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7일 연중 제27주일
그때에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5-10)
The apostles said to the Lord,
"Increase our faith."
The Lord replied,
"If you have faith the size of a mustard seed,
you would say to this mulberry tree,
'Be uprooted and planted in the sea,’
and it would obey you.
믿음은 힘이다. 믿음을 통하여 주님의 힘을 체험한 사람은 삶의 기쁨도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정성을 다해야 한다. 겸손한 믿음이 주님 앞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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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마저 옮길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마태 17,20 참조). 정말 그럴까요? 사실 믿음 때문에 옮겨진 산은 없으나, 산처럼 강하고 꿈쩍하지 않던 것들도 믿음 때문에 움직인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입니다. 얼마만큼 인내심을 가지고 믿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말했다가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의 판단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라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돌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믿음으로 극복해 본 사람만이 ‘바다에 심겨지는 돌무화과나무’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보답은 언제나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만큼 기도했으니 이 정도는 주시겠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주십니다. 주시지 않을 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잘못 청하거나 불필요한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부활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즉, 부활에는 반드시 십자가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서, 이 세상의 법칙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상 좋고 영광스러운 일만 내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의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있기 때문에 좋고 영광스러운 일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간사한 인간의 마음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보다는 좋고 영광스러운 일만 내게 다가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당에서는 추수감사제 미사와 명랑운동회를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개최합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행사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기예보를 보니, 글쎄 비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일기예보를 들은 교우 분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추수감사제때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는데, 그래도 행사를 그냥 합니까?”
“당연하지요. 만약 비오는 것이 싫으시면 열심히 기도하세요. 비오지 말라고요.”
이렇게는 말했지만, 사실 저 역시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이 어디 있을까요? 사실 오늘 비가 오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산장수, 비옷장수, 몸이 너무나 피곤해서 비가 와야 일을 쉴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빗줄기를 간절히 원하는 농작물들……. 그렇다면 우리 성당의 행사를 잘 치루기 위해서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일까요? 바로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이 이루어졌을 때, 반대로 상처를 받는 사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고 영광스러운 일만 내게 이루어지길 바라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방법이 가장 올바르다는 생각,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믿음이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겸손함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나만의 이득을 생각하는, 즉 나에게만 늘 좋고 영광스러운 순간만이 주어졌으면 하는 이기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그러한 이기심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 고통의 십자가를 지셔야 했듯이, 우리 역시 내 안에 있는 이기심을 버리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그 길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굳은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떠한 시련과 고통에도 끄떡하지 않는 굳은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집시다.
빠다킹신부
“저희는 쓸 모 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양승국신부-
<작아지고 작아지면 찾아오실 당신>
언젠가 형제들과 한 식당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메뉴를 들고 온 여종업원이 얼마나 친절한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뻣뻣이 서서 주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메뉴판을 건넵니다. 온몸에 친절이 철철 넘쳤습니다.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문을 받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앞에 저는 너무나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여종업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교회의 모습도 저렇게 바뀌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겸손한 모습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살 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자세가 아니라 낮은 자세로, 뻣뻣한 태도가 아니라 상냥한 태도로, 1대 다수가 아니라 1대 1로 접근하는 그런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훌륭한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자는 제 고객이기도 하지만 제 스승입니다.”
“병원은 환자가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혹은 숨질 때까지 책임져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연구는 의사의 의무이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이 세상 하나뿐인 생명을 맡겨주는 환자들과 하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참 겸손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겸손의 덕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여라.”
공동체 안에서, 봉사활동 안에서, 대인관계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자세가 겸손입니다.
봉사활동이나 사목활동을 수행해나가면서 빠지게 되는 가장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 박수갈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실적주의입니다. 결과지상주의입니다.
박수갈채에, 칭찬에 맛들이기 시작하면서 자꾸만 진실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거짓포장하게 됩니다. 점점 외적인 것, 크고 화려한 것, 때깔 나는 것만 찾게 됩니다. 작고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자세로 봉사할 것인지 친절하게 정답까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당신이 그리우면
촛불을 켭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면
어느새 찾아오실 당신...
-하삼두-
충실한 종
-이수철 신부-
오늘 복음에서 보여지는 종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대로 믿음과 겸손의 결정체 같은
고백입니다. 이런 믿음과 겸손의 정신으로 살면 어디서 누구와도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을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신을 아는 일이라 합니다. 자기를 하느님의 거울에 비춰보고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의 거울을
치워버릴 때 곧장 무지의 교만에 휩싸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는 이들은 절대로 교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삶이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고 겸손에 이어 찬미와 감사의 삶이 뒤따릅니다. 제 분수를 넘어 남의 것을
탐내지도 않고 비교로 인해 우쭐대거나 위축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성인이요 겸손한 이들입니다.
겸손은 결코 비상한 덕이 아니라, 자기를 알아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자들의 지극히 평범한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몰라 남과
비교하며 불평불만을 하는 것이지 진정 자기를 안다면 과정에 최선을 다할 뿐,
결과는 온통 하느님께 맡기며 늘 감사할 것입니다. 과거에 아파하지도 미래에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늘 지금 여기에서 주어진 일에 충실할 것입니다.
마침내 쓸모없는 종이라 자처하는 종에게 주님은 충실한 종이라 부르며
그에 맞갖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청빈한 믿음을 드려야 합니다
-배광하 신부 -
믿음과 종의 본분
믿음이 사라진 오늘
임진왜란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해학의 현신 이항복(1556~1618)’은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장인 권율을 속여 폭소를 자아낸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장인 권율이 사위 이항복과 함께 입궐하게 되었는데 이항복은 장인에게 날씨가 몹시 더우니 버선을 벗고 신을 신고 입궐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합니다.
사람 좋은 권율은 사위 말만 믿고 그렇게 입궐하였습니다. 입궐 뒤 이항복은 임금 앞에서 날씨가 몹시 더워 나이든 재상들이 의관을 갖추기 어려우니 신을 벗도록 청합니다.
선조 임금은 매우 옳은 말이라 생각해 영의정부터 차례로 신을 벗게 합니다. 권율이 신을 벗지 못하고 쩔쩔매자, 임금은 자신 앞이라 그러는 줄 알고 내관을 시켜 신을 벗깁니다. 그러자 맨발이 드러난 권율은 도포 자락으로 발을 가리며 엎드려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이항복에게 속아 이리 되었나이다.”
임금은 크게 웃고, 여러 신하들도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슴 시원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슬 퍼런 어전 회의에서 이 같은 해학의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장인의 사위 사랑과 믿음, 사위의 장인에 대한 믿음, 임금과 신하간에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욱 자유로운 오늘날 이 같은 여유와 사랑의 믿음이 사라지고 경직된 분위기와 살벌한 인심, 불신이 만연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풍조가 날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믿음은 물론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없어지거나 상거래 식의 믿음으로 변절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점점 기복신앙적인 이기주의식 믿음이 돼가고 인간은 더욱 영악스러운 계산적 모습을 보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사라지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 6)
예수님께서 그토록 크신 사랑과 기적을 베풀어 주셨건만, 우리는 그분께 신뢰와 믿음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욥과 종의 본분
욥은 구약성경에서 고통의 대명사입니다. 특별히 죄인은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죄 없는 의인이 왜, 벌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인간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내리고자 하는 열망에서 쓰여진 성경입니다.
욥기의 주제는 분명 의인이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에 들어가 보면 역설적이게도 욥기의 시작인 사탄의 질문에 있습니다. 지상 여행을 마친 사탄이 천상 어전에 오르자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없다.”(욥 1, 8)
그러자 사탄이 묻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 1, 9)
이 같은 사탄의 빈정거림에 욥기의 주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무슨 까닭 때문에 신앙을 가졌고, 주님께서 무엇을 주시기 때문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사탄은 분명 하느님께서 욥에게 무엇인가 세상사의 물질적 풍요를 주셨기에, 그 같은 까닭이, 이유가 있었기에 하느님을 경외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 역시 하느님께서 ‘무엇인가 주시겠지’라는 요량이 있기에, 그것에 희망을 걸고 세속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탄은 분명 하느님께서 욥에게 재산과 가정과 자녀들, 그 모든 물질적 풍요를 주셨기에 그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 모든 것을 잃어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고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 21)
이것이 신앙이며, 이것이 믿음입니다. 설령 오늘 내게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내가 청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끝내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삶, 그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무엇을 청할 요량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묵묵히 주님의 뜻을 따라 나의 행할 바를 끝까지 다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이렇게 깨우쳐 주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믿는 이들만이 만드는 기적
- 이기양 신부 -
미국 텍사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해 대단히 심한 가뭄이 들어서 각 성당마다 비를 기원하는 기도와 미사가 끊이지 않고 봉헌됐습니다. 날이 갈수록 가뭄은 심해져 가고 성당을 찾는 신자들 수도 늘어만 갔습니다.
그런 어느 날 미사 중에 강론을 하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성당에 와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비를 내려주지 않으실 것입니다."....신자들이 깜짝 놀랐지요.
"아니, 신부님께서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시는가?"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성당 안은 금방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반응을 지켜본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기도를 하면 비가 오리라고 믿습니까?"
"믿습니다!"...신자들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 중에 우산을 가져오신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 자리에 우산을 챙겨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하고 청합니다. 제자들의 요청에 에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봐서 제자들에게는 눈곱만한 믿음도 없는 것일까요? 또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정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힘이 생기는 것일까요?
어느 가을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산을 떠났습니다. 꽤 높은 산을 등반하는데 눈앞에 고지를 두고 해가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산을 선택했는데 다시 쉽게 산에 올 수 없다는 이유로 유독 한 사람이 정상 등반을 고집했습니다. 일행과 헤어진 그는 열심히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해가 짧아진 늦가을 산 속은 삽시간에 어둠이 내리고 기온은 뚝 떨어져 혼자 남은 그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며 서둘러 길을 찾아 내려오게 됐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게 된 이 사람은 너무나 두렵고 당황한 나머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참을 구르던 남자는 구사일생으로 나뭇가지 하나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뿐 나뭇가지를 잡은 팔에 점점 힘이 빠지고 온몸에는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하느님 뜻대로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요. 그러자 어디선가 응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를 정말 믿느냐?"
"믿습니다!"
"무엇이든 내 말대로 하겠느냐?"
"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예? 그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
다음 날 조난당한 그 사람을 찾으러 갔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높이가 바닥에서 1m 도 채 안 된 곳에서 나뭇가지를 움켜쥔 채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를 믿으면 살 것 같지만 결국은 죽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나의 경험과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큽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을 믿는 바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믿는 사람인 여러분의 삶 속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참 생명이신 하느님을 찾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군인주일을 보내며
-가톨릭신문-
오래전 피정중 선배 신부님들과 담소를 하던 중 들은 이야기이다. 그 신부님들이 보좌신부 시절이던 60년대 초에 휴가 때를 이용해서 군종신부로 나가있던 동창신부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신자에 의해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안내되었다. 그 집은 사제관으로 쓰는 집이었다.
동창신부가 없어 마루에 앉아 기다렸는데 가재도구도 별로 없어보여 고생을 하며 지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저녁무렵 돌아온 동창 군종신부는 반갑게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직접 부엌으로 들어가 쌀을 씻어 밥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반찬이 없어 미안하다' 하고는 겸연쩍게 씩 웃는 것이었다.
동창들은 밤새는지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새벽녘에 잠을 자는데 이불도 변변치 못해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다음날 아쉽게 버스 터미널에서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군종신부가 어딘가 갔다오더니 차 창문을 두드렸다. '가면서 심심할 때 먹어' 하면서 음료수 몇 개와 삶은 달걀을 건네 주었다.
그 동창신부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때의 동창 군종신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얼마 후 전방시찰 중 교통사고로 그 신부님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시는 선배 신부님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사정은 나아졌다고 해도 군종신부들의 고생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군인주일의 의미
오늘은 군인주일이다. 군인주일이란 군대에 있는 군인 신자들과 군 사목을 하는 군종사제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군대는 대한민국의 청년이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한다. 특히 젊은시절 짧지않은 시간을 보내는 군대는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다. 편안한 집을 떠나 처음으로 경험하는 낯선 생활속에서 보통은 정신과 육체가 지치고 힘들어진다. 자신의 삶과 가족, 그리고 사회의 국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눈을 뜨게되는 시기이다.
엄격한 규율과 절도있는 생활속에서도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종교이다.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은 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군대에 있는 우리의 아들과 형제들을 위해 오늘만큼은 모든 신자들이 한 공동체로서 과연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생각해보자. 방황하기 쉬운 젊은 군인 신자들을 사목하는 군종사제들 역시 일반 본당과 비교하면 쉬운 조건이 아니다. 군종 사제들은 혼자서 여러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사제이면서, 때로는 수도자, 사무장, 관리인의 역할도 해야될 때가 있다.
군종 사제는 홀로 모든 것을 준비하며 군인 신자들을 직접 찾아가 미사와 여러 성사도 집전해야 한다. 군종사제에겐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특히 타 종교에 비교한다면 더 그렇다. 여러 가지 역경과 어려움을 딛고 묵묵히 일하고 있는 군종사제들을 위해서 오늘만큼은 특별히 힘껏 격려하는 박수를 보내자. 그리고 간접적이나마 군종사제들이 교회의 나눔과 일치의 기쁨을 누리며 일할 수 있도록 기도와 지원을 아끼지 말자.
인내하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 말씀은 믿음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사실 믿음은 힘입니다. 험난한 인생길에서 주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의 힘입니다.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귀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길을 쉽게 걸을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체험한다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하느님이 보내신 일꾼들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여러 형태의 예언자를 통해서, 때로는 자연과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고약한 소작인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되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주위에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로서 주님의 인내를 닮도록 해야한다.
또한 우리 자신이 세상과 이웃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박해를 각오한 예언자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서공석 신부-
복음서들은 유대인 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과장된 표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예수님에게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마르코복음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시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1,23). 우리 한국어에도 고유의 과장법이 있습니다. “좋아 죽겠다”, “바빠 죽겠다”, “백발 삼 천척”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사용하는 우리 고유의 과장법입니다. 외국어로 옮기면 말이 안 되는 표현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뽕나무를 바다에 심은 사람도 없고, 산을 바다에 던진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일은 하지 못하셨습니다. 뽕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다는 오늘 복음의 표현이나,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마르코복음서의 표현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전달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은 어떤 신통력 같은 것입니다. 기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인간이면 모두가 가지고 싶은 초능력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마귀가 그분을 유혹했다고 말합니다. 유혹의 내용은 기적하는 초능력을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기적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깨들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나 탐하는 사람은 합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살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놀라움은 바로 이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 위주로 살던 삶을 하느님 위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위주로 삽니다.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대책을 세웁니다. 사람이 재물이나 지위를 탐하는 것도 자기 힘으로 자기 미래를 보장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믿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것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 혹은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이 놀라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소중히 생각하고 스스로 실천합니다.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녀와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자기 위주로 살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 앞에 자기 위주로 살면 불효자식 혹은 패륜아가 될 것이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면 자녀들은 문제아가 됩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혹은 자녀를 사랑한다는 말이 모두 자기 자신을 위주로 살지 않는 사람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요구하듯이 더해 질 수 있는 초능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후 받으신 유혹의 이야기에서 마귀가 권한 것은 빵과 기적하는 능력과 부귀영화를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런 것을 가지면 큰소리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것을 기적적으로 얻어내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신앙이면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 건강에 피해를 입은 사람, 실패한 사람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교의 생각입니다. 유대교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 그리고 모든 불행한 이는 하느님이 버린 죄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에 반발하셔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자기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 생각하고 잘 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의 놀라움은 이런 변화를 의미합니다. 초인적인 능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 삶의 현실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놀라운 입입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이루시는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 자신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처지를 모르는 망상이고 자기집착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망상과 집착을 깨고 나와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것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듯이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로써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더 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듯이 봉사를 한 후에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고 말하고 물러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교를 비롯한 인류역사의 모든 종교와 사상은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말합니다. 무엇이든 잘 했으면 상응하는 보상을 당연히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죽어 가셨습니다. 쓸모없는 종과 같이 죽어 가셨습니다. 그것은 인과응보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안에서 신앙인은 자신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 자신을 내세우는 망상과 집착에서 보람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일이었으면, 우리 자신은 쓸모없는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 표류하던 생명이 하느님의 바다 안에 심어져서 뿌리를 내리는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
-조욱현 신부-
오늘의 주제는 ‘믿음‘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에 온전히 의탁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두려움이나 자만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
복음: 루카 17,5-10: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13)라고 하시며, 약은 청지기와 부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연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재물을 끊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사도들은 의기소침해진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믿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도 갖고있지 않다고 답변하신다. 그만한 신앙이라도 있었다면 그 믿음은 그 고장에서는 뿌리가 대단히 깊어서 폭풍우에도 절대로 뽑히지 않는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그대로 옮겨 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믿음이란 양적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믿음의 가치는 ‘질‘과 ‘순수성‘에 달려있다. 겨자씨는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으면서 그 씨앗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시켜주는 강력한 생명력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하나의 내적 실체로서 어떠한 형태도 갖고 있지 않으며, 거창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상성‘ 안에 살아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 나가고자 노력함으로써 단순과 겸손을 통해 행하는 모든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믿음은 신앙인의 삶 속에서 아무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중요한 상황에서 뿐 아니라, 매일 매일 매순간 순간마다 ‘기적‘을 이루어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종의 비유에서 믿음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말씀하신다. 당시의 종이라고 하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시킬 수 있는 주인의 소모품 같은 존재였다. 이 종의 모습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무상‘이고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에 공로에 대한 기록부도, 봉사의 시간표도 없고, 봉사의 한계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다 무상적인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에는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10절). 우리의 봉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봉사가 ‘보잘것없음‘이 드러난다. 정말 우리는 ‘해야할 일을 다 했는가?‘(10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무상성‘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상‘으로 내놓을 수 있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믿음이며, 제자들이 갖추지 못했던 믿음이다.
이 종의 비유는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하도록 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활동적‘이어야 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즉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도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주님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성장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며,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무상으로 내어 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자. 믿음은 여기서부터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은총을 주님께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신앙
-유영봉 몬시뇰 -
묵상길잡이 :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참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영광으로 생각했다.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불가능이 없다. 최소한의 의무만을 하면서도 크게 생색을 내는 것은 참 신앙이 없다는 증거이다.
1. 뽕나무나 산을 옮기는 믿음.
오늘 예수님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며 청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하신다. 마태오 복음의 병행구절에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마태 17,20)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미국의 노스 캘로라이나 주(州) 스완쿼트라는 마을에 1874년 성당이 세워졌는데, 신자들은 원하는 자리에 성당을 세우지 못하고 그 근방의 다른 자리에 성당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땅 주인이 땅을 팔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원하는 자리에 성당을 세우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당을 짓고 헌당식을 가진지 2년이 지난 1876년 9월 17일 엄청난 폭우와 폭풍이 그 지방에 몰아쳐 성당은 폭풍우에 90여 미터나 떠밀려, 신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리에 정확하게 옮겨졌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으로 성당이 이사를 하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땅 주인도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성당 이름도 ‘하느님의 교회’ 라고 바꾸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107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 콜로세움(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어 순교하셨다. 성인은 스미르나의 주교 성 ‘뽈리까르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단 한 가지 하느님께 바치는 내 피의 봉헌을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밀로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빵이 되기 위하여 짐승의 이빨로 고운 가루로 갈아지기를 바랍니다.”하며 순교의 열망을 피력하셨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새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영광의 순간으로 여겼다. 수많은 신자들을 사자우리에 처넣은 ‘네로’ 황제는 달려드는 사자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가를 부르며 태연히 죽음을 맞는 신자들을 보고는 기겁을 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영광으로 여기며,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이렇게 신앙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교회사 안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기적적인 사건과 상상을 초월하는 신앙의 승리는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런 신앙의 힘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3. 무 신앙적인 적반하장(賊反荷杖)
오늘 복음은 언뜻 보기에 신앙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종은 주인의 명령대로 다 실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 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고 말하라 고 하신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열심한 신자들이 가정을 알뜰히 돌보면서도 평일미사는 물론, 피정, 신심단체 활동, 환자 방문과 선교, 본당행사에 노력봉사에도 열심이다. 그리고 각종 후원회에 가입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면서도 항상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고 신앙 안에 겸손해 하는 이들을 본다.
그런가 하면 냉담을 하고 있다가 부활이나 성탄 때 판공성사만 겨우 보고, 또다시 냉담을 하면서도 “ 판공성사 봐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는 식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인 ‘축일 신자’도 적지 않다. 어쩌다 작은 봉사라도 하면 동네방네 떠벌리며 자기자랑을 하는 이들도 있다. 신앙이 아니라, 세속적인 눈으로 매사를 이해타산적으로 보는 이들에게는 봉사활동은 ‘노동력 착취’요, 감사헌금은 ‘금품 사기(詐欺)’정도로 보일 것이다.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그들의 시야는 이 현실 안에 갇혀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하느님, 당신은 내 삶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하는 자세로 하느님을 실생활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항상 자신의 얄팍한 계산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죽는 날까지 결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앙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믿는 만큼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신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신앙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고 하셨다. 우리도 이 미사 중에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며 기도하자..............◆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확신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며칠 전 택배로 고구마 한 상자를 받았습니다. 주소를 보니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정리 땅 끝 아름다운 교회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우리나라 땅 끝에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 곳에 사시는 크리스티나 자매님이 보내 준 것입니다. 그 고구마 상자에는 가슴 저린 사연이 있습니다.
작년 늦가을에 엘리사벳 자매님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형부가 폐암으로 위독하니 정신이 맑을 때 세례성사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형부가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 자매님이 평소에 준비를 해 두었답니다. 서둘러서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 엘리사벳 자매님의 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교리를 간략하게 가르치고 믿음을 확인한 다음에 세례명을 요셉으로 하고 세례성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병세가 더욱 더 악화된 요셉 형제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그 때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라고 했더니 “한평생 나와 함께 살아 준 아내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시면서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그 말씀에 아내와 자식들도 모두 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요셉 형제님은 평화롭게 주님 품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로 요셉 형제의 믿음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와 아들이 세례를 받고 성당에 열심히 다닌다는 소식을 엘리사벳 자매님에게서 들었습니다. 고구마 상자는 온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시로 요셉 형제의 맏딸인 크리스티나 자매님이 보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7,5-10)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눈이 있다고 합니다. 사물을 보는 육안, 지혜를 터득하여 가지는 지안, 마음으로 보는 심안,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천주교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눈은 믿음으로 세상을 보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 영적인 눈은 우리가 지닌 믿음의 양에 따라, 믿음의 질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에 대한 보상은 우리가 믿은 것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면(히브 10,22)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 11,3).
당연히 해야 할 일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1. 성서이야기
제1독서 하바꾹 1,2-4는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이 고대 근동 세계의 통치자로 등장한 때 활약한 예언자인 하바꾹의 외침을 얘기합니다. 그는 악인들이 의인들을 괴롭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침묵하고 오히려 악의 세력인 바빌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대하여 항의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2독서 디모테오 후서 1,6-8.13-14는 신앙고백에 관한 격려와 교직자의 자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직자는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해야 하며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복음을 위해서 비겁하게 처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루가 17,5-10은 믿음의 힘(5-6절)과 종의 처지에 대한 비유(7-10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죄의 유혹을 경고하면서 형제가 죄를 짓거든 몇 번이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자 제자들은 이를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던지 그분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순종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의 처지 비유는 루가 복음서에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과 양을 돌보는 일을 위해서 종 하나를 두었는데, 그 종은 맡은 일을 다하고서도 아무런 보수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보수를 요구할 수 있는 품꾼이 아니고 무상으로 일하는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품꾼은 보수를 요구할 수 있지만 종은 무상으로 일하는 법입니다. 종은 주인이 지시한 대로 일을 다 마치고 나서도 ‘저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니까 그것을 더하여 달라고 예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중요성을 말씀하심으로써 믿음은 결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수량적 개념으로 이해한 반면에 예수는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크고 작고,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는 인과응보 사상에 젖어서 율법을 잘 지키고 공덕을 많이 쌓으면 거기에 정비례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종의 처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임을 천명합니다. 종이 온종일 일을 했다고 해서 보상을 바랄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아무리 공덕을 많이 쌓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마치 종처럼 처신해야 하기 때문에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느님의 명령대로 처신한 후에 보상을 바라거나 자랑해서는 안되고 비유에 나오는 종처럼 “저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으로서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그 자체로 기쁨과 보람을 삼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어떤 상급을 주실 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상급을 주고 안 주고는 하느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게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부과되는 하나의 필연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는 불행이 있을 것입니다”(1고린 9,16).
믿음이란 무엇인가?
-서울대교구 김충수 신부-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자칫 큰 오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특히 오늘 복음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복음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믿음이란 마술쟁이 또는 요술쟁이처럼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척척 해내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결코 마술이나 요술을 부리는 비법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느님께 대한 신뢰요 사랑이다. 믿음이란 오로지 하느님께만 바치는 전인적인 기도이며 의탁이요 순명이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사랑과 경륜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나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이다. 그래서 믿음은 과연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힘이 있는 것이어서 서슬이 시퍼런 죽음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순교자적 위대한 능력이기도 하다.
오늘 제1독서 하바꾹 예언서와 제2독서 티모데오 후서를 묵상해 보자. 먼저“하바꾹 예언서에 나타나고 있는 믿음의 생활”을 보자! 진정한 믿음이란 세상이 온갖 부정, 부패, 억울하고 한심한 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도 언제나 하느님의 정의는 실현된다고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설치지 않는다”는 정신이 들어있다. “세상이 온통 부조리와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해도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항상 진실과 정의와 善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정신이 올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 제2독서인 디모테오 후서에는 좀더 자세하게 믿음의 구체적인 생활 수칙이 나와 있다. ① 비겁하거나 옹졸하지 않게 진정한 용기로써 정의를 실천하고 진실을 말한다. ②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며 나누어준다. ③ 절제로써 탐욕을 누르고 이기심을 억제할줄 안다. ④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수모도 당하고, 고통도 위험도 감수한다. ⑤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고 봉사한다. ⑥ 모든 일상생활이 건전하고 아름다워서 자못 신성함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다. ⑦ 성령의 도움을 의식하며 언제나 성령께 맡기고 위탁하는 겸손함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믿음의 생활이란 단순히 “주님, 믿습니다”만 외치면 되는 것도 아니고, 주님께 무슨 청탁의 기도만 열심히 드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믿음의 생활은 위에 제1독서와 제2독서의 말씀에서와 같이 “자기의 모든 생활이 아름답고 성스럽게 변화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의 의미를 정의하고 났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나의 생활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성스러우리만큼 정의롭고 진실한가? 정말로 성령의 불길처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뜨거운 생활인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나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쪼개는 아픔 속에서도 조용한 행복을 느끼는 생활인가...?
마지막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비록 이상의 말씀과 같이 정말 열심히 산다고 하더라도, 또 남을 도우며 정의대로 산다고 하더라도, 또는 복음 선포를 부지런히 하면서 산다고 자부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며 인정을 받으려하거나, 상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마지막 단서이다.
“마치 종이나 하인이 밭에서 돌아와 주인의 음식을 차려놓고 시중들 때 주인의 칭찬이나 인정을 기다릴 필요 없이 그저 보잘것없는 종이 할 바를 했을 따름입니다.” 하는 겸손한 자세가 중요 하다는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루카복음 17장, 오늘 복음의 앞뒤에는 악한 표양을 보이지 않는 것, 형제적 상호교정, 용서, 믿음의 힘, 겸손하게 하느님을 섬김 등 제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믿음의 위력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사도들이 자신들한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한테 믿음이 전혀 없는 듯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을까요?
복음서를 통해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군중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7,40-43)
공관복음의 제자들 정보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12,44)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고 합니다. 또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6,29)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봅니다. 복음서에 가끔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말에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으나, 베드로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하며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꾸중 들은 적도 많습니다. 군중도 제자들도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가?’ 하며 반신반의합니다. 사실 그들의 믿음은 어떤 표징을 보고 난 뒤에 믿는 수준이요,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에 상응할 때만 믿는 상대적이며 오락가락하는 믿음입니다. 티 섞인 믿음이 순수해지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7) 하기까지 걸러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완전한 나무로 성장해야 하는 믿음,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를 예로 드셨나 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티 없이 믿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은 가나안 여인, 예리코의 소경, 돌아와 감사를 드린 치유받은 나병환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고 믿은 하혈하는 부인,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낸 친구들, 그저 한 말씀만 해도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백인대장`….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크구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며 감탄하셨습니다. 믿음의 위력입니다.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3)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모범이신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였습니다.
믿는 이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주인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우리는 피에타 조각상을 알고 있습니다. ‘피에타’의 의미는 ‘충실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그 믿음은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은 아들의 시신을 부둥켜안기까지 계속된 충실한 믿음이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시메온의 예언대로 영혼이 예리한 칼날에 꿰뚫리는 아픔을 당하시지만 마리아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종들에게 비로소 하느님은 일하십니다. 손수 허리띠를 두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시며 당신 아들딸의 대열에 불러올리십니다. 예수께서도 더 이상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요한 15,15 참조)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을 맥 빠지게 하는 일은 그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마르 9,19)라고 한탄하셨고,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라는 말을 탓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나자렛 고향에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장자」 제10편(거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천하는 언제나 혼란스러운 것인데 그 죄는 지혜를 좋아한 데 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은 모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구할 줄 모른다. 모두가 자신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난할 줄 알아도, 그가 이미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난할 줄 모른다. 그래서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을 흐리게 하고, 아래로는 산천의 정기를 녹이며, 가운데로는 사계절의 운행을 파괴하여, 꿈틀거리는 벌레로부터 날아다니는 새에 이르기까지 그 본성을 잃지 않은 것이 없다. 심하도다! 지혜를 좋아함으로 해서 천하가 이토록 어지러워지다니. 삼대 이후로 이러했으니, 순박한 백성들을 버리고 교활한 자들을 좋아하며, 담백 무욕한 생활을 버리고 수다스러운 말을 좋아하는데, 그렇듯 번다한 말들로 인해 세상이 이렇듯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이런 얄팍한 지혜와 생각들이 우직하게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근심 걱정을 초래하게 하지 않는지? 토끼와 경주한 거북이 이야기에서 승리한 자는 얄팍한 꾀를 부린 토끼가 아니라 처음부터 토끼와 시합한 것이 아닌(자기 자신과의 경주) 거북이의 우직함입니다. 신영복 교수는 ‘우직한 노인이 산을 옮긴다.’고 했지요.
‘주님, 저희의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
믿음과 종
-유광수 수사(성바오로수도회)-
첫째, 믿음에 대해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믿음을 청하였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가11,1) 하고 청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하고 있다. 이들이 청하고 있는 ‘기도하는 법과 믿음’은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청하는 것도 각자의 영적 수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영적 수준에 따라 어떤 사람은 물질적인 것을, 어떤 사람은 영적인 것을 청할 것이다.
예수께서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마태 5,6)라고 말씀하셨듯이 ‘옳은 일에 목마른 사람’만이 영적인 것, 곧 ‘기도하는 법과 믿음’을 청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는다'는 말을 라틴어로 Crede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cor(마음·심장)와 dare(주다·넘겨주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는 대상에게 내 마음(심장)을 넘겨주는 것이다. ‘내 마음을 넘겨준다’는 것은 내 전부를 넘겨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넘겨준다는 것이다. 넘겨주지 못한다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를 하느님께 넘겨줄 수 있을까?
나를 하느님께 넘겨준다는 것은 몸을 넘겨준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첫번째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선포하셨다. 믿음을 청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 생각으로 살아왔고, 내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했고, 내가 모든 것을 판단했지만 이제부터는 복음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가르치고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하느님께 넘겨주는 것이다. 이 믿음이 처음에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겠지만 복음으로 점점 성숙해지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이런 믿음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오로 사도이다. 이방인이었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였지만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필립 3,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바오로야말로 나를 완전히 하느님께 넘겨준 믿음의 모델이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믿음은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된 믿음으로 성숙되었느냐가 중요하다. 믿음의 근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곧 복음을 믿지 않는 믿음, 복음에 근본을 두지 않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둘째,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사도들은 누구인가? 사도들은 보잘것없는 종이다. 종이 곧 그들의 신원이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넘겨드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자기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하느님께 넘겨주지 못한 것이다. 바오로가 서간 첫머리에 항상 “그리스도의 종 나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라고 적었듯이 자신이 하느님의 종임임을 분명히 밝혔다.
성서에서 말하는 ‘종’이란 무슨 의미인가?
종이란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몸이다. 따라서 자기 인생이 없는 사람이요, 자기 주장이나 자기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이다. 종은 주인에게 매여 있는 몸으로 오직 주인이 하라는 일만 하는 사람이다.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머슴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머슴은 온종일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자신이 주님의 종임을 고백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당신의 종’(시편 105,42;다니 3,35)이라고 했고, 모세도 ‘당신의 종’(민수 12,7)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윗도 ‘주님의 종’(2사무 7,5)이라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리아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였다. ‘믿음’과 ‘종’이라는 두 단어는 사도들의 특성이며 영성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사도란 어떤 사람들인가?’라는 질문에 사도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종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믿음’은 복음을 전하는 이로서 제일 먼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바탕이고 ‘종’이라는 신분은 믿음에 근거한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하는 사도들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런 기본적인 자세로 성숙해질 때 바오로처럼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1고린 9,19.23)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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