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07. 10. 10. 03:54

  2007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가 11,1-4)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제자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사고 청한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기도’가 등장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따뜻한 모습을 알려 주셨다

 

☆☆☆

 

 우리는 그 어떤 기도보다도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고 있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뚜렷이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막연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탓이 아닐는지요? 이 기도에 담긴 참뜻을 깨닫는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까닭을 이해할 것입니다.
돼지를 치는 일을 하고 있는 야고보 씨는 날마다 할 일이 참으로 많기만 합니다. 그는 기계화된 전문 시설을 갖춘 것이 아니라 돼지를 우리에 가두어 놓고 돈 될 만큼 키워 파는 사람입니다. 40년을 그렇게 살아온 야고보 씨가 영세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아내가 죽은 뒤 술독에 빠진 그는 성당에 다니는 친구들의 인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예비 신자 교리반에도 들쑥날쑥한 그였지만, 세례를 받은 뒤로는 주일 미사에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가 외울 수 있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가 전부여서, 하루에도 이 주님의 기도만 자주 바친다고 합니다. 특히 일이 고되거나 아내 생각이 간절하면 이 기도를 바치고 또 바친답니다.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에 아내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주님의 기도 중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에서, 빠지지 않아야 할 유혹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소홀히 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유혹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양승국신부-


<특권 중의 특권, 주님의 기도>


초세기 교회 때 ‘주님의 기도’는 교회가 간직한 보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바칠 수 없었지요. 정식으로 교회 공동체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만 바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였기에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큰 특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큰 경외심과 ‘삼가 하는 마음’ 감사의 정과 더불어 바쳤습니다.


이러한 흔적은 오늘날 미사 경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사제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유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삼가 아뢰오니’, 통상적인 표현은 아닙니다만, 이 표현의 뜻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경건한 몸가짐으로’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건성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쳤던 지난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너무나 황송한 마음으로,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충만한 기쁨과 더불어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비록 소박하고 간결하지만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복음을 가장 명백하고 포괄적으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의 요약’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아버지’란 호칭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빠’, ‘아버지’란 호칭에 담긴 분위기는 어린아이가 사랑과 신뢰에 가득 찬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부르는 친밀한 분위기입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하루 온종일 기다리던 아빠가 돌아오자마자 다이빙하듯이 아빠 품에 안겨 부르는 호칭이 ‘아빠’, ‘아버지’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사용된 ‘아빠’, ‘아버지’란 표현은 당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가능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심으로서,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만 이루어졌던 친자(親子)관계를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까지 확대시켜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이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이며,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느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는 징표라고 하였습니다.(로마 8장 15절, 갈라 4장 6절 참조)


‘주님의 기도’, 이제부터라도 좀 잘 바쳐봐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세 살배기 어린이가 부르듯이 신뢰심과 친밀함을 담아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보잘 것 없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로 변화되기를 희망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메시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메시아의 시대는 용서하고 용서받는 시대이며, 충만한 하느님의 구원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이기에, 그러한 용서와 용서를 통한 구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를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이수철 신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종교는 아마 그리스도교뿐일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 신원도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말은 그럴싸하지만 애매모호합니다.
인간의 정의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제멋대로 살면서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녀답게’라면 아주 분명해지면서
구체성을 띱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바로 우리의 존엄과 품위의 기반입니다.
아버지의 체면을 봐서라도 함부로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공부해야 하고, 아버지와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또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의 자비로운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이요,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일용할 양식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마리아구호소에는 스물네 시간 따뜻한 밥과 국이 준비되어 있다. 새 가족이 입소할 때마다 가장 먼저 식사를 했는지부터 묻는다. 이삼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었다는 이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며칠을 굶은 이들한테는 먼저 물을 먹이고 죽을 드렸다가 후에 밥을 드린다. 그리고 밤 두 시든 세 시든 새로 입소한 가족이 배가 고프다면 언제라도 밥을 차려드린다. 영양실조로 빼빼 마른 그들은 입소 후 한 끼에 두 그릇씩 먹는데 몇 개월만 지나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다. 제때 양껏 식사를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기에 처음 입소했을 때 밥부터 챙겨준 것이 고마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수녀회에 딸린 이만 명이 넘는 식구들을 한 끼도 굶긴 적이 없으시다. 나는 식사를 할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어제는 아저씨들이 직접 농사지은 상추와 호박잎으로 푸짐한 밥상을 마련해 주셨고, 오늘은 된장국과 현미밥을 마련해 주셨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하루는 이웃집 준호 어머니가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산나물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햅쌀밥을 새하얀 바가지에 가득 담아 오셨다. 그 쌀은 절토골이라는 깊은 산속 손바닥만한 다랑이에서 손으로 훑어서 수확한 것이었다. 쫀득쫀득한 햅쌀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어머니가 왔다 갔다 하시는 동안 단숨에 한 그릇을 비웠고 어머니 밥만 남겨두었다. 그런데 마침 한 노숙자가 동냥을 청하러 왔다. 어머니는 당신의 밥을 전부 그에게 주셨다. 나는 “그것은 어머니 밥인데`….” 했지만 어머니는 “이 밥은 오늘 저 사람의 양식으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거야.”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육신이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영적 양식도 주신다. 매일 말씀과 성체로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는 하느님, 당신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불평과 원망에 가득한 요나를 달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랐지만, 하느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해주시자 몹시 화가 났다.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니느웨 백성에게까지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화가 난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시어, 악을 보고 벌하려 하시다가도 금방 뉘우치시는 분”이신 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받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나는 이러한 은총이 이방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며, 해당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니느웨가 구원되자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청한다. 자신은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로서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항상 시달림을 받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은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과 이 세상의 질서는 너무나도 괴리가 심하다. 그러니 견딜 수 없다고 불평하며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청한다.

이러한 요나의 불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요나를 타이르신다. 그러자 요나는 하느님께서 심판을 거두시지 않고 유보하셨으며 다시 심판을 내리실 지도 모른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니느웨 성 밖으로 나가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봤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니느웨를 심판하실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심판에 처하지 않고 용서해주신 당신의 뜻을 알아듣도록 하시고자 요나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도록 하시어 그늘을 드리워주셨다. 그리고 이내 아주까리 이파리가 벌레에 먹혀 말라 죽도록 하셨다. 아주까리 잎의 시원한 그늘 밑에 있다가 뜨거운 바람과 태양이 내려쬐자 더욱 짜증이 난 요나는 죽고만 싶어서 불평한다.

하느님께서는 요나가 자기 입장에서 니느웨의 구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로 아주까리가 말라죽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모순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그가 하찮은 아주까리 나무 하나가 죽는 것에 대해서 그토록 화를 내는데, 어린이만 해도 12만이나 되고 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를 어찌 아끼시지 않겠는가 하고 말씀하시며 그를 달래신다.

요나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온 우주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시기를 원했다. 그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자신의 생각과 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원망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과 가깝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예언자까지도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원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란 그러한 존재이다. 그처럼 자신에 얽매이고 자신을 버리기 어려운 존재이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상황이 바뀌면 자기를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을 잘 아신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를 잘 알고 계신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창세 8,21)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언젠가 자신을 버리고 온전히 당신의 뜻에 따르기까지 참고 기다리신다. 요나를 달래시듯이 그러한 인간을 달래시면서 참고 견디어주신다.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의 이기심과 잘못에 가득한 행동을 보면서도 참고 기다려주듯이 그렇게 참고 기다려주신다.

그러므로 오늘 그처럼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알자. 요나를 달래듯이 우리를 달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하루가 되자...................◆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내용

-박성태 신부-

가을 풍경들이 더욱 아름답게 변해가는 요즘입니다. 아름다운 이 계절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가을 여행도 좋겠고 가을걷이로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 봉사활동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가을'하면 습관적으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올 정도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책 속에 길이 있다'든지 '책 속에 진리가 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저도 여러분을 같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올바른 인생길이 열릴 것입니다.

기도할 줄 알고 하느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말씀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헤아려보고 하느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가슴깊이 새겨들을 줄 아는 사람이며,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다정히 손잡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앞장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게 변화할 것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먼저 나타냅니다. 그 이유가 첫째 기도는 나약한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나는 기도 할 줄도 모르거니와 관심도 없으니 기도를 잘하는 당신이나 하시오' 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걱정 마십시오. 혹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남겨 주셨는데 그것은 누구나 어디서나 바칠 수 있는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오늘 복음에서 다시 찾아 기도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럼 기도 내용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신 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아버지와 자녀의 사이로 관계를 맺어주셨는데 이 관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관심은 항상 모든 자녀들의 행복에 있으며 언제나 따뜻한 정으로 다가오십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관계를 맺게 하시니 하느님은 멀리계시는 분, 나와는 관계없는 분, 나의 기도와 관계없는 분이 아니라 늘 내 곁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인간(자녀)편에서는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움츠리고만 있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부를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처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며 그분의 뜻을 찾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끝부분은 용서와 악의 유혹에 관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다른 이웃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 용서하기 힘든 그 사람도 내가 용서 못해서 그렇지 그 역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아끼시는 사람을 내가 감히 뭐길래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얼굴을 붉히며 살아야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유혹이란 내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녀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원하지 않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탐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아름다운 기도에 우리들 마음을 함께 담아봅시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 참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정희 (한국 파트너십 연구소) -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그동안 파트너십 여정 프로그램을 하면서 파트너십이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섬기는 지도력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나눔을 할 수 있는 작은 그룹으로 구성되었고 그 과정은 그룹원들에게 과제를 주는데 그중 하나가 ‘당신이 다른 사람의 현존으로 기쁨에 겨웠을 때와 다른 누군가가 나의 현존으로 기쁨에 겨웠을 때’를 매일 그려보고 그룹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룹원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도 있었지만 새로 만난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의 현존으로 기뻤을 때를 그려보는 데 한 자매가 떠올랐다. 최근 일 때문에 자주 만나는 그 자매는 평소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렇게 편안하게 대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자매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채워주고 있고, 그가 있어 좋다는 느낌이 들어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조용히 그의 모습 떠올리자 내가 그에게서 불편해하던 단점보다는 그 자매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수함과 열정, 아버지의 사랑을 살고 싶어하는 마음 등등 내가 평소 그에게서 잘 발견하지 못했던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하느님이 그를 있게 하셨고, 지금 모습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불편했던 것은 그의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도 느끼게 했다. 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룹원을 위해 기도했다. 새로 만나 잘 모르지만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자 가까운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그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를 이끌어 주시고 도와주시어 아버지 뜻이 그에게 이루어지기를 청했고, 그가 잘되기를,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번 기도 체험은 나에게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늘 제자들이 예수께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고 가르쳐 주신다. 과제를 하면서 내가 기도방법을 모른다고 생각한 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은 늘 기다리고 계신데…. 그분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는 것, 그것이 기도방법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최영균 신부 -

이름을 부름으로써 한 사람의 정체가 확인됩니다. 때론 그 이름이 한 사람의
본질을 결정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남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명예를 걸고 어떤 일에 임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름은 또한
한 사람의 꿈과 염원이 담겨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이름은 ‘영(榮)균(均)’
입니다. 영화로움을 세상 끝날 때까지 고르게 누리며 살라고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지요. 그래서 이름과 관련된 농도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저의 어릴 적
별명은 ‘젊은 세균’이었습니다. 제 이름을 동음의 다른 한자 의미로 풀어서
불렀던 것이지요. 젊은 세균이라고 친구들이 부를 때면 불끈 화를 내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 속에는 영화로움을
세상 끝날 때까지 고르게 누리라는 아버지의 염원이 살아 숨 쉬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그 뜻을 모르고 놀려대며 불렀으니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사물의 이름을 왜곡되게 부르고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살지 않았는지 생각해봅니다. 특히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관해서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에 담긴 뜻은 바로 성스러움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다른 세상 조물의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고로 이 모든 세상 것들의 이름 속에는
성스러움의 꿈과 염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 사랑이 극진한 아빠, 절대자 신    

- 이성우-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바라시는지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이 들어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라 부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내 삶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실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이 이루어집니다.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까?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 되고 나의 울타리이며 나의 안식처입니까? 하느님이 내 삶에서 아빠가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나의 삶에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신(神)으로만 존재할 때, 우리는 내 삶과 신앙이 분리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신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아버지가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아버지의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수 있게 됩니다. 나와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있는 신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런 신이 어떻게 나의 일상 삶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로 받아들이고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모습을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시고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시며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셨습니다. 그럴 때 이 지상의 삶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신앙과 삶이 분리된 이름만 신앙인의 삶으로 살 것인지는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일상 속의 신앙

-김정대 신부(예수회·인천 `삶이 보이는 창` 운영)-


 가끔 신자들은 신심생활을 게으르게 했다고 해서 죄의식을 갖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기도를 바쳐야 했는데 못한 경우이다. 글쎄, 신심생활이 신앙 자체도 아닌데 너무 세심한 것이 탈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중 많은 경우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관심조차 없다. 자기만 열심히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기있다는 강연이나 프로그램만 열심히 쫓아다닌다. 이들 중 많은 사람도 사회문제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나는 잘못된 사회구조 안에서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죄의 구조에 쉽게 빠지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올바로 개선하는 것이 신앙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과 우리 삶을 분리해서도 안 되고, 전례 안에 가두어 두어서도 안 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청에 평범하게 보이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사실 이 기도는 당시 유다인들이 늘 하던 기도였다. 이렇게 평범한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마음이 허한 사람처럼 인기있고 특별한 것에 마음을 두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오늘의 삶을 올바로 열심히 성찰하며 살라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가장 탁월한 처방전, 기도>

언젠가 여러 수도회 수도자들이 모여 각자 자신들의 기도생활에 대한 체험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참으로 그 나눔이 풍요로웠습니다.

“기도에 몰입하면 할수록, 묵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관상에 도달하면 도달할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처나 고통의 치유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대처방법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야말로 공동체 내외부의 다양한 갈등국면을 최대한 빨리 해소시키는 탁월한 처방전임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한 가지 중요한 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 시대 당시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스승에게 기도 방법을 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당대 큰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 역시 이런 흐름에 따라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지도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눈여겨보았던 예수님의 제자 역시 스승님께 기도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기도문 하나를 하사하시는데, 오늘날 우리가 틈만 나면 바치는 ‘주님의 기도’의 원형입니다.

기도 중의 기도, 공동체의 기도, 모든 기도의 기반이 되는 기도, 그래서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나 바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너무나 자주 바치다보니 거의 습관적으로 바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다양한 전례 안에 반드시 빠지지 않고 ‘약방의 감초’처럼 ‘기본양념’처럼 들어가는 기도이기에 형식적으로 바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음미해보면, 사실 ‘주님의 기도’ 안에는 신앙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 전반이 다 들어있습니다. 짧은 기도지만 그 안에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신앙인의 일상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만 정성껏 잘 바쳐도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직접 우리에게 건네주신 기도의 유산입니다. 전 세계 모든 신앙인이 밤낮으로 바치는 교회의 기도이자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적당히, 건성으로가 아니라 교회의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거룩한 교회의 신비체에 합일하는 것이고,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 신음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기억하며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그 기도 자체로 그들을 위한 위로와 사랑의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마다 나 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 공동체와 함께 바친다는 마음으로 기도드리길 바랍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 물결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의 창시자인 예수님과 함께, 온 교회와 함께 전 세계를 향해 기도 바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기도 바치는 사람은 기쁨의 순간에도 슬픔의 때를 생각합니다. 열렬히 기도 바치는 사람은 슬픔의 순간에도 슬픈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에 희망을 두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 위주의 기도를 탈피하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 내 만족을 위해, 나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기도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감정으로부터의 탈피와 극복은 바람직한 기도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균형감각은 내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끔 도와주며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보다 깊이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것입니다

 

 

 기도할 때

 -이회진신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기도를 잘 하고 싶어하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잘 하고 싶어서 여러 형태의 기도방법에 대해 배우고 있고,

또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기도하려 노력합니다.


단순한 원리이긴 하지만 기도는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 마음이 간절하기만 해도 안되고, 생각만 해서도 안되고

하겠다고 결심만 해서도 안되는 것이죠.

기도는 실제로 하느님 혹은 다른 기도의 대상에게

자신이 직접 시간을 내어 마주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려고 할 때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그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할 수 있고, 말을 해 줄 수 있고, 위로를 줄 수 있듯이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도 그분이 어떤 것을 좋아하시는지 알아야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세례를 받을 때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세례 받은 뒤 처음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꼭 들어주신다며

세례 한 달 전부터 어떤 것을 하느님께 청할 지 잘 생각해 두라고

세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 당부를 주셨죠.


당시 저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고향 출신의 동료 여학생을 좋아했습니다.

성당에 다니며 교리 공부를 한 이유도 제게서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잡아보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기도로 청할 것을 하나 정해두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결혼하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세례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영성체 후 한 사람씩 제단 앞으로 나와

자신의 세례 후 첫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자 저도 일어나 제단으로 나아가며

다시 한 번 저의 기도를 머릿속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단 앞에 잠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자리로 돌아갔죠.


그런데 제단을 지나 신자석을 돌아서는데 “아차!” 싶었습니다.

분명 “마리아와 결혼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려고 결심하고 제단 앞에 나아갔는데

신자석을 돌아서면서 엉뚱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제단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주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신자석을 돌아오며 세례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온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미안하다는 생각과 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마음 등이 복잡하게 얽혔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도의 기억은 잊혀졌습니다.

원하지도 않는 기도였고, 세례 후에 제 생활이 변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3년 뒤에 성소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때 까마득하게 잊혀졌던 기억 한 편에서 세례 때 하느님께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잊어버렸던 기도를 하느님은 잊지 않았던가 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았죠.

기도할 때, 잘 생각해서 해야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당신께 봉헌하는 기도를 마음에 두셨다가

언젠가는 꼭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름을 부르며 우리가 기도할 때,

나의 기도와 청을 들어 달라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아버지가 지금 내 삶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신지 한번은 생각해 보고 시작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좀 더 하늘 가까이 이를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보는 시간으로부터 우리의 기도를 시작해 봅시다.


“주님, 당신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기도 안에 이제는 살 힘도 주소서.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갈라 2,1-2.7-14 (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
복 음 : 루카 11,1-4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오래 전에 부유한 한 가정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집안에 들어서서 둘러보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들이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기도서인 「성무일도」가 5권이나 놓여 있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온 가족이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인 두 자녀도 부모와 함께 기도를 하고 어쩌다가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날은 저희들끼리 성무일도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은 완전히 수도원이네!?‘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합니다. 부모의 모습이 곧 자녀의 모습이지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궁금하다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툭하면 싸우고 욕지거리를 한다면 내가 매일 욕하고 싸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자녀들이 주일 미사에 잘 빠지고 성당에 소홀히 한다면 부모인 내가 미사에 잘 빠지고 성당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돈, 돈?‘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면 내가 평소에 ??돈, 돈?‘하고 살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

오늘 복음에서 제자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지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기도하고 싶은 원의를 갖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지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외딴 곳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도 안에서 하루 하루의 삶을 하느님과 잘 승화시키시는 스승의 모습을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승님 살아 생전에는 잘 하지 못했던 제자들도 후에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 길을 따라 가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산교육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와는 좀 다릅니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에 있는 주님의 기도를 많이 본 따서 만든 기도문이고, 오늘 주님의 기도는 루카 복음의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많을 때는 수십 번씩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미사 때마다, 또 묵주기도를 드리며, 그리고 아침저녁 기도 때 등등 수없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있고, 신자라면 누구나 이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기도문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기도하고 있으며,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은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들 행동이 뒤따르지 않은 채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공허한 울림이 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성경에도 하느님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여라.?“(탈출3,14)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답변으로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성경학자들이 하느님을 표현한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불경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대통령 이름도 쉽게 호명하며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만약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ㅇㅇㅇ씨.?“하고 대통령의 이름을 호명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실례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고 또 어려운 어른의 존함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또한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애타는 부정으로 그리며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는 아버지, 바로 이 분이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바로 그 분이지요.

??아버지?‘라는 이 한 마디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있음을 그 한 구절에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하지만 속마음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제 아들의 대학 합격을 꼭 이루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물론 하느님께 나의 소원을 기도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지향을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모두가 다 성공하고 편히 잘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욕심이 부딪힌다면 세상은 곧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위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 됩니다.

저는 어린이들이 고백성사를 보면 착한 일을 하고 칭찬을 몇 번 하는 것을 보속으로 내줍니다. 주님의 기도는 물론 기본으로 바치게 하지요. 어른들도 주님의 기도를 보속으로 받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한 미움을 가슴에 그대로 담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나는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가 어떻게 하느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도를 바치려면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는 참으로 유혹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도처에 유혹거리가 넘쳐나고 있지요. 이 시대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육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내 욕망만을 채우려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혹 또한 넘쳐납니다. 그래서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쉽게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면 나쁜 환경에 아예 몸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내기 골프를 좋아하고 더 나아가 모르는 남자나 여자들과 쉽게 어울려 놀기를 좋아한다면 그와는 친분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친구와 어울려 다니면 나 또한 곧 그렇게 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있듯이 나쁜 친구를 사귀면 나도 모르게 나쁜 일에 휩쓸리게 되어 있지요. 유혹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면 많이 배우고 내 삶이 발전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자 중에 자매님 한 분이 열심히 <100권 신심 서적 읽기>에 동참하며 책을 읽는데 신자 아닌 남편이 옆에서 그대로 다 따라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좋은 이웃을 만난다는 것은 이렇게 내 인생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 다소 모자라는 점이 있더라도 아주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이것저것을 다 경험해야 풍부한 사목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더러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좋은 환경은 스스로 절제하고, 유혹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것이 거룩함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시대는 가까이에 유혹 거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런 남편과, 아내와 어떻게 사느냐, 이제 그만 이혼해라.?“

이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코 복음적이지 않은 이런 친구들과는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우리가 청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총을 주셨고, 그 아버지가 얼마나 인자하신 분인지를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하며, 용서를 청하기 전에는 먼저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웃과 환경 안에서 살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더욱 정성껏 바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 가장 완벽한 기도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은 바로 ‘기도’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대목이다. 우선 루가복음의 주님기도(11,1-4)와 마태오복음의 주님기도(6,9-13)를 비교해 보면, 루가는 5개의 청원을, 마태오는 7개의 청원을 담고 있다. 루가에는 마태오의 세 번째 청원인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일곱 번째 청원인 ‘또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가 빠져있다. 루가는 주님의 기도를 ‘아버지’ 라고 시작하는 반면, 마태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산상설교(5-7장)의 테두리 안에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만, 루가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기들도 기도하고자 하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오늘 편의상 현행의 주님기도를 묵상해 보자.


  주님의 기도는 우선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볼 수 있다. 이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담고 있는 바,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청원이며, 후반부의 네 가지 청원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 잘못의 용서’,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보호’, ‘우리를 악에서 구제’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 인간과 삶에 대한 청원이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청원에 의해 이 땅에 하느님의 영광(이름)과 통치(나라)와 섭리(뜻)가 계시되었음을 선포하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이다. 아울러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구원(양식)과 영혼의 구원(용서)을 도모하여, 모든 인간을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해방) 종말론적 구원(영생)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다짐기도인 것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이 땅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심으로써 이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가 되었고,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주님의 기도는 다른 어떤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도이다. 주님기도의 후반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께 청하는 일용할 양식은 어제나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만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우리의 지나간, 즉 이미 행한 어제의 잘못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갖은 유혹과 악으로부터 보호와 해방을 청하는 것은 미지(未知)의 내일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주님기도의 후반부는 우리 인간자신과 실존을 위한 것으로써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차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오늘만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청할 때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또 우리가 어제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할 때는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봉헌을 생각하며 구세주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또한 우리가 다가올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의 보호와 해방을 청원할 때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강림하신 진리이며 위로자요 협조자인 성령 하느님께 의지하여 우리의 미래를 맡겨드리면서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이름과 통치와 섭리를 청원하며, 성삼이신 하느님의 각 위격에 일용할 양식과 용서, 보호와 해방을 청원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완벽한 기도인 것이다. 이제 주님의 기도는 매일 매일 하느님 성삼께 바치는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주님의 기도를 매일 외우는 것으로만 끝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가 모든 신앙인이 지녀야 할 진실한 삶의 자세를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기도는 이 기도가 담고 있는 내용의 실천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 중에서 자신의 신원을 재삼 확인하시고, 신원에 따른 사명을 다짐하신 후 항상 그 대로 행동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 점이 어제 복음에서 밝혔듯이 관상과 활동을 한데 묶어 적극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이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까 11,1-4)

 -유광수 신부-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제자가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듯이 우리도 오늘 '기도하는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자.

 

모든 것이 그렇듯이 우리가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하고 싶은 원의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다. 그렇지만 제자들보고 기도하라고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늘 기도하셨지만 한번도 제자들보고 기도하라고 하시거나 아니면 내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하고 서두르지 않으시고 당신 혼자 묵묵히 기도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여 주셨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의 교육적인 방법이다. 사실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제자들, 기도를 한번도 해보지 않은 제자들보고 무조건 기도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들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도하겠는가?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전에 먼저 당신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셨고 궁금하게 생각하도록 하셨다. 드디어 참다못해 제자들이 나서서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루가는 다른 복음서보다 기도에 관한 부분이 제일 많이 기록하였다. 그마만큼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도에 관한 이 부분을 자기 복음의 첫 부분이 아닌 중간 부분에 갖다 놓은 것은 루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관심이 없이 또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 없이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신 것이다.


 

열망은 기도를 잘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할 조건이다. 이 조건이 채워졌을 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기도하는 방법의 첫째는 기도의 분위가 즉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라고 아버지를 처음에 갖다 놓은 것은 누구에게 기도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내가 지금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께 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아버지 앞에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다.

 

즉 기도는 아버지와 자녀의 만남이요, 대화요, 느낌이요, 확인이다. 삶을 나누는 것이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아버지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이, 나보다 더 나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더 잘 아시는 분, 지금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이시다.

 

아버지는 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시며 내가 잘되기를 나보다 더 바라시는 분이시다. 아버지는 내가 행복하기를 나보다 더 바라시는 분이시며, 아버지는 내가 슬퍼할 때 나보다 더 슬퍼하시는 분이시며 내가 고통을 당할 때, 병들어서 아플 때, 내가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시고 아파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분이시다.

 

내가 기뻐하면 나보다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늘 나에게서 당신의 눈을 떼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시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며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이지 못해 안달해하시는 분이시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늘 잔치를 차려주시며 함께 먹고 춤을 추시는 분이시다. 늘 나를 기다리시는 분, 당신의 넓은 품으로 나를 안아주시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자녀는 그런 아버지 앞에 드릴 말이 많지 않다. 그저 아버지 품에 안겨있으면 된다.

 

대 데레사는 주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라는 말 이외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아버지하고 몇 시간이고 머물렀다고 한다. 아버지의 품속에 오랫동안 안겨있으면서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앞에 나와 있으면서 많은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할 때 내가 알 지 못하는 낮선 분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내가 일일이 말을 하고 설명을 해야 알아듣고 그때서야 당신 마음에 내키면 기도를 들어주시는 인색한 분이 아니다. 내가 혹시나 잊어버리고 청하지 않았으면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잘되었다고 하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나의 청 때문에 성화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 나의 청을 억지로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큰 소리로 많은 말을 해야 그 때서야 알아듣고 귀찮아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정말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올바로 알고 기도한다면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인지 안 들어주실 것인지 하고 불안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도하는 사람은 불안해 하지 않고 늘 편안할 것이고 든든한 아버지의 보호아래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것이며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지켜 주시는데, 아버지가 나를 보호해주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데 얼마나 든든하고 편안한가! 두려울 것이 없다.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노력한다. 즉 나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루가 15,31)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또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만을 찾고 나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해 기도한다.

 

즉 기도하면서도 아버지와 하나되지 못하고 아버지와 나와 늘 떨어져 있고 분리해서 기도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했으면서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것이 우리가 청해야할 아버지의 나라이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기도하면서 청해야할 아버지의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청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모두 나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 얼마나 모순된 기도의 모습인가? 아무리 아버지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싫으면 내가 고통을 당하거나 손해를 봐야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것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오늘 나의 일용할 양식이다. 오늘 우리의 양식은 빵이든 밥이든 그것은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들이지 나의 나라를 위해서 청하는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늘 청하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욕심을 부려 갖기 위해 청한다. 이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늘 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다. 유혹이란 바로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생각들과 행동들이다. 우리는 이런 유혹을 늘 받고 있고 또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오늘 이 기도를 바치면서 적어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머물어 보고 아버지께서 오늘 나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일용할 양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자. 아니 이용할 양식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보자.

 

무슨 기도문이 그리 많은지 우리 주위에는 기도문이 너무 많다. 그 기도를 다 바치려면 시간 반 또는 두 시간 걸린다고 한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다 좋은 내용들이고 다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 내용들이다. 가정을 위한 기도, 연령을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성전 건립을 위한 기도, 수재민을 위한 기도, 통일을 위한 기도,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 예수 성심께 바치는 기도, 묵주의 기도, 등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도문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왜 그렇게 일일이 조목조목 나누어서 기도를 바쳐야 하는가?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한 가지 뿐이데 즉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라는 것뿐인데 우리의 기도문을 보면 책 한권이 모자란다. 정말 기도를 올바로 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