 우리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결론은 세상은 선(善)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악이 존재하는가? 가톨릭신앙은 사실상 악의 독자적인 존재를 부인한다. 잘라 말하면 악은 선의 결핍(缺乏)이다.(토마스 아퀴나스) 그러므로 악의 존재를 인정하려들기보다는 선의 결핍을 안타까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난 10월 1일 수호천사 축일에 천사론(天使論)을 공부하면서 보았듯이, 세상과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천사들 중에서 순전히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동등한 존재가 되기 위해 교만과 허세를 부리던 천사들이나,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 천사들이 타락하여 마귀의 무리가 되었다. 천사들이 하느님의 사자(使者)로 창조되어 하늘에서는 하느님을 보필하고, 땅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임무를 가졌다면, 마귀들이 그 반대의 행세를 할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세상을 사는 인간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물리적으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영적(靈的)으로 천사와 마귀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마귀의 세력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자유의지가 약해지거나 심한 경우에는 전부를 약탈당해 사람의 구실을 못하고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거나, 나쁜 악행을 반복해서 습관적으로 저지른다면 "마귀 들림"을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복음서들이 왜 예수님의 구마기적활동에 그토록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바로 마귀 들린 그 사람에게 다시금 자유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며, 회복된 자유는 또다시 선(善)과 악(惡)을 두고 선택의 기개(氣槪)를 과시하게 된다. 특히 마귀가 들려 귀머거리가 되거나 반벙어리가 된 사람들을 구마하여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은 단순히 마귀를 쫓아낸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된 사람에게 "말을 들음"과 "말을 함"의 기능, 즉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발설의 기능(대화)을 되돌려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구마기적행적을 두고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려 든다. 반대자들은 예수께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세력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마귀와 그 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은 마귀자신들에게도 있고, 하느님에게도 있다. 마귀들이 다른 마귀들을 쫓아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마귀 들렸던 사람을 이전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기 위함이다.(24-26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구마(驅魔)하심은 사람에게 인간본연의 품위와 자유, 그리고 말씀의 경청(傾聽)과 발설(發說)을 돌려주시기 위함이다. 이 일을 예수께서 하신다면 그는 하느님이시며, 그로 인해 이 땅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20절) 이에 인간은 언제든지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선(善)의 편에 설 수도, 악(惡)의 편에 설 수도 있다.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루가 11,14-23)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이르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 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 사람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들을 쫓아내신 것을 보고 놀라워하는 군중이 있는가 하면 "저자는 마귀들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하기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보고 이렇게 여러 가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체나 공동체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법이다. 십인 십색이듯이 얼굴 모습도 다르지만 생각도 다 다르다. 다양성이 있어서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의견이 달라서 일치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도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부간의 다툼은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고 결국은 싸우고 이혼하기까지 한다.

 

개인적으로도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갈등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 있는가하면 나쁜 생각도 있고 남을 칭찬하고픈 생각도 있는가하면 미워하고 시기심과 질투하는 마음도 있다. 나훈아의 "왜 이런지 나도 몰라.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노래가 있듯이.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뜨거운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차가운 것을 좋아한다. 이 사람은 창문이 열려 있기를 원하고 저 사람은 창문이 닫혀 있기를 원할 수도 있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왜 서로 다른가를 밝혀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비록 분류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여러 가지 범주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저 남자는 전형적인 독일(아일랜드, 이탈리아, 프랑스 등등) 사람이야."
"저 여자는 전형적인 간호사(교사, 주부 등등)야."
"그들은 경상도 사람이고 저 사람은 전형적인 전라도 사람, 충청도 사람이야."
사람들은 각자 다른 독특한 존재라는 사실임에도 우리는 사람들을 분류하고 꼬리표를 붙여서 틀 속에 넣으려 한다.

 

탐험가이며 작가인 영국의 리처드 버튼경의 부인은 사람들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이렇게 적었다.
-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바보다. 피하라.
-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 사람은 단순하다. 가르치라.
- 많은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자고 있다. 깨워라.
- 많은 것을 알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 사람은 현명하다. 따르라.

 

이 제마는 사상 체질론을 내세워 태음인, 태양인, 소음인, 소양인으로 분류하면서 인간이 서로 다른 차이점을 설명하였다.

 

빠스칼은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의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믿고 있다. 또 하나는 죄인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의인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신이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면서 죽었다고 한다.

 

여러 유형이 있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한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되든 자기 위주로 말을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예수님은 주의 기도에서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즉 각자 자기 나라가 아니라 모두 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갈라지는 일이 없이 일치할 것이고 모두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라고 말하였듯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 일치할 것이며 좋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각기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를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며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이다."

 

 바오로 사도가 "형제 여러분 끝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을 실행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립4, 8-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